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시사

LGBTQ+ 타임라인 1: 기원전 100세기부터 첫 번째 밀레니엄까지

Zigzag 2022. 8. 29.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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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BTQ+ 혹은 LGBTQIA+에서 L은 여성 동성애자인 레즈비언(lesbian), G는 남성 동성애자인 게이(gay), B는 양성애자인 바이섹슈얼(bisexual), T는 젠더전환자인 트랜스젠더(transgender), Q는 성소수자 혹은 성 정체성을 명확히 할 수 없는(혹은 하지 않는) 퀴어(queer) 혹은 퀘스처닝(questioning), I는 남성과 여성의 생식기를 다 가진 간성(애자)의 인터섹스(intersex, I), A는 성에 무심한 무성(애자)의 에이섹슈얼(asexual), 에이젠더(agender), 에이로맨틱(aromantic)을 의미한다. 그리고 +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혹은 포함을 거부하는) 플러스(Plus)의 머리글자 혹은 약자로 간성과 무성 외에서 남녀의 젠더 모두의 정체성을 갖고 두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쌍령(雙靈, two-spirit 혹은 2S), 선천적 성과 후천적 젠더 구분 없이 매력을 느끼는 범성(pansexual), 그리고 LGBTQIA 커뮤니티와 연대하는 동맹(ally)까지 포함하기도 한다. 이 글은 역사에 기록된 LGBTQ+와 관련된 타임라인을 정리한 것으로 LGBTQ+가 오랫동안 인류 역사의 일부임을 드러낼 것이다.

기원전

기원전 9,600년 – 기원전 5,000년: 동성애의 시작

시칠리아의 그로타델아다우라(Grotta dell’Addaura) 동굴의 암석 예술은 1943년 연합군이 이 동굴에 보관하던 탄약 중 일부가 폭발하면서 드러났다. 이 시칠리아의 중석기 시대 암각화는 사냥꾼, 곡예사, 종교 활동가, 남성 동성애 묘사를 포함하여 다양하게 해석되는 쌍으로 된 남근 남성 형상을 묘사한다.

시칠리아의 그로타델아다우라(Grotta dell’Addaura) 동굴의 암각화

기원전 9천 년: 사크리 연인상의 동성애?

이스라엘 베들레헴 인근의 아인 사크리 동굴에서 발견된 조각상 아인 사크리(Ain Sakhri) 연인상은 성교에 참여하는 두 사람을 표현한 것들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조각품에 있는 두 사람의 성별은 알 수 없다.

기원전 70세기 – 기원전 17세기: 분리되지 않은 성

지중해 지역의 신석기 및 청동기 시대 그림과 인형에 있는 성적인 묘사 중 "제3의 성"을 가진 인간 형상은 여성의 가슴과 남성의 생식기가 있거나 구별되는 성별 특징이 없다. 신석기시대 이탈리아에서는 여성 이미지가 가정환경에서 발견되는 반면 성적인 특성들이 결합된 이미지는 매장이나 종교 환경에서 나타난다. 신석기시대 그리스와 키프로스에서 인물은 종종 이성 또는 성적인 특징이 없는 경우가 많다.

기원전 29세기 – 기원전 25세기: 제3의 성

체코 프라하 교외의 한 매장에서 남성은 일반적으로 여성 전용 의상으로 매장되었다. 고고학자들은 매장이 트랜스젠더나 제3의 성에 해당한다고 추측한다.

기원전 24세기: 역사상 최초의 동성 커플

크눔호테프와 니안크흐눔은 고대 이집트의 왕족이었다. 그들은 기원전 25세기 후반에 통치한 제5왕조의 여섯 번째 파라오인 니우제르 이니(Nyuserre Ini)의 궁전에서 매니큐어 감독관(Overseer of the Manicurists)이라는 칭호를 공유했다. 그들은 사카라에 함께 묻혔고 그들의 공동 무덤에 "왕실의 측근"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동성 커플로 여겨진다.

기원전 1500년 – 기원전 1101년: 남성 간 성관계 처벌

구 아시리아 제국 또는 중기 아시리아 제국의 앗수라 법전(Code of Assura)은 남성과 성관계에 대한 규정을 포함했다. 
"만일 어떤 남자가 그의 이웃에 대하여 `남자와 성관계를 맺도록 허락하였다'라고 은밀히 소문을 내거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남자가 너와 성관계를 맺는다'라고 말하거나, 그다음에 `내가 직접 너를 고발하겠다'라고 말하였으나, 그 죄를 입증하고, 증명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태형에 처해지고, 왕을 위해 한 달 동안 고된 노동형에 판결을 받고, 거세되어 1 달란트의 납을 지불해야 한다. "    — 앗수르 법전, §19

기원전 7세기

한나라 이전의 정치적 조언과 이야기들을 모은 《전국책》은 진 헌공(晉獻公)이 상대 왕에게 영향을 주고 나쁜 조언을 주기 위해 잘생긴 청년을 상대 왕궁에 심었다고 기술한다. 

기원전 630년: 그리스 문명을 꽃피운 남성 간 사랑

크레타 섬의 도리아 귀족들이 성인 귀족과 청소년 소년 사이에 공식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리스에서 남성 간의 결혼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았지만 남성은 '남색'을 의미하는 영어의 pederasty처럼 경멸적인 의미가 없는 남성과 남성의 육체적 결합을 의미하는 payerastia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 관계는 평생 유지될 수 있다. 이러한 파트너십은 나이 든 사람이 교육자나 멘토 역할을 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이성애 결혼과 다르지 않았다. 이 관계는 보통 청년 교육과 인구 증가 억제라는 두 가지 목적을 포함하고 있다. Payerastias는 고대 그리스 전체에 널리 보여진 것으로 스포츠 문학 정치 철학 예술 전쟁에 영향을 미쳤고 또 그 원인이 되어 문화를 꽃피우기도 했다.

기원전 600년: 레즈비언의 탄생

고대 그리스 서정시인 사포(Sappho)는 기원전 630년에서 612년 사이에 레스보스 섬에서 태어나 기원전 570년경에 사망한다. 알렉산드리아 인들은 그녀를 9명의 서정시인 목록에 포함시킨다. 그녀는 그녀의 레즈비언 테마로 유명했으며, 그녀의 이름과 그녀의 고향 이름을 레즈비언주의의 정의에 붙인다. 

기원전 5세기 - 3세기

한비자 12장 '세난(說難)'에는 위공(衛公)이 그의 남성 연인인 미자하(彌子瑕)가 준 남은 복숭아를 받고 그의 지극한 사랑을 이해했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러나 후에 위공과 미자하의 사랑이 식자 위공은 미자하가 자신에게 먹다 남은 복숭아를 주었다며 그를 처벌한다. 여도지죄(餘桃之罪), 복숭아를 남긴 죄라는 사자성어는 이러한 동성 간 변심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등장한다.

기원전 4세기: 플라토닉 러브는 남성 간 사랑

기원전 385년: 플라톤은 파이드루스, 에릭시마코스, 아리스토파네스, 그리고 다른 그리스 지식인들이 남성들 사이의 사랑이 가장 높은 형태이고 여자들과의 성관계는 호색적이고 실용적이라고 주장하는 '향연'(Symposium) 쓴다.
기원전 338년: 150쌍의 동성 커플로 구성된 무패의 정예 대대였던 테베의 신성대(Sacred Band of Thebes)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의 군대에 의해 파괴된다. 피리포스 2세는 그들의 상실을 슬퍼하며 그 영예를 기린다.

기원전 400년 - 기원전 200년: 동성애 비법

바츠야나(Vatsyayana)의 《카마 수트라》(Kama Sutra)은 한 장을 동성애 행위를 하는 방법에 대한 명시적인 세부 지침에 할애한다.

기원전 3세기 또는 2세기: 청소년 성범죄 처벌

기원전 227년, 기원전 226년, 기원전 216년, 또는 기원전 149년: 로마 공화국 기간 동안 렉스 스칸티니아(Lex Scantinia)는 자유 태생 청소년을 대상으로 성범죄(stuprum)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형벌을 부과한다. 이것은 드물게 언급되거나 시행되었지만 동성애 관계에서 자발적으로 수동적인 역할을 한 남성 시민을 기소하는 데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성인 남성 시민이 동성 관계를 원하고 참여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그의 파트너가 남성 매춘부, 노예 또는 악명 높은 사람이라면 시민에게 부여된 법적 보호에서 배제된다. 제국 시대에 렉스 스칸티니아는 도미티아누스(Domitian)에 의해 사법 및 도덕 개혁 프로그램의 일부로 부활된다.

기원전 3세기 - 기원후 4세기: 트랜스 여성

타밀 학자와 시인의 모임인 타밀 상암(Tamil Sangam) 문헌은 타밀 나두의 쿠바감(Koovagam) 마을의 아라반 숭배(Aravan cult)에서 트랜스 여성의 삶을 탐구한다.

기원전 1세기: "비티니아의 왕비"가 된 동성애자 카이사르, 동서양 황제들의 동성애

기원전 90년대-80년대: 로마 공화정의 군인이자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함께 기원전 102년의 집정관을 지낸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Quintus Lutatius Catulus)는 공화정 말기에 유행한 짧고 가벼운 헬레니즘 시들을 쓴 시인들 중 하나였다. 그의 현존하는 경구들은 모두 남성을 욕망의 대상으로 묘사하며, 로마 문화에서 새로운 동성애적 미학을 암시한다.
기원전 80년: 젊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가 군선을 모집하러 비티니아(Bithynia)에 왔을 때 꽤 오랜 기간을 머물러 니코메데스 4세(Nicomedes IV)와 정을 나누었다는 소문이 돈다. 카이사르의 정적들은 이 소문을 근거로 카이사르를 "비티니아의 왕비"(Queen of Bithynia)라고 비난했다. 후에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 승리 후에 시중에는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눕히고, 니코메데스는 카이사르를 눕혔다"는 구절이 떠돈다. 이는 카이사르가 동성관계에서 수동적 파트너임을 의미한다.
기원전 51년 - 기원전 1년: 전한(前漢)의 성제(成帝)는 양성애자로 한서에 따르면 그에게는 장방(張放)이라는 남자 연인이 있었다. 장방은 성제와 잠자리를 같이 했으며 그의 사랑 덕에 높은 권세를 누린다. 전한의 애제(哀帝)는 여성에게 관심이 없었으며, 수려한 용모를 가진 그의 애인 동현(董賢)에게 왕위를 넘기려 했으나 그의 사후 동현은 권력을 상실한다.
기원전 44년: 독재자이자 집정관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카이사르의 유언에 따라 가이우스 옥타비우스가 그의 양자이자 후계자로 공개적으로 지명된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k Antony)에 따르면, 그는 옥타비우스가 성적인 호의를 통해 카이사르에게 입양되었다고 주장한다.
기원전 42년 – 39년: 베르길리우스(Vergilius)는 '전원시'(Eclogues)를 쓴다. Eclogue 2는 동성애 라틴문학의 주목할만한 예이다.
기원전 27년: 로마 제국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치세가 시작된다. 기록된 최초의 동성 결혼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발생한다. 동성애 매춘에 세금이 부과되며 누군가 다른 남성과 성적 관계에서 수동적이라는 사실이 적발되면 로마 시민은 시민권을 잃을 수 있다.
기원전 26년, 25년, 18년: 티불루스(Tibullus)는 동성애에 대한 그의 애가들을 쓴다.

첫 번째 밀레니엄

1세기: 널리 퍼진 동성 결혼과 동성애

5-15년: 워렌 컵(Warren Cup)은 로마의 은색 술잔으로, 남성 동성 커플의 두 개의 그림이 장식되어 있다.

워렌 컵에 장식된 두 남성의 애정 표현. 사진: Wikipedia

54년: 네로가 로마의 황제가 즉위한다. 네로는 두 남자 피타고라스(Pythagoras)와 스포루스(Sporus)와 결혼한다. 고대 로마의 시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유베날리스(Juvenal)와 마르티알리스(Marcus Valerius Martialis)는 남성 커플들이 전통적인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79년: 베수비오 산의 폭발로 인해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해안 휴양지가 묻혔고, 남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의 에로틱한 관계를 표현하는 풍부한 로마 예술품들이 발굴된다. 
98년: 로마 황제들 중 가장 사랑받는 사람 중 한 명인 트라야누스(Trajan)의 통치가 시작된다. 트라야누스는 동성애와 젊은 남성을 좋아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오스로에네의 왕 아브가르 7세(Abgar VII)에 의해 유리하게 이용되었다. 그는 116년 트라야누스에 대한 파르티아의 봉기를 지원하여 그의 분노를 샀지만, 자신의 잘생긴 어린 아들을 트라야누스에게 보내 사죄함으로써 용서를 받았다.

2세기: 청년 애인을 신으로 만든 로마 황제

130년: 로마 제국의 제14대 황제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Trajanus Hadrianus)는 그의 미청년 애인 안티누스(Antinous)가 이집트 시찰 중에 나일강에서 익사하자 그를 신격화하여 신전을 세우고, 안티누스 상을 세우고 도시 안티누폴리스 건설했다. 안티누스는 실제 황족 이외에 신격화된 마지막 인물이다.
200년: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피론주의(Pyrrhonism Outlines of Pyrrhonism)가 출판된다. 이 책에서 섹스투스 엠페리코스는 다음과 같이 쓴다. "페르시아인들 사이에서는 남성들과 교제하는 것이 습관이지만,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이 책에서 "우리들 사이에서 소도미는 수치스럽거나 오히려 불법이라고 여겨지지만, 게르만인들은 소도미를 수치스러운 것으로 보지 않고 관습적인 것으로 본다. 또한 오래전에 테베에서는 이 관습이 부끄럽지 않다고 여겨졌으며, 크레타인의 메리오네스(Meríones)가 크레타인의 관습에 따라 그렇게 불렸다고 하며, 어떤 이들은 파트로클로스에 대한 아킬레우스의 불타는 사랑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리고 견유주의 철학의 신봉자들과 키티온의 제논(Zeno of Citium), 클레안테스(Cleanthes)와 크리시포스(Chrysippus)의 추종자들 모두가 이 관행이 아무렇지 않다고 선언할 때 무엇이 이상하겠는가?"

2세기 – 3세기: 동성애 강간 처벌

193년 – 211년: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Septimijus Severas)는 로마 제국 전역에서 동성애 강간에 대해 사형 규정을 마련한다.

3세기: 트랜스 젠더 황제의 탄생

218년 – 222년: 로마 황제 엘라가발루스(Elagabalus)의 통치가 시작된다. 서로 다른 시기에, 엘라가발루스는 로마에서 열린 호화로운 공개 행사에서 다섯 명의 여성과 스미르나 출신의 운동선수인 조티쿠스(Zoticus)라는 남성과 결혼하지만, 그의 가장 안정된 관계는 전차 기사 히에로클레스(Hierocles)와의 관계이며, 로마 제국 시기의 역사가이자 정치가로《로마사》를 펴낸 디오 카시우스 (Cassius Dio)는 엘라가발루스가 히에로클레스의 정부, 아내, 왕비라고 불리는 것을 기뻐한다고 말한다. 황제는 화장을 하고 가발을 쓰고 군주가 아닌 부인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며 질을 제공할 수 있는 의사에게 거액의 금액을 제공한다. 초기 트랜스젠더 인물이자 성전환 수술을 받은 최초의 기록자 중 한 명이다.
222년 – 235년: 로마 황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Severus Alexander)는 공공 생활에서 활동하던 동성애자들을 추방한다. 그는 로마 제국 전역에서 동성애에 대한 처벌을 늘렸다고 한다. 

4세기: 기독교의 확산과 호모포비아의 제도화

305년 - 306년: 엘비라 공의회(Council of Elvira)는 서유럽 교회를 대표했으며, 무엇보다도 남성 간 성적 교류를 하는 pederast에게 성찬의 권리를 금지한다.
314년: 앙카라 공의회(Council of Ancyra)는 동유럽교회를 대표해 동성애 행위로 적발된 20세 이하 미혼남성에 대해서는 15년간 성찬식을 금지하고, 그러한 행위자가 기혼자, 50세 이상이면 평생 금지한다.
306년 – 337년: 로마 제국의 신학자이자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가 쓴 '콘스탄티누스의 생애'(Life of Constantine)는 페니키아의 아파카(Aphaca)에 있는 한 신전을 언급하며, 이 신전이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명령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콘스탄티누스가 이집트에서 여성 동성애 이교도 사제들을 박멸하는 법을 통과시켰다고 기술하고 있다.
337년: 콘스탄티우스 2세와 콘스탄스 1세가 로마 제국의 62대 황제가 되었다. 그들의 통치 기간 동안, 그들은 둘 다 동성연애를 한다.
342년: 모든 고대 문화에서 인간 성의 보통 부분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기독교가 확산되면서 호모포비아가 제도화된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와 콘스탄스 1세는 동성 결혼을 금지하는 최초의 법령을 발표한다. 그들은 테오도시우스 법전 제9.7.3절로 동성결혼을 금지하고 결혼한 사람들은 처형하도록 규정한다.
390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 (Valentinian II),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아르카디우스 (Arcadius) 황제는 로마 제국에 동성 간의 성교는 위법하며 유죄를 지은 자는 공중의 면전에서 산 채로 화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선언하는 황실 칙령을 공포한다.
390년 – 405년: 논노스(Nonnus)의 '디오니시아카'(Dionysiaca) 혹은 '디오니소스 이야기'는 동성애적 열정을 기념하는 것으로 거의 1,000년 동안 서양 문학에서 마지막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5세기

498년: 남성의 동성 간 성교를 금지하는 법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 황제들은 남창으로부터 세금을 계속 징수했다. 이 해에 아나스타시우스 1세(Anastasius)는 이 세금을 폐지한다.

6세기

506년: 알라리쿠스 2세(Alaric II)의 서고트 법전(Visigothic Code)은 서고트 왕국의 동성 커플에 대해 해 화형을 명한다. 다른 처벌로는 공개 추방, 삭발, 채찍, 거세 등이 있다.
529년: 기독교인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동성애자를 '기근, 지진, 역병'과 같은 여러 문제의 희생양으로 삼는다.
533년: 비잔티움 제국에 발효된 민법 대전(Corpus Iuris Civilis)은 남성 동성 간 성행위에 대한 처벌을 포함한다. 

    '형사 사건에서 공공 기소는 율리우스 법(Lex Julia)의 혼인 위반(adulteris, 보통은 '간통'으로 번역된다 - 역자 주)을 포함한 다양한 법령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는 다른 사람의 혼인을 어기는 자뿐만 아니라, 감히 남성과 악한 정욕을 저지르는 자도 죽음으로 처벌한다.' — 법학 제요 IV. 민법 대전 제18조 4항

576년: 아나스타시아 파트리시아(Anastasia Patricia)가 사망한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궁정에서 시녀로서의 삶을 떠나 28년 동안 이집트에서 남성 수도자 복장으로 은둔 생활을 한다. 그는 오늘날의 LGBT+ 커뮤니티에서 최초의 "트랜스젠더" 성인의 예로 제시된다.
589년: 스페인의 서고트 왕국은 아리우스 파(Arianism)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이 개종으로 이 왕국의 법이 가톨릭 제국의 법에 맞게 개정된다. 이 개정에는 남성 동성애자와 유대인을 박해하는 규정이 포함된다.
800년-900년: 카롤링거 르네상스기 잉글랜드의 스콜라 철학자이자 시인 알퀸(Alcuin) 수도사는 동성애를 단죄하는 수많은 교회법이 있었음에도 다른 수도사들에게 사랑의 시를 썼다.

가운데 인물이 수도사 알퀸. 이미지: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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