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체중계, 몸을 길들이다 3-1: 구한말 조선과 식민지 조선의 체중과 근대

Zigzag 2021. 2. 2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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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이번 글에서는 구한말과 식민지 조선의 체중 발명과 체중계의 발견을 다룬다. 개항과 함께 조선의 무게가 도전받으면서 도량형이 적응하는 과정, 식민지화 인구관리에서 체중이 부과되고, 체중기가 체중계로 바뀌는 과정을 다룬다. 다음 글에서는 해방 이후 체중과 체중계의 변화를 다룰 예정이다. 이 글에 앞서 제1부에서는 르네상스 시대 인간의 발견과 체중계와의 관계, 산업혁명 등의 시대적 변화와 체중계 그리고 정상 체중의 관계, 풍만이 비만으로 낙인찍히는 과정, 공공 체중계의 등장과 체중의 민주화를 다루었다. 2부에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체중 도덕'의 등장, 체중계와 체중의 사유화, 그리고 체중계와 칼로리의 관계를 살피면서 체중계가 어떻게 우리의 몸을 사적으로 길들이는 도구가 되었는가를 고찰했다.

근대와 무게의 문제

체중계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무게를 다는 단위가 정해져야 했다. 조선의 무게는 개항과 함께 시작됐다. 1876년 강화도 조약과 함께 개항하게 된 조선은 그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국제(國際, international)라는 생소한 관계, 경쟁, 질서에 직면했다. 조선은 당시 중국 상고시대 이후 정착된 도량을 사용하였지만, 세종대왕의 도량개혁 이후 점차 관리가 문란해져 관과 민간에서 사용하는 도량에 차이가 있었고, 심지어 지방마다 사용하는 도량과 도량형 용기에 차이가 있어서 부산과 인천의 개항장 객주들은 교역에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다. 1884년 1월 8일 한성순보는 정책 제안의 형식으로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각국의 척도, 면적, 중량, 본위화폐, 보조화폐 단위들을 소개하고, 이를 조선의 도량과 비교하기도 했다.

한성순보의 조선과 각국 도량 비교표

독립신문의 1896년 12월 10일 자 논설은 "나라마다 물건을 헤아리고 물건에 무게를 헤아리며 물건에 척수를 헤아리는 규칙을 엄히 세워 물건을 매매"하지만 "조선은 이 규칙이 없는 까닭에 말이던지 되든지 저울이든지 동리마다 다르고" "폐단과 착란이 무수"하며 "외국과 통상 하는 터에 정해 놓은 규칙이 없는 까닭에 말이라 하면 무슨 말인지 자라 하면 무슨 자인지 알 수가 없는 고로 상무상에 대단히 이해가 있고 불편한 일이 무수 한지라 말과 되와 자와 저울을 정부에서 강철로 만들어" 통일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도량 통일을 요구한 독립신문 1896년 12월 10일자 논설

도량의 일부로서 무게는 국제관계 속에서 탄생했고 상업과 무역의 필요에 의해 측량 통일의 요구로 제기되었다. 체중은 이 근대 초의 어리둥절한 조선의 통일되지 못한 무게 속에서 싹트지 못했다.

식민화와 체중의 부과

체중의 근대는 식민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조선은 광무 2년인 1902년 길이, 무게, 부피 등의 도량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도량형제를 도입했다.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와 을사늑약의 1905년은 도량형법이 제정되어 도량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체중이 성립하기 위한 전제로서 무게의 단위가 정해졌지만, 그 무게가 몸과 이어지기 위해서는 몸에 대한 관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일제는 1906년 경무국 위생과를 설치하고, 이어 1907년에는 보건의료를 담당하는 대한의원과 공중위생을 담당하는 한성위생회를 설립했다. 1906년 보통학교령으로 조선 시대의 소학교가 보통학교로 바뀌며 일제는 학생 신체검사를 강화했다. 특히 1907년 콜레라 유행과 함께 학생들에 대한 신체검사가 실시됐다. 1907년 03월 24일 자 대한매일신보는 의사들이 각 학교를 순회하며 신체검사를 할 예정이란 공고를 내보냈다. 대한매일신보 1908년 8월 4일 자 한성사립보성중학교의 학생 모집 공고는 시험과목에 독서, 작문, 산수와 함께 신체검사를 포함했다.

한성사립보성중학교의 학생모집공고, 신체검사가 시험과목에 포함되어 있다.

일본의 제국주의화 과정은 근대화와 동반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학교는 후방기지와 예비병력으로 병영화되었다. 특히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사망자의 80%가 전염병에 의해 발생하면서 일본은 학교에서 위생교육을 강화하고 신체검사를 체계화했다. 그 결과 러일전쟁에서 질병과 전염병에 의한 사망자 수는 1/3로 대폭 줄었다. 그러한 교훈을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도 적용했다. 조선총독부는 1913년 4월 26일에 도관공립학교생도신체검사규정을 발표하고 학교의나 임시 검사의에게 학생의 신체검사를 시행했다. 당시 신체검사표에는 신장과 함께 체중이 검사 항목 중 제일 앞에 나와 있다. 식민지 조선의 체중은 서구 르네상스처럼 인간의 재발견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으며, 대신 식민지 조선 인구의 관리를 위해 발명된 것이다.

1913년 학교 신체검사표와 신체검사 통계표, 출처: 『朝鮮總督府官報』 (이희재, ' 일제하 학교신체검사 제도의 시행과 특징'에서 재인용)

체중기(體重器)와 체중계(體重計), 체중이 곧 근대

학교 신체검사에 체중측량이 들어있었지만, 일반인들에게 체중은 재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다는 것이었다. 1914년 1월 1일 자 매일신보 기사 '신체라는 저울(體重器)'은 한 남작 부인이 아이의 체중을 알고 싶어 물건을 다는 저울에 아이를 올리자 아이를 요리로 만들 작정이냐고 묻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체중계는 계량의 목적보다 체중기 즉, 일반적인 기기로서의 의미가 강했다.

체중이 무게를 다는 기기에서 신체를 재는 계량기가 된 것은 표준체격표의 등장이다. 일제는 1921년 '학교생도아동신체검사규정'을 발표했다. 이 규정에 따라 신장, 체중, 체중에서 신장을 뺀 값 3가지를 모두 별도의 발육표준표에 기록해 발육이 표준 이상인 자를 甲, 표준보다 늦은 자를 乙,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를 丙으로 규정했다. 소설가이자 교육자인 주요섭은 1925년 '소학생도의 위생교육'을 무려 35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그 중 네 번째 연재에서 그는 학생들의 신장과 체중에만 기초한 표준표로 발육상태를 측정하는 것은 신체 기관의 발달, 연령별 변화, 사회적 환경, 민족적 특성 고려하지 못한 제한된 것이라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표준표의 이점을 무시하지 못하며 미국 유학파답게 미국의 성별 아동 키-몸무게 표를 소개했다. 이 표에 대한 그의 양가적 혹은 모순적 태도는 식민지 조선의 서구와 근대를 바라보는 이중적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체중과 발육은 주요섭에게 민족의 정체성이기에 일본과 서구의 신장-체중만을 조합한 서양식 표준을 거부하였지만, 동시에 이 표준표는 근대로 가는 길이기에 거부할 수 없었다. 체중은 특히 건강과 직결되었다. 1925년 선교단체가 주최한 '공주 영아대회'에서는 "일반 영아들에 대하여 체중과 건강진단을 한 후 의복의 청결 여하와 기타를 검사하였는데 건강진단의 결과 우량자가 삼십오 명이오 그중 상을 받은 이가 열다섯 명이었다." 일본제국과 선교사들은 체중이 그 자체로서 건강을 상징하는 숫자며 동시에 근대로 가는 상징임을 끊임없이 조선인에게 주입했다.

1927년 동아일보는 '급속히 발달되는 조선아동의 체격'이라는 칼럼을 게재했다. 칼럼은 경기도 소학교, 보통학교, 중고등학교 조선 학생들이 동년의 일본 학생들에 비해 신장도 크고, 체중도 더 무거웠다는 조사 결과에 대한 것으로 체중과 발육, 근대와 탈식민의 욕구가 어떻게 서로 끈끈하게 결탁해 있는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칼럼은 "일본 아동의 건강을 능가"하는 것이다. 이 우량함은 조혼과 봉건적 구속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며, 그것은 "지식도 필요하고 행실도 필요하지만, 그중에서도 건강이 더 필요하다" 것을 강조했다. 신장과 체중의 우위가 식민지 본국 일본에 대한 승리며, 구습으로부터 근대로의 전진이다.

미돌법(米突法)과 체중계

체중계가 식민의 일상에 좀 더 근접하는 계기는 미돌법(米突法)이라 불리는 미터법이 192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1927년 실시되면서부터다. 유럽과 미국은 공중 체중계가 이미 19세기 말부터 보급되었고, 1920년대 역사나 공공관청, 시장과 상점에서 동전을 넣고 체중을 잴 수 있는 공공체중계가 널리 보급되어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공공 체중계는 아직 일상이 아니었다. 미돌법 통과로 킬로미터가 체중의 단위로 받아들여지면서 깜짝 이벤트처럼 대중들이 자신의 체중을 잴 기회가 생겼다. 1928년 미돌법 1주년에 즈음한 메트르협회의 체중계, 신장계로 사람들에게 체중을 잴 기회를 제공했다. 미돌법은 학생들의 신체검사에도 적용되어 1937년의 학생 신체검사표의 체중은 킬로그램으로 표시됐다. 공공 체중계의 보급이 어느 정도였는지 확실치는 않다. 하지만 1937년 동래온천의 공공 욕탕에 체중계가 없다는 불평 기사, 1938년 한 공중 욕탕을 이용하고 체중계 위에 올랐을 때의 쾌감을 묘사한 기사를 보면 적어도 웬만한 공중목욕탕에는 체중계가 비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대 서구의 감량은 식민지 조선의 체중에는 사치

서구에서 체중계의 숫자와 칼로리표는 체중을 줄이는 방향으로 작용했던 주술이었지만, 식민지 조선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칼로리가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1920년대 중후반이다. 1927년 3월 7일 조선일보 기사는 체중과 칼로리, 영양성분과의 관계를 다루며, 일정한 체중을 가진 사람이 취해야 할 적정 칼로리를 소개하고 있다. 1920년대 체중 도덕이 지배했던 서구와 달리 식민지 조선의 체중을 둘러싼 고민은 줄이는 것이 아니었다.

아래 1935년과 1936년의 독자 상담 편지와 대답을 보면 모두 체중을 '가정의학'에서 다룬다. 체중이 가정으로 들어 온 것이다. 두 기사에서 독자들은 각각 체중감량과 체중증대라는 서로 다른 고민을 토로하고 있다. 살을 빼는 고민을 토로하는 독자에 대한 대답은 "살이 많은" 것이 체질이면 극단적인 처방 이전에 의사와의 상담을 요구하고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등장했던 서구의 체중 도덕은 소비문화에 대한 중산층의 반발과 엄격한 자기통제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는 서구와 같은 소비문화의 인프라가 없었으며, 다이어트에 대한 욕구는 서구처럼 전 사회적이기보다는 풍요를 누렸던 극소수에 제한됐다. 비만은 아직 단죄되지 않았다. 체중은 가정으로 스며들었지만, 체중계는 가정으로 스며들 소비 인프라가 부족했고, 문화적 인프라는 형성되지 않았다. 공공 체중계의 보급은 물론 가정용 체중계의 보급도 미미했기에 체중은 여전히 신비로웠고, 아직 사적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사정은 다음에 다룰 '체력이 국력'인 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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