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음악

사카모토 류이치에게 '천의 칼' 대신 천송이의 꽃을: 일본 소비주의의 열광적 사운드트랙에서 실험과 행동주의로

Zigzag 2023. 4. 6.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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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시절 마르크스주의 활동에 몸을 담았던 사카모토 류이치였지만, 그는 자신의 음악에 정치적 메시지를 담는 것에 엄격하게 선을 그어왔다. 물론 그것이 그가 신시사이저와 클래식 악기, 민속 악기, 자연의 소리 그리고 세계 곳곳의 음악의 결합을 통해 시대를 해체하고, 냉소하고, 비판했다는 것마저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이 '기적의 경제'로 무한한 소비주의의 세계를 열어젖히던 1980년대에 사카모토 류이치는 동서양의 다양한 음악, 전통과 첨단, 냉정과 열정, 노골적인 글로벌화와 은둔적인 일본 지역주의하는 미학적 모순을 결합하여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며 전후 일본에 대한 번뜩이는 냉소적인 패러디를 음악적으로 재현했다. 1990년대 다소 장황하고 과장됐던 그의 작업은 2000년대 들어 창조적인 디지털 미니멀리즘에 그의 오묘한 멜로디를 녹여냈다. 말년의 그는 후쿠시마 참사를 목격하면서 그의 음악에 새로운 실험과 행동주의를 녹여냈다. 이 글은 작가 Dan Barrow의 Jabobin magazine 4월 3일 자 기고 A Thousand Flowers for Ryuichi Sakamoto의 번역으로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적 여정을 그의 활동과 앨범의 분석을 통해 탐색하고 있다.

사카모토 류이치를 위한 천 송이의 꽃

마르크스주의 청년 운동에서 잠시 활동한 후,  사카모토 류이치의 끊임없는 혁신적인 음악은 1980년대 일본 붐의 소비주의적 열광의 사운드트랙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최근의 작품에서, 고인이 된 작곡가는 실험과 행동주의로 되돌아갔다.

Dan Barrow

사카모토 류이치(Sakamoto Ryuichi)는 엘리자베스 레너드(Elizabeth Lennard)의 1984년 다큐멘터리 도쿄 멜로디(Tokyo Melody)에서 인터뷰를 통해 "내 음악에 대한 개념은 일상적인 시간에 기초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음악이 도처에 있는 일본에서, 우리가 보편적인 시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시간과 같은 기반 위에 계속 존재합니다."

그 주장의 변증법적 함의는 두 방향으로 움직인다. 음악은 "보편적인 시간"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일상적인, 민주적인, "대중적인" 사람들에게 가까이 있다. 그것은 미학적, 정신적 시간성에 거주하며 일상의 시간과 구별되지만 다른 곳에서는 살 수 없다.

사카모토는 적절하게 일상적이고 "대중적인" 음악(제국주의 전쟁과 핵 파괴가 그 나라에 절대적으로 현대성을 강요하기 전에는 실제로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은 반드시 기괴한, 다른 세계적인 것이라고 시사하는데, 이는 한 세기 동안 일본 예술의 주제였던 보편적인 사회적 순응을 넘어선 또 다른 삶을 암시한다. 사카모토는 솔로 아티스트, 일렉트로닉 팝 그룹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Yellow Magic Orchestra, YMO)의 멤버, J-팝(J-POP)의 황금기의 흥행주로서 아마도 누구보다 더 자신감과 지략으로 서양 팝과 클래식 전통, 전후 전자 음악의 가장 기이한 단편들, 그리고 "세계 음악"이 될 거대한 물결, 아방가르드와 대중음악의 역사의 층위라는 들쭉날쭉하고 유동적인 집합체, 스타일과 재료들을 엮었다. 예술, 팝, 그리고 중간지대의 번지르르한 영역 사이에서 그의 용이한 움직임은 그가 자주 부인하는 개인적인 매력에 의해 촉진되었다.

도쿄 멜로디(Tokyo Melody) 시절, 그는 이미 일본에서 가장 큰 스타 중 한 명이었다. 1981년 솔로 앨범 레프트 핸디드 드림(Left Handed Dream)의 커버에 추상적인 파스텔 메이크업으로 광대뼈가 강조된 자신감 넘치는 미니멀리스트 댄디로 등장했다. YMO와 함께 그는 '워간'(Wogan, BBC 토크쇼 - 역자 주) 또는 '라이브 앤 킥킹'(Live and Kicking, BBC 어린이 시리즈 - 역자 주)의 일본 버전에 자주 게스트로 참여했다. 그전 해에 이미 여러 장의 톱 10 음반이 자신의 이름으로 발매된 상태에서, 그는 오시마 나기사 (Ōshima Nagisa)의 '전장의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Mr Lawrence)에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와 TV 코미디언 기타노 다케시(Kitano Takeshi)의 상대역으로 출연했다.

1952년 탄탄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이미 피아노와 작곡의 신동(4살 때 첫 작품을 작곡했다고 주장)으로 국립 음악원에 들어갔다. 그의 취향은 일본 재즈, 서양 팝,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과 페트로비치 무소륵스키(Petrovich Mussorgsky)의 과장된 후기 낭만주의, 아프리카 및 동아시아 민족 음악, 존 케이지(John Cage)와 칼하인츠 스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의 일렉트로닉 혈통을 받아들인 보편적이고 세속적인 것이었다. 그는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에 대해 특별한 존경심을 가졌는데, 그는 자바식 가멜란의 비서구적인 형태에 기초해 19세기의 성조 음악을 반음계 화음과 고정되지 않은 음색이 이미지처럼 떠다니는 복잡하고 모호한 하모니의 장으로 용해시켰다. 사카모토를 알고 협력했던 데이비드 툽(David Toop)은 드뷔시를 어떠한 민족적 '진정성'이라는 개념도 제거하는 20세기 음악관의 중심에 두었는데, 이는 새로운 기술과 실천이 음악을 유동적이고 혼색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사카모토는 세계적인 음악 스타들의 롤로덱스(Rolodex, 상품명으로 비즈니스 연락처 정보를 저장하는 데 사용되는 회전식 카드 파일 장치 - 역자 주)를 전개했던 '뷰티'(Beauty), '네오 게오 스위트 리벤지'(Neo Geo, Sweet Revenge)와 같은 앨범에서 약간 터무니없는 결론으로 그 아이디어를 수행했다.

1980년대 전환기의 일본은 미래가 가장 먼저 도래한 곳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파괴된 제국주의 국가로서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에 대항하는 방벽으로 육성된 독특한 전후 지정학적 위치는 유럽의 자유 자본주의와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에게는 생소했던 키메라 사회를 만들었다.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을 수반한 "경제적 기적"으로서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공산당 중 하나이자 강력한 사회주의 정당을 가지고 있었지만, 1955년에 구성된 성공적인 보수적 의회 연합으로 인해 공식적인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한편, 60년대 후반의 거대하고 전투적인 학생 운동은 완전히 낡은 좌파와 결별하고 살인적인 규모로 억압되었다.

그 결과는 강력한 전통주의와 최고급 소비재로 얼룩진 사회적 분열과 균열의 난장판이었다. 극단적인 사회적, 인종적 보수주의는 소니(Sony), 닌텐도(Nintendo), 롤랜드(Roland)의 개인 기술을 가장한 자유로운 소비주의의 결과와 나란히 앉아 새롭고 비물질적 생활세계를 준비했다.

일본 대중음악은 창조적인 폭발을 겪었다. 재즈 퓨전의 자원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부드럽고 낭만적인 보컬 팝이 잉태되었으며 점점 더 엄격한 전자 미니멀리즘이 디자인 쇼룸의 요구를 충족시켰다. 사카모토는 아마도 다른 어떤 것보다 이러한 심미적 모순, 즉 관현악 시럽과 야만적 음파의 첨단 기술, 정확하고 침착하고 격한 열정, 일본의 은둔적인 지역주의와 그것이 현재 중심이 된 글로벌 흐름이라는 모순을 파악한 예술가였다. 1978년과 1986년 사이에 그가 만든 음악은 이 세계를 반영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내면적인 미적 잠재력을 형성했다.

사카모토는 임시직 세션 음악가이자 편곡자로서 호소노 하루오미(Hosono Haruomi)와 다카하시 유키히로(Takahashi Yukihiro)를 만났고, 그들은 YMO를 일종의 기악적인 참신한 디스코 그룹으로 구상했다. 호소노는 사이키 록 밴드 해피 엔드(Happy End)로, 다카하시는 사디스트 미카 밴드(Sadistic Mika Band)의 드러머로 둘 다 이미 음악 산업의 베테랑이었다.  그들의 초기 음반들은 미국의 거의 동시대의 데보(Devo)와 마찬가지로 60년대 이상이 파괴된 후 문화의 완벽한 표현이었다. 그것은 오리엔탈리스트들의 키치와 저속한 소비주의를 날카로운 음파적 폭풍으로 활기차게 만든 전후 일본에 대한 번뜩이는 냉소적인 패러디였다.

원색 점프슈트를 입고 가끔 마오 모자를 쓴 사카모토는 전형적인 일본 관광객처럼 관객들에게 플래시큐브를 날렸다(다카하시는 패션디자인을 부업으로 하는 야마모토 요지[Yamamoto Yohji]의 친구였으며 사카모토의 스타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시사이저가 팝 차트에서 참신한 아이템(혹은 반음악적 위협)으로 여겨지던 순간, 그들은 불안할 정도로 겸손한 멜로디와 함께 비타협적, 이질적, 그리고 화려한 작곡을 차트의 정상에 올렸다. 마틴 데니(Martin Denny)의 1959년 이국적인 듣기 편한 커버곡인 1978년 곡 '파이어크래커'(Firecracker)는 복잡한 키보드 줄과 뿡뿡거리는 베이스로 물결치는 상상 속의 일본의 소리 이미지였다. 다음 해에 발매된 '컴퓨터 게임'(Computer Game)은 초기 아케이드 게임의 사운드 세계를 가져왔고, 이것을 펑크의 단편들이 합쳐지는 삐삐 거리는 소리와 경보의 추상적 소용돌이로 변화시켰다. 그것은 사이버펑크가 앞으로 몇 년 동안 탐구할 다른 상상적 세계의 윤곽이었다.

6개의 후속 앨범에서 모두 일본 탑 5의 자리를 차지한 그들은 기괴한 만담 스케치, 대담한 샘플링 전략, 댄스 음악을 지배하게 될 신시사이저(특히 롤랜드 808 드럼 머신)의 선구적인 사용을 위한 공간을 찾았지만, 강하게 빛나는 팝 그룹으로 발전했다. 사카모토는 YMO가 결성되었을 때 이미 1978년 솔로 데뷔작인 사카모토 류이치의 '천 개의 칼'(Thousand Knives)을 작업하고 있었다. 1986년의 '푸투어리스타'(Futurista)까지 그가 프로듀싱한 솔로 작품은 금세기의 가장 주목할 만한 팝 업적 중 하나이다. 모든 음반은 많은 음악가들의 전체 경력보다 더 큰 기술적 독창성과 형식적 복잡성으로 실행된 더 많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 그 시대의 사운드 세계의 먼 구석에서 온 파편들은 절대주의(Suprematist) 캔버스의 돌진하는 추상 모양처럼 함께 부서진다. 그렇게 형식적이고 질감적인 담대함이 고전적인 노래 구조의 덕목에 대한 그렇게 성취되고 미시적인 관심과 결합된 적은 거의 없다. "천 개의 칼"은 밤의 정글에 대한 전자 시뮬레이션, 가짜 사이버네틱 포크 음악, 무거운 전자 펑크 잼과 일본 가가쿠(gagaku, 일본 고전 궁중음악 - 역자 주)의 핑핑 거리는 날카로운 공격을 결합했다. 더빙 프로듀서 데니스 보벨(Dennis Bovell)이 함께 한 1980년 음반 'B-2 유닛'(B-2 Unit)은 미니멀리즘과 이질적인 전자적 성좌로 훨씬 더 나아갔다.

'파티시페이션 미스티크'(Participation Mystique)는 떨리는 신시사이저의 비기하학적 공간을 중심으로 기타와 목소리를 해체했고, '라이어트 인 라고스'(Riot In Lagos)는 펠라 쿠티(Fela Kuti)의 영구적 운동의 아프로비트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E3A'와 '디 엔드 오브 유럽'(The End of Europe)과 같은 기악곡들은 드뷔시의 '라 메르'(La Mer)가 북해에 있었던 것처럼 도쿄와 뉴욕의 상상의 공간에 있다.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와 팔러먼트-펑카델릭(Parliament-Funkadelic)과 함께, '라이어트'(Riot)는 지난 40년 동안 대중음악을 지배한 흑인 음악 리듬 머신의 인정된 핵심 중 하나였다. 즉, 아프로퓨처리즘, 리드미컬한 민주주의, 그리고 아프리카 밤바타(Afrika Bambaataa)의 '플래닛 록'(Planet Rock)으로 시작된 디지털 기술의 봉합은 지구의 절반을 돌아 처음 실현되었다.

이 음악에서 글로벌 신자유주의가 창조하고 있던 생생한 새로운 현실, 즉 즉각적인 소비의 세계, 디지털 비물질성, 명령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전 대륙의 문화 산물이 추출되고, 해체되고, 들쭉날쭉한 시계태엽 팝 음악으로 재구성된다. 기술관료적 미래의 비현실적 홀로그램, 펑크와 레게의 디아스포릭한 현재, 파시즘이 봉안하고 파괴했던 일본 과거의 신화적 발산물 등이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시퀀서 패턴과 페어라이트(Fairlight, 디지털 신세사이저 - 역자 주) 편집의 그물에 걸려 있다.

1985년 토마스 돌비(Thomas Dolby)와 함께 한 12인치(직경 12인치 크기의 LP판을 가리킴 - 역자 주)의 비교적 작은 작품들이나 데이비드 실비언(David Sylvian)의 '브릴리언트 트리스'(Brilliant Trees)와 야노 아키코(Yano Akiko)의 J-팝(J-pop) 광적인 하우스 '타다이마!'(Tadaima!)와 같은 그 시대의 비교적 작은 작품들도 놀라운 대조, 긴장, 구조적 통일성, 기술적 충격 효과, 무중력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다. 한편, 그를 일본 밖의 주요 예술가로 자리매김하게 한 책임이 있는 '메리 크리스마스…'는 그 급진주의가 종종 과소평가되는 매력적인 작품으로 남아 있다.

2차 세계대전 배경과 사카모토의 악보(신디오케스트라 확장 속에서 일본 클래식 음악의 타악기와 목관악기 요소를 모방하는 장엄하고 포괄적인 테마 세트)는 청중에게 이것이 중관의 일요일 오후 TV 프로그램임을 암시한다. 그들이 얻는 것은 카리스마는 있지만 경험이 없는 두 팝스타의 공연을 통해 일본 태평양 전쟁의 끊임없는 공포와 잔인함 속에서 운명론, 명예, 동성애적 유대에 대한 냉담한 연구이다. 그 사운드트랙의 아름다움은 거의 너무 과하다. 그것은 조형적이고, 너무 숙성됐고, 아이러니하다. 그는 나중에 "감상성"(sentimentality)에 대해 비판했지만 종종 콘서트에서 주요 테마로 다시 연주했다.

그의 결과물은 1990년대에 상당히 과장되어졌다. 그것은 중관적인 명성 프로젝트와 장황한 영화 사운드트랙 사이에 끼워진 방대하고 장식적인 앨범이었다. 그러나 그는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에 많은 음악가들이 성공의 평범화 효과에 굴복하는 나이에 놀라운 창조적 갱신을 겪었다. 독일 프로듀서 카르스텐 니콜라이(Carsten Nicolai), 오스트리아 기타리스트 크리스티안 페네스(Christian Fennesz)와의 협업은 그의 절묘한 멜로디 재능을 라스터-노톤(Raster-Noton)과 메고(Mego)와 같은 레이블에 의해 개척되고 있는 디지털 미니멀리즘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그 효과는 그의 첫 번째 인후암에서 회복하는 동안 녹음된 그의 2017년 솔로 앨범 '아싱크'(async)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스티븐 노무라 시블(Stephen Nomura Schible)의 다큐멘터리 '사카모토 류이치: 코다'(Ryuichi Sakamoto: Coda, 2018)에서 볼 수 있다. 그는 빗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양동이를 머리 위에 쓰고, 뉴욕 북부 삼림지대에서 부서진 금속을 가지고 놀며, 잔잔한 신시사이저 저음부와 바흐(Bach)의 단편이 바람과 물의 엉킴과 함께 안드레이 타르콥스키(Andrei Tarkovsky)의 사운드 트랙에  짜여들어갔다.

2011년 후쿠시마 참사를 계기로 일본의 반핵 운동이 동원되면서 사카모토의 환경주의적 헌신은 이 몇 년 사이에 되살아났다. 그는 시위에서 연설했고 원자력 발전소 주변의 출입 금지 구역을 방문했다. '코다'에서 그는 버려진 마을들의 섬뜩한 분위기를 기록하고 남아있는 방사선과 물에 잠긴 자연을 조사한다. 1998년 인터뷰에서 그는 젠가쿠렌(Zengakuren, 전후 급진적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을 가리키며 보통 '전학련'으로 알려져 있다 - 역자 주) 시기에 아주 어린 좌파 급진주의자로서의 짧은 기간을 "100%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그랬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나는 내 음악에 어떤 직설적인 메시지도 원하지 않는다."라고 그는 자신을 명확하게 비정치적인 위치에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신자유주의가 배신한 자유와 욕망을 부정적으로 결정화했다. 여러 면에서, 사카모토의 삶은 부러운 삶이었다. 일찍부터 그는 그가 즐겼던 것을 하게 되었고 그것에서 엄청나게 성공했다. 결국 그가 예술과 정치의 관계로 돌아왔다는 것은 그의 작업이 무언가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풍부함 속에 묻혀 있던 무언가를 재발견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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