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사회민주당(사민당, SPD)은 158년의 역사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전통을 가진 정당으로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정당일 것이다. 2년 전 유럽의회 선거에서 15%로 전후 최악의 지지율로 녹색당에게도 밀려 3당으로 몰락할 위기에 처했던 사민당은 9월 26일 총선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1당으로 올라설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사민당의 총리 후보인 올라프 숄츠(Olaf Scholz)는 앙겔라 메르켈의 기민련(CDU)과의 대연정 내각에서 부총리 겸 재무장관으로 참여하면서 사민당의 이번 총선을 이끌고 있다. 불출마를 선언한 메르켈의 후임이 누가 될 것이며 그 정부를 누가 계승할 것인가가 중요한 선거의 규정 요인인 가운데 그는 기민련의 총리 후보인 아르민 라셰트(Armin Laschet) 보다 더 안정적이고 실용적이라는 느낌으로 독일인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그의 인기는 여론조사에서 사민당의 지지율을 10% 대에서 25%까지 끌어올려 지지율 1등 정당으로 만들었다. 그동안 자신의 후계와 관련해 비교적 말을 아꼈던 메르켈은 며칠 전 자기 당의 라셰트를 공식 지지했지만 숄츠와 사민당의 지지율이 쉽게 꺾이지는 않을 듯하다. 이 글은 독일 국제방송인 Deutsche Welle(DW, 독일의 소리)의 기사 The SPD: Germany's oldest political party 번역으로 사민당의 기원부터 최근 올라프 숄츠까지 사민당의 역사와 그 현재를 잘 정리하고 있다. - 역자 주
사회민주당(SPD):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
독일 사회민주당(사민당, Social Democrats, SPD)은 사전 여론조사에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DW는 사민당의 150년 이상의 격동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모든 정당은 그것의 바탕 신화를 가지고 있고, 사민당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적 정당이라고 주장한다. 확실히, 사민당은 독일의 것이다.
사민당의 탄생은 초기에 상대적으로 적은 권리를 가진 노동자들이 그들을 고용한 가부장적 기업들에게 처음으로 반항하기 시작한 시대에 속한다.
이 집단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정치적으로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는 사실은, 대부분 페르디난트 라살(Ferdinand Lassalle)이라는 인물의 업적 덕분이다.
1863년 5월 23일, 한 상인의 이 부유한 아들은 라이프치히에서 19세기에 사회 민주주의로 알려지게 된 단체의 전신인 전독일노동자협회(General German Workers' Association, ADAV)를 창립한 원동력이었다. 그 당시, 그 나라 시민의 절반 이상이 문맹이었다. 자유선거와 무기명 투표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박해, 급진화, 저항
1871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 제국의 통치 기간 동안, 한때 노동자 당이었던 이 정당은 빠르게 백만 명 이상의 당원을 가진 대중 운동이 되었다. 선거에서, 이 당은 일반 투표의 3분의 1을 얻었다.
사민당은 너무 인기가 많아서 새로 통일된 독일 제국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일련의 "반사회주의 법"을 통해 당을 금지시켰다. 12년 동안, 노동조합에 우호적인 사회민주주의 지지자들은 감시당하고 비난받았으며 이민을 강요당했다.
박해는 당내의 일부 분파로 하여금 급진화를 초래했다. 사민당의 다수는 혁명적 마르크시즘의 원칙을 채택하기 시작했는데, 마르크시즘은 지배적인 자본주의 구조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무산계급 사회에 의한 대체를 예견했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그 철학적 균열은 노동자들의 운동을 개혁파와 혁명파로 분열시키면서 거침없는 정치적 분열로 이끌었다.
1918년 11월 9일 독일의 마지막 황제인 카이저 빌헬름 2세가 퇴위했을 때, 사회민주운동의 양 분파는 동시에 새로운 공화국의 건국을 요구했다. 베를린 라이히탁(Berlin's Reichstag, 제국의회 건물 - 역자 주) 의회 회의실에서, 사회민주당 필립 샤이데만(Philipp Scheidemann)은 온건한 민주주의 공화국을 선포한 반면,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급진적인 스파르타쿠스 동맹을 결성함 - 역자 주)는 "사회주의-공산주의" 독일을 주장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온건파 사민당의 지지를 받고 독일 땅에서 민주주의의 첫 단계를 대표하는 바이마르 공화국은 1918년부터 1933년까지 짧은 생애 동안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다.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대량 실업 때문에, 독일의 경제 상황은 절망적으로 보였다. 약한 민주주의 제도들은 더 이상 아돌프 히틀러 치하의 국가사회주의자(National Socialist)들의 부상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4명의 사민당 의원 전원은 히틀러의 "전권 위임법" (Enabling Act of 1933, 입법부 권한을 행정부에 일임하는 법 - 역자 주)에 반대했다. 이 법은 히틀러의 전제 정치를 지지하며 독일의 민주주의를 대체한 법률이었다.
포스트 제2차 세계대전의 '동방정책'(Ostpolitik)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 SPD에게 남은 것은 전후 몇 년 동안 가장 큰 관심을 끌었던 좌익 인민전선이었다. 독일의 보수 정당이 독일을 "경제적 기적"으로 이끄는 길로 들어서자 사민당은 반자본주의적 태도를 바로잡고 개조했다.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Godesberg Program)에서 비록 강력한 사회 보장 메커니즘으로 강령을 에워쌌지만, 사민당은 시장 경제를 받아들였다.
1966년, 사민당과 전통적인 중도우파 라이벌인 기독교민주연합(기민련, Christian Democratic Union, CDU) 사이의 대연정이 시작되면서, 사민당에 의해 형성된 10년간의 전후 발전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세대의 사민당 정치인들이 이전에 여성의 참정권, 8시간 노동일, 그리고 노동조합에 대한 지지에 그들 정책의 닻을 내렸다면, 1969년, 독일 수상이자 사민당 당수인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는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평화와 화해에 그의 주의를 기울였다.
브란트는 바르샤바의 게토 영웅 기념비에서 무릎을 꿇은 것으로 197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는데, 이 행위는 현직 독일 수상에 의해 행해진 것으로 나치 독재 정권의 범죄에 대한 폴란드 국가에 대한 상징적인 사과가 되었다.
"개인적인 죄가 없는 사람이 그의 국민들의 대한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제스처 쪽으로 그를 움직인 것은 순간의 본능이었습니다, "라고 동유럽의 브란트 정책의 설계자인 에곤 바르(Egon Bahr)는 회상했다.
빌리 브란트와 그의 후계자 헬무트 슈미트의 시대는 사민당의 황금기로 여겨진다.
근본적인 변화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통해 동독과 서독의 평화적 통일을 전후한 몇 년 동안, 사민당은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기민련의 헬무트 콜(Helmut Kohl)은 그의 중도 우파 정당 정치인들을 향후 수년 동안 정부 의석에 앉혀준 명성인 "통일 총리"로 여겨졌다.
1998년 독일인들은 콜 시대의 종말을 선택했고 사회민주당의 카리스마 넘치는 게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öder)는 요슈카 피셔와 그의 녹색당과 함께 연정을 구성했다.
높은 실업률과 경기 침체로 인해 슈뢰더의 사민당은 보수적 노선과 기업 친화적인 정책을 채택하여 당의 전통적인 기반인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이탈시켰다.
"어젠다 2010"이라고 불리는 이 개념은 하르츠 IV(Hartz IV)라고 알려진 복지 삭감을 도입하여 실업자에 대한 요구 사항을 강화하고 혜택과 국가 지원을 억제했다. 이 움직임은 당을 분열시켰다. 사민당 보수주의자들은 이 정책이 일자리 성장에 유익한 영향을 미쳤다고 칭송한 반면, 보다 좌파적인 파벌들은 하르츠 IV를 비인간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이라고 비난했다.
산업 노동자들과 저소득자들인 그 당의 전통적인 유권자들은 사회민주당에 등을 돌렸고, 그 사실은 2005년 게하르트 슈뢰더의 총리 임기가 끝날 무렵에 정당 내 정체성 위기를 초래했다.
사민당은 전국적 차원에서 그리고 대부분의 연방주들에서 30% 아래로 추락했고, 10년 여의 선거 좌절을 초래했고 보수주의자들과 어울렸다(대연정을 의미함 - 역자 주).
앙겔라 메르켈의 중도 우파 기민당과 수년간 "대연정"은 사민당과 메르켈 보수주의자들에게 굴복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치명상을 입었다.
201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사민당이 기록적으로 부진한 15%의 지지율을 보인 후 사민당 당수인 안드레아 날레스(Andrea Nahles)가 사임한 후 당은 바닥을 쳤다.
사민당의 부활?
집권은 바로 올라프 숄츠(Olaf Scholz) 부총리가 2021년 선거 경선에서 용케 활용했던 것이다. 자기 당의 중도우파 실용주의자는 안정과 지속성에 대한 캠페인을 벌였다. 그는 메르켈의 노동장관을 지냈고, 후에 2018년에 메르켈의 부총리와 재무장관을 지냈다.
사민당의 사무총장으로서 그는 2010년 당시 슈뢰더의 "어젠다 2010"을 지지하여 그를 당의 원칙을 배반하는 것으로 간주한 당 좌파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당원들이 두 명의 좌파 정치인인 사스키아 에스켄(Saskia Esken)과 노르베르트 발터-보리안스(Norbert Walter-Borjans)를 선호했던 2019년 당 지도부 경선에서 패배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그가 사민당 총리 후보로 일찍 지명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기민련과 기독교사회연합(기사연, Christian Social Union, CSU) 보수주의자들은 숄츠가 극좌 정부를 구성할 계획이라고 비난했다. 숄츠는 환경주의자인 녹색당에게 접근했지만 좌파당(Left Party)과 거리를 두었다. 이 사회주의 집단인 좌파당은 동독을 통치했던 공산당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점점 더 신자유주의적인 슈뢰더 정책에 대한 항의로 2004년에 사민당을 탈당한 저명한 사회민주당 탈당자들을 포함하고 있다. 사회민주당의 좌파는 관계 회복을 옹호할 가능성이 높다.
만약 SPD가 최대 정당이 된다면, 중도파 숄츠는 또 다른 치열한 내분의 분출을 막기 위해 좌파 정당 지지자들과 까다로운 외교를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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