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시사

양적으로 압도적이던 아프간 군의 패배 원인과 탈레반 승리가 여성과 소수민족의 인권, 국제 테러 그리고 아프간 민주주의에 미칠 영향

Zigzag 2021. 8. 23.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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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간 군은 30만 명으로 탈레반 병력의 3배를 넘었으며, 장비에 있어서도 현대적이었지만 탈레반군이 본격 공세를 시작한 5월부터 단 3개월 만에 저항도 못한 채 무너졌다. 특정 종족 중심의 아프간군은 종족과 종교를 초월한 국민군대 건설에 실패했으며, 미군의 훈련은 이들 아프간 군대에 의존성만을 키웠다. 결국 테러와의 전쟁을 넘어 아프간 재건의 야심을 품고 탈레반을 축출했던 미국은 아프간 재건이라는 애초의 목적 달성을 위해 터무니없는 비용이 들자 미련 없이 손을 털었고, 아프간 군대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탈레반의 이슬람 근본주의적 교리나 그들의 과거 통치기간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탈레반의 승리가 여성과 소수민족의 인권, 국제 테러리즘, 그리고 아프간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아프간 평화담당 유엔 정무관을 역임하며 유엔의 아프가니스탄 평화 프로세스에 깊이 관여하였던 가와바타 기요타카(川端清隆) 후쿠오카 조가쿠인 대학 특명교수가 8월 21일 아사히 신문의 논좌(論座)에 게재한 タリバンの「勝利」がもたらすものは~米軍撤退に揺れるアフガニスタン②을 번역한 것으로, 아프간 군의 패전 요인과 미국의 패배 원인 그리고 탈레반 승리가 여성과 소수민족의 인권, 국제 테러리즘, 그리고 아프간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자신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조심스럽게 예측하고 있다. - 역자 주

탈레반의 '승리'가 가져올 것은. 미군 철수에 흔들리는 아프가니스탄 ②

국제사회가 지원해 온 민주 정권 붕괴. 아프간 국민과 세계에 심각한 영향이…….

가와바타 기요타카(川端清隆) 후쿠오카 조가쿠인 대학 특명교수(전 아프간 평화담당 유엔 정무관)

아프간 정세는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탈레반의 공세 앞에서 카불의 민주정권이 와해되면서 우려됐던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의 복귀가 확실해진 것이다.

탈레반의 전격적인 승리의 유인이 된 것은 올 9월까지 주 아프간 미군을 일방적으로 철수시키겠다는 바이든 대통령이 4월에 내린 결단이었다. 승리를 확신한 탈레반은 5월에 공세를 본격화시켜, 8월 중순에는 전 국토의 대부분을 지배하에 넣었다. 탈레반 포위망이 수도 카불로 다가오는 가운데 8월 15일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이 국외로 빠져나가자 20년간 국제사회가 지원해 온 민주정권은 사실상 붕괴됐다.

본편은 논좌(論座)에서 5월에 게재된 졸고 '왜 탈레반은 부활했나? 미군 철수에 흔들리는 아프가니스탄①'(なぜタリバンは復活したのか~米軍撤退に揺れるアフガニスタン①)의 속편이다. 전편에서는 수년에 걸친 아프간 분쟁을 종결시킨 본 평화합의의 배경과 탈레반이 부활한 원인을 고찰해 보았다. 속편이 되는 본편에서는 우선 왜 병력이나 장비에서 앞서는 정부군이 탈레반에 압도되었는지 그 원인과 평화 과정과의 관계를 짚어본다. 게다가 여성 차별 등 인권침해와 아프간발 국제 테러 우려 등 이제 현실이 된 탈레반의 승리가 아프간 국민과 세계에 가져올 수 있는 심각한 영향을 검증해 보고자 한다.

카불의 대통령궁을 장악한 탈레반 전사들(2021년 8월 15일) 사진 출처: AP

민족-종파를 초월한 국민군 창설 실패

탈레반은 카불 정부에 대한 공세를 본격화한 이후 잇달아 전국 34개 주의 주도들을 제압하는 등 병력과 장비에서 앞서는 정부군을 계속 압도했다. 국제사회를 지원을 받은 병력 30만 명을 자랑하는 아프간 정부군은 왜 적은 병력의 탈레반 소탕은 고사하고 소규모 게릴라 공세조차 견디지 못했을까.

아프간 국군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카불 정부와 국제사회가 민족이나 종파를 초월한 국민군 창설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국민을 지키는 우수하고 강인한 군대의 육성과 국민을 대표하는 민주국가의 수립은 어느 쪽이 빠져도 성립되지 않는 표리일체 관계에 있다. 그러나 5월 전편에서 지적했듯이 본 평화합의 초기 미국이 국제치안지원부대(ISAF)의 전국적 전개 협력을 거부함으로써 국제사회는 평화합의의 전제인 전국적인 치안회복과 안정을 이루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카불 정부는 탈레반의 영향이 남아 있는 동부나 남부에서 충분히 선거를 실시하지 못했고, 민족이나 종파를 초월한 모든 아프간 국민에 의한 근대 국민국가의 초석을 쌓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전국적인 치안 안정과 민주화의 침투를 완수하지 못한 채 국제사회는 국군과 경찰 등 아프간 신정부의 치안 관련 조직 재편과 훈련에 착수했다.

최초로 국군의 재편을 담당한 것은 영국이었다. ISAF 소속 영국 부대는 부족 간의 균형을 고려하면서 1개 대대에 해당하는 600여 명의 병졸과 장교 후보자를 각지에서 모집해 3개월 동안 훈련을 실시했다. 훈련을 마친 부대는 타지크족 출신의 알리 파힘(Mohammed Fahim의 오기 - 역자 주) 국방장관이 이끄는 국군으로 편입돼 대통령 관저 등 수도 요충지의 경비를 맡았다.

이후 미군이 영국으로부터 임무를 인수받아 프랑스 등 다른 유엔 회원국과 함께 국군의 재편과 훈련을 지원했다.

미군은 2002년 본 평화 프로세스의 시행을 지원하기 위해 유엔에 총 8만 명 규모의 아프간 국군을 재건하기 위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무기 사용법과 부대 운용 등 군인으로서 최소한의 기초훈련에 그쳐 임시방편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후 국군은 병력은 30만 명 규모까지 성장해 헬기, 장갑차와 야간 투시경 등 최신 무기도 제공받았다. 그러나 미군의 계획 속에는 새 정부를 뒷받침하기 위해 어떤 임무와 기능을 갖춘 국군을 키울 것인가 하는 평화 프로세스와 일체화된 포괄적인 사고는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아프간 국군은 탈레반 정권 붕괴 후 남은 유일한 무장세력인 타지크인 부대의 강력한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타지크인 세력에 치우친 국군 편성은 새 정권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국군 편성의 당초부터, 타지크족 중심의 조직이나 운용에 반발하는 파슈툰족 등 타민족의 병사의 탈영이 잇따랐다. 민족과 종파에 의해 그어지는 군벌 시절의 당파적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국군에서는 무기 유출과 함께 병사 월급의 체불 원천징수가 횡행했다고 한다. 당연한 결과로, 부대의 통솔과 병사들의 사기는 침체된 채로 있었다.

전의도 통제도 없었던 아프간 국군

이로 인해 아프간 국군은 군으로서의 통솔을 잃고 미군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항공지원, 정보수집 및 보급 등 광범위한 미군의 지원 없이 아프간 국군은 주요 군사작전을 수행할 능력을 갖지 못한 것이다.

미군의 완전 철수가 결정되자 홀로서기 힘든 국군은 이내 도요타 제 소형 트럭, 구식 칼라슈니코프 총과 휴대용 로켓추진총류탄(RPG) 등 초보적인 게릴라전 장비만 가진 10만 명도 안 되는 탈레반에 압도당하게 됐다. 개중에는 다가오는 탈레반 병의 모습만 봐도 패주 하는 부대도 나타나 신정부의 국군은 거의 전투를 해보지도 않은 채, 차례차례로 주도를 잃어 갔다.

전의도 통제도 없는 국군이 전의가 왕성한 탈레반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국제사회는 최신 장비를 갖춘 병력 30만 국군이라는 도구를 만들기만 했을 뿐 민족과 종파를 초월해 신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기개와 각오라는 국민군으로서의 혼을 담는데 실패했던 것이다.

비록 아프간 국군을 키운 미국이었지만 탈레반과의 전투 마지막 단계에서는 냉담한 자세로 일관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카불 함락이 임박한 8월 14일 아프간 국군이 자국을 지키지 못하거나 방어할 의사가 없다면 미군이 앞으로 5~10년 동안 계속 있어도 의미가 없다고 말하며 기능부전에 빠진 국군을 내쳤다.

카불 함락 전날인 2021년 8월 14일, 카불의 보안요원 감시대 등을 시찰한 가니 대통령(왼쪽)과 국방장관 대행. 사진 출처: 8월 14일 아프간 대통령궁 트위터

본 평화 합의의 이념과 상충되는 탈레반의 교의

탈레반의 승리는 본 평화합의가 지향한 민주국가의 끝을 의미하는 것일까? 극단적인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본질이 바뀌지 않는 한 탈레반 집권하의 아프가니스탄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없다.

유엔이 주도한 본 평화합의는 911 대미 테러 3개월 뒤인 2001년 12월 조인됐다. 평화 합의의 목적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비극적인 분쟁을 종식시키고 동 국가에서의 국민 화해, 평화의 영속, 안정 및 인권 존중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평화합의는 "이슬람, 민주주의, 다양성, 사회정의 원칙에 따른 국민 자신의 정치의 미래를 자유롭게 결정할 권리"를 승인한 데 이어 "(아프간 국민의) 넓은 합의에 근거한 여성 대표 문제에 민감하고 다민족적인, 전적으로 국민을 대표하는 정부 수립"을 선언한 것이다.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을 목표로 하는 본 평화협정의 이념은 선지자 마호메트가 살아난 7세기 이슬람을 향한 탈레반 운동의 복고적인 교리와는 상충한다.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로 퇴보할 것인가

탈레반은 1994년 파키스탄의 아프간 난민캠프에서 결성됐다. 1988년 소련군 철수 후에도 골육의 권력투쟁을 벌이던 무자헤딘(성전의 전사)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 청년들이 '이슬람 신학생'(탈레반)으로 불리는 집단을 결성해 조국에 '진정한 이슬람교도에 의한 정부'를 세우기 위해 일어섰다.

탈레반은 적대적인 무자헤딘 각파를 "부패한 무슬림"으로 정하는 한편, 스스로를 "진정한 무슬림"이라고 칭하고 지배지 주민들의 지지를 얻어갔다. 탈레반이 자신의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해 코란이나 하디스의 극단적인 해석에 기반한 이슬람법 샤리아를 엄격히 시행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 탈레반 정권이 부활하면 아프간 사회는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로 되돌아가 20여 년간 쌓인 인권 옹호와 민주화의 토대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탈레반이 수립하려는 이슬람 에미리트 국가에서는 종교가 유일한 절대적 사회규범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다양성을 중시하는 사회에 필수적인 민주적인 선거나 인권을 용인할 여지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하에서는 인권침해, 여성 차별이나 아프간 발의 국제 테러 등, 탈레반 정권하에서 염려되는 여러 문제를 개별적으로 검증하고자 한다.

탈레반 정권 하에서 우려되는 문제들

국민의 기본적 인권은 유린되지 않는가

탈레반은 공포정치를 부활시키고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유린하며 아프가니스탄을 중세의 암흑시대로 되돌릴 것인가?

바이든 대통령은 미군 철수를 선언하는 연설에서 철군 목적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국 역사상 최장기 전쟁에 막을 내리겠다"는 자국 사정에 따른 포기임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우리는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간 것이 아니다. 자신의 미래와 국가의 운영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아프간인들만의 권리이자 책임이다"라며 탈레반의 부활을 사실상 용인한 것이다.

하지만 탈레반에 의한 인권 침해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는 깊다.

탈레반은 결성 당시부터 이들의 해석에 따라 이슬람법을 엄격하게 적용했다. 예를 들어 탈레반은 범죄자들에 대해 야만과도 같은 잔혹한 형벌을 가했다. 절도 초범의 경우 범인의 왼쪽 손목이 잘리고, 재범의 경우 남은 오른쪽 손목도 잘리는 것이다. 이에 따라 탈레반 점령지에서는 범죄가 현저히 감소하고 치안은 금세 회복됐다. 오랜 전란에 시달리는 주민들은 당초 탈레반의 공포정치를 환영한 것이다.

하지만 아프간 국민들의 탈레반 지지는 오래가지 못했다. 탈레반의 전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가혹한 통치가 일상생활 구석구석을 파고들기 시작하자 주민들 사이에 점차 불만이 고조되었다. "눈에는 눈" 식의 전근대적 공포정치는 비록 치안회복을 가져왔지만 현대 세계의 보편적 가치와 인간성을 부정하는 '묘지의 평화'였다.

탈레반이 가한 일상생활의 제약은 음악 금지, TV 영화 금지, 인물 사진 찍기 금지, 연날리기 금지, 남자 면도 금지, 게임 금지, 축구 금지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탈레반의 압정 가운데 심각한 것은 시아파 이슬람교도에 대한 탄압이었다. 탈레반의 교의에 따르면 시아파는 이슬람교에서 일탈하는 배교자(apostate)로 이교도보다 더 악질적인 것으로 간주됐다.

유엔은 1998년 시아파 교도가 많은 하자라(Hazara) 소수민족에 대한 탈레반 탄압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하자라족 거주지대인 아프간 중앙부 바미안 주변에 인권 상태 감시를 목적으로 하는 연락원을 배치했다. 하지만 탈레반의 공세로 바미안이 함락되자 탈레반 병사들은 학살과 성폭행 등 시아파 주민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를 서슴지 않았다.

하자라족은 전통적으로 여성들의 사회 진출에 관대했으며 유엔 대표단이 방문하면 여성 TV크루들이 반갑게 맞이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파미안 함락 후에, 이웃나라 이란으로 간신히 도망친 TV 크루와 테헤란에서 재회하자, 무엇이 그녀들의 신상에 닥쳤는지 안색이 일변하여 탈레반에 의한 학대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17일 아프가니스탄의 유력 TV '톨로'(Tolo)에 출연한 여성 앵커. 탈레반이 수도를 점거한 다음 날인 16일 화면에서 여성 앵커가 사라졌다 사진 출처: Tolo TV 공식 트위터(2021년 8월 17일)

탈레반에 의한 인권침해 중에서도 가장 우려되는 것은 여성에 대한 주도면밀하고 철저한 차별정책 재개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기자들과 만나 탈레반 지배지에서의 여성 차별에 대해 아프가니스탄 소녀와 성인 여성들이 고군분투해 얻은 권리가 빼앗겼다는 보고를 보는 것은 무섭고 가슴이 터질 것 같다고 말해 강한 분노와 우려를 표명했다.

유엔은 탈레반이 대두한 이후 사례별로 탈레반 간부들에게 극단적인 여성 차별 정책을 중단하라고 호소해왔다.

탈레반의 여성차별은 다음과 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여성의 초등학교 폐쇄, 여성의 고등교육 금지, 여성의 취업 금지, 여성에 대한 남성 의사 진단 금지, 머리부터 발목까지 온몸을 덮는 민족의상 부르카 착용 의무화, 미용원 폐쇄, 화장 금지, 남편이나 아버지가 동반하지 않는 외출 금지, 사랑에 따른 도피와 불륜을 포함한 혼전(혼외) 교제 금지, 유아혼 강요, 동성애 금지.

탈레반은 통상 이런 제약을 파트와(fatwa, 종교령, 공인된 권위에 의해 주어진 이슬람 율법에 관한 판결 - 역자 주)를 통해 발했다. 위반에 대한 형벌은, 채찍질(부르카의 착용을 게을리했을 경우 등)에서, 돌팔매 형(혼전 교섭 등)에 이르렀다. 돌팔매형은 마을공원이나 광장 등에서 집행되는데, '불의'를 저지른 남녀에게 눈가리개를 한 뒤 하반신까지 땅속에 묻어 움직일 수 없게 하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친족이 ‘죄인’이 사망할 때까지 주먹만 한 크기의 돌을 계속 던지는 잔혹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탈레반은 그러나 이 같은 정책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과 유엔의 설득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유엔은 탈레반에 대해 국가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왜 여성의 교육과 사회 진출이 결여되어서는 안 되는지를 잘 알아듣도록 타일렀다. 그러나 탈레반은 "(가냘픈) 여성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며 "(남녀 동등권을 표방하는) 서방의 부패한 문화와 교육이 조국에 불행을 가져온 것이다"라고 반박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탈레반과의 협상 중 그들의 완강한 태도에 화가 난 브라히미 유엔 특사는 옆에서 기록을 찍고 있던 저자를 향해 "내 보좌관은 일본에서 왔다. 그의 조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여성의 사회 진출이 허용되었으므로 오늘날의 평화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득을 시도했다. 그러나 탈레반은 묵묵히 설득에 귀를 기울일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학생 초등학교 폐쇄와 여성 취업 금지 등의 문제에서는 소소하지만 꾸준한 진전이 보였다. 오랜 협상 끝에 유엔은 남학생 초등학교를 하나 건설할 때마다 여학생 초등학교도 하나 건설하겠다는 타협을 탈레반에서 얻어냈다. 여성의 노동에 관해서는, 남편을 전투에서 잃은 미망인이 유엔의 지원으로 운영하는 빵 공방에서 일하는 것을 인정받게 했다.

탈레반 정권 붕괴 후인 2002년 본 평화 프로세스가 본격화되자 아프간 여성의 권리는 고등교육과 의료 접근에 그치지 않고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으로까지 확대됐다.

탈레반 간부는 오늘날 탈레반 정권이 부활해도 여성의 권리나 사회진출을 제한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 근본주의를 자신의 존재 이유로 하는 탈레반의 내력과 과거 행적을 감안할 때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많은 세월과 수많은 희생 위에 선 아프간 여성의 사회적·법적 권리의 획득이지만, 이제 그 성과는 풍전등화이다.

국제 테러 활동의 온상이 되지 않을까

탈레반의 승리로 국제사회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이 다시 국제 테러의 온상이 되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발 테러 우려는 911 테러에 노출된 미국과 국내에 소수 무슬림 민족을 둔 중국과 러시아 등 세계 강대국 사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과 전임 트럼프 대통령은 아프간 주둔 미군 완전 철수의 대전제로 다시는 아프가니스탄을 알 카에다나 이슬람 국가(IS)와 같은 국제 테러조직의 은신처나 훈련장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탈레반 지도부에 강력히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악관에서 연설하는 바이든 미국 대통령. 사진 출처: Yuko Lanham(August 5, 2021)

앞을 가로막는 유일한 걸림돌인 미군 철수를 최우선시하는 이들은 올해 4월까지 미군 완전 철수의 대가로 아프가니스탄을 국제 테러조직의 기지로 삼지 않겠다는 확약을 미국에 주었다. 탈레반과 카불 정부 사이의 평화협상이 난항을 겪어 4월 철군은 무산됐으나 바이든 행정부는 아프간 당사자 간 평화합의의 성립 여부에 관계없이 미군을 올 9월 11일까지 철수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러시아는 체첸과 다게스탄 등 코카서스 지방 자치공화국 내에 이슬람 세력 분리 독립운동을 안고 있어 탈레반의 영향이 파급되지 않도록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 때문에 러시아 정부는 1990년대부터 종종 탈레반에 대해 러시아계 테러조직의 입국이나 훈련을 불허하라는 경고를 내놓았다. 러시아는 올해 3월에 아프간 정부와 탈레반 및 관련국을 모스크바로 초청해 독자적인 평화회의를 개최했다.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댄 중국도 이슬람교도가 많은 신장위구르 자치구에 분리 독립운동을 안고 있어 탈레반의 부활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왕이 외상은 올해 7월에, 탈레반 제2인자인 바라다르(Abdul Ghani Baradar)를 텐진에 초대해 아프간 정세를 의논했다. 회담에서 왕이 외교부장은 탈레반에 위구르 독립파 조직인 '동투르키스탄이슬람운동'(ETIM)과 결별하도록 압박했다고 한다. 중국 정부가 탈레반에 이런 요구를 한 것은 신장에서 온 두 명의 중국인 탈레반이 아프간 전선에서 반탈레반 북부연합에 의해 1990년대 말 체포된 이후 두 번째다.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인 미국 중국 러시아의 3국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가운데 당장 아프가니스탄이 국제 테러의 온상으로 되돌아갈 것이라는 예측은 많지 않다.

하지만 탈레반이 예전처럼 국제 테러조직과 결탁하는 요인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탈레반 운동의 배후에, 카슈미르 지방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인도와 대립하는 파키스탄이 있는 것은 전편에서 설명했다. 카슈미르의 '해방'을 내세우는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들에게 테러리스트 훈련과 같은 탈레반 지배하의 아프가니스탄을 대인도 공격의 배후지로 이용하는 메리트는 적지 않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 산유국들은 국내에서 절대 왕정을 유지하면서 나라 밖에서는 국시인 원리주의적 와하브 파 이슬람교의 확산을 공공연히 지원해 왔다. 지원의 수단은 인도적 지원 단체를 통한 자금 원조나, 왕족에 의한 직접적인 자금이나 물자 제공이다. 아직까지 탈레반에 동조하는 아랍 국가들의 지원이 감소할 기미는 없다.

탈레반 창설 초기 탈레반 간부는 유엔에 "우리의 유일한 관심은 진정한 이슬람교도에 의한 정권을 조국에 세우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국제 테러단체와의 관계를 부인했었다. 그런데 1996년에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을 은닉하고 나서, 탈레반은 서서히 알카에다의 자금, 병사와 사상에 포섭되어 갔다. 탈레반이 우상을 금지하는 와하브 파의 교의를 신봉하는 알 카에다의 영향을 받아 바미안의 석불을 파괴한 것은 9.11 대미 테러가 일어나기 반년 전의 일이었다.

이에 따라 탈레반은 현재로선 국제 테러조직과의 복원을 부인하고 있지만 아프가니스탄이 국제 테러의 온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시간문제일지 모른다. 물어야 할 것은 아프간발 테러가 재발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언제 재발하느냐가 아닐까.

바이든 정부는 잠재적 테러 위협에 대해 아프가니스탄 인근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고 월경 공격을 실시할 능력을 보유한다는 방침이지만 충분한 대책이랄 수 없다. 테러의 부활을 막기 위한 국제사회의 지속적인 감시가 요구된다.

민주화의 실패가 국제 사회에 내미는 과제

국제사회는 아프가니스탄을 저버릴 것인가. 본 평화 프로세스의 좌절로 인해 아프간 사회는 이제 인권과 민주화의 근원인 인간 본연의 이성의 자립을 거부하고 종교가 지배하는 중세 어둠 속으로 가라앉으려고 한다.

소련군이 침공한 1979년 이래 유엔은 40여 년에 걸쳐 아프간 평화협상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유엔 직원이 부상을 입고 목숨을 잃었다. 분쟁으로 인한 아프간 국민의 희생은 수백만 명에 이른다.

비록 유엔이 심혈을 기울여 진행한 평화과정이었지만 국민의 권리를 수호하는 민주국가의 시도는 미완으로 끝났다. 수많은 희생 위에 쌓은 인권과 민주화 등의 성과는 탈레반 정권의 부활로 무위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민주화의 실패가 국제사회에 던지는 긴박한 과제는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시민사회가 미숙하고 종교 세력과 무장세력이 권력 항쟁을 벌이는 파탄국가(failed state)에 어떻게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주느냐는 정답 없는 물음이다.

본 평화 프로세스에서 유엔은 이슬람 원리주의 등 전근대적 가치관이 뿌리내리는 부족사회 속에 민족이나 종파를 초월한 근대 국민국가 창설을 시도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평화 실패의 원인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겸허히 배우는 것이 지금처럼 요구된 적은 없다.

미국 뉴욕의 유엔 건물. 사진 출처: Asahi

미국은 스스로 자초한 실패를 되돌아보라

미국의 바이든 정권은, 카불 정부의 붕괴라고 하는, 성급한 미군의 철군에 의해 스스로 부른 참담한 실패를 진지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미군은 20년 동안 아프간 주재로 2,400여 명의 희생자와 2만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그동안 지출은 전비만 7,780억 달러에 이른다. 과대한 부담에 시달리는 바이든 대통령이나 그 전임자가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국 역사상 최장의 전쟁에서 손을 떼려 했다는 것은 이해할 만도 하다.

그러나 한편, 바이든 정권은 부주의한 철군의 대가로 20년에 걸친 평화 프로세스를 좌절시켜, 아프간 국민이 획득한 인권이나 민주화의 성과를 위태롭게 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미국은 40년에 걸친 아프간 분쟁 초기부터 소련군과 싸우는 무자헤딘 지원이나 911 테러 이후 대테러전쟁을 통해 혼란스러운 아프간 분쟁에 깊숙이 관여해 왔다. 일방적인 철수를 정당화하기 위해 바이든 대통령은 국가재건(nation building)의 책임을 거듭 부인했는데 과연 적정한 주장일까.

이라크 전쟁 반년 전 콜린 파월 당시 국무장관은 개전에 나서는 부시 대통령에게 "(이라크라는) 그릇을 깨뜨리면 그것을 소유하게 된다"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만약 무력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을 타도한다면 "미국은 전후 이라크 재건을 책임지게 될 것"이라는 충고였다.

파월은 또 만일 전쟁을 감행하면 "미국은 전후 이라크 국민의 모든 희망과 소망과 문제를 떠맡게 될 것"이라고 시사하는 바가 큰 예측을 내놓았다.

미국은 911 테러의 보복으로 알 카에다를 비호하는 탈레반 정권을 무력으로 타도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망가진 그릇"을 갖게 됐지만, 아프간 국민 모두의 "희망과 소망과 문제를 떠맡을" 각오는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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