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시사

탈레반은 어떻게 부활했을까?: 미국와 유엔 전략의 실패, 탈레반의 뿌리, 그리고 파키스탄

Zigzag 2021. 8. 23. 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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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패전할 것이라는 예측은 이미 미국이 전쟁을 개시산 2001년 10월 7일부터 존재해왔다. 미국은 1달 만에 탈레반을 카불에서 축출했지만, 이후 역량의 중심을 이라크로 이동하면서 국경 주변으로 밀려나 파키스탄에서 절치부심하던 탈레반은 부활의 기회를 잡았다. 이 글은 전 아프간 평화담당 유엔 정무관 가와바타 기요타카(川端清隆) 후쿠오카 조가쿠인대학 특명교수가 2021년 5월 3일 아사히 신문의 논좌(論座)에 게재한 タリバンはなぜ復活したのか?~米軍撤退に揺れるアフガニスタン① 일부를 번역한 것으로 탈레반의 부활 원인을 꼼꼼하게 분석하고 있다. - 역자 주

탈레반은 왜 부활했을까? 미군 철수에 흔들리는 아프가니스탄

본(Bonn) 평화회의 20년. 민주주의는 뿌리내리지 못하고 이슬람 극단주의가 부활

가와바타 기요타카(川端清隆) 후쿠오카 조가쿠인 대학 특명교수(전 아프간 평화담당 유엔 정무관)

아프가니스탄과 미국의 국기. 사진 출처: Leo Altman/shutterstock.com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4월 12일에,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는 미군을 대미 동시다발 테러로부터 20년이 되는 올 9월 11일까지 완전 철수시킬 것이라고 발표했다. 발표에 의하면, 미국의 새 정부는 5월부터 무조건 이 나라에 머무르는 2500명의 미군을 차례차례 철군시키겠다고 한다. 미군의 일방 철수에 대한 미국 내 및 국제사회의 우려가 크다.

미국 사정에 의한 성급한 결정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이 9·11 테러의 주범인 오사마 빈 라덴을 살해해 알카에다를 약화시켰다고 지적한 뒤,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에 침공했던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라고 강변하며 스스로의 결단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러면서 이상적인 철군 조건을 만들기 위해 계속 주둔할 수는 없다고 속내를 드러냈다. 철수 이유를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국 역사상 최장 전쟁의 막을 내리겠다는 자국의 사정에 따른 다급한 결정임을 시사한 것이다.

미국 첩보기관들은 바이든 행정부에 아프간 정부와 탈레반 사이의 정치적 화해도 하기 전에 미군이 철수해 버리자 "2~3년 안에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에 지배될 수 있다"는 우려를 전달했다고 한다(“Officials try to sway Biden using intelligence on potential for Taliban takeover of Afghanistan”, the New York Times, 26 March 2021.).

이슬람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탈레반 정권의 부활은 20년에 걸쳐 일본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지탱해 온 본 평화합의의 붕괴로 이어져 이 나라에서 싹트기 시작한 민주주의와 여성 인권 후퇴를 초래할 수 있다. 심지어 탈레반 비호 아래 911 테러를 일으킨 알 카에다와 한때 이라크 시리아에서 맹위를 떨쳤던 이슬람 국가(IS)가 되살아나 아프가니스탄을 국제 테러 소굴로 되돌려 놓을지 모른다.

큰 전환점을 맞이한 아프간 정세이지만, 본 논고에서는 유엔이 주도한 평화 활동의 이면 무대를 되돌아보고, 왜 국제사회가 총력을 쏟아부은 아프간 부흥이 길을 잃었는지를 검증한다. 특히 아프간 국민이 그토록 기다리던 민주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해 탈레반이 내세우는 이슬람 과격주의의 부활에 길을 닦은 원인을 자세히 밝히고자 한다. 검증에 있어서는, 본 평화회의에 유엔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등 저자의 7년여에 걸친 아프간 분쟁 담당 유엔 정무관으로서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할 것이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발표하는 바이든 미국 대통령(2021년 4월 14일). 사진 출처: RedhoodStudios/shutterstock.com

"아프간 부흥" 경시한 미국

두 개의 전쟁을 동시 진행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저지른 최대의 실패는, 알 카에다나 탈레반의 섬멸을 목적으로 하는 대테러 전쟁을 고집한 나머지, 아프간 새 정권의 독립을 목적으로 한 부흥 지원을 가볍게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국제사회는 오랜 분쟁으로 피폐해진 이 나라의 재건, 즉 국가 재건(nation-building)을 달성하지 못했고 새 정권은 국내 치안을 스스로의 힘으로 유지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두 개의 전쟁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미군 주도의 대테러 전쟁인 '불후의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Afghanistan, OEF-A)'과 아프간 신정권을 지탱하기 위한 다국적군인 '국제 치안 지원부대(International Security Assistance Force, ISAF)'에 의한 전투이다.(주 1)

주 1: 미국의 '불후의 자유작전'의 법적 근거가 된 것은 유엔 안보리가 911 테러 직후인 2001년 9월 12일에 만장일치로 채택한 미국 등 유엔 회원국에 의한 개별적·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인정하는 결의 S/RES/1368(2001)이다. 한편, 아프간 새 정부를 지원하는 ISAF의 창설은 안보리가 본 평화 합의 체결을 거쳐 같은 해 12월 20일 채택한 결의안 S/RES/1386(2001)에 의해 이루어졌다.

유엔은 911테러 직후부터 탈레반 정권 붕괴 이후 민주적인 새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당시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와 긴밀히 협력했다. 새로운 아프간 정부 수립에 있어서 특히 유엔이 중요시한 것은 발족 직후의 약한 아프간 신정권을 지탱하는 ISAF에 대한 미군에 의한 전면적 협력이었다. 유엔은 2001년 말에 부시 행정부에 대해,

1. NATO 여러 나라의 군으로 구성된 ISAF의 지방도시 전개 지원,
2. 지방 도시에 전개된 ISAF가 공격받을 경우의 미군에 의한 항공 지원,
등을 요청했고, 미국은 이를 받아들였다(주 2).

주 2: 유엔 내에서는 부시 행정부의 협력을 담보하기 위해 ISAF에 대한 미군의 협력 의무를 안보리 결의에 명기하라는 제안도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기각되었다.

부시 정권의 "배신"

그런데 아프간 새 정권이 움직이기 시작한 이듬해인 2002년 2월이 되어 부시 행정부는 ISAF 지원 방침을 갑자기 뒤집었다. 미국과의 2인 3각으로 아프간 평화에 매진한 유엔이었지만 부시 행정부의 배신으로 2층으로 올랐다가 사다리가 없어지게 됐다.

방침 선회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대테러전쟁 관심사가 이듬해로 다가온 이라크 전쟁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미국의 비협력으로, 본 평화 합의의 "중점"이 되어야 할 ISAF의 전개는 수도 카불로 한정되어 지방 도시는 탈레반 잔당과 무자헤딘과 같은 구 세력의 위협에 계속 노출되었다. ISAF의 전국 전개 실패에 의해, 아프간 신정권은 탈레반의 영향이 남아있는 동북부 및 남부 지역에서 징세 및 선거와 같은 국가로서의 최소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해 오늘날의 불안정한 정권 운영의 원인이 되었다.

미국의 실패는 ISAF에 대한 비협력에 그치지 않는다. 부시 행정부는 섣불리 대테러 전쟁을 이라크로까지 확대하는 바람에 세계 이슬람교도들 사이에서 아프간 전쟁의 목적이 탈레반으로부터의 해방이나 민주화가 아니라 이슬람교 국가에 대한 부당한 침략이라는 오해를 낳고 말았다. 그 결과 탈레반 지지자 등 일부 아프간 국민 사이에서는 유엔의 재건 활동조차 반이슬람적인 서구적 가치관의 강요로 여겨지게 됐다.

치안 유지의 또 하나의 기둥은, NATO 제국에 의한 아프간 국군이나 경찰의 재편성과 훈련이었다. 그러나 전국적인 치안유지가 이뤄지지 않고 부족의 차이를 넘어선 민주주의가 미발달 상태 속에서 이뤄진 치안기구의 개편은 국제사회의 방대한 재적·인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혼돈으로 치달았다. 현재에 이르러서도 아프간 국군의 사기는 떨어져 전의가 왕성한 탈레반의 공세를 단독으로 막지 못하고 있다.

방치된 파키스탄 문제

탈레반의 기원은 파키스탄

극단적인 여성 차별 등 가혹한 통치로 유명해진 탈레반이지만 그 기원이 아프가니스탄이 아니라 이웃 파키스탄에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파키스탄에서 태어나 파키스탄에 의해서 성장해, 파키스탄에 의해서 조종되는 탈레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파키스탄에 아프간 정책의 근본적인 변경을 강요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파키스탄의 아프간 정책의 근저에 놓인 인도와의 긴장이 누그러질 기미는 보이지 않아 파키스탄 문제는 방치된 채 있다.

탈레반 운동은 1990년대 초반 파키스탄 북서부 아프간 난민촌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발생했다. 소련군 철수 후 골육의 권력투쟁을 벌이는 무자헤딘(성전의 전사)을 가망이 없다고 포기한 젊은이들이 우리야말로 진정한 이슬람교도라고 선언하고 조국을 부패한 사이비 이슬람교도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일어선 것이다.

이러한 신흥 세력을 강력하게 지지한 것이, 대인도 전략의 관점에서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을 지원하는 파키스탄 군부였다. 파키스탄군에게 있어 아프가니스탄은 미래의 대인도전에서 무기와 부대를 온존 할 수 있는 배후지이며 국방상의 '전략적 깊이(strategic depth)'를 담보하는 중요 거점인 것이다. 따라서 파키스탄은 힌두교 인도에 절대 가담하지 않는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을 카불에 세우는 것을 지상명제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파키스탄군과 이슬람교 원리주의의 깊은 관계는 공공연한 비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파키스탄은 오랫동안 911 테러를 주도한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대에 은신해 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알카에다의 최고 지도자가 2011년 5월 2일에 미군 특수 부대에 의해서 살해되기 직전까지 숨어 있던 곳은, 아프간 변경의 동굴이 아니고, 파키스탄군이 육군사관학교를 두는 아보타바드라고 하는 이슬라마바드 근교의 마을이었다.

유엔은 그동안 파키스탄군 가운데 탈레반 지원을 총괄하는 통합정보국(ISI)과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ISI는 탈레반은 자율적인 운동으로 우리는 일절 관여하지 않고 있다고 둘러댈 뿐이어서 실질적인 협상에는 이르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을 자국의 뒷마당처럼 다루는 노골적인 간섭을 보다 못한 유엔은 911 테러를 앞두고 여러 차례 파키스탄에 대해 이례적인 경종을 울렸다(주 3).

주 3: 예를 들어, 아난 사무총장은 1999년 8월 6일 "지금 수천 명의 비 아프간인들이 (탈레반 전투에) 합류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DPI Press Release SG/SM/7090). 이어 그는 같은 해 9월 21일 안보리와 총회에 대한 보고서에서 탈레반의 공세는 파키스탄의 마드라사 출신의 많은 비 아프간인들을 포함한 2천에서 5천 명의 신병들에 의해 강화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파키스탄을 비난했다(사무총장 보고서 A/54/378-S/1999/994).

안전지대가 된 국경 부족 지대

총을 든 이슬람 무장세력 파키스탄 탈레반 운동(TTP) 전투원. 사진 출처: 2021년 4월 TTP 홍보기관 영상

파키스탄 내에서 이슬람 원리주의의 온상이 되고 있는 것은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을 따라 펼쳐진 부족 지대(tribal areas)이다. 영국령 인도 시대부터 중앙정부의 통치가 미치지 못한 이곳에서는 탈레반의 모체인 파슈툰족이 거주하며 엄격한 이슬람법에 따른 사회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런 부족 지대는 탈레반에 미군이 쉽게 손을 대지 못하는 안전지대가 됐다. 이 때문에 미군은 2,000여㎞ 국경선 곳곳에서 자유자재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탈레반 병사들을 쫓아다닌다는 "두더지 잡기"와 같은 소모전의 수렁에 끌려들어 갔다. 압도적 군사력을 가진 미군이 근대 무기가 없는 게릴라 세력에 불과한 탈레반에 애를 먹은 것은 이 때문이다.

유엔은 911 테러 이전에 파키스탄으로부터 무기와 병사 유입을 제한하기 위한 국제 감시에 필요한 병력을 비공식적으로 추산했지만 10만 명이나 되는 병사가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와 정책의 선택지가 되지 못했다.

탈레반 여성차별은 여성 초등학교 폐쇄, 여성 취업 금지, 남성 의사에 의한 진찰 금지, 온몸을 가리는 전통의상 '부르카' 착용 강제 등 상식 밖의 조치가 포함되지만 같은 인습은 부족 지대에서도 발견된다. 참고로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호소한 당시 15세의 소녀 말랄라 유사프자이(Malala Yousafzai)가 2012년 10월 9일에 탈레반에 의해 총격을 당해 빈사의 중상을 입은 곳도 이 부족 지대였다.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파키스탄이 아프간 평화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판단하고 아프간 문제를 파키스탄이 연루된 '아프팩(Af-Pak) 문제'로 재정의한 뒤 리처드 홀브룩을 특사로 임명했다. 보스니아 분쟁 종식을 위해 노력한 홀브룩이었지만 인도와의 영토 문제를 안고 있는 파키스탄의 반인도 정서가 뿌리 깊어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탈레반 지지층을 수용하지 못한 유엔

본 평화합의 체결 후 참가자 기념촬영. 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브라히미 유엔특사. 브라히미의 왼쪽 옆은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 사진 출처: 가와바타 기요타카(川端清隆, 제일 뒷 줄 왼쪽에서 세번째)

탈레반 이후 새 정권 수립을 서두른 유엔은 2001년 11월 말부터 독일 본에서 평화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그러나 급조된 본 평화회의에서는 민주적인 헌법 제정과 총선 과정에 합의했으나 탈레반 지지층인 파슈툰 다수파 부족을 포섭하지 못해 평화의 향방에 화근을 남기게 됐다.

본 평화회의의 목적은 아프간 안팎에서 당사자들을 평화회의에 초청해 탈레반 이후 새 정부 수립을 위한 길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회의는 본 근교에 위치한 산꼭대기의 호텔을 전세 내 상공의 비행이 금지되는 등 삼엄한 경계 아래 8일 간 외부와 차단된 상태로 진행됐다. 평화협상은 유엔과 아프간 당사자와 관련국 간에 비공식적으로 이뤄졌으나 그 세부 사항은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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