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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을 계기로 본 번외 대선 후보들의 흥망사 2: 이인제부터 문국현까지

Zigzag 2021. 3. 10.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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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윤석열 검찰총장의 사퇴와 동시에 그의 지지율이 치솟고 있다. 윤석열은 총장직 사퇴를 사직서 제출이 아닌 기자회견의 형태로 함으로써 향후 정치 행보를 노골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과연 그의 지지율은 반짝 현상일지 아니면 지속 가능한 것인지를 과거 한국 대통령 선거사에서 명멸했던 주요 번외 후보들을 통해 분석하고자 한다. 첫 번째 글에서는 조봉암, 김대중, 정주영을 다룰 것이며, 두 번째 글에서는 이인제, 노무현, 정몽준, 문국현을, 그리고 세 번째 글에서는 고건, 반기문, 안철수 그리고 윤석열을 다룬다. 특번외 후보가 성공하기 위한 권력의지, 조직 기반, 바람, 비전의 4 조건을 중심으로 각각의 번외 후보 사례들을 분석한다.

이인제, 바람을 거스른 오버독의 몰락

이인제는 김영삼과의 인연을 통해 1988년 통민당 후보로 안양 갑에서 당선되어 본격적인 정치인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김영삼 정부 시절 노동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1995년 지방자치 선거의 부활과 함께 경기도지사에 출마 최초의 민선 경기도지사가 되었다. 이인제는 차분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은 정치인으로 민자당 내에서도 유력한 정치인으로 꼽혔다.

그는 1997년 신한국당 대선 경선 후보로 참여하였다. 이인제는 이회창에 비해 젊은 이미지를 부각해 세대교체를 주장하며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여론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당내 기반이 이회창과 비교해 열세였던 그는 결국 이회창에게 패배하였다. 그는 경선 결과에 불복해 탈당하고 국민신당을 만들어 대선에 뛰어들었다. 그는 여론 조사에서 두 아들의 군 면제 의혹으로 지지율이 폭락하던 이회창을 앞서 나갔다. 그의 대선 레이스는 오버독으로 시작됐다.

1997년 11월 10일 경향신문의 제15대 대선 여론조사

1997년 제15대 대선은 국난이라 불리는 IMF 와중에 치러진 선거로 국민들의 관심사는 누가 이 국난을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쏠려 있었다. 당시 김대중은 정권교체를, 이회창은 안정을 주요 구호로 내걸었다. 김대중은 경제 파탄에 대한 책임과 국난 극복을 위한 경제 비전과 경륜을 강조하여 기존의 자신에 대한 반감을 약화했고, DJP연합으로 비토세력들을 설득했다. 이회창은 안정을 내세웠지만 경제 파탄 주범 정당의 후보자라는 한계를 넘어설 수 없었다. 이 와중에 세대교체를 외치며 "젊은 한국, 강한 나라"라는 이인제의 구호는 결코 바람을 일으킬 수 없는 구호며 비전이었다. 국난극복을 위한 경륜과 노련함을 요구했던 유권자들에게 '세대교체'는 시대적 요구와 동떨어진 정치 수사 이상의 의미가 아니었다. 더욱이 그는 수십 년 단결해 온 집권당을 조직을 굳히기보다는 분열 시켜 조직을 약화했다. 결국 오버독으로 선거에 뛰어들었지만, 그는 바람을 일으키기보다는 그 바람에 역행했으며, 조직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무너졌다. 그는 권력의지만 강했던 후보였다.

노무현, 번외후보 최초의 승리

2002년 16대 대선은 여권 내의 야권이었던 노무현의 승리로 귀결됐다. 노무현은 학력, 인맥, 정치경력 등에서 엘리트 정치인들이 밟아 온 것과 다른 역정을 걸어왔다. 그는 명문대는커녕 고졸 출신으로 주류 학력의 열외자였다. 인맥으로 보아도 김영삼의 통민당에서 3당 합당에 합류하지 않고 꼬마 민주당에 남았다가 이후 김대중의 민주당과의 합당에 참여해 야당 주류였던 동교동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청문회에서 그는 정주영과 전두환을 궁지에 몰아넣음으로써 일약 전국적인 청문회 스타가 되었지만, PK 출신 정치인이 PK 주류인 김영삼과 결별하고 호남 정치인인 김대중과 연대하면서 정치적으로 자신의 지역구에서 성공할 수 없는 조건을 안게 되었다.

민주당 내에서 그는 확실히 언더독이었다. 정치적으로 승리할 수 없음에도 그는 총선과 시장선거에서 부산지역에 출마했다. 그의 연이은 패배는 그에게 번외 후보가 승리할 수 있는 네 조건을 충족시켰다. 그의 패배는 우선 그의 대선을 향한 권력의지를 공고히 했다. 둘째로 그 패배는 언더독 이미지를 만들어 사람들의 공감을 쌓을 수 있었다. 그 공감은 단순한 그에 대한 지지를 넘어 노무현에 대한 서민들의 감정이입의 수준으로 나아 갔으며, 노사모라는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탄생으로 이어졌다. 셋째로 이 팬클럽은 이후 정당조직을 압도할 정도의 네트워크와 바람을 불려 일으켰다. 2002년 민주당의 국민경선제 도입과 광주 경선에서 영남 정치인 노무현의 승리는 당내 부동의 1위 이인제를 무너뜨렸고, 당내 주류 동교동계 한화갑을 몰락시켰다. 국민경선이 시작하기 전 노무현의 전국 지지율은 한 자릿수였다. 그러나 전국 국민경선이 끝나자 그의 지지율은 여야 통틀어 최고의 지지율로 당선이 유력했던 이회창을 눌렀다. 넷째로 그의 부산출마는 포스트 양 김 정치의 시작이었으며, 정책적으로는 이후 전국 균형 발전이라는 비전의 기초가 되었다.

2002년 3월 민주당 대선 광주 경선 승리 후 연설하는 노무현. 출처: Ohmy TV

노무현은 민주당 대선 후보 확정 이후 김대중 대통령 친인척 비리로 여당의 지지율 추락, 주류 동교동계의 비토, 월드컵 붐을 타고 떠오른 정몽준의 비상으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그는 당시 정몽준보다 여론조사에서 뒤처졌지만, 정몽준의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 조건을 수용하는 과감한 승부수를 던져 결국 단일 후보가 되었으며, 대선에서 승리했다. 그는 언더독으로 출발해, 다크호스가 되었으며, 결국 오버독으로 대선에 승리하였다.

정몽준, 오버독의 오류와 왕자의 추락

2002년 월드컵은 현대와 울산의 왕자 정몽준을 전국 후보로 만들었다. 그는 2002년 9월 여론조사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여당 후보 노무현(16.8%)을 압도하는 26.1%의 지지율로 일약 정치 스타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그 이전까지 현대, 울산, 대한축구협회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정치인이었다.

월드컵 열기는 그를 대선 유력 후보로 올려놓는 비정치적 바람이었다. 이 바람을 조직화된 세로 만들기 위해 그는 대선을 불과 1달여 앞둔 2002년 11월 국민통합21을 창당한다. 김영배, 김영길 등 당시 민주당 내에서 노무현 후보에 반대하던 구여권, 동교동계 출신들이 만든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후단협)는 지지율이 추락하던 노무현 후보사퇴를 주장하다 정몽준이 부상하자 본격적으로 후보교체를 주장했다. 김민석은 본격적으로 정몽준의 국민통합21에 합류하여 후보교체에 힘을 실었다. 그는 이후 노무현과 단일화 협상을 제안했으나 결국 여론조사에서 패배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견주어 경쟁력 있는 단일후보로 노무현·정몽준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하십니까"라는 설문 문항에서 이회창과 차별성이 덜한 정몽준이 높은 응답을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2002년 제16대 대선 당시 후보단일화에 합의한 후 러브샷을 하는 노무현과 정몽준. 출처: 연합뉴스

정몽준은 오버독이라는 유리한 위치를 오히려 악화시켰다. 그는 오버독들이 전형적으로 저지르는 약자에 대한 관용과 공감의 결여, 오만이란 결점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다. 언더독의 이미지를 가진 노무현과의 대결에서 그의 오버독 이미지는 유리하지 않았으며, 단일화 협상과정은 그의 오버독 오류를 더 드러내고 말았다. 후보 단일화 합의 이후 대선 하루 전 개인적인 감정상의 이유로 후보 단일화를 번복하고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것은 대선주자로서 결정적 결격사유였다. 그는 대선후보가 가지는 권력의지와는 다른 권력욕만 드러냈다. 정치적 책임감과 대의, 도의를 져버린 이에게 민심은 싸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월드컵의 비정치적 바람을 대선의 정치적 바람으로 전환할 화학적 비전이 없었다. 그의 비전은 기존 보수 야당과 차이가 없었다.

문국현, 이변이 되지 못한 현상으로서 다크 호스

2007년 제17대 대선은 이명박과 정동영의 대결로 압축됐지만, 그 거대한 틈바구니에 문국현 현상도 무시할 수 없었다. 유한킴벌리 전문경영인, 윤리경영의 도덕적 경영인, 일자리 공유와 친환경 기업인이란 이미지로 문국현은 시민사회단체의 지지를 받으며 급속히 새로운 후보로 등장했다. 그는 언더독은 아니었지만, 가능성과 실력을 점치기 어렵다는 점에서 다크호스였다.

문국현은 2007년 8월 대선 출마를 선언했으며, 10월에 창조한국당을 창당하고 본격적으로 대선에 참여하였다. 창당과 동시에 그의 지지율은 8월 말 1.5%에서 9.1%로 수직으로 상승했다. 그는 "사람 중심 진짜 경제"를 내세우며 이명박의 가짜 경제와 각을 세우는 프레임을 전면에 내 걸었다. 기존 정치인과의 차별되는 신선함과 경제 전문가 이미지를 내세웠던 그의 조직적 기반은 환경단체 등 그와 수년간 교류해 온 시민사회단체들이었다. 2000년 총선연대의 낙천낙선 운동을 정점으로 점차 영향력이 쇠퇴하고, 이슈를 상실했던 시민사회단체들은 문국현을 통해 새로운 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기대 속에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는 일자리 500만 개 창출, 경제 성장률 8% 달성 등의 공약을 내걸어 통 큰 면모를 보여주었다.

문국현 후보가 김종인 당시 민주당 의원과 8% 경제성장론을 놓고 토론을 벌이는 장면. 출처: 한겨레 21

문국현은 정동영과의 후보 단일화를 거부하며 대선을 끝까지 완주(5.8% 득표)하며 권력의지를 보였지만, 조직과 바람, 비전에서는 실패했다. 문국현 개인의 도덕적 이미지는 부동산 시세차익과 자녀 증여세 문제로 타격을 받았다. 문국현의 지지기반이었던 시민사회단체는 공식적으로 정치참여와 거리를 두기 때문에 선거운동의 지속 가능한 기반이 되기 힘들었다. 또한 정당 운영을 사기업처럼 경영하던 그의 독단적 스타일은 창조한국당에 참가했던 정치인들마저 탈당하게 만들고, 시민사회단체 출신도 배제되면서 캠프는 현실성과 참신성을 상실했다. 일자리 500만 개 공약과 경제성장률 8%는 허황함이 참신함을 넘었고, 그를 경제전문가 대신 기성 정치인의 1인으로 만드는 공약이었다. 문국현 현상은 이변이 되지 못한 채 사그라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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