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공포의 사무실 칸막이의 역사: 개방형 사무실 vs 칸막이 사무실 그리고 권력

Zigzag 2022. 10. 14.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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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 주: 사람은 공간을 만들지만 공간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한다. 사무실 공간을 나누는 파티션, 더 정확히는 칸막이 혹은 큐비클(Cubicle)은 독일에서 수입된 사무실 경관(office landscape)이란 의미의 뷰로란트샤프트(Bürollandshaft)의 개방형 사무공간이 소통의 용이함과 평등의 목적에서 불구하고 소음과 시각적 불편을 야기했기에 이에 대한 대안으로 1960년 대에 등장했다. 하지만 독립성과 유연성을 보장하려던 큐비클은 1980년대 이후 미국 노동자들의 고립과 과로, 불안정성, 일회성의 상징이 되었으며 사람들은 다시 개방형 사무실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이 글은 현재 펜실베니아 주 민주당 상원의원인 니킬 사발(Nikil Saval) 잡지 n+1의 편집장 시절인 월스트리트저널 2014년 5월 9일 자 기고 A Brief History of the Dreaded Office Cubicle의 번역으로 사무실 칸막이의 역사, 개방형 사무실과 칸막이형 사무실에 얽힌 반전의 역사, 그리고 권력의 문제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공포의 사무실 칸막이 약사

널리 혐오받는 작업 공간의 발명가는 그것이 유연성과 독립성을 가져다 주기를 바랐다

1960년대에 사무용 가구 회사인 허먼 밀러(Herman Miller)에서 일하는 뛰어난 디자이너 로버트 프롭스트(Robert Propst)가 이 칸막이(cubicle)를 발명했다. 사진: Getty Images

Nikil Saval

"칸막이"(Cubicle)는 영어에서 가장 효율적인 단어 중 하나이다. 그토록 빠르게 공포와 고단함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다. 위대한 컬트 영화 '오피스 스페이스'(Office Space, 1999)의 칸막이에 거주하는 주인공은 "이 지구에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보낼 예정이 아니었어요."

부분적으로 칸막이가 나쁜 사무실 직업의 멸시받는 상징이 되었기 때문에 회색의 펠트로 덮인 벽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파티션이 적거나 없는 개방형 사무실(또는 책상 역할을 하는 긴 피크닉 테이블)이 이제 대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열린 사무실은 칸막이를 만든 사람이 우리 모두를 구하려고 했던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 발명가는 1960년대 사무용 가구 회사 허먼 밀러(Herman Miller)에서 일하는 뛰어난 디자이너인 로버트 프롭스트(Robert Propst)였다. 1960년 그는 미국 사무소를 '황무지'라고 불렀다. "활력을 떨어뜨리고, 재능을 방해하고, 성취를 좌절시킨다. 이루지 못한 의도와 노력이 실패한 일상의 현장이다."

프롭스트가 혐오하는 사무실은 현재 우리가 '매드맨'(Mad Men)에서 볼 수 있는 유형의 사무실로 크게 개방되어 있었다. 회계사나 타이피스트들이 9시부터 5시까지 탁탁 소리를 내며, 종종 매니저와 임원을 위한 닫힌 사무실의 복도로 둘러싸여 있었다.

1960년대에는 훨씬 더 개방형 도면이 부상했다. 그것은 뷰로란트샤프트(Bürollandshaft) 혹은 사무실 경관(office landscape)이라고 불리는 독일에서 수입된 새로운 개념이었다. 그것은 인위적(cultivated) 혼돈을 요구했다. 여기서는 넓은 평면을 가로질러 책상이 모여있고, 키 큰 양치 식물들과 음향 스크린에 의해 시야가 가려졌고 개인 사무실은 보이지 않았다. 계층 구조를 단순화하고 의사 소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이 새롭고 현기증나는 디자인은 건축가, 기획자 및 디자이너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이것은 곧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1967년 듀폰 본사에 최초의 미국 사무실 경관이 설치된 후 미국 전역에서도 마찬가지로 퍼져나갔다.

문제요? 사람들이 그것을 싫어했다는 것이다. 개방형 사무실(open-office plan)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시각적 및 청각적 소음을 의미한다. 개인 사무실에 익숙한 사람들은 수다와 타이핑 때문에 집중할 수 없었다. 사무실 경관의 소위 평등주의에도 불구하고, 관리자들은 자신들에게 보통 하급 직원들보다 더 많은 공간을 할당했고, 스크린과 여분의 식물을 창조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들은 종종 그들 자신을 위해 임시 개인 사무실을 만들 수 있었다. 1970년대까지 유럽 노동자 평의회는 유럽 전역의 직원들에게 개인 사무실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개방형 사무실을 거부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개방형은 프롭스트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는 사무직 노동자들이 자율성과 독립성을 필요로 한다고 결론지었고, 따라서 어떤 주어진 필요에 맞게 변형될 수 있는 유연한 3개의 벽을 가진 디자인을 제공했다. 프롭스트는 또한 노동자들이 앉는 만큼 자주 서 있어야 한다고 느꼈고, 그래서 그는 노동자들이 일어나도록 격려하기 위해 수납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사무실이 노동자들 사이의 "의미있는 교통"(meaningful traffic)을 장려하기를 원했다.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유토피아적인 비전이었고, 그것은 오늘날의 진보적인 사무실 디자인 사고의 많은 부분을 예측했다.

그의 제품인 액션 오피스 2(Action Office II)는 대성공이었다. 1968년에 처음 소개된 이것은 3개의 둔각, 경첩, 천으로 싸인 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필요에 따라 모양을 만들 수 있는 유연한 사무실 공간을 장려한다. 뉴욕 포스트의 실비아 포터(Sylvia Porter)는 "평생을 신문 편집실의 개방 공간에서 보낸 사람으로서 그 개념이 완전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1985년, 세계 디자인 컨퍼런스(World Design Conference)는 이 디자인을 지난 25년 동안 가장 성공적인 디자인으로 선정했다. 프로스트가 죽기 2년 전인 1998년, 약 4천만 명의 미국인들이 42개의 다른 버전의 액션 오피스 II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주로 칸막이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통한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을 잊었다. 이 용어는 리처드 예이츠(Richard Yates)의 1961년 소설 '레볼루셔너리 로드'(Revolutionary Road)에서 프랭크 휠러(Frank Wheeler)가 작업하는 칸막이처럼 이전에도 사용되었지만, 일반적으로 작고, 보다 영구적이며, 도서관 열람실(carrel)과 같은 작업 공간을 의미했다. 프롭스트의 유연한 디자인과 일회용(disposable) 재료는 칸막이를 더 저렴하게 만들었다.

칸막이의 문제들은 곧 사람들이 개방형 사무실의 문제들을 잊도록 도와주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칸막이 거주자들의 대규모 합병과 대량 해고가 일상화되었다. 합병으로 형성된 거대 기업의 사무실 안에 갇혀 며칠을 기다린 노동자들에게, 그 얇은 벽은 프롭스트가 바랐던 것처럼 독립성과 유연성이 아니라 과도함, 불안정성, 미국 노동자의 일회성(disposability)을 상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 반전이 있다. 개방형 사무실로 밀려난 과거의 칸막이 거주자들은 종종 같은 감정에 어쩌면 훨씬 더 격렬하게 직면한다. 내가 이야기한 개방형 사무실의 많은 직원들은 집중력과 프라이버시를 찾기 힘들고 종종 그들의 칸막이를 그리워 하곤 한다.

진짜 문제는 가구가 아니다. 가구가 직장에서 권력의 자의성을 나타내는 방식이다. 프롭스트는 죽기 2년 전에 "이것의 어두운 면은 모든 조직이 지능적이고 진보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많은 곳은 같은 종류의 장비를 가지고 지옥을 만들 수 있는 무신경한 사람들에 의해 운영됩니다. 그들은 아주 작은 칸막이를 만들고 그 안에 사람들을 채워 넣습니다. 황량하고 쥐구멍 같은 곳... 나는 이것이 완벽한 세계라는 환상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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