경제

재벌 총수 수난사 혹은 범죄사 4: 국제그룹 양정모, 정치와 경제 사이의 담장 위를 걷다

Zigzag 2021. 4. 12.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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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신군부와 공정거래법: 낯익은 불법정치자금과 낯선 공정한 시장질서의 이중세계에 직면한 재벌

경제개발계획 이후 지속해서 성장해오던 한국경제는 1979년 처음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정부-재벌이 결탁하여 추진해왔던 중공업육성은 국민투자기금의 약 68%와 제조업에 대한 산업은행 대출의 약 77%를 흡수해 경공업의 10%의 성장률 두 배에 달하는 21%의 성장을 기록했다. 하지만 해외시장을 겨냥했던 중공업 상품들은 세계적인 불황과 함께 이익으로 현실화하지 못했다. 중공업에 대한 투자는 과잉중복 투자였으며, 반대로 경공업에 대한 투자는 부실해 1970년대 말 수많은 경공업 부문의 중소기업들은 채산성의 악화, 자금 부족 등의 경영난으로 도산했다. 박정희 정권의 위기가 부산과 마산지역 시민들의 항쟁과 동일, 원풍, YH 등 경공업 부문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에 의해 야기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12·12 사태와 광주학살로 정국을 장악한 전두환의 신군부와 재벌의 관계는 1970년대처럼 정권이 경제개발로 독재정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재벌을 육성하고, 재벌은 독재와 결탁을 통해 자원을 독점하는 그런 '순탄한' 관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유혈적 쿠데타로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재벌육성을 통한 과잉중복 투자를 해소하고, 재벌에 대한 반감을 억제하기 위해 최소한의 재벌 견제 장치를 마련해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군부와 그 주변 정치집단의 합법적 정치무대 장악을 위한 막대한 정치자금을 강제로 갹출하기 위해 재벌을 쥐어 짜야 했다. 재벌로서는 어찌 보면 최초의 정치적 도전에 직면한 것이다.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 초기, 여당 보다 야당에 우호적이라는 이유로 금강제약의 전용순과 삼양의 김연수, 상호무역의 안동원과 삼흥실업의 서선하, 조선제지의 윤석준이 핍박을 받기도 했지만, 이들 정권은 재벌 일반에 대해 규제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광주항쟁 이후 높아지는 민주화 요구에 대응하면서 자신의 불법성을 덮기 위해 재벌에 대한 최소한의 견제 제스쳐라도 보여야 했다. 재벌은 이제 더이상 일방적 육성의 대상이 아니라 최소한의 정치적 민주주의와 시장 질서 내에 편입되어야 하는 규제대상이 되었다. '경제 민주화' 논의가 1980년대 초에 처음 등장한 것은 바로 민주적 정통성이 결여된 전두환 정권의 콤플렉스를 덮기 위한 제스쳐다. 이에 따라 재벌과 기업 일반에 대한 공정거래법이 처음 도입된다. 전두환 정권 아래서 재벌은 한편으로는 공정한 시장 질서라는 당연하지만 낯선 세계와 정치자금 헌납이라는 낯익은 세계를 동시에 직면하게 됐다. 재벌에게 낯선 세계의 도전에 적응하면서 낯익은 세계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힘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당하게 여겨졌다. 특히 박정희 정권이 했던 것처럼 초창기 대일 수교의 뒷거래로 막대한 정치자금을 조달할 수 없었던 전두환 신군부의 재벌 쥐어짜기는 아무리 낯익은 세계라 하더라도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1985년 양정모의 국제그룹 도산과 해체는 재벌이 직면한 이러한 모순적인 이중세계 속에서 탄생한 사건이다.

왕자(王者)표 고무신 신화의 국제그룹

국제그룹은 원래 부산에서 정미소로 돈을 모은 양태진이 정미소 한켠에 기계 한 대를 놓고 1948년 4월 자본금 1만 원으로 동생 양태수와 함께 설립한 국제고무공업사에서 출발했다. 이 국제고무공업사는 후일 국제화학으로 발전한다(국제화학 공식 창립일은 1949년 12월 21일이다). 국제 외에도 주요한 신발제조업체들이 부산지역에 많이 몰려있었던 이유는 고무보급창이 부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무신 구하기가 어려웠던 시절, 양태진이 만든 '왕자표 고무신'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1960년대 '왕자표 고무신'은 고무신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성장했다. 1970년에 이르러서야 도시화율이 50.2%에 도달할 정도였으니 1960년대까지 인구의 절반 이상이 농촌에 거주하고 있었고, 이들에게 고무신은 작업과 나들이를 겸할 수 있는 효율적인 신발이었다. 특히 왕자표의 백색 고무신은 농촌용으로 볼이 넓고 바닥이 두꺼운 고무신과 도시용의 날렵하고 가벼운 고무신을 차별화해 "백만인이 애용하는 아름답고 질긴 왕자표 고무신"이란 1966년 왕자표 고무신 광고처럼 거의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고무신으로 성장했다.

국제화학 왕자표 고무신의 1966.01.17일자 경향신문 광고

이미 1965년 국제화학은 12억 원(2020년 기준 약 460억 원) 매출로 국내 기업 매출액 18위에 오른다. 마침 1960년대 말부터 불어닥친 신발 수출 붐은 해마다 약 40%의 성장률을 보였으며, 이 붐을 타고 국제화학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1969년 납세 명세에 따르면 국제화학이 단일 업종으로 최고의 납세율을 기록할 정도로 왕자표 고무신은 잘 팔렸다.

재벌로서 국제그룹의 형성: 훔쳐 먹기와 주어 먹기의 그룹사

국제그룹의 성장은 검은색 고무신의 백색 고무신 혁신, 다양한 신발의 출시와 같은 미담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국제그룹은 어찌 보면 그룹의 역사 자체가 혁신사 보다는 유착사와 가깝다. 국제화학이 고무신을 제조하던 1949년 부산에는 약 80개의 고무신 회사가 범람했다. 국제화학이 그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유착과 폭력 덕이었다. 전쟁과 더불어 국제고무공업사는 미국 국제협조처(ICA) 자금을 독점해 고무원료를 매점하였다. 1959년 국제는 약 3천 톤의 고무원료를 독점해 고무원료 값을 급등 시켜 당시 부산지역의 건민고무, 신흥고무 공장 등 중소업체들을 무더기로 도산시켰다. 중소고무공장들이 ICA 자금의 공정한 배분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내자 국제고무공업사 사장 양태진과 장남이자 전무였던 양정모는 깡패 50여 명과 함께 진정서를 낸 중소업체 사장 집에 쳐들어가 난동을 부리며 집단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국제그룹은 또한 부산 남구 감만동 부두의 2만6천 평 규모 1965년 당시 시가 3억9천만 원(2020년 기준 150억 원) 상당의 적산 국유지를 실존하지 않는 인물의 이름으로 매수한양 꾸며 양정모 개인 사유지로 돌리는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양진태, 양정모 부자의 중소기업 사장에 대한 집단폭행 기사. 출처:1959.07.04 동아일보 양정모 국제고무공업사 당시 전무의 서류위조를 통한 국유지 사유화 출처: 1965.11.28조선일보

국제화학이 고속성장하던 1968년, 설립자인 양태진이 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나고 장남 양정모가 사장으로 취임해 국제화학을 본격적으로 그룹으로 성장 시켜 나간다. 그 그룹화의 역사는 정경유착과 뗄 수 없다. 사업확장을 위해 자본금의 무려 80% 수준까지 사채를 끌어다 쓰던 국제는 1972년 1차 오일 쇼크로 도산 직전에 있었지만, 1972년 시장경제를 뒤집는 박정희의 사채동결 조치로 기사회생했다. 양정모는 1972년 국제상선을 설립하고 동시에 삼호그룹 해산과 함께 나온 삼호방직 인수전에 뛰어들어 들었다 실패했다. 하지만 막후협상으로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방직회사 설립 승인을 받아 이듬해인 1973년 영국으로부터 차관 2천만 달러와 내자 30억 원을 들여 국제방직을 설립한다. 양정모는 1974년 보국증권(후에 동서증권으로 개명)을 인수하고 동해투자금융을 설립하고, 조광무역, 원풍산업, 동우산업, 풍국화학, 국제토건, 국제제지 등을 차례로 인수했다. 국제는 1975년에는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되며 본격적인 그룹의 틀을 갖춘다. 국제그룹의 규모가 확장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77년 연합그룹의 연합철강, 연합물산, 연합개발, 연합통운의 인수였다. 1972년 당시 연합철강은 5천8백만 달러 수출로 상사별 수출 1위를 기록하던 대기업이었고, 1975년 기업 매출 순위에서도 13위로 17위였던 국제보다 규모가 훨씬 큰 기업이었다. 하지만 연합철강의 권철현 사장은 1975년 오일 쇼크 후 수출드라이브에 더 목을 매던 박정희 정부 방침에 반발했다. 냉연강판을 최초 국내 생산한 연합철강은 이 냉연강판을 수출하면 손해를 보기 때문에 수출을 동결해 정권에게 미운털이 박혔다. 그는 당시 미국에서 골수암 수술을 앞둔 딸의 수술비 등 12만 달러를 송금한 것이 빌미가 되어 외국환관리법 위반과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됐다. 은행은 연합철강에 대출을 중단했고, 권철현은 국제그룹에 연합철강을 넘기라는 압력을 받았다. 1977년 결국 그는 1천억 규모의 회사를 단돈 5억 원에 국제그룹의 양정모에게 넘기고 만다.

국제그룹의 해체, 정치보복과 부실경영의 합작품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은 국제그룹의 해체가 정권에게 밉보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해왔다. 1993년 7월 29일, 헌법재판소는 "재무부 장관이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취한 국제그룹 해체조치는 헌법상 보장된 기업 활동의 자유와 경영권 불간섭 원칙을 어긴 것"이라고 전두환 정권의 국제그룹 강제 해체 위헌 결정을 내렸다. 분명 국제그룹의 해체과정은 헌법재판소의 판결대로 근거 법률이 없는 위헌적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판결이 곧바로 국제그룹의 경영이 부실하지 않았다거나 국제그룹의 해체가 순전히 정치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두환 정권은 등장과 함께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중공업에 대한 중복과잉 투자와 산업합리화 정책을 추진했다. 박정희 정권의 붕괴에서 교훈을 얻은 전두환 정권은 생존을 위해 부실기업 정리와 재벌규제를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모두 6차례에 걸쳐 약 80개의 부실기업을 정리했다. 국제그룹은 여러 지점에서 정리대상의 유력한 후보군이었다. 국제그룹은 해체 당시 매출액 1조8천억 원, 계열사 23개사로 재계 7위의 그룹으로 부상했지만, 문어발식 국내 및 해외 사업 확장, 용산의 호화 사택과 양산의 골프장 건설 등으로 부채 비율이 약 9백%로 10대 그룹 중 최악의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 더구나 주력인 신발업종의 퇴조와 해외건설과 무역의 부진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1984년 말까지 국제그룹을 회생시키기 위해 정부가 지원한 구제금융만 2천억 원에 달했지만,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게다가 '사위그룹'이라는 별칭답게 사위들을 사장이나 중역에 앉히고, 부인 등 친인척을 이사진에 앉히는 경영방식 역시 국제그룹의 전문적 경영을 저해했다.

양정모 전 국제 회장은 그룹 순위와 비교해 정치자금을 적게 낸 것이 그룹 해체의 원인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그는 새마을 '성금' 10억 원, 일해재단 기금 5억 원, 경남 양산의 통도 골프장 사업승인 10억 원 등 35억 원의 뇌물을 전두환 정권에 제공했다. 이는 그룹 규모에 비해 적은 돈이 아니며, 이 뇌물이 모두 국제그룹이 곤경에 처한 1984년에 제공됐다는 것은 양정모 전 국제 회장이 경영보다는 정치 쪽에서 기업회생의 실마리를 찾으려 했음을 시사한다. 당시 정치 상황을 고려하면 그의 셈법은 나쁘지 않았다. 1985년 김대중과 김영삼이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신한민주당은 창당과 동시에 전국에 거센 야당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수세에 몰렸으며, 관제 야당인 민주한국당은 존립 위기에 처했다. 이런 상황에서 양정모는 부산 향토기업인 국제그룹이 몰락한다면 부산 민심이 돌아 설 것이 자명하기에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국제그룹을 지원할 수밖에 없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며, 그에 따라 1984년 집중적으로 뇌물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1985년 총선에서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은 35.2%로 1당의 자리를 지켰지만, 신생 신한민주당이 29.3%로 일약 제1 야당으로 등장하면서 정권 차원에서는 부실한 국제그룹의 생명을 더이상 연장해 줄 의미가 사라졌다.

국제그룹 총수 양정모의 몰락은 전두환 정권의 위헌적인 그룹 해체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주장대로 그룹의 부실이 해체라는 결과를 유도할 정도가 아니었을 수도 있고, 그가 정권에 밉보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양정모가 정치자금을 적게 냈기 때문에, 혹은 국제그룹이 회생 가능한 상황이었다는 주장의 근거는 확실치 않다. 전두환 정권에게는 박정희의 실패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정언명령이 있었고, 그로 인해 재벌 견제, 경제민주화, 공정한 시장이라는 제스처를 보여야 했다. 국제그룹은 그 본보기의 틀에 딱 들어맞는 그룹이었다. 정경유착과 친인척 중심의 경영에 익숙했던 양정모는 정치와 경제 사이의 담장 위를 조심스레 걸었지만 결국 전두환 정권의 생존을 위한 재벌 규제 코스프레의 정치도, 경제의 변화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몰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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