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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클레르크 전 남아프리카 대통령,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사후 사과 발표

Zigzag 2021. 11. 12.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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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넬슨 만델라와 함께 악명 높은 남아프리카의 인종분리정책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에 일조한 데 클라크 전 남아프리카 대통령이 11월 11일 8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남아프리카는 아파르트헤이트로 수십 년간 유엔의 제재를 받아왔음에도 이 인종주의적 정책을 쉽게 끝내지 못했다. 데 클라르크는 1989년 대통령 취임과 함께 일부 정당에 대한 금지를 해제하고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시위를 허용했으며, 1990년 넬슨 만델라의 석방하면서 남아프리카가 새로운 전환기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는 자유로운 선거로 자신의 백인 정당인 국민당이 소수정당이 될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아프리카 민족회의(ANC)를 합법화했다. 공식적으로 아파르트헤이트는 사라졌지만, 남아프리카는 여전히 그 유산 아래 있다. 남아프리카의 평화적 전환을 연 데 클레르크의 공적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리고 있지만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고 데스몬드 투투 주교는 그의 공로가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데 클라르크의 사망 후 그는 사전에 녹화된 영상을 통해 "아무런 조건 없이 아파르트헤이트가 남아프리카의 흑인, 갈색 그리고 인도인들에게 끼친 고통과 상처, 모욕과 피해에 대해 사과"했다. 그는 이 영상에서 그는 전 대통령으로서 뿐만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도 사과를 표명했다. 이 글은 Guardian의 11월 11일 자 기사 FW de Klerk issues posthumous apology for pain of apartheid의 번역으로, 그의 사과 유언, 그의 경력과 그에 대한 평가를 자세히 담고 있다. - 역자 주

프레데리크 빌렘 데 클레르크 (Frederik Willem de Klerk), 아파르트헤이트의 고통에 대한 사후 사과 발표

남아프리카 공화국 전 대통령, 85세 일기로 사망 전 영상 메시지 녹화

죽기 전에 녹화된 영상에서 데 클레르크는 "저는 아무런 조건 없이 아파르트헤이트가 남아프리카의 흑인, 갈색 그리고 인도인들에게 끼친 고통과 상처, 모욕과 피해에 대해 사과합니다,"라고 밝혔다. 사진 출처: Guardian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마지막 백인 대통령인 데 클레르크(Frederik Willem de Klerk)는 넬슨 만델라와 함께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을 감독했으며 85세를 일기로 케이프타운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무소는 사전에 녹화된 사후 비디오를 통해  남아프리카의 차별적인 백인 소수자 통치 시스템에 대해 사과를 발표했다.

"저는 아무런 조건 없이 아파르트헤이트가 남아프리카의 흑인, 갈색 그리고 인도인들에게 끼친 고통과 상처, 모욕과 피해에 대해 사과합니다, "라고 수척한 데 클레르크는 녹화에서 말했다.

그러나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미래에 대한 우려를 덧붙였습니다. “저는 우리가 거의 매일 인식하고 있는 헌법의 여러 측면의 훼손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데 클레르크의 죽음은 목요일 일찍 그의 재단에 의해 발표되었다. FW 데 클레르크 재단은 성명을 통해 “FW 데 클레르크 전 이사장이 중피종 암 투병 끝에 오늘 아침 프레즈나예(Fresnaye)의 자택에서 평화롭게 사망했습니다."라고 밝혔다.

만델라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데 클레르크는 자신이 종식을 도왔던 잔인한 제도화된 백인 소수자 지배 체제의 결과로 여전히 상처를 입은 나라에 복잡한 유산을 남겼다.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켰을 뿐만 아니라 장관으로서 백인 소수자 통치를 지지했던 데 클레르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해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시릴 라마포사(Cyril Ramaphosa)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은 자신과 정부가 슬픔에 빠졌다고 말했으며, 데 클레르크가 남아공에서 "민주주의를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덧붙였다. 라마포사는 “그는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유권자들 내에서의 심각한 반대 압력 속에서도 정당 금지 해제, 정치범 석방, 해방 운동과의 협상을 위해 용감한 결정을 내렸습니다.”라고 말했다.

만델라 재단은 별도의 성명을 통해 데 클레르크가 “남아프리카 역사의 연대기에서 넬슨 만델라와 영원히 연결될 것”이라고 밝혔다.

“데 클레르크의 유산은 거대합니다. 그것은 또한 불균등한 것으로 남아공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 고려해야 할 어떤 것입니다, "라고 만델라 재단은 말했다.

정치적 성향이 보수적이었던 변호사 데 클레르크는 요하네스버그에서 영향력 있는 아프리카너(Afrikaner)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국민당(National party) 의원으로 PW 보타(PW Botha)의 백인 소수 정부에서 일했다.

“데 클레르크의 유산은 거대하며 또한 불균등합니다." 사진 출처: Frank Martin/The Guardian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 대주교를 비롯한 많은 남아프리카 백인과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고위 인사들은 그가 집권 시 보타의 인종차별 정책을 계속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데 클레르크는 국가에 의해 조장된 호사족(Xhosa)과 줄루족(Zulus) 간의 인종 폭력을 포함해 인종 폭력이 증가하는 것을 우려하며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데스몬드 투투 재단은 데 클레르크의 사망 발표에 대해 "전 대통령이 남아프리카에서 역사적이지만 어려운 공간을 차지했다"라고 말했다.

1989년 대통령이 된 후 그는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시위를 허용하고 금지된 일부 정당에 대한 제한을 해제했으며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만델라와 비밀리에 만났다.

전환점은 당선 5개월 후인 1990년 2월 2일 드 클레르크 의회 연설에서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수감된 지도자 만델라가 27년간 수감되어 있던 감옥에서 석방될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찾아왔다. 이 발표는 수십 년 동안 인종 차별의 잔혹한 시스템으로 인해 많은 세계로부터 경멸과 제재를 받은 나라를 흥분시켰다.

이 연설은 인종 분리 정책의 공식 종료와 모든 남아공 사람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가진 입헌 민주주의를 이끌어낸 협상의 시작을 나타냈다.

9일 후,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킬 역사적인 순간 속에서 만델라는 빅터 베르스터(Victor Verster)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드 클레르크는 1994년 만델라의 ANC가 총선에서 집권할 때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소수 정부를 이끌었다.

드 클레르크는 관련된 위험을 알고 있었다. 그는 연설 다음날 기자들에게 “앞으로 닥칠 모든 일에는 분명히 불확실한 요소가 있으며, "  폭력은 과도기 내내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데 클레르크는 아파르트헤이트 종식을 위한 국민투표 결과에 '찬성'이라고 선언한 헤드라인을 게재한 지역 신문을 들고있다. 사진 출처: AP

백인 소수 통치가 끝난 후 그는 1996년까지 부통령을 역임했다.

말년에 데 클레르크는 만델라라는 우뚝 솟은 인물에 가려졌다. 투투는 2012년 데이비드 프로스트(David Frost)와의 인터뷰에서 "때로는 데 클레르크 씨가 마땅히 받아야 할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데 클레르크와 만델라 사이의 관계는, 전자가 노벨 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인정했듯이, 분열될 수 있고 격렬한 의견 불일치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만델라는 데 클레르크가 정치적 과도기 동안 남아프리카 흑인들의 살해를 허용했다고 비난했고, 데 클레르크는 만델라가 매우 완고하고 비합리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일부 백인 남아프리카 인들은 데 클레르크가 "나라를 내주었다"라고 비난했지만, 많은 남아프리카 흑인들은 그를 계속 의심스럽게 바라보았고 그의 유산은 그의 평생 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곤 했다. 특히 그가 항상 부인했던 주장, 즉 그가 국가가 후원하는 잔학 행위에 연루되었다는 비난은 논쟁의 대상이었다.

데 클레르크는 11년 전 옵저버(Observer)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했던 방식으로 변하지 않았었다면 남아프리카는 완전히 고립되었을 것입니다. 세계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부를 전복하려 했을 것입니다. 우리 경제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단 한 상자의 와인도 수출하지 못했을 것이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비행기는 어디에도 착륙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부적으로는 내전에 버금가는 상황에 처하게 됐을 것입니다.”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데 클레르크의 판단 역시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원했던 것보다 더 소프트했으며, 국내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아파르트헤이트] 시스템의 완전한 공포를 인정하고 가해자를 재판에 회부하는 데 실패한 백인 남아프리카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

이는 지난해 한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그가 아파르트헤이트를 “인류에 반하는 범죄”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 투덜거리는 것으로 보였던 한 논쟁으로 강화되었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발언이 야기했을 "혼란, 분노, 상처"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FW 데 클레르크 재단은 지난 6월 그가 폐 내막에 영향을 미치는 암 진단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그의 죽음은 아마도 불가피하게 엇갈린 반응을 맞게 되었다. 지난해 국회 방문 중 그를 살인자라고 비난했던 좌파 경제자유투사당(Economic Freedom Fighters party)의 줄리어스 말레마(Julius Malema) 대표는 트윗에 "신에게 감사합니다"라는 글에 뒤이어 다섯 개의 춤추는 이모티콘을 달았다.

말레마는 데 클레르크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전 대통령이었다는 언론 보도를 비난했습니다. 말레마는 트윗에서 “그는 전 아파르트헤이트 대통령입니다. 소셜 미디어의 다른 사람들은 데 클레르크에게 국장이 주어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전 야당인 민주동맹당(Democratic Alliance) 대표 토니 레온(Tony Leon)은 트위터에 “FW 데 클레르크 안녕히 가세요. 미하일 고르바초프처럼 그는 1990년에 물려받은 체제를 개혁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1994년에 권력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남아프리카는 시리아나 베네수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데 클레르크의 유족으로는 그의 아내 엘리타(Elita), 두 자녀 수잔(Susan)과 얀(Jan), 그리고 여러 손주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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