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시사

윤석열을 계기로 본 번외 대선 후보들의 흥망사 1: 조봉암부터 정주영까지

Zigzag 2021. 3. 10.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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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윤석열 검찰총장의 사퇴와 동시에 그의 지지율이 치솟고 있다. 윤석열은 총장직 사퇴를 사직서 제출이 아닌 기자회견의 형태로 함으로써 향후 정치 행보를 노골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과연 그의 지지율은 반짝 현상일지 아니면 지속 가능한 것인지를 과거 한국 대통령 선거사에서 명멸했던 주요 번외 후보들을 통해 분석하고자 한다. 첫 번째 글에서는 조봉암, 김대중, 정주영을 다룰 것이며, 두 번째 글에서는 이인제, 노무현, 정몽준, 문국현을, 그리고 세 번째 글에서는 고건, 반기문, 안철수 그리고 윤석열을 다룬다. 특히 번외 후보가 성공하기 위한 권력의지, 조직 기반, 바람, 비전의 4 조건을 중심으로 각각의 번외 후보 사례들을 분석한다.

대한민국의 정치는 늘 대선과 대선 후보들의 일상을 산다. 대선이 끝나는 동시에 정치는 다음 대선의 정치가 되며, 당락의 결정과 동시에 후보들이 가시권에서 사라지지만 다른 후보들이 그 가시권을 놓고 쟁탈하는 정치의 지평이 열린다. 여당과 야당 등 안정된 기반의 정당 내에서 '잠룡'의 이름으로 유력한 정치인들이 대선을 준비하지만, 때론 그 정당 내에서도 의외의 인물이 부상하기도 하며, 때론 여야 정당과 무관하게 제3당 후보가 급부상하기도 한다. 여야를 불문하고 이러한 후보들은 원래 계획에 없는 혹은 순위권 밖의 후보라는 점에서 번외 후보라 할 수 있다.

번외 후보 승리의 4대 조건: 권력의지, 조직, 바람, 비전

정치의 선거는 스포츠의 경기처럼 게임과 유사한 형태와 규칙의 지배를 받기에 스포츠의 용어를 정치용어로 차용하곤 한다. 오버독(overdog)과 언더독(underdog), 다크호스(dark horse)는 정치 선거의 후보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 스포츠 개념이다. 오버독은 우세한 위치에 있으며 승리가 예견되는 강한 자/집단이며, 언더독은 누구도 승리를 기대하지 않는 약한 자/집단이며, 다크호스는 그 능력이나 기술이 잘 알려지지 않은 베일에 싸인 자/집단이다. 번외 후보들은 때론 언더독의 형태로, 때론 다크호스의 형태로 선거판에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종종 오버독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들 후보들을 제3의 후보라 지칭하지 않고 번외 후보라 지칭한 이유는 아직 제3 후보의 성공사례가 없으며, 기성 정당들의 내부에서 게임의 틀과 룰을 전복하며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내는 게임 체인저들이 있기 때문이다.

번외 후보는 원래 계획에 없었던 후보이기에 그들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계획이나 룰을 전복하거나 자신에 유리하게 끌어와야 한다. 특히 대선은 전 국민을 상대로 한 경기며, 한 번의 승리만 보고 응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기간 동안 통치를 위임하는 경기이기에 유권자들 입장에서는 지명도, 책임성, 시대정신과 비전을 함께 고려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번외 후보들이 최소한의 흥행, 나아가 승리 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권력의지, 조직의 기반, 환경의 바람, 미래의 비전이란 4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되어야 한다.

권력의지가 없으면 사소한 여론의 변화에도 쉽게 좌절해 완주할 수 없다. 인적 물적 기반은 대선이란 전국 레이스를 뛰는 기반이다. 어떤 유능한 후보도 대선을 혼자 빈손으로 뛸 수 없다. 조직적 기반은 대선 승리를 위한 지속가능한 머리와 발이다. 환경의 바람이란 시대적 흐름을 만들어 내 거나 혹은 그럴 능력이 안 된다면 자신을 그 흐름에 맞게 꾸며내는 것을 의미한다. 기성 조직, 기존 게임 규칙에 불리함을 안고 있는 번외 후보가 그들보다 유일하게 유리할 수 있는 조건이 이 바람이다. 자신은 그 바람을 타는 자이고, 상대는 그 시대의 바람에 역행하는 자임을 부각하는 것은 기존 체제에 의문을 제기하며 동시에 사람들의 불만을 조직할 수 있는 조건이다. 마지막으로 비전은 새로운 정치를 약속하고 불만을 실질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조건은 필요충분조건으로 이 중 그 어느 하나라도 결여된다면 번외 후보가 대선을 자신의 게임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봉암, 최초의 번외 후보

아이러니하게도 최초의 대통령 직접 선거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중단과 함께 시작됐다. 의회에서 정·부통령을 뽑았던 제1대 대선 이후 이승만은 대중적 인기는 높았지만, 의회 장악에는 실패한다. 더구나 거창양민학살사건, 중석불 사건 등으로 의회의 불신이 높아져 대통령 재선이 힘들어지자 '빨갱이' 출현 등을 구실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의원들을 납치 구금하는 등 온갖 폭압 속에서 의회를 겁박해 '발췌개헌'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통과시킨다. 제2대 대선의 직접 선거는 이런 배경 속에서 치러졌다.

당시 아직 국민적 인기가 높았던 이승만의 재선은 거의 확실시 됐으며, 야당에서는 친일 지주층과 자산층의 정당이었던 민주국민당의 지원을 받는 이시영이 출마하였다. 조봉암은 원래 공산주의자로 임시정부와 같은 상층 중심의 민족적 독립운동보다 노동자와 농민 등의 하층 중심의 계급적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에 투옥되어 해방과 함께 석방된 전력이 있다. 그는 해방 후 조선공산당에 참가했으나 박헌영과 결별 후 사상 전향을 선언한 후 합리적 진보주의자로 변신하며 남북합작 운동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의 제헌헌법에는 당시 헌법기초위원장이었던 조봉암의 손길이 스며있다. 그는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지주들에게 불리한 농지개혁법을 주도하여 농민들 사이에서 지지율이 높았다.

제2대 대선에서 조봉암은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지만, 전국농민회의 등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승만은 74.62%라는 압도적 득표율로 당선됐다. 조봉암은 11.36% 득표에 불과했지만, 독자 정당이 없는 상황에서 이시영을 꺾고 2위를 한 것은 이변이었다. 1952년 8월이라는 전쟁의 와중에서 색깔 논쟁까지 겪은 조봉암이 10% 이상의 득표율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탄탄한 대중적 기반이 있음을 의미한다.

1952년의 조봉암은 다크호스였다. 전쟁이 끝나고 치러진 1956년 제3대 대선에서 무소속으로 또 출마한 그는 더이상 실력이 잘 알려지지 않은 다크호스가 아니었다. 그가 준비하던 진보당은 아직 창당 전이었지만 그는 진보 세력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있었다. 당시 선거는 자유당 이승만, 민주당 신익희, 무소속 조봉암의 3파전이었다. 신익희와 조봉암은 후보단일화 협상을 통해 신익희로 단일화가 진행되었지만, 유세 도중 신익희가 사망함에 따라 조봉암으로 단일화가 되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민주당은 조봉암 지지를 거부했고, 오히려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를 던질 것을 지지자들에게 호소해 결국 무효표가 된 '추모표'가 20%나 발생했다. 이승만은 유효표의 70%를 획득했지만, 무효표를 계산하면 전체 투표에서 그가 얻은 득표는 55.66%에 불과했다. 조봉암은 유효표의 30%를 얻었고, 전체 투표로 보면 23.8%를 획득했다. 여당 자유당의 부정선거와 야당 민주당의 노골적인 방해에도 그가 얻은 23.6%는 정권에 충분한 위협이었다. 결국, 이승만 정권은 그에게 북한의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혐의를 씌워 사형에 처했다.

1956년 신익희와 야당 후보단일화 논의를 마치고 나오는 조봉암(왼쪽). 출처: 한겨레신문

그는 "수탈없는 경제정책"을 주장하며, "중요국영사업의 민영화"와 같은 통제경제와 국가의 적극적인 경제개입의 계획경제를 내세웠다. 독일, 일본, 소련과 같은 후발주자의 산업화 과정에서 국가의 통제와 개입이 산업화를 촉진했다는 점에 착안했던 그의 경제정책은 경제개발계획 등으로 1960년대 이후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또한 유엔감시하의 남북한동시선거를 통한 화평통일을 주장했다. 전쟁의 후유증이 여전한 상황에서 무력통일 대신 화평통일을 내세운 그의 공약은 파격적이었다.

조봉암은 제2대와 제3대 대선 출마를 통해 그의 굳은 권력의지를 시위했다. 그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지지와 진보 세력의 지지를 받았지만, 그 기반은 여전히 취약했으며, 이승만의 권력과 물리력, 자금력을 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가 가장 넘기 힘든 벽은 자신의 바람을 만들어 내기에는 전쟁과 냉전, 반공의 벽이 너무 두꺼웠다. 반공 세력들이 주류가 된 상황에서 진보당의 입지는 매우 좁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비전은 파격적이면서도 현실적이었고, 제3대 대선 지지율에서도 드러나듯 광범위한 대중들의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그가 다크호스를 넘어 승리하기에 당시 상황은 너무나 엄혹했다. 그의 사형은 한국의 정치지형과 제3 후보의 등장 가능성을 이후 수십 년간 축소했다.

김대중, 주류 속의 비주류

김대중은 1964년 동료의원의 구속을 막고, 한일협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5시간에 걸친 당시 최장의 필리버스터로 정치인으로 자신의 이름을 전국에 알렸다. 그러나 1970년 그는 야당의 주류 유진산계와 거리를 둔 비주류였다. 그런 그가 1971년 제7대 대선에서 야당 신민당의 후보로 나선 것도, 그의 선전도 일대 이변이었다.

당시 신민당은 주류였던 유진산 당 대표는 본인이 직접 대선에 출마를 준비했다. 당시 "권모술수의 대명사"로 불리던 그는 박정희와의 협상 추진으로 최초로 '사쿠라'라는 별칭을 얻기도 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등의 '40대 기수론'을 "정치적 미성년자들의 행위"로 깎아 내리다 40대 기수론이 점차 힘을 얻자 40대 후보들의 단일화를 조건으로 불출마 선언을 했다. 그는 나아가 당 대표인 자신에게 대선후보 지명권을 요청했다. 유진산의 조건부 불출마에 대해 유진산계에 속하던 김영삼과 이철승은 40대 기수 단일화를 약속했지만, 김대중은 유진산이 비주류인 자신보다 주류인 김영삼을 지명할 가능성이 높음을 알고 "40대의 단일화는 우리들의 자율적인 결정에 속하는 문제며" 그는 "유당수가 출마하고 않고는 그의 자유이므로" "특별한 관심"이 없다고 단호하게 일축했다.

유진산은 대선후보로 김영삼을 지지했고, 1970년 신민당 9월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는 김영삼의 싱거운 승리로 끝날 것 같았다. 1차 투표에서 김영삼은 421표로 382표를 받은 김대중을 앞섰지만 반수를 넘지 못했다. 2차 투표를 앞두고 김영삼계는 지구당 위원장들의 표를 단속했지만, 김대중은 이철승계와 회동하는 한편 지구당 위원장 대신 바닥의 대의원들을 상대로 치열한 설득작업을 벌였다. 그 결과 김대중은 458표를 얻어 51.8%의 지지율로 410표를 얻은 김영삼을 누르고 후보로 지명됐다.

1970년 9월 29일 신민당 대통령 후보지명대회 보도. 출처: 조선일보

김대중의 공약은 중앙정보부 개혁, 서민을 위한 대중경제 건설, 무력통일의 포기와 남북의 평화적 교류, 향토예비군 철폐, 지방자치제 실시, 여성 지위 향상위원회 설치, 최저임금제 도입 등 각 부문을 망라해 현실적이면서도 획기적인 비전을 담고 있었다. 미-중 관계가 데탕트의 화해 무드로 접어드는 상황에서 교착된 남북관계의 평화적 해결이나, 향토예비군 폐지 등은 정권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기도 했지만, 시대의 흐름을 잘 읽으면서도 대중들의 호응을 얻는 공약이었다. 지방자치는 1992년 정계 은퇴 선언 후, 몇 년 뒤 김대중 정계 복귀 선언의 명분이 되었고, 남북평화교류는 그의 1997년 당선과 함께 햇볕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는 634만 표(53.2%), 김대중은 539만 표(45.2%)를 획득하였다. 부정선거가 횡행했음에도 김대중 후보는 대도시에서 바람을 일으켰으며, 박정희 정권의 최대 정적이 되었다. 결국 대통령 직접선거를 허용할 경우 차기 선거에서 패배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박정희는 1972년 유신 친위 쿠데타로 대통령 선거를 간접선거 혹은 '체육관 선거'로 바꾸었고, 김대중 납치사건까지 벌이게 된다.

김대중은 당내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불리한 조건을 기꺼이 감당함으로써 그의 권력의지를 보였다. 당내 비주류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류를 분열시키고 비주류를 응집시키는 조직능력을 보여주었고, 여권보다 취약한 조직을 도시에서 불만을 조직함으로써 여촌야도의 바람을 일으켰고 동시에 데탕트의 바람과 자신의 통일 비전을 잘 결합했다. 1971년의 그는 실패했지만, 그 실패는 1997년 성공을 위한 기초를 만들어 냈다.

정주영, 재벌에서 국민당으로

1992년 제14대 대선은 1987년 13대 대선 당시 분열로 승리하지 못했던 김영삼과 김대중 양 김이 여야로 나뉘어 재 승부를 벌이는 선거였다. 의회의 여소야대로 정국 운영이 쉽지 않았던 노태우의 민정당, 김영삼의 통민당, 김종필의 공화당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이 탄생하면서 제14대 대선의 추는 김영삼 쪽으로 기우는 듯 했다. 하지만 이 승부에 정주영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그는 대선에 나서기 위해서는 의회정치의 본고장인 여의도에 뿌리를 내리고, 선거운동을 조직할 수 있는 정당이 필수적임을 인식하고 총선을 두 달 앞둔 1992년 1월 국민당을 창당했다. 다른 군소정당들과의 통합을 거쳐 만들어진 통일국민당은 총선에서 31석을 확보했고, 철저하게 정주영의 선거운동 조직이 되었다. 통일국민당은 규모와 무관하게 현대기업을 기반으로 전국적인 동원이 가능한 정당이었다. 1992년 12월에 치러진 제14대 대선에서 김영삼은 997만 표(41.9%), 김대중은 804만 표(33.8%), 정주영은 388만 표(16.3%)를 획득했다. 정주영은 김영삼의 영남, 김대중의 호남, 그리고 제주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20% 이상의 높은 득표율을 보였다.

정주영은 반값 아파트, 초중등 무상급식, 경부고속도로 복층 건설과 같은 신선한 공약을 내세웠다. 반값 아파트는 현실성은 떨어졌지만 치솟는 부동산 가격으로 점점 내 집 마련의 꿈에서 멀어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정도로 파격적이어서 이후 홍준표 의원에 의해 재활용될 정도였다. 초중등 무상급식은 이미 현실로 정착될 만큼 가능성이 컸지만 정주영이 처음으로 정치화했다.

정주영의 반값 아파트는 대선 내내 쟁점이었다. 출처: 경향신문

정주영은 통일국민당과 현대라는 탄탄한 조직적, 물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양 김 정치를 기성정치로 프레이밍 하며, 자신을 제3세력으로 위치 지우며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공약은 포퓰리즘이라는 비난에도 그 단순함과 명료함으로 사람들을 매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주영에게는 권력의지가 약했다. 현대에 대한 세무조사와 각종 정치적 압박으로 그는 통일국민당 탈당과 함께 정치에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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