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입국과 사업보국, 정경유착의 다른 말
박정희가 '수출입국'의 담론으로 쿠데타와 독재의 연장을 정당화했을 때, 현대 정주영과 삼성 이병철은 사업으로 나라를 이롭게 한다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의 담론으로 불법을 합리화했다. 국가주도의 개발독재 시대에 수출입국과 사업보국은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했다는 명분의 담론이었지만 정경유착을 가리기 위한 위장의 담론이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 직후 수입대체 산업화를 내걸었지만 1960년대 초반 흉작, 급속한 물가 상승, 재원 조달의 문제에 직면해 결국 수출지향으로 방향을 수정한다. 1964년 베트남 파병과 외환 수입,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에 따른 대일 청구권자금, 1966년 8월 외자도입법 제정, 1967년 1월 한국외환은행 발족은 이러한 방향 전환과 맞물려 있었다. 이에 따라 1961년 이전 외자도입은 2천만 불에 불과했지만 1966년 약 3억 달러로 증가했다. 수출도 1960년 3천2백만 달러에서 1966년 2억5천만 달러, 1970년에는 8억3천5백만 달러로 증가했다. 1960년 수출은 1947년을 기준으로 볼 때 1.3배에 불과했지만 1970년 32배로 고속성장한다. 1960년대 말 3선 개헌 전후로 가속화된 박정희 정권의 위기와 뒤이은 유신 친위 쿠데타는 수출입국에 중화학공업화의 방점을 찍은 형태로 진행됐다. 정주영의 현대는 1960년대 고속성장과 함께 1970년대 이 수출입국과 중화학공업화의 붐을 타고 재계 1위로 급부상했다. 1960년대 삼성이 재계 1위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적산과 원조물자, 금융 특혜에 힘입은 것이고 정권의 정책 방향에 기댄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현대의 부상은 박정희 정권의 정책 방향에 기댄 것이었다. 현대와 박정희 정권과의 유착에 대해서는 삼성의 이병철마저도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할 정도였다.
현대건설의 고속성장과 담합 5인조
정주영의 현대는 공식적으로 1947년 5월 현대토건의 설립과 함께 시작됐다. 하지만 현대토건 설립 이전인 일본강점기에 정주영은 독자적인 사업을 벌인다. 과거 그가 일했던 삼창정미소 주인 오윤근으로부터 1천 원, 동향 친구 오실보에게 5백 원을 차입해 모두 1천5백 원으로 1940년 아도 서비스(Art Service, 정주영에 따르면 '애프터 서비스'의 약어다)를 인수했다. 하지만 아도 서비스는 화재로 전소되고, 그는 다시 오윤근에게 1천 원을 차입해 자동차 수리공장을 세우고 3만 원의 자본금을 마련하지만, 1941년 전시 공장 통폐합으로 문을 닫는다. 그는 1946년 적산대지 2백평을 불하받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세운다. 그는 이듬해에 현대토건을 여기에 추가한다. 현대토건은 1948년 112만 환(1949년 당시 쌀 80kg 1가마 가격은 9,830환), 1949년 200만 환의 실적을 올린다. 현대자동차공업사는 1949년 서울시장으로부터 우수한 자동차업자로 표창장을 받기도 한다. 정주영은 1950년 양사를 합병해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한다. 현대건설은 당시 1주 가격 1,000환으로 총 3만 주를 발행, 자본금 3천만 원의 규모였다.
전쟁으로 정주영은 많은 것을 잃었지만, 미군 통역으로 일하던 동생 정인영의 덕택으로 미군 관련 공사를 맡기 시작했고, 부산에서 현대상운을 건설해 전쟁 중에 목돈을 만들 수 있었다. 전쟁 경기 덕택에 이들은 두 달 만에 3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벌 수 있었다. 이후 현대건설은 미8군 군납업자 자격을 취득해 막사 공사는 물론 공군기지 복구 등 다양한 건설 경험을 축적했다.
현대건설의 발전에서 첫 결정적 계기는 1953~1955년 대구와 고령을 잇는 고령교 건설이다. 폭 6m 길이 240m의 고령교는 5천4백만 환 규모로 신생 현대건설이 1954년 수주한 전체 계약 규모의 1/3을 차지할 정도의 대형공사였다. 그러나 중간에 십여 차례의 홍수가 발생해 공사가 지연됐고, 인플레로 인해 물가가 매월 200% 상승해 시공비가 애초 예정보다 4배 가까이 상승해 적자가 현대의 한해 전체 수주액의 40%를 차지했다. 정주영은 사재를 털고, 현대상운 등 회사의 자산을 정리해 가까스로 빚을 메꾸었다. 하지만 고령교 건설은 현대건설의 규모를 키우고 기술을 축적하는 좋은 계기였으며, 이후 정부 발주 공사 수주의 디딤돌이 되었다. 현대를 위기에 몰아넣을 정도로 대규모 적자를 발생시킨 공사였지만, 5천4백만 환이란 규모나 교량 건설 기술의 축적은 현대건설이 급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였다.
전쟁 직전 전국의 건설사는 60여 개에 불과했으나, 전쟁 직후 서울에는 1백 개의 건설사, 전국적으로 약 2백 개의 건설사가 난립했다. 서울 수복 후 '도시건물복구령'은 현대건설에 호재로 작용했다. 정주영은 당시 큰 건설사인 대림산업 이석구 사장과 함께 대한부동산회사를 설립해 홍콩교포회장을 지낸 현근을 사장에 앉힌다. 대한부동산회사는 구 정자옥(丁字屋, 일본식 발음으로 조지아)을 분양받아 개축해 미국 메트로폴리탄 백화점의 한자음인 미도파로 이름을 바꾸어 크게 번성하지만, 이승만과 이기붕의 지시로 무역협회에 넘어가고 만다. 이 사건은 정주영에게 정치권과의 관계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가져왔다. 이후 정주영은 자유당 국회의원이자 당시 거대 건설사인 대동공업 이용범이 주도하는 '5인조'에 합류한다. 이 '5인조'는 대동공업(이용범), 조흥토건(황의성), 극동건설(김용산), 현대건설(정주영), 그리고 삼부토건(조정구)으로 대부분의 주요 공사는 이들 '5인조'가 돌아가면서 따냈다(논자에 따라 대림까지 넣어 '6인조'로 부르기도 한다). * 당시 이들 '5인조'가 사전 담합을 통해 입찰가를 합의하고, 거기서 나온 리베이트를 이기붕에게 제공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1957년 계약금 2억3천만 환으로 당시로써는 최대공사였던 한강 인도교 복구 사업은 원래 양춘선의 흥화공작소가 단돈 1천 원에 응찰했으나 심계원(현 감사원)의 부적격 판정으로 5개 업체 지명입찰로 변경되었다. 그 5개 업체가 위의 '5인조'임은 물론이다. 1961년 5·16쿠데타 직전 전국 건설사가 1천4백 개로 급증한 가운데 이들 '5인조' 담합은 이런 건설사 난립 상황에서 현대건설의 성장에 결정적이었다. 1961년 1억 환이 넘는 서교지구 공사입찰에는 37개 업체가 참여했는데, 정주영의 현대와 김용산의 극동이 함께 이 입찰에 참여한 10개 업체에 3만 환~7만 환을 주고 담합해 입찰을 따내기도 했다.
* 정주영과 대한부동산회사를 함께 했던 대림은 자유당에 대해 비우호적이라는 이유로 6대 건설사중 이들 '5인조'에서 제외됐다.
정주영의 부정축제와 특혜
1960년 4.19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하고 새롭게 등장한 장면 정권은 기존 정권하에서 특혜로 부정축재를 한 자들에 대해 조사하고, 부정축재자금의 국고환수를 추진했다. 당시 장면 정권은 46개 기업에 추징금 109억 환과 벌과금 87억 환 등 총 196억 환의 국고환수를 명했다. 삼성 이병철은 탈세로 인한 32억여 환의 추징금과 이에 따른 28억여 환의 벌과금을 합쳐 모두 61억 환의 국고환수 명령을 받아 최고를 기록했다. 건설업자 중에서는 대동공업의 이용범은 11억3천9백만 환으로 최고를 기록했으며, 현대 정주영은 추징금 1천3백만 환과 벌과금 4백만 환을 부과받았다. 이 추징금과 벌과금을 보면 1960년 당시 삼성과 현대의 규모 차이를 가늠할 수 있다.
1960년까지 현대의 규모가 작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정주영의 말처럼 "현대가 세금을 잘 냈으니까 더이상 낼 게 없었는데 환수금액이 건설업계에도 배당돼 서로 분배해서 냈던 것 같다"라느니, 김영주 당시 현대건설 이사의 말처럼 현대가 "비정치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엄연한 추징금과 벌과금의 부과는 부인할 수 없는 정주영의 범죄사실을 보여준다. 탈세의 일부는 불법 정치자금으로 제공되었으며, 그 불법 정치자금은 기업의 각종 사업 특혜 및 은행 특혜융자의 거름이 되었다. 1960년 7.29 총선 이후 시중 7개 은행에서 대출된 20억 환은 주로 부정축재 기업들로 흘러 들어갔는데, 당시 5대 재벌 안에 들어 있던 삼호 재벌의 정재호는 11억 7천4백만 환, , 개풍재벌의 이정임은 5억2천9백만 환, 그리고 현대의 정주영은 1억 환의 특혜대출을 받는다. 현대의 이 액수는 현대보다 규모가 컸던 삼양사가 7천만 환, 대동공업이 6천만 환을 대출받은 것에 비하면 상당히 큰 액수로 정치권과의 연줄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재벌, 족벌경영과 족벌구속: 정주영의 현대, 불법정치자금의 뇌물공여죄 첫 판례
'재벌 총수의 수난사 혹은 범죄사 1' 에서 밝힌 바와 같이 재벌은 "가족 또는 동족에 의해 출자된 모회사(지주회사)를 핵심으로, 그것에 지배되는 여러 자회사가 다양한 산업을 경영하는 기업집단으로 각 산업부문에서 과점적 지위를 차지"한다. 그런데 이 정의 그리고 많은 경우 사람들은 "가족 또는 동족"을 기업지배에만 적용하곤 한다. 하지만 이 가족 혹은 동족은 범죄 혹은 수난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총수인 아버지를 대신해 아들이나 형제자매 혹은 가족 같은 심복이 구속 대행을 하거나, 자녀들이 저지른 범죄를 총수들이 대신해 사과하거나, 혹은 음주로 난동을 부린 아들을 대신해 보복하기 위해 총수가 직접 글러브를 끼고 범죄를 저지르다 구속되기도 한다. 1966년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구속 위기에 처한 삼성의 이병철을 대신해 그의 차남 이창희가 구속 대행을 했다. 그보다 2년 전인 1964년 철도청 고철 특혜불하의 대가로 정치자금을 제공하던 현대의 정주영은 그 대신 당시 현대건설의 전무를 하던 동생 정순영을 법정에 세운다.
한일수교 조약과 청구권 합의를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정치자금을 받기 전인 1964년, 공화당은 정치자금 압박에 시달렸고 기업을 통해 정치자금을 조달했다. 그 조달 루트 중 하나가 2억7천만 원 가량의 철도청 과장품(過藏品, 과잉 저장품)을 '5.16 가격'(박정희 정권의 물가조절 실패로 62년과 63년 사이 물가는 두 배 이상 뛰었다)으로 특정 업체에 제공하고, 업체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는 것이었다. 당시 공화당 재정책임자 김유택은 철도청장 박형훈에게 철도청 '고철'을 대한중공업에 단독불하해 정치자금을 모집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쉽게 적발될 수 있기에 현대, 삼부, 아주, 창설 등 4개 업체에 불하하고 4백만 원을 거두어들인다. 그중 2백만 원을 공화당에 제공하고, 나머지 2백만 원을 공화당 의원 6인과 청와대 경호실에 전달한다. 정순영의 변호사는 그가 전 철도청장 박형훈과 시설국장 최순철에게 제공한 1백만 원은 "정치자금으로 준 것이므로 뇌물공여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정치자금으로 주었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법률상으로는 명백히 뇌물공여죄가 성립된다"고 판시해 정치자금을 뇌물공여죄로 본 첫 판례가 되었다. 이 재판에서 정순영은 징역 6월을 선고받았으나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난다.
정주영이 자신을 대리해 친족을 법정에 세운 건 이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박정희 정권의 수출지향과 중화학공업화가 본격화되면서 박정희와 정주영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으며, 둘의 관계는 1970년대 정치-경제학의 상징이 되었다. 그 결탁은 1978년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사건으로 드러난다. 이 사건은 정권의 위기, 경제개발, 도시화와 서울 도시계획, 중화학공업화, 오일쇼크 타개와 외화획득을 위한 중동 건설 붐, 개발독재 기생 특권층의 욕망이 총체적으로 얽힌 근대화와 산업화의 사건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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