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주: 이번 글에서는 식민시대 식민통치의 기호였던 체중이 해방 직후 치안의 기호로 변화하는 과정과 체중의 공적 성격을 먼저 다루고, 이어서 산업화 시대가 체력은 국력이라는 구호 아래 체중을 어떻게 관리해왔는가를 살펴볼 것이며, 마지막으로 다이어트가 식이요법에서 체중감량으로 의미가 변하며 체중의 사유화 시대를 열은 과정을 고찰한다. 다음 글에서는 1980년대 이후 체중과 체중의 사유화 과정을 검토할 것이다. 이 글에 앞서 제1부에서는 르네상스 시대 인간의 발견과 체중계와의 관계, 산업혁명 등의 시대적 변화와 체중계 그리고 정상 체중의 관계, 풍만이 비만으로 낙인찍히는 과정, 공공 체중계의 등장과 체중의 민주화를 다루었다. 2부에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체중 도덕'의 등장, 체중계와 체중의 사유화, 그리고 체중계와 칼로리의 관계를 살피면서 체중계가 어떻게 우리의 몸을 사적으로 길들이는 도구가 되었는가를 고찰했다. 3-1에서는 개항과 함께 조선의 무게가 도전받으면서 도량형이 적응하는 과정, 식민지화 인구관리에서 체중이 부과되고, 체중계가 체중계로 바뀌는 과정을 다루었다.
해방정국의 체중, 식민통치의 기호에서 치안의 기호로
1947년 미군정은 서울, 경기에 남조선 공민증 발급을 명했다. 이 공민증은 성별, 성명, 주소, 출생과 가족관계는 물론 신장과 체중을 표시하게 되었다. 이 공민증은 물품 배급 시 확인의 목적도 있었지만, 그 소지자가 "남조선의 합법적 주민임을 증명"함으로써 혼란한 해방정국 당시 사회 '불안 분자' 색출을 위한 도구로도 활용되었다. 일제 치하에서 식민통치와 관리의 기호였던 체중은 해방정국에서 치안의 기호가 되었다.
체중계와 체중의 공적 성격
공민증 정체성의 확인 자료를 사용될 정도로 체중은 아직 사적인 것은 아니었다. 체중계의 보급은 여전히 가정까지 미치지 못했다. 체중계는 여전히 가정에 들여놓을 만큼 값싼 물건이 아니었고, 값어치 나가는 물건 중 하나였다. 1963년의 한 기사는 독지가들이 돈을 모아 경북 영암군 수비면 신암리 학교에 노트, 라디오 그리고 체중계를 전달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1965년 마산일보는 영국 구호단체에서 운영하는 영아상담소 체중계 도난 소식을 전했다. 1969년 서울시교육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시내 2백12개 국·공·사립 초등학교중 체중계가 13개교는 체중계를 구비하지 못했다. 한국은 1960년대 중후반까지 가계지출의 50%~60%는 식료품비가 차지해 높은 엥겔지수를 보였고, 체중계가 그 고달프고 촘촘한 삶과 소비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1960년대 체중계는 여전히 공적일 수밖에 없었다.
1953년 유한양행은 보혈 강장제 네오톤 신문 광고를 게재하며 배가 적당히 나온 남성이 공중목욕탕 체중계 위에 여유 있는 모습으로 자신의 체중을 바라보고 있고, 광고 상단에는 "과연 체중이 부렀군" 큰 문구를 집어넣었다. 미국에서는 다이어트 관련 약들이 매년 20%씩 성장하던 1960년대 초 한국의 광고는 살을 붙이는 광고가 많았다. 체중은 아직 숨겨야 하는 은밀한 것이 아니었다. 풍만은 아직 사회적으로 비만으로 낙인찍히지 않았으며 무형의 여유를 표현하는 유형적 코드였다.
체력은 국력, 수출입국과 공업입국 시대의 체중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개발계획의 시작은 전체 인구와 개인 몸을 산업화에 동원했다. 1961년 제정된 계량법이 1964년 본격적으로 시행되어 법정 계량의 기본단위를 미터법으로 정하고 척관법 등 다른 단위의 사용을 법적으로 금지했다. 도량형의 통일은 수출과 공업으로 나라를 세우겠다는 박정희식 수출입국과 공업입국의 신호탄이었다. "정확한 계량 없이는 수출 한국은 없다"가 당시 정부의 구호였다. 미터법의 시행으로 한편에서 "바로 재고 바로 달자"는 구호가 외쳐질 때 다른 한편에서는 1964년 전국체전과 함께 "체력은 국력"이란 구호가 등장했다.
체력은 학교란 교육 현장, 공장이란 생산 현장, 마을이란 농촌 현장에서 산업화와 '조국 근대화'를 위한 가장 기본구성요소였다. 국민체조가 나폴레옹에 패배한 독일을 후진국에서 전쟁 강국, 후발 산업 강국으로 만든 기초가 된 것처럼 박정희 정권은 체력강화를 위해 국민체조 보급에 나섰다. 1952년에 보건 차원에서 제정된 국민보건체조는 박정희의 국가재건, 공업입국, 새마을을 위해 새롭게 재편되어야 했다. 1968년 신세기체조의 제정과 보급은 그러한 재건과 입국에 걸맞은 새로운 체조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1974년 신세기체조 대신 새로운 새마을 체조 보급을 대한체육회에 지시하여 보급하였다. 그러나 새마을 체조의 보급에 진척이 없자, 1977년 국민체조를 제정해 테이프 보급, TV 방영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여 전국적으로 보급하였다.
체력이 국력으로 구성되기 위해서는 공장, 학교, 마을에서 국민체조가 울려 퍼지며 산업화에 맞게 몸을 재구성하는 것과 별도로 그 몸 자체에 대한 밑그림이 필요했다. 1969년 최초의 국민 영양실태조사는 체격과 영양, 체력향상을 연결하기 위한 국가적 밑그림이었다. 한국인의 남성과 여성 중 국제적 표준체중, 표준신장, 표준 흉위에 미치지 못하는 인구가 항목별로 많게는 66%, 적게는 18%에 달한다는 조사 결과는 "국민 체력의 빈약성"으로 해석되었다. 이 빈약성의 극복은 적정 칼로리 소비와 영양성분 섭취를 통해 표준권장량의 달성을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 학교급식, 분식, 혼식의 권장은 표준체중, 표준신장, 표준 흉위, 표준권장량 달성으로 체력을 국력화하기 위한 현장 사업들이었다.
다이어트, 식이요법에서 살빼기로, 체중 사유화의 여명
다이어트란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초반부터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까지 다이어트는 식이요법을 의미했다. 아래 기사에서 보듯이 1973년 다이어트는 "식이요법"을 의미했지만 1975년에 다이어트는 "체중감량"으로 의미가 바뀌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 그 이전까지 다이어트란 외래어를 설명하기 위한 괄호의 한글해석, 혹은 한글설명에 괄호로 다이어트를 넣던 별도의 해설 또한 사라지면서 다이어트는 우리말처럼 정착한다. 다이어트가 체중감량, 살 빼기로 이해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체력은 국력의 시대에서 점차 체중이 개인의 관심사로 이전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체력이 국력이란 체중의 국가 담론이 지배하는 한 체력의 구성 부분인 한 체중은 결코 사유화될 수 없었다. 체중은 여전히 국가에 종속되어 개인의 몸에 귀속되지 못했다. 체중과 체중계의 사유화는 여전히 험난했다. 몸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체중의 자신만의 숫자로 간직할 물적 기반 또한 취약했다. 1978년 시중 체중계 가격은 8천5백∼1만2천 원이었다. 같은 해 자장면 가격이 250원이었고, 초졸자 월평균 임금은 15,100원, 중졸자는 27,700원, 대졸자는 50,900원이었으니, 대졸자라 하더라도 체중계를 집에 들여놓기는 아직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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