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시사/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

우크라이나와 한국전쟁의 유사성: 세계 질서 재편과 지정학적 재편의 시발점

Zigzag 2022. 7. 1.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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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 주: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은 여러 면에서 한국전쟁의 재편이다. 비록 외관은 러시아의 침공에 의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양상이지만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과 한국전쟁은 각각 중-미 신냉전과 미-소 냉전의 양극 구조 확립의 시발점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으며 또한 지정학적 세력 재편의 방아쇠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으로 형성될 신냉전체제는 냉전체제만큼 안정적이지는 않을 것이며 대륙 강국이었던 소련과 달리 해양과 맞닿아 있는 중국 그리고 미국과의 경쟁은 육지보다는 해양에서 헤게모니를 둘러싼 더 많은 갈등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 글은 노르웨이 국방연구소의 중국 선임연구원이자 전직 외교관인 Jo Inge Beckkeold의 Foreign Policy 6월 28일 자 기고 Ukraine Is the Korean War Redux의 번역으로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과 한국전쟁의 맥락적 유사성과 차이, 강대국으로서 소련과 중국 파워의 유사성과 차이, 미-소 냉전과 중-미 갈등의 유사성과 차이, 그리고 중-미 갈등의 전망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한국전쟁의 재현이다

러시아의 침공은 새로운 글로벌 질서로의 전환을 예고하지만 냉전보다는 덜 안정적일 것이다.

1950년 9월 20일, 서울의 거리에서 전투하고 있는 유엔 군대. 사진: NATIONAL ARCHIVES/AFP via Getty Images

역사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war in Ukraine)과 가장 큰 유사점을 제공하는 분쟁은 무엇인가? 답은 의심의 여지없이 한국전쟁(Korean War)이다. 기원과 규모는 다르지만 두 분쟁은 모두 새로운 양극화 글로벌 질서로의 전환을 예고하고 가속화하며 공고히 하는 전 세계적인 의미를 지닌 지역 전쟁이다. 이러한 유사점과 몇 가지 주요 차이점은 미래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 역자 주: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war in Ukraine)과 한국전쟁(Korean War)의 영어식 표현이 다른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war in Ukraine)은 전쟁이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실은 다른 세력과 맥락이 개입되어 있음을 내포하고 있지만, 한국전쟁이라는 용어는 국제적 개입과는 무관한 남북한 간의 내전이라는 이미지를 준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war in Ukraine)과 우크라이나 전쟁(Ukraine War),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Russo-Ukrainian War)은 엄밀히 다른 정치적, 이념적 맥락을 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Ukraine War)은 우크라이나만의 전쟁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Russo-Ukrainian War)은 동등한 두 당사자 사이의 전쟁을 암시한다. 이 글에서는 일관되게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war in Ukraine)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다만 어감상의 문제로 이 용어는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 혹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번역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국제체제는 미국과 소련을 양대 지배적 세력으로 가지는 양극화된 권력구조로 막 정착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제 막 시작된 ​​냉전은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기억하는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매우 안정적인 냉전이 아닌 위험한 초기 단계에 있었다. 오늘날 러시아 군대가 우크라이나를 황폐화하면서 국제 체제는 다시 한번 새로운 양극화 권력 구조로의 불안정한 전환의 한가운데에 있다. 이번에는 미국과 중국이 거의 동급 경쟁자이자 라이벌이다. 한국 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 경쟁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고 냉전의 많은 규칙을 형성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서방의 주요 적대자는 베이징이 아니라 모스크바일지라도 이 전쟁은 중-미 경쟁의 새 시대를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음이 이미 명백하다.

북한군은 1950년 6월 남한으로 넘어왔다. 이어진 3년간의 전쟁은 앞으로 수십 년간 분단된 코리아의 운명을 봉인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질서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변화의 신호는 이미 얼마 동안 존재해왔다. 전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1946년에 유럽 대륙을 가로질러 "철의 장막"이 내려왔다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본토를 장악한 후, 당시 중국 지도자인 마오쩌둥(Mao Zedong)은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과 우호 조약을 맺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세계 정치를 미·소 분단으로 몰아가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전쟁은 전 세계적으로 냉전을 심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이하 나토)를 동맹으로서 통합했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은 또 다른 지정학적 재편의 시작을 예고한다. 지난 3~4년 동안 중국의 부상은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려는 중국과 미국의 경쟁관계가 미국이 중국을 봉쇄하려 하는 새로운 냉전으로 비화할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이미 모든 징후는 국제 체제에서 양극성 권력 구조의 복귀를 가리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은 원래 냉전 시대에 한국 전쟁이 그랬던 것처럼 한쪽은 미국과 동맹국 사이를 한편으로 그리고 중-러 축을 다른 한쪽으로 하는 지정학적 분열을 가속화하고 공고화하고 있다. 이는 네 가지 주요 방법으로 그렇게 한다.

첫째,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으로 중국에 대한 러시아의 의존도가 높아졌다. 중러 동반자 관계는 지난 10년간 경제 협력 확대, 에너지 동반자 관계 구축, 군사 훈련, 첨단 기술 협력 실천, 정기적인 고위급 회의 참석 등을 통해 꾸준히 개선되었다. 심지어 관광 붐도 일었다. 중국은 러시아의 제1 교역 상대국이며 현재 중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러시아로부터 더 많은 원유를 수입하고 있으며, 새로 건설된 파이프라인을 통해 천연가스 공급이 빠르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베이징과 모스크바 사이의 강한 유대는 워싱턴과 유럽 수도들에서 점점 더 우려되고 있지만 러시아가 현재 서방으로부터 크게 고립되어 있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약해진 러시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강화한다.

둘째, 우크라이나 전쟁은 중국을 잠재적 안보 위협으로 보는 유럽인의 굳어진 시각을 공고히 한다. 전통적으로 중국에 대한 유럽의 시각에서 안보 문제는 아주 작은 역할을 차지했지만 최근에 변화하기 시작했다. 유럽연합(EU)은 2019년에 중국을 "시스템적 경쟁자"로 선언했는데 이는 중국과의 파트너십이 더 많은 도전과제를 제공하고 더 적은 기회를 제공한다는 유럽의 인식을 반영한다. 유럽 ​​국가들은 5G 인프라 구축에서 화웨이 및 기타 중국 통신 회사를 크게 배제함으로써 중국과의 경제적 상호 작용에 새로운 제한을 설정했다. 작년에 옌스 스톨텐베르그(Jens Stoltenberg) 나토 사무총장은 “중국이 우리와 더 필적하고 있다”라고 주장했으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중국의 무조건적인 지원은 많은 유럽 수도에서 이러한 견해를 더욱 강화했다. 특히 모스크바가 침공 불과 20일 전의 중-러가 무한 동반자 선언은 유럽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미 수만 명의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국경에 집결하고 있을 때 발표된 성명에서 양국은 나토에 동유럽으로의 확장을 배제하라고 요구했다. 유럽연합(EU)의 외교정책국장 요제프 보렐(Josep Borrell)은 이 성명을 "반항 행위"(act of defiance)라고 불렀다. 중국이 유럽의 안보 문제로 부상했다는 사실은 나토의 새로운 전략 개념에 반영되어 있으며, NATO의 지도자들은 이번 주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NATO 정상 회담에서 이를 승인할 것으로 예상된다.

셋째,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은 미-중 경제 분열을 심화시키고 상호의존을 제한하려는 노력을 가속화할 것이다. 양극화 경쟁에서 두 강대국은 경제적 상호의존성을 상호 취약하게 만드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이 미국과 중국이 지난 3, 4년 동안 긴밀한 경제 관계를 끊기 위해 첫 번째 조심스러운 조치를 취한 이유이다. 베이징에서 러시아 경제를 제재하는 신속하고 강력한 서방의 대응은 서방 기술과 시장에 대한 중국의 의존도에 대한 중국의 우려를 더욱 고조시켜 중국이 자급자족을 늘리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마찬가지로, 에너지 안보를 위해 유럽이 러시아에 의존하는 것은 워싱턴이 중국과의 관계에서 모방하고 싶어 하는 예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은 나토와 대서양 횡단 공동체에 회복된 통일감을 주었다. 몇 년 동안 유럽과 미국에서 양자 간의 균열이 커지는 것에 대한 우려가 커진 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이러한 추세가 역전되었다. 미국은 이제 유럽에서 군사 주둔을 늘리고 있으며 유럽의 나토 회원국은 방위비 지출을 확대하고 있다. 유럽은 마침내 동맹 내에서 보다 균형 잡힌 책임 분담에 대한 미국 대통령들의 수많은 요구에 응답하고 있다.

중-미의 새로운 시대 경쟁은 여러 면에서 냉전과 유사하지만 고유한 특징도 가지고 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경쟁은 초기 단계에서 위험할 정도로 불안정했다. 한국전쟁은 세 개의 구체적인 방법에서 영향을 미쳤다. 한 때 주변국으로 여겨졌던 한국과 다른 지역이 이제는 필수가 되었고,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소련 블록을 봉쇄하기 위해 주변 방어 전략(perimeter defense strategy)이 구현되었다. 한국[전쟁 - 역자 주] 이후 미국은 추가 대리전을 준비하고 동맹국들과 긴밀히 협력하여 재래식 전력과 핵전력을 증강함으로써 모스크바와의 군비 경쟁에 집중했다. 결국, 냉전의 주요 초점은 유럽 대륙 전역에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보복 전략이 등장했으며 이는 유럽 대륙을 가르는 고정선을 넘으려는 모든 시도를 강력하게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전략의 결과로 한국 이후의 냉전은 극도로 양극화되었지만 상대적으로 정적이고 안정적이었다.

현재 부상하고 있는 중-미 경쟁은 덜 양극화될 가능성이 높지만 덜 안정적이다. 이전의 높은 수준의 상호 의존성으로 인해 양극화가 덜할 것이다. 중국은 1971년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이 소련에 대항해 '중국 카드'를 사용한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 내에서 부상해 왔다. 오늘날 중국의 미국 및 유럽과의 경제적 상호 의존은 양극성의 극화 효과를 완화할 것이다. 게다가, 냉전은 주로 유사 자급적(pseudo-autarkic) 대륙 강대국인 소련과 해양 강대국인 미국 사이의 경쟁이었다. 반면에 중국은 이제 육상과 해상 모두에서 무역과 연결성을 선호하는 상황이다.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세계를 다른 현실로 일깨웠다.

게다가 중국의 지리적 위치는 미중 지정학적 격차를 줄여준다. 소련은 유라시아 중심부의 위치에서 유럽에서 극동에 이르는 모든 유라시아 변방에 위협이 되었다. 반면, 동아시아 변두리 지역에 있는 중국의 위치는 인도 태평양 너머의 군사적 도달 범위를 제한하여 중국의 부상의 영향을 완화할 것이다. 이는 또한 미국과 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 다양한 동맹국 사이의 위협에 대한 다양한 인식으로 이어져 중국에 대한 균형 노력을 감소시킬 수 있다. 장기적으로 중국의 제한된 지리적 범위는 대서양을 횡단하는 통합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다.

지리학은 미-중 경쟁이 냉전보다 더 불안정할 가능성이 높은 바로 그 이유이기도 하다. 육상 중심의 냉전과 달리 미중 경쟁의 주요 무대는 해군이 될 것이며 인도 태평양의 광대한 지역은 잠재적으로 예측하기 어려운 환경이 될 것이다. 해양의 지휘권을 놓고 경쟁하는 것은 해상에서 사고의 가능성을 높이고, 지역의 섬 국가, 해군 기지 및 파트너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경쟁하는 것은 불확실한 확대 메커니즘으로 해상에서 제한된 전쟁을 시작하고 싶은 유혹을 유발할 수 있다. 게다가 이미 진행되고 있는 해체와 분리는 이미 분단되고 양극화된 체제가 제자리에 동결된 한국전쟁 당시 세계가 본 것보다 더 큰 마찰을 일으킬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의 세계화는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여 강대국의 갈등은 구식이며 어두운 과거에 속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세계를 다른 현실로 일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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