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시사

왜 노벨상 수상자는 승자가 아니라 계관자(桂冠, laureate) 라 불리나?

Zigzag 2022. 10. 11.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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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이 매년 수여될 때, 수상자들은 막대한 상금과 메달이라는 물질적인 것을 거머쥐지만 노벨상 수상자, 정확하게는 노벨상 계관자(laureate, 桂冠者)라는 상징적 영예를 함께 부여받는다. 노벨 위원회는 노벨상 수상자를 일반 상 수상자와 달리 "계관자"(laureate)로 부른다. 노벨 위원회는 노벨상 수상자에 대한 이러한 명칭이 고대 그리스에서 월계관이 영예의 표시로 승자에게 수여되는 것에서 유래한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이 단어는 월계수 잎 화환을 왕관으로 쓰고 특별한 업적을 기리는 고대 전통에서 출발했는데, 그 기원은 고대 도시 델포이에서 기원전 582년부터 서기 394년까지 열렸던 피티아 제전(Pythian Games)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노벨상 메달에는 월계관이 없지만 노벨상 수상자는 월계관을 받은 계관자(laureate, 桂冠者)로 불린다. 사진: nobelprize.org

피티아 제전과 월계관: 영예의 상징

피티아 제전은 고대 그리스의 제전으로 델포이의 성지에 전 그리스 시민이 참여하여 개최된 아폴론 신의 제례 의식이다. 제전은 원래 8년에 한 번 개최되는 음악 경기를 위주로 했으나 기원전 582년부터는 체육 경기도 함께 개최했다.

피티아 제전이 개최된 델포이의 땅은 옛날에는 피토(Pytho)라고 불렸으며, 그곳에는 대지 여신 가이아가 낳은 거대한 뱀 피톤(Python)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한다. 가이아로부터 인간에게 예언을 내리는 것을 허락받은 피톤은 후에 예언의 주관자인 아폴론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아폴론은 이 일로 가이아의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피톤을 위로하는 제물과 경기를 바쳤는데 이것이 피티아 제전의 기원이다.

8년마다 한 번씩 개최되는 피티아 제전은 기원전 582년 이후 델포이 지역에 중과세를 부과하는 키르하(Kirrha)에 맞서 델포이 인근 도시들의 동맹이 전쟁을 통해 키르하를 격파하고 델포이를 해방하면서 4년에 한 번 있는 대제전으로 변경된다. 이 제전은 이후 올림픽 개최 후 2년 뒤에 열리는 경기가 되었다. 

피티아 제전은 다양한 노래와 악기 경연에서부터 운동 경기까지 다양한 경쟁 부문이 포한되었다.

음악 부문은 합창을 동반하는 노래와 악기 경연대회가 열렸다. 시와 산문 경연대회는 피티아 제전의 또 다른 특징이었다. 낭독된 시와 산문의 승자는 심사위원단에 의해 선택되었다. 연극 경연은 헬레니즘 말기 로마에서 도입되었으며 연기와 연출에 대한 심사를 모두 포함했다. 회화의 경연은 기원전 5세기부터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운동 경기에는 육상과 레슬링, 복싱, 그리고 온몸을 다 이용하는 거친 격투기인 팡크라티온(Pankration)이 포함되었다. 경기 마지막 날에는 말들이 끄는 전차 경주가 키르하 평원에서 개최되었다. 

피티아 제전은 394년 로마와 비잔틴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Flavius Theodosius)가 비기독교적 혹은 이교적 신전의 파괴와 의식을 금지하면서 중단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피티아 제전은 상금보다는 명예를 놓고 다투는 경연이었다. 올림피아의 승자에게는 종려나무, 즉 올리브 가지로 만든 관이 주어졌지만, 피티아 제전의 승자에게는 아폴론 신과 관련된 월계수로 만든 관이 씌워졌다. 

월계수와 아폴론: 신성이 깃든 식물

아폴론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월계수를 신성한 것으로 여겼다. 어떤 전통에서는, 초기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 중 하나인 델포이의 신탁을 선포한 피티아 여사제가 예언을 하기 전에 월계수 잎을 씹어 환각을 일으킬 수 있는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로마에서는 로루스(laurus)라 불린 월계수는 그리스에서는 다프네(daphne)로 불렸다. 그리스에서 다프네는 의식적인 정화 및 신성한 영감과 관련되었다.

신화에 따르면 월계수에 대한 아폴론의 사랑은 각별했다.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에 따르면 에로스는 아폴론가 자신의 활 솜씨를 조롱한 것에 대해 벌을 주려고 했고, 그래서 그는 아폴론에게 상대를 사랑하게 하는 금 화살을 쏘고 여성 님프인 다프네에게는 상대를 멀어지게 하는 납 화살을 쏘았다.

금 화살에 맞은 아폴론은 다프네에게 계속 구애하는 반면 납 화살을 맞은 다프네는 아폴론을 완강히 거부했다. 쫓는 아폴론과 도망치는 다프네, 마침내 아폴론은 다프네를 따라잡았지만 다프네는 아폴론의 구애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인 강의 신 페네이오스에게 자신을 변신시켜주길 간청했다. 다프네의 아버지는 그녀를 월계수로 바꾸었다. 한 걸음만 더 있으면 손이 닿는 곳에서 월계수로 변해버린 다프네의 모습을 보고 아폴론은 몹시 슬퍼했다. 그리고 아폴론은 그 사랑의 영원한 증거로 월계수 가지에서 월계관을 만들어 썼다. 

아폴로와 다프네를 보여주는 폼페이의 고풍스러운 프레스코화. 출처: Wikipedia

이 신화는 월계수를 아폴론의 사랑과 신성이 담긴 식물임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월계수는 그 자체로서 아폴론과 또 다른 더 중요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아폴론과 월계수의 상징성: 치유와 업적, 그리고 평화의 상징

아폴론이 예언의 신이자 동시에 시와 음악, 의술과 궁술, 빛의 신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원래 지중해에서 발견되는 많은 작은 덤불과 나무들 중 하나인 월계수의 향기로운 녹색 잎이 다양한 요리의 인기 있는 향신료로 사용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고대인 그리스와 로마인에게 월계수는 향신료 이상이었다.

월계수는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자연계의 선물을 사용하는 오랜 전통의 일부인 유용한 식물이었다. 로마인들은 그 식물을 위해 다양한 의학적 용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것의 잎을 뱀에게 물린 곳에 바르고 구토제로 이용했다. 그들은 월계수와 그 열매로 다양한 감기약을 만들었다. 그리스인들은 월계수를 다른 식물의 발진에 대한 치료제로 사용했고 소독제와 응급처치를 위해 월계수를 졸여서 사용했다.

월계수는 이러한 물리적 치유 효과를 넘어 아폴론과 피티아 제전과 얽힌 상징성을 지속적으로 확장했다.

피티아 제전에서 영예의 상징으로 우승자에게 씌우던 월계관은 로마 시대에 들어서 업적을 칭송하는 상징이 되었다. 로마인들은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보상하기 위해 성공한 장군에게 월계관을 씌웠다. 승리한 장군은 "트리움푸스"(triumpus)라고 불리는 의식에서 월계관을 쓰고 로마를 행진했다. 

업적의 상징, 특히 군사적 업적의 상징으로 사용되던 월계관은 중세, 르네상스 시대에 피티아 제전의 원래 기원에 따라 문화예술 방면으로 확장되었다. '계관 시인'은 14세기 말과 15세기 초에 영국에서 처음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이탈리아에서 사용되었는데 오비디우스, 단테 등 과거의 위대한 시인들이 월계관을 쓰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는데, 이것이 '계관 시인'이라는 문구와 지위의 기원이다.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의 15세기 말 그림으로 추정되는 단테의 초상화(Ritratto di Dante). 단테의 머리 위에 월계관이 씌워져 있다. 출처: Wikimedia

노벨상 수상자를 상징하는 계관자의 영어 단어 "laureate"이 영국에서 뛰어난 시인에 대해 쓰이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후반이다. 시인 계관(詩人桂冠, Poet Laureate) 혹은 계관 시인(桂冠詩人, Laureate Poet)은 문헌상으로는 이솝의 중세 영어와 15세기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처음 등장한다. 영어권에서 최초의 공식 계관 시인은 벤 존슨(Ben Jonson, 1638년)이지만, 최초의 기록된 계관 시인은 드라이든(Dryden, 1668년)이다. 영국에서 계관 시인은 군주의 시인으로 공식적으로 선택된 사람을 의미하며,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에서 시인들의 명예직을 의미한다.

나폴레옹은 로마 전통을 되살려 자신의 군사적, 문화적, 사회적 업적을 스스로 기리기 위해 초상화와 동전에 월계관을 쓴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1807년에 발행된 40프랑 나폴레옹 동전. 출처: 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

월계수는 또한 평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월계관을 놓고 각축하는 피티아 제전 기간 전쟁은 중단된다. 약 3개월에 걸쳐 계속되는 피티아 제전 동안 '성스러운 델포이의 평화'가 선언된다. 이 선언으로 경기 참가자나 관객 등 제전의 참가자 전원이 위험 없이 안전하게 자신의 나라에서 델포이를 방문하고 다시 안전하게 귀국하는 것이 보장되었다.

인증으로서 계관자 그리고 안주

업적에 대한 실질적 증명서로 계관자가 처음 쓰인 것은 중세 시대였다. 중세 라틴어에서 "바칼로레아"(baccalaureate)라는 단어는 명예롭거나 무언가를 성취한 사람을 의미했다. 이 용어를 부여받은 사람은 학사 학위 소지자를 의미했다.

노벨상 위원회가 수상자에게 처음부터 계관자라는 명칭을 부여한 것은 아니며, 그 관습은 노벨상 자체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기록하는 노벨상 수상자에 대한 최초의 계관자라는 명칭 부여는 1947년이다.

노벨상이 수여되는 의학, 물리학과 화학, 문학과 경제, 그리고 평화는 월계수에 촘촘하게 짜인 의학과 문화예술 그리고 평화라는 상징의 그물 그리고 고대 그리스 이후 그 월계관에 부여된 업적과 성취라는 상징의 무게와 잘 어울리기에 그 수상자를 계관자로 부르는 것은 다른 어떤 명칭보다도 잘 어울려 보인다. 하지만 그 업적과 성취에는 늘 그것에 안주하지 않는 경계를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영어에서는 '이미 성취한 것에 안주하며 게으름을 피우며 발전하지 못하는 것'을 "월계수에 의지하다"(rest on one's laurels) "월계수 위에 앉다"(sit on one's laurels)라고 한다. 아무리 뛰어난 업적과 성취도 끊임없이 도전되지 않으면 굳어져 죽은 화석이 된다. 그런 점에서 월계수는 다프네처럼 끝없이 갈구하지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과정으로서의 성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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