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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곤 문서 폭로 50주년: 사건으로서 펜타곤 문서 미국 베트남전 개입의 부도덕과 야만 고발

Zigzag 2021. 6. 15.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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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곤 문서(Pentagon Papers)의 폭로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71년 6월 13일 뉴욕타임스는 베트남전의 분위기를 완전히 반전시키는 소위 펜타곤 문서(Pentagon Papers)라는 미국 정부 비밀문서의 연재 시작을 알렸다. 펜타곤 문서의 공식 명칭은 '베트남 정책에 대한 미국 정책 결정 과정의 역사, 1945~1968'(History of US Decision-Making Process on Viet Nam Policy, 1945-1968)로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에 대한 포괄적인 분석과 정부 문서를 포함하고 있는 방대한 자료다. 펜타곤 문서에 대한 뉴욕 타임스의 6월 13일 첫 보도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트리샤 닉슨의 결혼식 기사 바로 옆에 게재되었다. 그 기사는 펜타곤 문서 연재가 “4대에 걸친 미국 행정부가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심리적 지분을 어떻게 쌓았는가”를 밝히는 것이며, 또한 “미국의 지배적인 이해가 처음에는 공산주의를 봉쇄하고 나중에는 미국의 권력, 영향력 및 명성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 두 단계에서 베트남의 조건은 무시되었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펜타곤 문서를 처음 폭로한 뉴욕타임스 1971년 6월 13일자 신문 1면. 출처: New York Times

이 문서는 로버트 맥나마라 당시 미 국방성 장관이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일종의 백과사전을 작성할 목적으로 만든 '베트남 연구 테스크포스'에 의해 작성되었다. 이 작업은 그가 국방부를 떠난 뒤에도 계속되었으며, 그 작업에는 36명의 국방부 내부 및 학계 등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였다. 1969년에 완성된 이 문서는 모두 47권으로 총 7,000페이지의 방대한 자료였다. 그중 3,000페이지는 분석이며 나머지 4,000페이지는 정부 공식문서로 구성되었다. 이 문서는 "일급 비밀 – 민감"(Top Secret – Sensitive)으로 분류되었다.

'펜타곤 문서' 원본.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National_Archives_and_Records_Administration

이 문서는 미 국방성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랜드연구소의 군사 분석가 대니얼 엘즈버그(Daniel Ellsberg)가 뉴욕타임스에 제보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엘즈버그가 어떻게 자신을 수십 년 동안 감옥에 가둘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문서를 뉴욕타임스에 전달했는가는 톰 행크스와 메릴 스트립이 주연을 맡은 2017년 영화 '더 포스트'(The Post)가 자세히 다루고 있다. 엘즈버그는 당시 함께 일하고 있던 엔써니 루소(Anthony Russo)와 함께 47권을 밤새 복사해 그 복사본을 전쟁에 반대하는 의회의 주요 구성원들에게 제공했으나 별 반응이 없자 우선 언론에 먼저 폭로하기로 했다. 그는 펜타곤 문서를 직접 뉴욕타임스에 제공했고, 뉴욕타임스는 법률팀 내부의 격렬한 논쟁 끝에 국민의 알 권리가 국가기밀에 우선한다는 입장에 따라 이를 공개했다.

펜타곤 문서의 내용

펜타곤 문서는 첫 번째로 베트남전 혹은 인도차이나 전쟁이 베트남을 재식민지화하기 위한 1946년~1954년 프랑스-베트남 전쟁과 북베트남-남베트남 그리고 남베트남 내의 '내전', 1964년 미국 개입에서부터 1975년 미군 철군까지의 확전이란 두 개 혹은 세 개의 별도 전쟁이나 '내전'이 아니라 미국이 노골적으로 개입한 전쟁이었음을 드러냈다. 미국은 케네디 행정부에서 남베트남의 내정탄압과 북베트남과의 전투를 지원하고 존슨 행정부에서 이를 확대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의 트루먼 행정부 시절부터 프랑스에 무력과 재정을 지원해왔다. 베트남을 재식민지화하려는 프랑스에 대해 호찌민이 미국에 계속 베트남의 국가로서 인정을 요구하는 문서를 보냈지만, 미국이 묵묵부답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두 번째로 펜타곤 문서는 전쟁의 근본적인 명분은 당시 대통령 존슨이 밝힌 "독립적이고 비공산주의적인 남베트남"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1965년 1월 존 맥노튼 국방부 차관의 각서가 밝힌 바와 같이 "친구를 돕는 것이 아니라 중국을 억제하는 것"이었음을 드러냈다. 1965년 11월 3일 국방장관 맥나라마가 대통령 존슨에게 보내는 비망록 서두의 미국의 "전략"을 서술하면서, 1965년 2월 B-52를 동원한 본격적인 북베트남 폭격은 중국 봉쇄라는 미국의 장기적인 정책에서 나온 것이었음을 드러냈다. 맥나마라는 중국을 1차 대전 당시의 독일, 2차 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제국과 같은 제국주의로 규정하면서 "중국의 부상이 세계에서 열강으로서 미국의 중요성과 효과를 약화하고, 보다 위협적으로 아시아의 모든 역량을 미국을 반대하는 방향으로 조직할 것"이라며 중국봉쇄로서 베트남 참전을 정당화했다. 나아가 이 비망록은 "중국을 억제하기 위한 장기적 노력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전선이 있다(소련이 북부와 북서부에 중국을 "봉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a) 일본-한국 전선, (b) 인도-파키스탄 전선, (c) 동남아시아 전선". 이 비망록은 아울러 베트남전 참전이 미국에 막대한 시간과 돈 그리고 생명을 요구할 것임을 인정하고 있다. 즉, 미국은 처음부터 이 전쟁을 베트남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중국봉쇄와 미국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리고 자국민들의 막대한 희생이 있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대중들에게 그러한 사실을 은폐했다.

세 번째로 펜타곤 문서는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노골적인 개입을 폭로했다. '케네디의 헌신과 프로그램'(Kennedy Commitments and Programs)이라는 섹션에서 펜타곤 문서는 다음과 같이 미국의 남베트남 개입을 "창조"로 미화했다. "미국의 지지가 없었다면 디엠(Ngo Dinh Diem, 당시 남베트남의 독재자-필자 주)은 1955년~1956년 남베트남 지배력을 공고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의 개입 위협이 없었다면 남베트남은 1956년 제네바 합의로 촉구된 (베트남 전국) 선거에 대해 논의하는 것조차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며, 북베트남 군대에 의해 즉시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후 몇 년 동안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디엠 정권은 확실히, 독립된 남베트남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남베트남(동남아시아의 다른 여느 나라와 달리)이 본질적으로 미국의 창조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 미국은 디엠 정권이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2,840만 달러 상당의 장비와 물자를 보냈다. 또한, 남베트남 민방위대 소속 32,000명이 1,270만 달러를 들여 미국에 의해 훈련을 받았다.

펜타곤 문서는 전략서비스국(OSS)에서 근무하며 중앙정보국(CIA)에서 일했던 에드워드 랜스데일 장군을 남베트남의 대통령으로 디엠을 세우는 데 '핵심 인물'로 지목하고, 이후 디엠 정권의 후원했음을 폭로했다. 랜스데일은 1961년 비망록에서 미국은 "다른 강력한 실행자가 그를 합법적으로 대체할 수 있을 때까지 응고 딘 디엠을 지지해야 한다"고 적었다.

네 번째로, 펜타곤 문서는 미국이 응고 딘 디엠이 폭정으로 위기에 처하자 그를 암살하는 쿠데타에 직접적으로 관여했음을 담고 있었다. 펜타곤 문서는 미국의 디엠 정부 전복 쿠데타에서 역할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미국은 응고 딘 디엠에 대한 군사 쿠데타에 대해 책임의 모든 부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1963년 8월부터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베트남 장군들의 쿠데타 노력을 인가, 승인, 장려했으며 후계 정부를 위한 전폭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10월에 우리는 디엠에 대한 원조를 직접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이 장군들에게 청신호를 보냈다. 우리는 쿠데타의 계획과 실행 내내 그들과 비밀리에 연락을 유지했고 그들의 작전 계획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정부를 제안했다. 그리하여 디엠의 9년간의 통치가 유혈사태로 끝나면서, 그의 타도에 대한 우리의 복잡함은 우리의 책임과 근본적으로 지도자가 없는 베트남에서의 우리의 헌신을 강화했다." 1963년 8월 23일, 익명의 미국 대표가 베트남 장군들을 만나 디엠에 대항하는 쿠데타를 계획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 미국 대표는 나중에 루시엔 코네인 CIA 장교로 밝혀졌다.

다섯 번째로, 펜타곤 문서는 미국이 북베트남을 도발하기 위해서 다양한 선제 작전을 기획했음을 드러냈다. 1964년 CIA 국장 존 맥콘(John A. McCone)이 대통령에게 보내는 비망록은 베트남과 라오스에서 미국 또는 미국이 후원하는 특정 행동 과정에 대한 공산주의의 반응 가능성(Probable Communist Reactions to Certain US or US-Sponsored Courses of Action in Vietnam and Laos)이란 주제 아래 다음과 같은 3종류의 군사 행동 범주를 제안했다.

"범주 1 – 남베트남 공군과 미국 공군이 동시에 수행하는 주요 베트콩 공급 센터에 대한 공습, 범주 2 – 남베트남 부대와 미군 자문관들이 주요 베트콩 공급 센터에 대한 국경을 넘어선 습격, 범주 3 – 비미국 항공 승무원으로만 구성된 항공이 국적 미표기(unmarked) 항공기로 북베트남 목표물에 대한 제한된 공습"

이러한 제안은 196년 통킹만 사건 이후 북베트남 '보복' 공습과 1965년 북베트남 공중폭격에 의해 재현됐다.

펜타곤 문서의 공개로 미국이 세계적인 헤게모니 유지를 위해 계획적으로 전쟁을 도발하고, 사전에 전쟁을 준비했으며, 의회라는 민주적 장치를 속여 민주주의를 기만했으며, 이를 통해 한 국가는 물론 동맹국들을 10년에 걸친 전쟁에 몰아넣고, 베트남을 1945년 이후 1975년 미군 철수까지 무려 30년간 크고 작은 전쟁의 화마 속에 밀어 넣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사건으로서 펜타곤 문서의 영향

사건으로서 펜타곤 문서 혹은 그 폭로는 우선 위험을 무릅쓰고 조직 내부의 부패와 비리를 폭로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내부 고발자'(Whistleblower)라는 용어를 탄생시키고, 내부고발을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시켰다. 1972년 환경운동가인 랄프 네이더는 《호루라기를 불다》라는 책을 통해 펜타곤 문서 등 다양한 내부고발 사례를 소개하면서 내부고발자라는 용어를 처음 세상에 널리 알렸다. 엘즈버그의 펜타곤 문서 폭로는 후에 미국 정치역사의 최대 부패 스캔들인 '워터게이트' 사건의 '딥쓰로트'(당시 유행하던 미국 포르노 영화의 제목으로 흔히 '목구멍 깊숙이'로 번역된다)로 불리는 내부고발자(FBI의 부국장을 역임했던 마크 펠트 Mark Felt가 딥 쓰로트임)의 폭로를 촉발해 닉슨 행정부의 몰락을 초래하기도 했다. 엘즈버그는 후에 이라크 민간에 대한 미군의 학살을 폭로한 첼시 엘리자베스 매닝(Chelsea Elizabeth Manning)과 미국 국가안보국의 광범위한 민간 도·감청과 기업의 협조를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Snowden)과 같은 내부고발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두 번째로 펜타곤 문서 폭로는 국민의 알 권리와 언론자유의 역사에서 중요한 한 획을 그었다. 미국 연방정부는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의 펜타곤 문서 폭로를 저지하기 위해 워싱턴 연방 고등법원에 기사의 연재가 미국 국익에 치명적인 손실을 입힐 것이라는 구실로 출판금지 신청을 하여 허가를 얻어냈다. 이에 이 두 신문사는 정부의 이러한 조치가 언론자유를 보장하는 미국 헌법 수정 제1조의 침해하는 것이라며 연방 대법원에 상고하였다. 연방 대법원은 상고심에서 "정부가 입증 책임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정부의 요청을 기각했고, 두 신문은 연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세 번째로 펜타곤 문서 폭로는 우방 원조라는 미국 베트남전 개입의 도덕적 명분이 실은 조작된 것임을 드러냄으로써 미국의 더 이상의 전쟁 개입 명분을 완전히 제거하였다. 펜타곤 문서는, 아니 펜타곤 문서의 폭로는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이 우방국을 돕기 위한 수동적인 반응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능동적인 것이었으며,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통킹만 사건에 대한 보복행위로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이었음을 폭로했다. 통킹만 사건은 1964년 8월 2일과 4일 공해상에서 활동하던 미국 구축함 USS 매덕스가 통킹만에서 북베트남 측에 의해 어뢰 공격을 받았다고 미국이 주장했던 사건이었다. 펜타곤 문서는 매덕스 함은 공해상에서 활동하던 함정이 아니라 수시로 북베트남의 영해를 침범하며 정보를 수집하던 첩보선이었으며, 8월 4일의 미군 함정 피격은 미국의 자작극임을 드러냈다. 미국은 7월 30일 남베트남의 함정이 북베트남의 항구를 습격하고 이에 북베트남 해군이 매덕스 함을 남베트남 함정으로 오인하도록 유도했으며, 8월 4일 매덕스가 북베트남의 습격을 받은 지 12시간도 채 되지 않아 북베트남을 미국이 공습한 것은 미국이 사전에 북폭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드러냈다.* 이 사건을 구실로 존슨 행정부는 1964년 8월 7일 북베트남에 예고 없는 폭격을 감행하였다. 미국 의회는 '통킹만 결정'을 통과시키면서 "의회는 미국에 대한 무장 공격을 축출하고 계속되는 침공을 예방하기 위한 모든 필수적 조처를 하기 위한 최고 사령관으로서 대통령의 결정을 동의하고 지지한다"는 전쟁 참여를 위한 백지수표를 존슨 행정부에 건넸다. 통킹만 사건과 이를 구실로 한 북베트남 폭격 그리고 미국 의회의 존슨 지지는 미국의 10년에 걸친 공식적이고 본격적인 베트남 참전의 시발점이 되었다.

엘즈버그와 닉슨 행정부의 추악한 행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의 책 《공화국의 위기》(Crises of the Republic)의 '정치에서의 거짓말하기'(Lying in Politics)라는 장에서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을 폭로한 '펜타곤 문서'에 대해 "여기서 중요한 점은 거짓말 정책이 결코 적을 겨냥하지 않았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주로 국내 소비와 국내 선전, 특히 의회를 속이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지적했다. 펜타곤 문서는 냉전 이후 미국 정치가 아르카나 임페리(arcana imperii), 제국의 신비 혹은 국가기밀이라는 미명 아래 어떻게 국민을 기만하고 속여왔는가 그 거짓 정치의 민낯을 드러냈다.

펜타곤 문서를 시리즈로 공개했던 뉴욕타임스가 법무부가 법원으로부터 게재 중지 명령으로 게재를 중단하자, 엘즈버그는 이를 워싱턴포스트에 제공했으며, 워싱턴포스트는 엘즈버그와의 논의를 통해 이를 당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던 민주당 알래스카주 상원의원 마이크 그레이블(Mike Gravel)에게 제공했다. 미국 헌법에 따르면 상원의원은 상원 연설과 토론에서 일급기밀을 상원 기록 남길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누구에 의해서도 부정될 수 없는 권리였다. 그레이블은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워싱턴포스트 관계자로부터 펜타곤 문서를 전달받아 이를 트렁크에 넣으려 했지만, 문서의 무게 때문에 그가 힘들어하자 워싱턴포스트 관계자가 그를 도우려고 했으나 거절했다. 그레이블은 만약 그가 자신을 도운 사실이 알려지면 상원의원인 자신처럼 면책특권이 없는 그가 형사소송에 걸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도움을 거절한 것이다. 그레이블은 필리버스터를 통해 펜타곤 문서를 상원 기록에 남기려 했지만, 정족수 부족으로 회의가 무산되자, 베트남전이 공공건물 유지를 위한 예산을 낭비한다는 근거에 기초해 1971년 6월 29일 자신이 위원장으로 있는 토지 및 건물 소위원회를 소집하여 혼자 기자들 앞에서 서서 3시간 동안 문서를 낭독했다. 새벽 1시, 그가 울음을 터뜨리며 더는 읽을 수 없는 순간이 와서야 그는 낭독을 중단했다.

FBI는 엘즈버그를 체포하기 위해 FBI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광범위한 체포 작전을 벌였지만 엘즈버그는 체포망을 잘 피하며 펜타곤 문서를 더 널리 퍼뜨렸다. 그는 심지어 체포 명령이 내려진 와중에 비밀장소에서 저녁 뉴스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그 인터뷰에서 엘즈버그는 그의 활동으로 인해 감옥에 가는 것이 두렵지 않냐는 질문에 "만약 그것이 전쟁을 종식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감옥에 안 가겠습니까?"라고 응답했다.

엘즈버그는 1차 대전 당시 반전주의자와 좌파 급진주의자를 탄압하기 위해 만든 스파이방지법(Espionage Act)으로 기소된 미국 최초의 내부 고발자였다. 엘즈버그는 이외에도 정보 누설, 절도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법정에 세워졌다. 미국 검찰은 엘즈버그에게 115년 형을 구형했으며, 그를 도와 펜타곤 문서를 외부로 반출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엘즈버그 반대 심문에서 증언을 거부한 앤써니 루소에게 35년 형을 구형했다. 닉슨은 엘즈버그를 감옥에 넣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으며 그의 사생활을 파헤쳐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는 전직 CIA와 FBI 요원으로 구성된 '배관공'(White House Plumbers)이라 불리는 정보공작팀으로 하여금 엘즈버그가 정신과 상담을 받던 의원에 침입해 의료기록을 훔쳐 그의 사생활을 폭로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이 본격적으로 언론에 오르내리며 이 '배관공'들이 민주당 전국위원회가 묵고 있던 워터게이트 호텔을 불법 감청했다는 사실이 폭로되고 동시에 엘즈버그 의료기록 절도 혐의도 세상에 드러났다. 재판과정에서는 또한 닉슨은 대통령 법률자문관이자 내정 담당 보좌관인 존 다니엘 에를리히만(John Daniel Ehrlichman)을 통하여 엘즈버그 사건 담당 판사인 윌리엄 매튜 번 주니어(William Matthew Byrne Jr.)에게 FBI 국장 자리를 제안했으며, 그는 애를리히만과의 백악관에서의 비밀스러운 만남이 폭로되기 전까지 제안 사실을 숨겼다. 그뿐만 아니라 재판과정에서 FBI가 불법적으로 엘즈버그를 무수히 도청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모든 불법으로 인해 판사 윌리엄 번은 1973년 5월 11일 "이 사건의 전체적인 정황은 정의감에 위배된다. 기괴한 사건들이 이 사건의 소송을 치유 불능의 수준으로 오염시켰다"며 소송을 기각했으며, 엘즈버그와 루소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샌프랜시스코 프라이드 행진에서 내부 고발자 대니얼 매닝(첼시 매닝 성전환 이전 이름)지지 시위를 하는 엘즈버그. 출처: Moizsyed.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8719377

엘즈버그는 펜타곤 문서 폭로 이후 미국의 이라크와 이란에 대한 전쟁 반대와 내부고발자에 대한 지원 등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가 폭로했던 펜타곤 문서는 뉴욕타임스의 폭로로부터 정확히 40년 후인 2011년 6월 13일 비밀지정이 해제되어 국립문서기록관리국이 전체 문서를 공식 웹사이트에 공개하였으며, 다른 여러 사이트에서도 열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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