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자 주: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은 아부다비의 지원을 받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카타르 재원에 기반한 파리 생제르맹도,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첼시도 아닌 전통 축구 클럽인 리버풀과 레알 마드리드의 대결로 순수한 축구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물론 레알은 이미 51억 달러의 가치로 세계 최대 축구 클럽이고, 리버풀도 약 44억 달러의 가치를 가진 세계 4위 가치의 클럽이기에 돈의 출처로 클럽의 전통성과 정통성을 가리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리버풀과 레알이 오랜 전통을 가진 축구클럽임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들의 전통 정치색에서 드러난다. 리버풀과 레알의 대결은 그래서 더 흥미로운데 이들은 서로 대립되는 색, 즉 붉은색 리버풀의 더 레즈(The Reds)와 흰색 레알의 로스 블랑코스(Los Blancos)는 정치적으로 그들의 오랜 좌파와 우파적 뿌리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미 세계 최대 부자 클럽들의 대결이라 이미 탈색된 정치색이 이번 결승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세계적인 축구 클럽이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단지 과거에 대한 관음적 흥미를 넘어 축구가 단지 평평한 그라운드 위에서 둥근 공을 차는 평등한 스포츠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다. 특히 세계 최대 축구 클럽 레알 마드리드는 독재자 프랑코와의 결탁과 비호 아래서 스페인 통합이라는 정치적 목적에 봉사함으로써 성장하였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원했던 카탈루냐를 기반으로 한 바르셀로나는 그렇기에 수도 마드리드 팀에 굴복할 수 없는 라이벌 의식 속에서 성장했다. 1980년 대 한국과 필리핀에서는 국민의 탈정치화를 위한 '3S 정책'(sex, sports, screen)이란 말이 공공연히 회자되었다. 하지만 스페인에서 스포츠는 이러한 탈정치화가 아닌 권위주의 통치의 정당화와 스페인 통합이라는 고도의 정치적 목적에 복무하였다. 이 글은 축구 채널 코파90(COPA90)의 전 콘텐츠 에디터인 Charlie Carmichael의 NLPH Magazine 2019년 3호 기고 글 Franco, Fascism & Football: How an oppressive political regime changed the face of modern Spain의 번역으로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가 축구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했는가 그리고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엘 클라시코는 왜 격렬했는가를 분석하고 있다.
프랑코, 파시즘과 축구: 억압적인 정치 체제는 현대 스페인의 모습을 어떻게 바꾸었나
2012년 10월 7일이고 바르셀로나 시는 엘 클라시코(El Clásico)의 최신판을 주최하고 있다. 스페인 매체가 양 팀이 자랑하는 재능, 특히 게임의 주요 주인공인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 찬사를 보냈던 이전 기사들과 달리, 이 경기를 둘러싼 기사의 내러티브는 카탈루냐의 독립을 요구하는 정치적 함의의 외침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킥오프가 다가오자 약 98,000명의 팬들이 경기장을 가득 메우고 레드카드와 옐로카드를 휘날리며 펄쩍펄쩍 뛰었다. 캄프 누(Camp Nou, 바르셀로나 경기장 - 역자 주)의 좌석은 그지역의 국기인 세계 최대의 세녜라(Senyera)로 바뀌었다. 둘러싸인 마드리드 선수들은 부족 정체성의 360도 모자이크로 장식된 소음의 도가니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더 이상 단순한 축구 게임이 아니다.
시계가 17분 14초를 가리키자 귀청이 터질 듯한 "독립, 독립!"(Independencia, Independencia!)의 구호가 카탈루냐 밤하늘에 크고 높게 울리는 캄프 누 주변에 울려 퍼진다. 타이밍은 중요하다. 그것은 카탈루냐 인들이 그들의 관할권으로부터 많은 역사적 권리들을 박탈당한 1714년을 대표한다.
클럽 회장인 산드로 로셀(Sandro Rosell)은 카탈루냐 독립이 18세기 평온한 시대와 유사하다는 확고한 신념 속에서 "카탈루냐 인들이 그들의 미래를 결정할 때, 바르샤(Barça)는 그들의 편에 설 것"이라고 말했다. 로셀은 1936년과 1939년 사이의 스페인 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경쟁의 원인이 되는 불화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공화국은 국민주의자(Nationalist, 공화국에 반대하는 우파 - 역자 주)들에 대항하여 그들의 자치권을 위해 싸웠다. 카탈루냐, 갈리시아, 바스크 지방과 같은 지방들은 파시스트 독재에 대한 전망에 격분했고 곧 다가올 군사 쿠데타에 반대했다. 쿠데타를 주도한 사람은 프랑코 장군(General Franco)이었는데, 그는 스페인에 대한 완전한 통제와 그 나라의 핵심을 국유화(nationalise, '국민화'라는 복합적 의미도 있음 - 역자 주)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지역 관행과 카스티야(Castilla, 중세 카스티야 왕국에서 온 것으로 스페인의 중부지역에 해당하며 비 카스티야 지방 사람들은 카스티야를 마드리드와 동일시하곤 한다 - 역자 주) 정체성 사이의 이분법은 프랑코의 눈에 극명했다. 그는 스페인의 자치 지역을 위협으로 보았고 진정한 스페인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든 문화를 억압하여 전복하려고 했다.
결국 공화국이 무너지고 프랑코 정권이 세워져 1974년까지 독재가 지속되었다. 국민주의자에게 정권은 반란 주들의 젠트리피케이션을, 공화국에게는 전체주의적 미래에 대한 무서운 선견지명이었다.
바스크어, 카탈루냐어와 같은 비 카스티야 언어는 금지되었고 클럽 이름은 국가의 새로운 이미지에 맞게 강제로 변경되었다. 아틀레틱 빌바오(Athletic Bilbao)는 이 지역에 축구를 처음 소개한 영국 이주 노동자의 이름을 따서 아틀레티코 빌바오(Atlético Bilbao)가 되었고 바르셀로나는 바르셀로나 축구 클럽(Club de Fútbol Barcelona)으로 개명되었다. 당시 바르셀로나 회장이었던 조셉 선욜(Josep Sunyol)을 포함하여 수천 명이 그들의 신념 때문에 살해당했다.
스페인 축구 역사가이자 '라 리가의 공포와 혐오'(‘Fear and Loathing in La Liga)의 저자인 시드 로우(Sid Lowe)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카탈란 어는 금지 되었고, 책은 압수되고 불타버렸다. 징후들은 카탈루냐 인들에게 예수가 베들레헴이 아닌 부르고스에서 태어난 것처럼 '기독교'를 말하도록 상기시켰다."
프랑코가 몰락한 국가의 비 스페인 전통을 일소하려 하자, 축구는 시민들이 그의 억압적인 정권에 항의하는 자연스러운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경기장은 정치적 논쟁의 온상이 되었고 카탈루냐어는 다시 한번 바르셀로나의 오래된 경기장인 레스 코츠(Les Courts)의 공용어가 되었다. 그곳은 사람들이 모여서 모국어로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실제로, 클럽의 새로운 모토인 클럽 그 이상(Mes que un Club)을 의미하는 운동이 탄생했다.
많은 사람들이 분쟁을 지지했던 것과 달리 마드리드는 정권에 맞서 단호하게 투쟁했으며 민주주의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공화국과 나란히 싸웠다. 유감스럽게도, 프랑코가 마드리드를 정복하고 통제권을 장악하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총통은 마드리드를 수도의 중심적 근접성과 스페인에서의 입지를 고려할 때 완벽한 기지로 보았다. 카탈로니아에 위치한 공화당의 거점과 함께 이것은 마드리드가 종종 지나치게 단순하게 프랑코의 도시이자 프랑코의 팀인 레알로 간주될 수 있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Real Madrid)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적인 거물이 아니라 이웃 도시인 아틀레티코에 의해 크게 가려진 겸손한 팀이었다. 지도자(El Caudillo)라고 불리는 프랑코는 아름다운 게임에 무관심했지만 곧 분열된 국가에 활력을 불어넣고 지켜보고 있는 세계에 통합되고 강력한 스페인의 이미지를 투사하는 게임의 힘을 깨달았다.
마드리드와의 연합,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마드리드의 승리는 비 카스티야(non-Castilian) 문화에 대한 거부로 여겨졌다. 바르샤와 레알 간의 더비는 로스 블랑코스(Los Blancos, '흰색'이라는 의미로 레알 마드리드의 별칭)가 장군과 제휴하기 전에 치열하게 싸웠지만, 프랑코가 마드리드에 합류하면서, 그는 사회적 계급, 지역적 정체성, 반대되는 정치적 의제들에 뿌리를 둔 격렬한 반목인 오늘날의 클라시코(Clásico, '전통'을 의미하지만 바르샤와 레알의 더비를 지칭하는 것으로 쓰임 - 역자 주)를 탄생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마드리드의 성공에 대한 프랑코의 영향력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출처불명이지만, 그 이야기는 1950년대에 걸쳐 레알 마드리드가 유러피언컵의 첫 5번을 연달아 우승했던 전례 없는 유럽의 성취를 훼손하려는 시도로 꿀레(Culés, 바르셀로나 애칭 - 역자 주)에 의해 풍부하게 퍼뜨려진다. 각 트로피는 레알의 스타플레이어인 스트라이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Alfredo Di Stéfano)의 큰 역할 덕분에 차지하게 되었으며, 바르셀로나는 그가 마드리드의 모험 이전에 직접 계약을 한 공격수였다는 것에 단호했다.
디 스테파노의 이적은 역사상 가장 문서화되고 논쟁의 여지가 많은 것 중 하나이다. 이 아르헨티나인은 고향 팀 리버 플레이트(River Plate)에서 뛰쳐나와 콜롬비아 팀 미요나리오스(Millonarios)와 트레이드를 시작했다. 문제는 공식적인 이전이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르셀로나는 선수 서명을 위해 리버와 계약을 맺었다. 미요나리오스와 함께 레알도 마찬가지였다.
스페인 풋볼 연맹(Spanish Fútbol Federation)이 개입하면서 대치 상황이 이어졌고, 디 스테파노(Di Stefano)가 공동 소유가 될 것이며 그 선수는 시즌에 따라 마드리드와 바르샤를 번갈아 오를 것이라고 발표했다. "누가 그것에 대해 결정했 건 축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자"라고 디 스테파노 자신이 나중에 언급했다. 그 이후에 일어난 사건은 수수께끼에 싸여 누구에게 묻는가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러나, 계속되는 큰 낭패는 스페인 축구의 평판을 떨어뜨렸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프랑코와 잘 맞지 않았다.
이에 따라 프랑코가 스페인 올림픽 위원회와 국가 스포츠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한 호세 모스카르도 이투아르테(José Moscardó Ituarte)가 바르셀로나 이사회에 압력을 가하여 디 스테파노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고 선수의 권리를 레알에 매각하게 되었다. 이후 5번의 유러피언 컵 우승과 디 스테파노가 모든 결승전에서 득점하면서 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가 마드리드에 대한 정권 편향성을 비난한 것은 디 스테파노의 이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반으로 했다. 클럽의 유럽 지배력을 감독한 레알의 회장은 다름 아닌 전쟁의 국민파의 자원 군인이자 프랑코스의 절친한 친구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Santiago Bernabéu)였다. 바르셀로나가 정권의 수중에 떨어진 날, 베르나베우는 그의 동료 군대와 함께 아빈구다 디아고날(Avinguda Diagonal,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넓고 중요한 도로 중 하나 - 역자 주)을 지나 행진하며 프랑코의 영광스러운 정권을 칭송했다.
레알이 부인하는 또 다른 것은, 1943년 6월 19일 엘 클라시코에서 독재자가 개입했다는 것이다. 프랑코의 수행원 중 한 명이 하프타임에 바르셀로나 탈의실에 들어가 은근한 협박을 하기 전에 선수들에게 그들이 정권의 '관대함'을 통해 경기할 기회를 제공받았을 뿐이라는 점을 상기시켰다는 주장이 있다. 레알 마드리드는 이날 11-1로 승리하였는데 이는 구단 역사상 가장 일방적인 경기였다.
그러나 카탈루냐 사람들을 반증하는 한 가지는 프랑코가 국가 대표팀을 대하는 태도이다. 지도자(El Caudillo, 프랑코 - 역자 주)에게 국제 축구는 스페인 통합을 보여줄 완벽한 플랫폼을 제공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무너지고 스페인에 동맹이 거의 남지 않은 이후에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당신이 정권에 복종하는 한, 당신이 어느 지역 출신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스페인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라면, 당신은 경기를 한다. 월드컵과 유럽 선수권 대회는 프랑코의 자랑스럽고 '깨끗한' 국가가 얼마나 위대한지 세계에 보여주는 무대였지만, 그가 승리를 실현 가능한 결과로 보았을 때에만 가능했다.
프랑코는 스페인이 1962년 월드컵에 참가하는 것을 꺼려했는데, 강력한 소비에트 연방이 스페인을 당황하게 할까 봐 두려워했다. 공산주의 국가는 스페인 내전 동안 공화국과 동맹을 맺어 군수품을 제공했으며, 프랑코는 패배가 지켜보는 세계에 보낼 불가피한 메시지를 감안할 때 패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2년이 지났지만 탈출구는 없었다. 스페인은 1964년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를 개최하였고, 결승전에 진출하였다. 그들의 상대는? 소련. 다행히 프랑코에게는 라 로하(La Roja, 붉은색이라는 의미로 스페인 국가대표팀을 지칭한다 - 역자 주)가 승리하여 소련을 2-1로 물리쳤다. 프랑코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방송하기 위해 스포츠 성취의 정점을 활용했다. 이것은 강력하고 독립적이며 통합된 스페인이었습니다. 이것은 프랑코의 비전이었고 전 세계 청중 앞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정치와 축구는 항상 얽혀 있었고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 간략한 조사는 끔찍한 인권 기록을 뒤로한 외관으로서 맨체스터 시티를 공공연하게 행진하는 아부다비 국가, 경찰의 만행과 긴축에 항의하기 위해 모인 그리스의 국내 팬들; 그리고 2018년 월드컵을 둘러싼 긍정적인 태도를 조작하여 러시아의 차별 문제와 국가 차원의 도핑 스캔들 의혹에 대한 비판을 빗나가게 하려는 블라디미르 푸틴을 보여준다.
스페인에서는 엘 클라시코에 대한 언급만으로도 여전히 가장 격정적인 꿀레의 파블로프 반응(Pavlovian reaction)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프랭코의 소란스러운 유령은 분명히 양 팀의 복잡한 관계를 괴롭히고 있다. 바르샤는 과거가 여전히 수도에 대한 현재의 적대감을 부채질하고 있는 상황에서 독립을 계속 갈망하고 있다. 레알의 경우, 그들은 프랑코와의 관계에 대한 어떠한 주장도 거부하고 바르셀로나를 희생자 콤플렉스가 있는 선전에 기반을 둔 클럽으로 분류한다.
이것은 이중적 관점의 분열적 경쟁이다. 그러나 한 가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결과가 단 3점(승리 시 얻는 승점 - 역자 주) 보다 훨씬 더 깊다는 것이다. 결국, 바르셀로나는 단순한 클럽이 아니며 정권은 단순한 정치 그 이상이며 축구는 단순한 게임 그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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