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시사

서구인은 언제부터 '백인'으로 발명되었나?: 권력과 폭력의 도구로 발명된 Whiteness

Zigzag 2022. 7. 19.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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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 주: 2019년 뉴질랜드 크라이스 처지와 최근 뉴욕주 버펄로의 총기 난사 사건은 서구에서 비백인과 이민자들이 백인을 대체하고 있다면서 백인들의 비백인에 대한 테러를 조장하는 거대 대체 이론(great replacement theory)의 신봉자들에 의해 야기됐다. 굳이 이 이론이 아니라도 트럼프 대통령 당선 전후 미국의 상당수의 음모론들은 백인이 우월하고, 백색 혹은 흰색 자체에 진리와 권력, 뛰어남이 내재되어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백인, 백색, 하얀색이 보편적 기준, 권력, 우월성과 연결된 것은 순전히 소위 '지리상의 발견' 혹은 '대항해 시대'로 미화된 제국과 노예제 시대의 창조물이었다. 백인(white people)이 유럽인으로 등치 되기 전인 17세기 이전에 유럽인들은 자신을 "백인"으로 일컫지 않았다. 자신의 작품에 흑인들을 종종 등장시켰던 셰익스피어 도 백인 v 흑인이라는 구도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스트랫포드 어폰 에이번 성 트리니티 교회의 무덤의 그의 조각상은 그의 피부를 백인보다는 보다 어두운 갈색으로 그렸다. 유럽인을 "백인" 그들의 분홍색 피부색을 "백색"으로 분식하고 거기에 보편과 권력, 우월성을 심은 것은 근대 식민통치의 산물이다. 식민지 통치를 위해 유럽의 제국들은 식민지에서 같은 하인이라도 계약된 유럽의 백인 하인들은 자유인으로 흑인 하인들은 노예로 취급하여 차별했으며, 인종적 구별에 따라 권력, 신분, 권리의 차별을 제도화했다. 그렇기에 유럽에서 최하층 그룹으로 취급받던 아일랜드인들은 미국 이민과 동시에 자신들의 비참한 처치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흑인과 비유럽계 이민자들과 분리하려 애썼으며, '백인'의 지위를 갖기 위해 애썼다. 이 글은 맨체스터 대학교 인종 및 불평등 총장 펠로우 Meghan Tinsley의 Conversation 7월 14일 자 기고 Whiteness is an invented concept that has been used as a tool of oppression의 번역으로 흼(Whiteness)이 어떻게 서구 식민시대에서 권력과 지배, 폭력의 도구로 창조되었는지 세계사를 살펴보고 있다.

흼(Whiteness)은 억압의 도구로 사용되어 온 발명된 개념이다

Meghan Tinsley

흼(Whiteness)*은 현대 식민지 시대의 발명품이다. 그것은 17세기에 고안되었으며 대량 학살과 노예 제도에 대한 논리를 제공하는 데 사용되었다. 역사가들은 "백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영국 극작가 토머스 미들턴의 1613년 희곡 '진실의 승리'(The Triumphs of Truth)에 있다고 동의한다.

* 역자 주: Whiteness를 백색 혹은 백인으로 번역하는 대신 여기서는 "흼"으로 번역했다. 역사적으로 Whiteness는 색 그리고 피부색을 넘어서는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Whiteness는 코카시안처럼 특정 인종-민족 그룹에 대한 소속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적으로 Whiteness는 다른 그룹에 의해 자신을 정의할 필요 없는 그 자체로서 정상이고 표준을 의미해왔다. 따라서 non-whiteness는 자연스럽게 비정상, 비표준을 의미하게 된다. 뉴욕타임스의 한 중문판 기사는 이러한 역사를 반영해 Whiteness를 '白' 즉, 백 혹은 하얌으로 번역했다.

17세기 이래로 도미니카 공화국과 모로코에서 인도와 뉴질랜드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사람들은 백인으로 간주되느냐 아니면 비백인으로 간주되느냐에 따라 다양한 권리를 부여받거나 거부받아 왔다. 따라서 흼은 일관되게 반대, 권력 및 예속을 수반했다.

연구에 따르면 권력과 통일로서의 흼이라는 주제는 백의 경계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어 왔다.

유럽 ​​열강이 세계의 여러 지역을 식민지화하면서 그들은 인종 범주를 구현하고 다듬었다. 식민지 바베이도스에서는 17세기 노동 법규에 따르면 고용 계약된 유럽인을 "백인"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를 근거로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보다 더 많은 권리를 부여하고 있다. 이것은 두 그룹이 부유한 농장주에 반대하는 반란에서 단결할 수없도록 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연구 전문가인 에드워드 B 루게머(Edward B Rugemer)가 주장했듯이, 이것은 또한 "지배의 도구로 성문화 된 인종적 구별"이며 자메이카와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복제되었다. 결정적으로, 이것은 노예가 된 흑인들은 법적으로 인정된 권리가 없는 반면 유럽 태생의 백인 하인들은 권리가 있다는 사실에 의존했다. 노예의 신분은 종신으로 상환되지 않으며 상속 가능하다.

다른 카리브해와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하얀"(white)이라는 용어는 점차 유럽 정착민을 가리키는 "기독교인"이라는 용어를 대체했다. 아이티에서는 프랑스 식민지 관리들이 "그랑스 블랑크"(grands blanc, 큰 백인), "쁘띠 블랑크"(petits blancs, 작은 백인), "자유 유색인"(free coloureds), "노예"처럼  인종과 계층을 융합한 분류로 사람들을 분류했다.

한편 라틴 아메리카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식민지 개척자들은 복잡하고 엄격한 계급제(casta system)를 발전시켰다. 이 카스트 기반 계층의 맨 위에는 반도의 스페인인(이베리아 반도의 사람들)이 있었고 맨 아래에는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이 있었다.

정치적 도구로서의 흼

흼을 지속적으로 강력한 도구로 만든 것은 작가 로버트 P 베어드(Robert P Baird)가 최근에 말했듯이 "난센스 논리"(nonsense logic)이다(레이블로서 그것은 얼마나 모호하게 정의되었는가).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지배 집단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정의될 수 있고 정의되어 왔다.

수세기 전 노예와 계약직 하인들 사이의 분열을 반영하듯, 20세기 노동계급 사람들은 앞다투어 서로 흼에 호소하면서 첨예하게 대립했다.

미국 역사가 노엘 이그나티예프(Noel Ignatiev)는 1995년 자신의 저서, '아일랜드인이 백인이 된 방법'(How the Irish Became White)에서 19세기 아일랜드인의 미국 이민을 살펴본다. 그는 이 노동계급 새 이민자들이 어떻게 흑인 노동자들과의 거리를 강조하여 백인임을 주장하는지 자세히 설명한다.

급진적 사회주의자인 그는 왜 그들이 피억압자(흑인 노예)보다는 억압자(백인 미국인)의 편을 들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북부의 비숙련 노동력인 아일랜드인과 남부의 비숙련 노동력인 노예가 단결했다면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해 보라. 나는 과거에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지 이해하는 것이 다음에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기를 바랐다"라고 나중에 설명했다.

흼이 폭력 행사에 사용될 때

그러나 흼은 권력을 가능하게 하는 만큼 불안을 부추긴다. 이 범주는 모호하지만 동시에 큰 힘을 부여하기 때문에 그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것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흼은 "순수"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따라서 대영제국의 식민 관리들은 백인 정착민을 권리가 있는 시민으로 취급했지만 원주민과 노예를 억압하고 통제해야 할 위협으로 취급했다.

수세기 동안 유럽 전역의 대학과 학교는 지식 생산과 보급을 통해 백인 우월주의(white supremacy) 개념을 공식화했다. 스웨덴의 식물학자 칼 린네(Carl Linnaeus)는 모든 생명체가 유형으로 범주화되고 분류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독일의 박물학자 요한 프리드리히 블루멘바흐(Johann Friedrich Blumenbach)는 인간이 두개골 모양에 따라 5개의 “과학적” 인종으로 나뉘며 “백인”(Caucasian) 두개골이 “가장 잘생기고 적절한” 것으로 묘사된다고 주장했다.

인도에서 과학적 인종주의(scientific racism)가 한창일 때 식민지 과학자들은 인종과 카스트가 물리적 속성이라고 주장하여 계층적 지위와 특권적 근접성을 흼에 부여했다. 그리고 과학적 인종주의가 주류가 되면서 백인은 자연화되어 여러 세대의 학생들에게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훨씬 더 사악한 것은 우생학, 강제 불임, 대량 학살과 같은 흼이 정당화하는 정치적, 사회적 프로그램이었다. 20세기에는 인문학과 사회과학도 백인 우월주의의 주체였다. 사회학은 근대성을 유럽과 북미 사회의 경험을 보편화함으로써 설명하면서 반대로 아프리카와 아시아 사회를 '원시적'으로 묘사하거나 역사에서 배제했다.

이 후자의 요점은 중요하다. 백인들과 백인 제도들은 오랫동안 그들의 경험을 보편적인 것으로 상상하면서 그들의 경험을 중심에 두어 왔다. 결국, 그들의 경험을 보편화함으로써 백인들이 인종과 인종차별의 표식 없이 개인으로 그들 자신을 말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것은 비백인과 흑인이 집단적으로 타자화되고 인종화되는 방식과 대조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계속해서 가시적이며 종종 끔찍한 일상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대학과 학교는 흑인 학생을 차별하는 백인 중심의 커리큘럼과 교복 정책을 강요한다. 경찰관들은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흑인 커뮤니티를 과잉 감시한. 당국은 흑인 어린이를 성인화 하는데 이는 그들이 범죄자로서 취급되는 결과를 빚어낸다.

각각의 경우에 흼은 말을 하지 않고 폭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흼의 역사를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제국과 노예제의 유산을 다루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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