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주: 이번 글에서는 1980년대 이후 체중과 체중의 사유화, 체중의 세분화와 사회적 체중,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다이어트의 관계, 비만의 사회적 낙인화와 개인적 일탈화와 스마트 체중계와의 관계를 검토한다. 이 글에 앞서 제1부에서는 르네상스 시대 인간의 발견과 체중계와의 관계, 산업혁명 등의 시대적 변화와 체중계 그리고 정상 체중의 관계, 풍만이 비만으로 낙인찍히는 과정, 공공 체중계의 등장과 체중의 민주화를 다루었다. 2부에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체중 도덕'의 등장, 체중계와 체중의 사유화, 그리고 체중계와 칼로리의 관계를 살피면서 체중계가 어떻게 우리의 몸을 사적으로 길들이는 도구가 되었는가를 고찰했다. 3-1에서는 개항과 함께 조선의 무게가 도전받으면서 도량형이 적응하는 과정, 식민지화 인구관리에서 체중이 부과되고, 체중계가 체중계로 바뀌는 과정을 다루었다. 3-2에서는 체중이 해방 직후 치안의 기호로 변화하는 과정과 체중의 공적 성격, 산업화 시대의 체력은 국력이라는 구호 아래 체중의 국가적 관리, 다이어트의 식이요법에서 체중감량으로 의미 변화와 체중의 사유화 시대 개막을 고찰했다.
3저 호황과 민주화, 체중계와 체중의 사유화
1980년대 저금리-저유가-저달러 3저라는 경제적 호황과 민주화 물결 속에서 체중은 더이상 국력의 하수인인 체력의 구성 부분이 되길 원치 않았다. 체중계를 구매할 물질적 조건이 갖추어지고, 체중에 더이상 국력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아도 됐다. 1983년 시중 체중계 가격은 2만 원∼3만8천 원 정도였으며, 1982년 현재 대졸 초임은 24만 원, 중졸 이하의 생산직은 13만 5천 원이었다. 1978년 체중계 가격이 대졸 초임의 1/5, 중졸 초임의 거의 절반 수준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체중계는 이제 가정에 들어 올 물질적 조건이 된 것이다. 1985년 경인산업은 눈금식의 가정용 체중계를 처음으로 국산화해 시중에 출시하였다. 아래의 1985년 경인산업의 체중계 광고는 여러 면에서 의미심장하다. 슬림 시커(Slim seeker)라는 명칭과 날씬한 여성을 상징하는 여성 체조인이 체중계를 짚고 있는 모습은 체중계와 다이어트와의 상관성을 보여주며, 색상이 한두 종이 아닌 화려한 5종인 것은 체중계에 대한 개인의 다양한 취향의 반영이다. 무엇보다도 "가정마다 하나씩"이라는 구호는 체중계와 체중의 사유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89년의 한 기사는 체중계가 "다이어트하는 여성들은 물론 남성과 어린이도 비만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체중계는 이제 웬만한 가정의 필수품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1987년 6월 항쟁 직후인 8월, 그동안 과대광고로 금지되었던 청량음료에 '다이어트' 상표를 붙이는 것이 허용됐다. 건강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우유도 '슬림 우유'가 출시되었다. 시중에는 이뇨제, 설사약, 식욕 억제 약들이 살 빼기 약으로 팔리고 있다는 기사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체중을 줄이는 것이 확실히 특정 층에서는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1986년 공업진흥청의 두 번째 전국민남녀체위조사에 따르면 한국 남성과 여성의 체중은 1979년 첫 번째 조사보다 증가했다. 그런데 16세~25세 여성 체중은 오히려 1979년보다 0.8kg~1.5kg이 감소했다. 이제 체중계는 사유화되고, 체중은 사적인 길로 접어들었지만, 그것은 아직 일부의 관심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다이어트 붐, 체중의 세분화와 사회적 체중
1988년 서울 올림픽은 체중에 대한 중대한 전환이었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구호 아래 개인의 체중을 국가가 통제하는 개발주의 성장 패러다임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다. 개발주의 성장패러다임은 메달과 성과를 중심으로 엘리트 체육인을 양성하는 예산편중, 체육 특기자 제도, 학교 운동부 지원, 병역 특례, 연금 제도로 나타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패러다임의 절정이었던 서울 올림픽은 노동시간 단축과 여가생활의 증대로 사회체육, 생활체육 필요성을 일깨웠다. 서울대학교 체육연구소가 주최한 "올림픽 이후의 한국체육 세미나"는 관 주도의 체육에서 민간주도의 체육 담론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1988년 대한체육회 국고보조금 200억 원의 66%가 엘리트 선수양성에 들어가는 반면, 국민체육 진흥에는 고작 1억5천만 원만 투입되는 현실을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1990년 생활체육안 제정으로 이어졌고, 국민생활체육조사도 1989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조사에 따르면 1989년 체육활동인구는 전체 36.9%에서 2019년 현재 66.6%로 성장하였다. 나아가 기존의 교통부, 문교부로 분리되어 있던 경기장부터 헬스장까지 각종 체육시설이 체육부로 일원화되고 '작은 공간'개념이 도입되었다. 1989년 국민체육진흥공단 설립은 체육과 몸에 대한 새로운 전환의 반영이었다.
1990년대 다이어트는 붐을 형성했다. 1995년 보건복지부의 국민영양조사에 따르면 성인 비만자와 과체중자의 비율은 1994년 3.3%와 27.3%에서 각각 1.5%와 19%로 감소했다. 비단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의 비만과 과체중이 줄어 전 국민의 체중 감량화가 이루어졌다. 다이어트 시장의 규모는 2000년 10월 주간동아에 따르면 1992년 이래 매년 40%씩 성장했으며, 2000년 1조 원, 2017년 현재 7조5천억 원 규모로 확대됐다. 다이어트는 체중을 한편으로 더 작게 쪼개고 다른 한편으로는 더 크게 확대했다. 1994년 대학 입시 체력장 시험은 학생들의 종목별 체력점수와 별도로 학생들의 체지방비 측정 포함을 의무화했다. 체중은 몸의 몸무게와 신장과의 비율이라는 외형적 측면 외에도 체지방이라는 내면에까지 파고 들어갔다. 이와 별도로 90년대 '다이어트'란 용어는 그 적용 범위가 개인의 몸무게를 넘어선 사회적 몸무게로 확대됐다. 예산, 시설, 혹은 어떤 조직이 비대하다고 생각될 때 사람들은 다이어트라는 용어를 채택하기 시작했다. 사회와 조직을 몸에 비유하는 사회적 해석과 상상력이 발생한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비만의 사회적 낙인화 및 개인적 일탈화 그리고 스마트 체중계
이러한 체중의 미시화와 거시화는 다이어트 붐의 배후에 자리 잡은 거대한 사회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1990년대 한국의 비만에 대한 사회적 태도는 서구의 1960년대 피트니스 윤리의 시선과 유사했다. 비만은 단죄의 대상을 넘어 일종의 병이며 치료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한국의 비만에 대한 시선은 질병이란 사회적 낙인을 넘어 개인적 일탈까지 포함했다. 비만의 병리화란 사회적 시선은 국가의 시장과 사회에 대한 통제를 축소하려는 신자유주의와 병진했고, 나아가 민주화와 더불어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난 개인의 심리적 비만 상태와 함께했다. 1996년 보건사회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자신의 몸이 뚱뚱하다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은 24%지만 실제로 과체중인 비율은 14%에 불과했다. 다른 연구들에서도 비만에 대한 사회적, 개인적 위기감이 팽배했다. 비만은 사회적으로 낙인을 찍히게 됐으며, 동시에 비만한 개인은 표준과 정상에서 벗어나는 일탈자가 되었다. 비만의 사회적 낙인은 비만을 사회화하였고, 비만의 개인적 일탈화는 비만을 내면화했다. 체중은 건강뿐만 아니라 입시, 취업, 승진, 여가생활 등 사회적으로 질병 그리고 비만자는 환자로 취급될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게으르고, 무책임하며, 자기 절제를 할 줄 모르는 일탈자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체중이 사회적 낙인과 개인의 일탈을 동시에 끌어안는 시대에 체중계는 이제 몸의 무게를 눈금으로 표시하는 아날로그 한 방식으로 몸을 길들일 수 없게 되었다. 체중계는 사회적 병리로서 비만을 드러내고, 개인의 일탈에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깊숙이 몸 안으로 들어가는 인바디와 체중을 똑똑하게 보여주는 스마트함이 필요했다. 소위 스마트 체중계는 체중, 체지방, BMI, 골격량, 기초대사량, 근육량, 내장지방, 수분 몸의 상태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인바디' 한 스마트 체중계는 체중을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재구성했다. 체중계는 공공장소에서나 볼 수 있는 공공 체중계에서 각 가정의 화장실로 침투한 가정용 체중계를 넘어 이제 손목과 스마트폰으로 휴대할 수 있는 개인 체중계가 되었다. 손에 휴대할 수 있는 체중계와 체중의 데이터는 결코 사적이지 않다. 개인의 체중은 알게 모르게 사물인터넷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통해 빅데이터의 일부가 된다. 신의 지배에서 벗어나 인간을 재발견하기 위해 산토리오 산토리오가 만들었던 체중계는 이제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 인간을 재구성하는 장치로 바뀌고 있다. 인간의 이익을 양적으로 계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공리주의자 벤담이 감시 효율성의 극대화를 위해 고안했던 파놉티콘의 눈, 그리고 푸코가 타인의 감시와 피 감시자를 규율하는 근대의 사회적 기제로 설명하고자 했던 파놉티콘의 눈, 그 눈과 체중계의 눈은 다르다. 체중계의 눈은 공리적이지도, 타인을 감시하지도, 그 피감시자는 수동적이지도 않다. 체중계의 눈은 이기적이며, 자신을 감시하며, 그 피 감시자는 적극적으로 그 감시에 동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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