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시사

LA '폭동" 30주년: '한국인-흑인 갈등' 프레임, 주류언론의 미국의 구조적 인종차별에 대한 관심회피를 위한 창작물

Zigzag 2022. 4. 30. 0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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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 주: 백인 경찰관들이 1991년 3월 3일 과속 운전자 흑인 로드니 킹을 집단 구타 사건과 약 2주 뒤 LA에서 상점을 운영하던 한국계 미국인 두순자 씨가 흑인 소년 라타샤 할린스를 절도범으로 오인해 등 뒤에서 총으로 사살한 사건은 약 1년 뒤에 LA와 미국 전역을 뒤흔든 소위 LA 폭동의 표면적인 출발점이었다. 약 1년 뒤인 1992년 4월 두순자 씨가 집행유예로 석방되고, 킹을 구타했던 백인 경찰들도 곧 석방되자 LA는 폭동에 휩싸이게 되었다. 1992년 4월 29일부터 5월 4일까지 계속되어 결국 연방군대까지 출동하게 된 이 사건에서 코리아 타운은 '폭동'의 주요 타겟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63명이 살해되고(그중 25명이 한국계), 2천 여명의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1만 2천 명이 체포되었으며, 약 10억 달러의 재산상의 피해가 발생(그중 절반은 코리아타운에 집중)했다. 당시 주류 언론은 미국 사회의 구조적 인종차별은 뒤로 한 채 사건을 '한-흑 갈등'으로 몰고 갔다. 한국계 미국인들에 의해 사이구(4.29)라 불리는 이 사건은 그동안 미국 사회의 주변부에 위치했던 한국계 미국인들의 발언권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계 디아스포라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된 일종의 분수령이 되었다. 이 글은 이 글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Los Angeles Times, LA Times)에서 다양성과 디아스포라에 대해 글을 쓰는 칼럼니스트 Frank Shyong의 LA Times 칼럼 Column: What we got wrong about Black and Korean communities after the L.A. riots의 번역으로 당시 미국 주류 언론이 만들어 낸 '한-흑 갈등'이라는 프레임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있다.

LA 폭동 이후 흑인 사회와 한인 사회에 대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

Frank Shyong

"여기서 뭐 하는 거죠?"

때는 2017년이었고, 나는 맨체스터(Manchester)와 사우스 노르망디(South Normandie) 애비뉴의 교차로에 있었다. 그곳은 25년 전에 로스앤젤레스 폭동(Los Angeles riots)이 격렬했던 곳이었다.  나는 현지 목사에게 내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기자로 레스토랑 체인에 관한 기사를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나는 기자로 신문에 기사를 쓰기 위해 여기에 있다고 응답했다.

"그래, 들었어요. 근데 여기서 뭐 하는 거죠?" 그는 이번에는 조금 더 크게 반복했다. “무섭지 않나요? 당신들은 보통 이곳에 오지 않아요.”

그의 어조는 무뚝뚝했지만 적대적이지 않았다. 우리는 계속 이야기했고, 그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언급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내가 한국인이 아니라고 설명하자 그는 눈에 띄게 긴장을 풀었다.

나는 로스앤젤레스 폭동을 경험하지 않았지만, 10년 동안 이 신문을 위해 인종과 민족을 다루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인으로 오해하는 얼굴과 함께 나는 그 그 여파를 알게 됐다.

흑인-한국인 갈등(Black-Korean conflict, 이하 한-흑 갈등 - 역자 주)은 1992년 로스앤젤레스 경찰 4명이 로드니 킹(Rodney King) 구타로 무죄 판결을 받은 후 발생한 폭력 사태 동안 지속된 스토리라인이었다. 백인 인종차별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인종 갈등에 대한 구미에 맞는 내러티브였다.

1992년 5월 2일 코리아타운의 그의 식료품점 옥상에서 상점 주인 리차드 리(Richard Rhee)는 권총으로 무장한 채 철야를 하고 서 있다. 로드니 킹(Rodney King)의 구타 재판에서 LA 경찰관 4명이 무죄 판결을 받은 후 3일 동안 폭력사태가 발생하면서 150개 이상의 한국 기업들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사진: David Longstreath / Associated Press

경찰의 잘못이 아닌 인종 갈등에 관한 기사로 헤드라인이 장식되는 것을 보고 기뻤던 로스앤젤레스 경찰청에 그것은 정치적으로 편리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사우스 LA와 같은 지역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흑인과 아시아계 미국인이 자신을 생각하는 방식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며 살아있다.

코리아타운과 사우스 LA의 일부 지역에서는 각 블록에서 폭동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각각의 오래된 건물은 생존과 공동체에 대한 증거이며, 모든 빈 공간은 추도사이다.

나에게 LA 폭동 이야기(story)는 두 개의 비디오테이프에 대한 이야기(tale)이다. 하나는 킹의 구타를 흐릿하게 녹화한 캠코더이며, 다른 하나는 라타샤 할린스(Latasha Harlins)의 살인 장면을 선명한 흑백으로 촬영한 폐쇄회로 영상이다.

역사가들은 LAPD와 당시 LAPD의 수장인 데릴 게이츠(Daryl Gates)가 인종차별주의자였는지 여부에 대해 논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타샤(Latasha, 15세)를 도둑질했다고 비난하고 뒤통수를 쏜 술 가게 주인 두순자(Soon Ja Du)에 대해 거의 모호하지 않았다. 라타샤는 배낭에 주스 한 병을 넣고 손에 2달러를 들고 있었다.

한인들은 주류 미디어에서 대표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한인 가게 주인들은 폭동의 희생자이자 악당이 되었고 인종주의의 상징이자 희생양이 되었다.

Korean American Grassroots Conference에 따르면 피해를 입은 모든 재산의 약 45%가 한인 소유였다. Koreatown Emergency Relief Committee에 따르면 1990년 1월에서 1992년 5월 사이에 총에 맞아 사망한 25명을 포함하여 폭동 전후 몇 년 동안 수십 명의 한인 상점 주인이 살해, 강도, 구타를 당했다. 수 세대에 걸쳐 지속될 수많은 우울증과 자살은 더 넓은 한국계 미국인 사회에 정신적 상처를 남겼다.

1992년 4월 30일 코리아타운의 3번가와 호바트(Hobart) 거리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18세의 에드워드 송 리(Edward Song Lee)가 사망하고 3명의 남자가 부상을 입었다. 경찰은 한국인 소유의 피자 가게를 보호하려다 총에 맞은 생존자들을 심문했다. 사진: Hyungwon Kang / Los Angeles Times

한-흑 갈등은 폭력, 불매 운동, 항의로 특징지어지는 한국인 상점 주인과 대부분의 그들 흑인 고객 기반 사이의 매우 실제적인 전국적 다이내믹을 설명했다.

폭력과 범죄에 겁에 질린 한국의 상점 주인들은 흑인 고객을 마땅히 받아야 할 존경심으로 대하지 않았다. 흑인 커뮤니티는 대우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인종차별과 투자 중단에 좌절감을 느끼며 흑인을 고용하지 않는 한인 상점에 대한 보이콧을 조직했다.

그러나 "한-흑 갈등"은 폭동의 인종 갈등에 대한 토론을 두 커뮤니티에 한정하는, 즉 당시 LA 타임스 기자 존 H. 리(John H. Lee)의 "제로섬 게임 속의 선수들"에 한정하는 용어이기도 했다.

리 씨는 "그 용어가 특정 총격 사건에 어떻게 적용되었고 그것이 국민으로서, 한 인구로서 한국인과 흑인에게 어떻게 확장되었는지 그것이 나에게는 이해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지난주 코리아타임스(Korea Times) 기자 2명과 점심식사를 하며 한-흑 갈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킹의 판결이 내려졌을 때 피터 박(Peter Pak)의 나이는 32세였다. 그는 폭력 사태가 발생한 날 퍼스트흑인감리교회(First African Methodist Episcopal Church, LA의 대형 흑인 교회 - 역자 주)에서 생중계된 카메라 리포터였다. 그는 여전히 한-흑 갈등을 둘러싼 내러티브에 박해를 받고 있다고 느낀다.

"주류 언론은 왜 그런 프레임을 만들었을까요? 의제는 무엇일까요?"라고 박 씨가 나에게 물었다.

그것은 진정성 있는 질문이었고 내가 대답하기 어려웠던 질문이었다.

백인 인종차별이 악당이 아닌 인종 갈등에 대한 이야기를 열망했던 것은 백인 관점과 독자들에 의해 지배되는 뉴스 미디어였을까? 한국계 미국인들은 인종 정의에 대한 흑인의 요구를 거부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편리한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일까?

동기가 무엇이든 라타샤가 살해된 시점은 전투에 휘말린 LAPD에게 매우 유익했습니다. 두(Du)에게 징역형을 선고하지 않기로 한 조이스 칼린(Joyce Karlin) 판사의 결정은 킹의 평결이 있기 불과 일주일 전에 확정됐다.

역사는 항상 그것을 쓰는 사람들의 세계관과 열망을 반영한다. 수년에 걸쳐 나는 아시아인, 흑인, 라틴 아메리카인들이 공통 원인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에 폭동이 끝난 후에도 남아 있던 버질(Virgil)의 중국 식당, 롱비치에 있는 캄보디아 보석 가게, 코리아타운의 태국 식당 건물들의 이야기를 수집해 왔다.

사우스 LA에 있는 캄보디아 소유의 프라이드치킨 체인점에 대해 쓴 이야기에서, 나는 방탄유리가 아닌 제가 본 미소에 초점을 맞췄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악당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이야기들을 소중히 여겼을까?

캘리포니아 고속도로 순찰대원이 1992년 4월 30일 화재로 연기가 피어오르자 로스앤젤레스 9번가와 버몬트 애비뉴(Vermont Avenue)에서 경비를 서고 있다. 사진: David Longstreath / Associated Press

폭동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이러한 욕망에 의해 형성된다. 매년 기념일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위해 같은 사진, 비디오 클립, 그리고 줄거리가 다시 방문한다.

나 같은 젊은 세대의 로스앤젤레스 사람들(Angelenos)은 이러한 기억을 통해 폭동에 대해 배우지만 우리가 배우는 이야기는 1992년보다 더 확실하지는(conclusive) 않다.

그리고 저는 LA 폭동에 대한 대화가 종종 아메리칸드림에 대한 논쟁으로 끝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인 이민자들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고국을 떠났고, 많은 사람들이 폭동 이후 고국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하지만 흑인들이 결코 평등하게 아메리칸드림에 접근하지 못했었다면 아메리칸드림이 진짜였을까?

우리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항상 그것에 모두가 도달할 수 있다는 증거로 사용된다. 우리 중 몇몇은 교육적이고 재정적인 성공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인종차별주의는 반증된다. 우리의 성공은 이 나라가 능력주의 국가라는 믿음을 확인하는 데 이용된다.

하지만 진실은 그것보다 더 복잡하다고 생각한다. 3차원의 물체는 항상 여러분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관점을 바꿀 수 있을 때 더 많은 진실을 본다. 두 목소리가 똑같이 큰 소리로 동시에 웅변할 수 있지만 서로 말을 하지 않으면 우리가 듣는 것은 혼돈뿐이다.

비록 작년에 예술가 빅토리아 카시노바(Victoria Cassinova)는 중남부(South-Central) 휴양 시설에 라타샤의 벽화를 그렸지만, 매년 기념일이 되면 나는 폭동을 기념하기 위한 공공 기념물이나 공간이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아마도 그 부재는 우리 모두가 그것을 기억하는 방법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

오늘날에도 한인들은 주로 가난한 흑인과 라틴계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하는 중고품 매장(swap meet)과 미용 용품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주류 판매점에는 경제적으로 권리가 없는 동남아시아 및 남아시아 이민자의 새로운 세대가 카운터 뒤에 있다.

흑인 사회는 여전히 경찰의 잔혹성과 경제적 인종차별로 고통받고 있다.

그리고 바로 지난달에 나는 흑인 용의자에게 칼에 찔린 한국의 주류 판매점 주인 이용자(Yongja Lee)에 대해 썼다.

그러나 이 폭동이 일어난 지 30년이 지났다고 용자의 딸 엘린 리(Ellyn Lee)가 말했다. 고객들은 주류 판매점을 위한 고펀드미(GoFundMe) 캠페인을 조직하고 거의 $10,000를 모금했다. 그들은 용자가 어떻게 저녁으로 김치찌개를 만들어 그들과 나누어 먹었는가를 회상했다.

엘린은 "커뮤니티는 우리 편이었으며, 우리를 적대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화합의 이야기가 오늘날과 1992년의 갈등의 이야기보다 훨씬 덜 다뤄진다는 것이다.

1992년 4월 30일 버몬트 애비뉴(Vermont Avenue)와 마틴 루터 킹 대로(Martin Luther King Boulevard)와 근처에 있는 불탄 건물. 사진: Mark Elias / Associated Press

폭동의 여파로 존 H. 리의 가장 기억에 남는 인터뷰는 그의 흑인 고객층과 유대를 맺기 위해 그의 가게에 총을 두지 않고 독주 판매를 중단하기로 결정한 한 한국인 가게 주인과 한 인터뷰였다.

리는 LA 타임스를 떠났고 뉴욕 타임스를 위해 줄을 서고 있었습니다. 그 일화는 이야기의 뒷부분 어딘가에서 끝났다.

UC 리버사이드(UC Riverside) 교수이자 1986년에 시작된 흑인 한인 연합의 회원인 에드워드 태환 장(Edward Taehan Chang)은 언론에 두 번 보도된 것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한 번은 이 단체가 창립되었을 때이며 다른 한 번은 폭동이 일어난 다음 해에 해체되었을 때였다.

"언론은 평화적 해결보다는 인종차별주의자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라고 장이 말했다. "그들은 우리가 해산할 때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노력을 취재하는 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 씨는 LA 타임스를 그만두고 뉴욕타임스에 잠시 기고 활동을 한 후 1993년 코레암 저널(KoreAm Journal)의 편집자와 나중에 라푸 신포(Rafu Shimpo, LA에 소재를 둔 일본어-영어 신문 - 역자 주) 아시아계 미국인 언론으로 복귀하였다. 그는 민족 언론을 위해 일하는 사명감이 더 분명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제 목표는 흑인과 한국인 사이에 본질적인 갈등이 있다는 생각을 어떻게든 불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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