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시사

미국의 이라크 침공 20주년: 실향민, 난민, 그리고 파괴된 학교와 문화유산

Zigzag 2023. 4. 8.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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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의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 '쇼크 독트린'(The Shock Doctrine)의 서론은 미국이 대량살상무기를 핑계로 이라크를 침공한 이후 미국이 이라크의 공적 기관과 자산을 충격적으로 해체하고 사적 자본주의를 촉진했는가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미국이 주도했던 이라크 침공이 시작된 2003년 이후 20년이 흘렀지만, 이라크는 여전히 혼란 도가니와 파괴의 폐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침공이 야기한 수백만 명의 실향민과 난민은 물론 높은 인플레에 시달리는 경제, 문화유산의 약탈과 교육시설의 파괴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라크 사회를 괴롭히고 있다. 후세인 정권의 대량살상 무기 보유를 기정사실화 하며 미국의 침공을 유도했던 뉴욕타임스를 포함한 미국의 주요 언론 그리고 그 언론보도를 구실로 이라크를 침공했던 미국 정부는 대량살상 무기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있으며, 그 침공으로 인한 고통은 이라크인들의 몫이 되었다. 미국은 이라크인들의 삶에서 일상을 지워버렸다. 이 글은 Al Jazeera 4월 5일 자 기사 'We are still displaced,' 20 years after the Iraq war의 번역으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의 물적, 인적, 사회경제적, 문화적 피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라크 전쟁 후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여전히 실향민이다.'

미국 주도의 전쟁 이후 수백만 명의 난민과 실향민 이라크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국내에서 추방된 소녀들이 학교에 가기 위해 바그다드의 폭격을 맞은 건물을 떠나고 있다. 사진: Wathiq Khuzaie /Getty Images

전쟁의 공포, 오랜 유산, 그리고 잃어버린 생명과 유산은 미국의 침공 후 20년이 지난 후 이라크를 괴롭힌다.

이라크 언론인이자 영화 제작자인 미테하크 알 카티브(Meethak al-Khatib)는 "내 가장 초기 기억 중 하나는 침공 일주일 전쯤입니다"라고 알자지라에 말했다. "나는 우리 거실에 들어갔습니. 삼촌이 오셨어요. 그는 모든 창문에 덕트 테이프를 붙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죠. 그는 유리가 파편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동안, 우리 TV에서 사담(Saddam)이 나왔는데 그것이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입니다."

2003년 3월 19일, 미국 주도의 연합군이 이라크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하루 후, 지상 침공이 시작되었다. 알 카티브는 7살이었다.

당시 알 카티브와 그의 가족은 바그다드에서 서쪽으로 110km 떨어진 라마디(Ramadi)에 살고 있었다. 이들은 침공 초기 집을 떠났지만, 알-안바르주(Al-Anbar)의 도시인 히트(Heet)에서 가족들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라마디로 돌아갔고 미군이 가족 집 옆에 기지를 설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미트하크 알 카티브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7살이었다. 사진: Meethak al-Khatib/Al Jazeera

알 카티브는 "미군 기지가 가까이 있어 우리 이웃의 상황이 매우 문제가 많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항상 기지에서 공격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이 기지에 대한 공격이나 소요가 발생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에 대한 알카에다의 공격 이후, 미군은 이 그룹의 네트워크를 파괴하고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을 무너뜨리기 위한 목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나중에 이라크 지도자 사담 후세인이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했다는 주장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의 연속으로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라크의 독재자는 쓰러졌지만, 대량 살상 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약속된 민주주의 대신에, 미국의 전쟁과 그 파괴는 그 나라와 그 국민과 문화에 상처를 입혔다.

2003년 3월 임신한 아내와 딸과 함께 이라크를 탈출하는 바그다드의 아버지. 사진: Patrick Barth/Getty Images

알 카티브의 가족은 2014년부터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ISIL, ISIS)의 등장과 이 조직의 라마디를 포함한 이라크와 시리아의 광대한 지역 장악 후 실향민이 되었다.

알 카티브는 "ISIS 전쟁 중에 우리는 집을 잃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2003년 전쟁과 계속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실향,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삶을 갖지 못하는 것, 우리의 삶에서 모든 것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상적인 가족생활을 가질 수 있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2005년 3월 20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피랄 아슈어(Firyal Ashoor)가 집세를 낼 여유가 없어 집에서 쫓겨난 후 그녀와 그녀의 10인 가족이 살고 있는 텐트 앞에서 옷을 빨고 있다.  사진: Wathiq Khuzaie/Getty Images

440만 명의 국내 피난민

미국 주도의 이라크 침공과 점령은 2011년까지 지속되었고, 대규모 난민 사태로 이어졌다. 국내 실향민(internally displaced people, IDP)의 수는 2003년에 등록된 0명에서 2007년에 260만 명으로 증가했다.

2011년 12월 미국이 전투 작전 종료를 발표했을 때, 이라크 IDP의 수는 130만 명이었다.

그러나 2013년부터 2019년까지 ISIL의 흥망성쇠와 함께 IDP의 수가 다시 증가하여 2015년에는 440만 명으로 정점에 도달했다.

2022년 기준으로 전국적으로 약 120만 명의 국내 실향민이 있다.

230만 명의 난민

국내에서 추방된 사람들 외에도, 수백만 명의 이라크인들이 난민이 되었다. 2007년 절정기에는 230만 명 이상의 이라크인들이 이라크를 떠났고, 80%는 이웃 시리아와 요르단으로 갔다.

이라크 의사협회(Iraqi Medical Association)에 따르면 이라크 침공 후 몇 년 동안 도망친 사람들 중에는 이라크에 등록된 의사의 절반이 포함되어 있었다.

2022년 현재 유엔은 주로 독일(44%), 요르단(10%), 이란(10%)에 거주하는 345,305명의 이라크 난민을 등록했다. 아래 인포그래픽은 미국의 침공 이후 이라크 난민들이 어디로 피신했는지를 보여준다.

광범위한 폭력

사담 후세인의 제거는 권력 공백을 만들어 종파 간 긴장을 고조시켰고 내전을 초래했다.

알카팁은 "우리를 지배하는 총과 권력, 권위를 가진 행위자들이 너무 많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전의 한 명의 독재자 대신 지금은 수백 명의 독재자가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젊은 이라크인으로서 지금 주어진 선택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뿐입니다. 만약 옵션이 전쟁이나 사담 중에 있다면 나는 어느 쪽도 원하지 않습니다.”

2008년 바그다드 사드르시티에서 교전 중인 시아파 민병대 마흐디군(Mahdi Army) 일원. 사진: Kareem Raheem/Reuters

웁살라 분쟁 데이터 프로그램(Uppsala Conflict Data Program)이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2003년부터 2021년까지 전국적으로 최소 7,966건의 분쟁 사건이 기록됐다. 그것은 19년 동안 하루에 적어도 한 건의 분쟁이 있었다는 것이다.

폭력사태의 60% 이상(4,955건)이 니네베(Nineveh), 바그다드(Baghdad), 알-안바르(Al-Anbar) 등 3개 지방에서만 발생했다. 아래 지도는 이러한 폭력적인 충돌이 발생한 곳을 강조한다.

경제 불안

이라크 침공 이후, 이 나라는 장기간의 높은 인플레이션에 시달려왔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06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최고치인 53%를 기록했다.

2003년 침공 이후 경제적 안정을 유지하고 이라크의 석유 인프라를 재건하려는 미국의 목표에도 불구하고, 고착된 폭력, 상품 부족, 달러화 및 불안정한 통화 정책은 높은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되었다.

2008년에 인플레이션은 통제되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이라크의 생활비는 다시 한번 치솟았다. 2020년, 유가 하락은 이라크 디나르의 평가절하로 이어졌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석유 수입은 이라크 수출의 99%, 국내총생산의 42% 이상을 차지했다.

2022년 3월, 이라크 남부에서 상품 가격이 급격히 오르면서 시위가 발생했다. 관계자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원인으로 꼽았다.

한 이라크 여성이 나시리야에서 식량 가격 상승을 규탄하는 시위 도중 '자존심을 위해 반란을 일으키면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사진: Asaad Niazi/AFP

알-카티브는 "적어도 이전 정권에서는 독재 정권에도 불구하고, 기능하고 있었고,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으며, 제재와 정부의 관료주의(구축하는 데 수십 년이 걸리는)에도 불구하고 기능하고 있는 경제가 있었습니다 다"라고 말했다. "분명히 2003년 이후에 등장한 정부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2008년 미국 폭탄 공격으로 부상을 입었다고 말하는 장애인 운동선수 사드 후세인(Saad Hussein)이 바그다드의 알 투라 장애인 재향군인회(Al Thura Disabled Veterans' Community)를 통해 방폭벽을 지나 걷고 있다 사진: Mario Tama/Getty Images

"때때로 나는 2003년의 일들을 기억하고, '아, 그래서 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거구나. 그것이 내가 약간 우울한 이유구나'"라고 알 카티브는 말한다. "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남겨둔 이 모든 혼란이 합쳐져 마치 이 전쟁의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오고 있습니다."

이라크 바디 카운트(Iraq Body Count, 2003년 이라크 침공 이후 폭력에 의한 사망자를 기록하는 단체 - 역자 주)에 따르면 2003년 이후 전쟁과 관련된 폭력으로 적어도 210,090명의 민간인이 사망자가 발생했다. 연간 사망자 수가 가장 많은 것은 2006년으로, 약 3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전쟁 비용 프로젝트(The Costs of War)는 수십만 명의 이라크인들이 분쟁의 결과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국 국방부에 따르면 이라크 전쟁 당시 전사자는 4431명, 부상자는 31,994명이었다.

1862년 모술에 세워진 알타히라 시리아 가톨릭 교회(Al-Tahira Syriac Catholic Church)는 ISIL(ISIS)과의 전쟁 중 파괴되었다. 사진: Hawre Khalid/Getty Images

이 전쟁은 또한 이 나라의 유산에 상처를 남겼다.

2003년 4월 바그다드 함락 이후 약탈자들은 이라크 국립박물관에 침입해 수천 년 전의 유물들을 포함하여 15,000개의 물건들을 훔쳤다.

2003년 4월 바그다드에서 파괴된 유물 위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있다. 사진: Mario Tama/Getty Images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 UCL)의 고대 중동사 교수인 엘레노어 롭슨(Eleanor Robson)은 알 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정말 끔찍한 피해와 정량화하기 훨씬 더 어려운 것은 박물관 외부의 고고학적 유적지와 문화 유적지에서 약탈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것은 아직 땅속에 있고 발굴되거나 연구된 적이 없는 것입니다. 계량화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기원전 22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수메르 점토 원뿔은 2003년 5월 영국 경찰에 의해 약탈되어 압수되었다. 사진: The British Museum/AFP

ISIL 하에서 모술과 니네베 주의 기념물이 파괴되는 등 문화적, 종교적 손실이 더 발생했다. 이라크의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홍보하는 고고학자, 문화유산 전문가, 전문가들로 구성된 네트워크인 라시드 인터내셔널(Rashid International)에 따르면 2016년 5월 말까지 모술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41개의 건물이 파괴되거나 파멸되었다고 한다.

이라크 정부는 ISIL가 2017년 6월 모술 전투 중 1172년경 지어진 알누리 대 모스크(Great Mosque of al-Nuri)를 파괴했다고 밝혔다. 사진: Tom Peyre-Costa/Norwegian Refugee Council

롭슨은 "유산(Heritage)은 상속(inheritance)과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역사와는 다릅니다"라고 말한다. "유산은 우리에게 연결되어 있고, 우리가 개인적으로 애착을 느끼고, 우리가 뿌리내리고 있는 길의 일부분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조상으로부터 상속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그들이 세계 어디에 있든지, 그 정체성을 줍니다."

그 교수는 "한 세대 전체가 사라지고 새로운 세대를 가르치고 격려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롭슨과 그녀의 동료들은 UCL에 기반을 둔 나레인 네트워크(Nahrein Network)를 운영한다. 그것은 중동 역사와 유산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롭슨은 "우리의 임무는 이라크의 유산 전문가들의 목소리와 의견을 듣기 위해 그들의 기술을 재설계하고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라고 설명한다.

심각한 영향을 받은 교육

이라크의 교육에 대한 영향은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전쟁 전, 이라크 교육은 자원이 풍부했고 여성들에게 개방적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침공은 이 분야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고 사회의 많은 부분에 대한 접근을 제한했다.

이라크 교육부가 전국 3,200개 이상의 중학교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2003년 6월과 8월 사이에 학교의 80%가 중간 정도 또는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주는 나자프 (Najaf, 90% 피해), 니네베 (88%), 타밈 (Tamim, 87%)이었다. 가장 영향을 덜 받은 지역은 북동부 아르빌(Erbil) 주와 술레이마니야(Sulaymaniyah)주였다. 바그다드에 대한 자료는 얻기 어려웠다.

2003년 이라크 정부가 무너지면서 많은 학자들이 이라크를 떠났다. 1990년대에 시행된 제재, 전쟁, 억압된 언론의 자유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떠났다. 롭슨은 "제 동료들에게 즉각적인 영향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많은 학자들이 침공 후 살해당했다고 덧붙였다.

"그냥 혼란스러웠고 [그들은] 암살당하거나 끔찍한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도로에서 도망친 두 동료가 생각납니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나의 엄마는 선생님이었고 근처에 있는 학교에서 일했습니다."라고 알 카티브는 말한다. "어느 시점부터 알카에다가 우리 도시를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엄마]가 집에 돌아오더니 히잡만 쓴 것은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제 니캅을 써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라고 하셨어요.”

미래에 대한 그의 희망에 대해, 알 카티브는 그의 가족이 일상적인 일에 대해서만 걱정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나는) 내 여동생이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지 아니면 아빠(에 대해서는) 좋아하는 차로 차를 바꾸지 않을지, 엄마가 우리가 휴가를 가기를 원하시는지, 내 남동생이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 하는지 걱정(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라크 전쟁 이후에 내려진) 이 모든 결정으로 인해 여전히 정말 많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저 평범한 삶을 살고, 혼자 있고, 강요받지 않고 일을 하라는 지시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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