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재벌 총수 수난사 혹은 범죄사 6: 김우중, 기업인이 되지 못한 상인

Zigzag 2021. 5. 3.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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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울뿐인 재계 2위 대우

김영삼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기 석 달 전이자, 대우 그룹이 해체되기 2년 전인 1997년 9월 중순, 당시 시중에는 '엘지 그룹 회장 비서실 재무팀' 이름으로 작성된 <예측 2005>란 보고서가 시중에 떠돌고 있었다. 이 보고서는 당시의 삼성-현대-엘지-대우-선경(지금의 SK) 5대 재벌 순위가 대우-엘지-현대-삼성-선경의 순서로 재편되리라 예측했다. 대우가 재벌 순위 1위로 올라서는 예측의 근거는 김우중의 세계경영과 탄탄한 해외금융 능력이었다. 이 보고서가 허황한 것은 1999년 10월 대우그룹의 해체 예측에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대우의 성공예측 근거로 제시한 세계경영과 금융 능력이 바로 대우의 실패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대우는 1980년대 들어 줄곧 삼성, 현대, 엘지와 함께 4대 재벌에 속했으며, 1993년에는 자산 총액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대우가 2위에 오른 시기다. 전두환이 주도하고 노태우가 참여했던 신군부 중심의 권력이 1987년 민주화 이후 쇠퇴하고, 군부가 아닌 민간인 중심의 정치 권력이 실질적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시기가 바로 190년대 초다. 따라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라는 소위 3김과 같은 기존 정치 세력은 물론 정치의 외곽에 존재하던 세력들도 정치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국면이 시작된 것이다.

1992년 재벌 순위. 출처:1994.04.02 조선일보

김영삼과 김종필은 3당 합당으로 신군부의 빈자리를 채우려 했다. 포항의 박태준은 대권과 킹메이커 사이에서 동요했고, 현대의 정주영은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단번에 원내 제3당 대표가 되어 대권의 문을 두드렸다. 김우중 역시 1992년 대권 출마와 불출마 사이를 수없이 오락가락하며 주판알을 튕겼다. 그가 정치권 접근은 정주영과는 출발은 둘째치고 동기부터 달랐다. 김우중이 정치의 문을 두드린 것은 대우가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 아니라, 계속 부도와 적자의 위기를 거듭했기 때문이었다. 대우는 1993년에 이어 1999년 초 삼성을 제치고 현대에 이어 자산규모 2위 그룹으로 올라선다. 하지만 이것은 사업을 통한 자본의 증가 때문이 아니라 전체 자산의 40%에 해당하는 17조 원의 부채를 끌어다 쓴 것이 자산으로 포함됐기 때문이다. 1990년대 대우는 위기가 아닌 적이 없었고, 파괴를 통해 혁신할 줄 아는 기업인과 달리 파괴와 혁신을 두려워했던 상인 김우중의 심화 없는 양적 확대의 세계영업과 차입 영업의 신화는 1999년 막다른 골목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이병철의 밀실 지배 vs 정주영의 현장 통치 그리고 김우중의 밀실형 현장 지배

대우의 김우중은 삼성의 이병철이나 현대의 정주영과 달랐다. 이병철은 일 년에 1~2회 열리는 계열사 사장단 회의 외에는 거의 전면에 나서거나 간부들을 접촉하지 않는 밀실형 황제 스타일이었다. 반면 정주영은 공사 현장에서 직접 지휘하고 전경련 회장을 10년간 연임하며 공개 행보를 즐기는 공개형 현장 스타일이었다.

김우중은 '워커 홀릭'이라 불릴 정도로 열심이었고, 차 안에서 식사를 하거나 현장 주변의 허름한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할 정도로 소탈했다고 알려졌지만 정작 대우가 위기 시 정부나 GM과의 협상 과정에서 그를 제외하곤 회사의 주요 간부들조차 주요 회사 정보와 금융 정보에 무지할 정도로 독재자였다. 김우중은 현장에서 밀실형 황제처럼 중요한 정보를 독점한 채 지휘하는 현장형 밀실 황제 같은 스타일이었다. 김우중은 이병철이나 정주영처럼 무엇을 만들거나 세우는 유형의 인물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것을 팔고, 세워진 것을 사들이는 상인이었다.

삼성과 현대, 대우 모두 박정희 정권의 비호 아래 성장한 재벌들이었다. 하지만 삼성의 이병철이 한비 사건으로 절치부심 후 반도체로 방향을 틀고, 현대의 정주영은 미지의 해외 건설과 자동차 산업에 과감히 진출했지만, 대우는 주워먹기형으로 성장했다. 대우는 내실 없는 박정희식 성장 일변도의 팽창정책을 1979년 그의 암살 이후에도 쉼 없이 밀고 나간 거의 유일한 재벌 기업이었을 것이다. 기술은 빌려 쓰면 되고, 남들이 안정을 취할 때 팽창해야 한다는 김우중식 경영은 규모와 덩치가 그리 크지 않았다면 율산그룹과 제세산업처럼 1970년대 이미 몰락했을 것이다. 경제부 기자들이 삼성을 「추적·추격 주의」, 현대를 「개척 주의」로 특징 지웠던데 반해, 대우를 「영업주의」로 부른 것은 어느 정도의 진실을 포함하고 있었다.

초기 대우 고속성장의 비밀: 인맥경영, 차입경영, 확대경영

박정희의 은사이자 제주도지사까지 역임했던 부친 김용하의 납북으로 가세가 기울어져 김우중은 돈벌이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가 밝힌 대로라면 김우중의 첫 돈벌이는 중학 시절 신문팔이다. 당시 그는 부지런했을 뿐만 아니라 남보다 두 배 이상 신문을 잘 팔 정도로 장사꾼 기질이 있었고 한다.

대우의 시작은 수입전문업체인 한성실업에서 업무부장을 하던 김우중이 경기고, 서울대 동창들과 함께 자본금 5백만 원으로 1967년에 세운 대우실업이다. 김우중과 함께 대우를 시작한 5인은 그가 한성실업에서 빼 온 일종의 수출 '별동대'였다. 대우실업은 첫해에만 트리코트 섬유 수출로 58만 달러의 실적을 올렸고, 이듬해인 1968년 수출로 대통령 포장, 1970년에는 850만 달러 수출로 철탑 산업훈장, 1971년에는 2,450만 달러로 동탑 산업훈장, 1972년에는 5,300만 달러 수출로 5,000만 달러 이상을 수출한 4대 업체 중 하나가 되어 금탑 산업훈장을 받을 정도로 괄목할만한 성장을 거듭했다. 대우의 자본금은 1967년 500만 원에서 1973년 15억 원으로 불어났다.

대우의 수출 5천만불 돌파 기념 광고. 출처: 1972.12.09 조선일보

대우의 초고속 성장은 처음부터 김우중식 인맥 동원과 차입경영 '덕분'이었다. 초창기 대우 이사진 대부분은 경기고 출신들이었다. 김우중의 대우는 1980년대 초 삼성과 현대에 이어 재계 3위가 됐을 때도 이사진의 1/3 이상이 경기고 출신으로 '경기고 왕국'이었다. 김우중은 경기고 인맥을 활용해 대우를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창업 당시 자금압박이 심해 회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상공부의 경기고 선배 도움으로 자금난을 해결했다. 자금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김우중은 1970년대 초부터 동양증권과 제일은행, 산업은행 등 금융기관의 중간 관리층을 대거 적극적으로 영입하였다. 또한 기업의 규모가 커진 1980년대 사장단과 부사장 단의 상당수는 국무총리실, 재무부, 상공부 국장급 이상 출신들의 관료, 금융권 출신 임원진이었다. 특히 대우의 주거래 은행이었던 제일은행 간부들은 대우 중역진으로 자리를 옮기기 일쑤여서, 제일은행의 돈은 모두 대우의 돈이라는 말이 금융가에서 돌 정도였다.

1973년 당시 대우의 유동부채가 유동자산을 초과했고, 부채 총계가 자본총계의 6배에 달할 정도로 재무구조가 좋지 않았다. 1973년 11월 21자 경향신문은 "대우의 확산 경향에 대해서 일부에서는 불안한 눈초리"가 있으며 "자금난을 겪고 있는 기업이 정부의 지속적 지원을 받고 핀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확산할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지적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사는 대우가 "정부 내의 엘리트 관리들과 훌륭한 휴먼릴레이션을 갖고 있다는 점" " 대우에 대한 금융지원금액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지원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대우의 "두 가지 점에서 강점"으로 꼽았다. 대우는 이미 초기부터 '대마불사'의 신화를 믿고 차입경영으로 기업을 끊임없이 확대했다. 김우중의 '세계경영'이란 확대경영과 이를 위한 차입경영은 1990년대 말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1990년대 말에 국민경제 차원에서 인내할 수 없는 수준이 된 것이며, 그 시작은 이미 대우의 설립과 함께 시작된 것이었다.

차입경영을 통한 기업인수로 급격한 몸집 부풀리기

김우중은 1970년부터 본격적인 기업인수에 나섰다. 그는 당시 국내 최대 메리야스 수출 업체 동남 섬유, 그리고 고려피혁을 차례로 인수했다. 정권의 합법성을 수출에서 찾던 박정희 정권의 수출금융에 대한 전폭적 지원, 유신독재 이후 1973년 중화학 공업화 선언, 제1차 오일쇼크로 인한 부실기업의 속출은 박정희와 특수관계에 있었던 김우중에게 기업사냥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1973년 동국정밀, 동양증권, 영진토건, 신성통상 등 덩치가 큰 기업들을 인수했다. 1975년에는 대우전자를 설립하고, 대원섬유를 인수했으며, 1976년에는 한국기계(대우중공업의 전신), 1977년에는 제철화학, 1978년에는 옥포조선(대우조선 전신)과 새한자동차를 인수해 몸집을 급격히 부풀렸다. 섬유 수출 전문업체였던 김우중의 대우는 오일쇼크로 인한 기업부실과 중화학 공업화의 최대 수혜자였다. 아래 도표에서 보듯 1972년 중화학공업 산하 기업이 없던 대우는 1979년에 중화학공업 비율이 전체 자산에서 약 95%를 차지하는 그룹으로 변모했다. 중화학공업 규모로만 보면 대우는 1979년 삼성을 압도했다.

재벌의 제조업자산에 대한 중화학공업 자산비율. 출처: 백광기, <한국의 근대적 대기업 및 기업집단 형성사>, 산학경영연구 제 17권 2004년 4월

1978년 대우실업의 수출은 약 6억5천만 달러, 1979년에는 10억4천만 달러를 달성했는데, 이는 그해 한국 수출의 10%에 상당했다. 1978년 대우는 매출액 기준으로 재벌그룹 3위에 올랐으며, 대우의 매출액은 당시 GNP의 5.0%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1978년 10대 그룹 매출 순위 및 규모. 출처: 1979.03.24 매일경제

문제는 김우중의 대우가 몸집과 규모를 부풀리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 편법과 불법 사이를 오가는 것이었다. 당시 국내 일반 대출금리가 연 24%, 국제금리가 12%인데 비해 수출금융금리는 연 6%였다. 대우처럼 공격적인 무역을 하는 기업은 상품을 선적했다는 선하증권(bill of landing, B/L)을 들이밀고 이런 특혜금융의 혜택을 얼마든지 누릴 수 있었다. 대우의 경우 뉴욕 창고에 수출품의 절반 정도가 쌓여 있었지만, 재고와 무관하게 선적된 것은 모두 실적으로 잡혔기 때문에 수출금융을 받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런 수출금융으로 받은 재원을 대우는 건물매입과 같은 부동산과 부실기업 수집에 사용했다. 대우가 비슷한 행각을 벌였던 율산과 제세, 원기업처럼 망하지 않은 이유는 오직 하나, 정권과 금융권에 줄을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우가 재무부와 상무부, 총리실 그리고 금융기관 외환부서 간부들을 대거 스카우트한 이유는 이러한 수출특혜금융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며, 그 부정직한 방법이 1970년대 김우중이 대우를 키운 주요 방법이었다. 그래서 대우는 몸집은 컸지만 '공장을 못 짓는 기업' '인력 빼돌리기 기업' 자체 기술 개발 대신 '기술을 사들이는 기업'이라는 오명, 이류라는 오명을 벗지 못했다.

전두환의 신군부와 김우중

1980년 8월 초, 신군부가 광주항쟁을 유혈로 진압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현대의 정주영과 대우의 김우중을 호출한다. 박정희 정권의 중화학공업 과잉중복투자를 조정한다는 명목으로 국보위는 정주영과 김우중에게 현대의 중공업을 대우에 넘기고 대신 대우의 새한자동차를 현대에 넘기는 안을 제시한다.

당시 언론과 정계와 재계는 이 중공업통폐합 안을 김우중의 조언에 따라 만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정주영은 국보위의 강요에 반발했다. 그는 "김 회장과 나는 기업을 발전시킨 정신과 과정이 전혀 다르다. 나는 내 손으로 말뚝도 박고 길도 내가며 이제껏 공장을 지어왔다. 그러나 김 회장은 서울역 앞 대우빌딩도 정부 것을 수의계약으로 사서 만든 것이다. 이 사람이 이제 시국이 변하니 권력을 업고 또 뭘 어째 보려는가 본데 나는 그런 방식이 못마땅하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정주영의 반대를 묵살했고, 결국 그는 창원중공업을 내놓았지만, 새한자동차는 GM이 지분을 포기하지 않아 자신만 중공업을 빼앗긴 셈이 되어 버렸다. 당시 국보위 서슬이 퍼렇음에도 불구하고 국보위의 대우에 대한 반발 여론이 커지자 김우중은 국보위의 중공업 통폐합 발표 며칠 뒤 사재 200억 원의 사회환원과 기업공개를 의향을 밝히기도 했다.

1981년 옥포조선소 준공식에서 김우중과 전두환. 출처: 1981.10.19 동아일보

정주영의 김우중에 대한 견해가 정확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정주영과 김우중의 신군부와의 관계가 중공업통폐합 이후 전자는 불편한 관계로, 후자는 밀월관계에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삼성의 이병철이 1960년대 중반 이후 한비 사건으로 박정희와 껄끄러운 관계가 되고, 현대의 정주영이 1980년 국보위 중공업통폐합 이후 전두환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지만, 대우의 김우중은 3공부터 6공까지 군부와 여당 측과 늘 소통하며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었던 거의 유일한 기업인이었고, 그들로부터 "의리 있는 기업인"으로 불렸다.

기업인이 되지 못한 상인 김우중 그리고 기업(corporation(이 되지 못한 회사(company) 대우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재벌육성 정책은 경제침체와 정권몰락을 초래했으며, 그로 인해 신군부의 전두환이 1980년 공정거래법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1987년 민주화는 재벌에 대한 상호출자 규제와 경제민주화 같은 경제력 집중을 견제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다. 또한 1997년 금융위기는 재벌기업의 회계 투명성과 사외이사제도 등의 도입에 따른 의사결정 투명성을 강화했다. 기업의 부패는 이제 정경유착에서 점차 화이트칼라 범죄와 같은 기업 내부의 시장 질서와 국민경제에 반하는 경제부패로 점차 옮아갔다. 이 새로운 환경에 김우중의 대우는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1988~1989년 대우조선 부도 위기 당시 김우중의 “정부의 지원이 없는 한 부도를 낼 수밖에 없다”는 발언은 그가 대마불사, 차입 규모가 클수록 정부는 혈세로 기업을 살릴 수밖에 없다는 그의 1970년대 발상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1990년대 김우중은 민주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권위주의 시대의 공룡이었다. 1999년 그룹 해체 전까지 대우의 최대 위기였던 1989년 김우중의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가 베스트셀러로 떠오른 이유는 그룹차원의 철저한 언론플레이 덕분이었을뿐 그의 경영능력과 성과와는 완전히 무관했다.

1992년 자신과 관계가 껄끄러웠던 현대의 정주영이 통일국민당 창당으로 직접 정치에 참여하자 김우중은 조심스레 정치참여의 문을 두드렸다. 정주영과 같은 개척정신 대신 영업 정신만 있었던 그는 5~6차례에 걸쳐 정치참여 입장을 번복하며 간만보다 결국 여론이 불리해지자 포기한다. 기업에 전념하겠다는 발언과 달리 그는 계속 권력과의 줄에 연연했다. 대표적으로 김우중의 대우중공업은, 국방 율곡사업과 관련해 1993년 당시 이상훈 국방부 장관과 김종휘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에 뇌물을 제공하고, 월성 3, 4호기 공사 과정에서 뇌물을 제공했다. 또한 대우중공업 계열사 합병을 위해 증권감독원장에게 뇌물을 공여했다. 김우중은 1990년 진해 잠수함기지 건설 입찰을 위해 노태우에게 50억 원을 포함해 모두 240억 원의 뇌물을 제공했다. 나아가 그는 자금압박 때문인지 아니면 신군부와의 관계 때문인지 1993년 노태우 비자금 4백억 원을 변칙적으로 실명 전환해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

내실 없는 대우의 팽창전략은 1970년대부터 줄곧 밀어내기식 외상수출과 본사와 지사 간 거래에 따른 현지 재고 축적과 덤핑 제소 문제를 안고 있었으며, 대우는 이런 외상과 재고 누적으로 끊임없는 자금압박에 시달려왔다. 부채 규모가 커지고 시중은행의 대출도 곤란한 상황에서도 그는 쌍용차를 인수하고, 수출로 부채를 갚으면 된다며 단기어음과 회사채를 발행하며 차입경영을 더욱 강화했다. 동유럽 진출과 같은 그의 세계경영은 미개척 시장을 선취하기도 했지만, 미국과 유럽 같은 소위 '선진'시장에 진출할 제품경쟁력을 가질 수 없었던 중저가 위주 만년 2위 대우의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문제는 김우중의 '세계경영' 깃발 아래 진출했던 동유럽,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지역은 당분간 이윤을 내기는 힘들지만 장기간의 대규모 투자를 필요로 하는 시장이라는 점이다. 더우기 대우 '해외투자의 80%가 차입급이었기에 그의 세계경영은 차입경영의 다른 말에 불과했다.

김우중은 1967년 대우의 설립부터 1999년 그룹 해체까지 기업인이기보다는 상인이었다. 한때 그가 언론으로부터 불렸던 '위대한 상인'이란 수식어는 어찌 보면 그에 대한 정확한 묘사였다. 그는 확대할 줄만 알았지 혁신할 줄 몰랐다. 자신의 물건을 만들기보다는 남이 만든 물건을 많이 내다 파는 것에서 시작한 그는 동창들과 인맥으로 운영하는 회사(company)를 운영하기에는 알맞은 그릇이었지만 거대한 기업(corporation)을 경영하기에는 맞지 않는 그릇이었다. 그가 군부와 여당에 정치자금을 제공하면서도 동시에 야당에 정치자금을 제공하거나, 대우자동차 파업을 주도하던 86그룹들을 키웠던 이유는 인간적 관대함이나 정치적 혜안 때문이 아니라 상인의 보험 들기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의 알뜰했던 보험도 국민의 혈세로 감당해야하는 대우의 채무 60조 원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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