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뮤지컬 계의 셰익스피어로 불렸던 스티븐 손드하임이 세상을 떠났다.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작사가이자 '스위니 토드', '선데이 인 더 파크 위드 조지'(Sunday in the Park With George, 1984), '인투 더 우즈'(Into the Woods, 1987)와 같은 독창적이고 주옥같은 많은 작품을 남긴 손드하임은 확실히 가족적이고 가볍기만 했던 뮤지컬에 예술성과 심오함을 불어넣었다. 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몇 줄로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글은 뉴욕타임스의 11월 26일 자 기사 Stephen Sondheim, Titan of the American Musical, Is Dead at 91의 번역으로 다소 긴 글이지만 손드하임의 생애, 그의 주변 인물, 작품, 브로드웨이에서의 위치 등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손드하임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할만한 글이다. - 역자 주
미국 뮤지컬의 거장 스티븐 손드하임, 향년 91세로 별세
그는 20세기 후반에 극장에서 가장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작곡가이자 작사가였으며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사랑받고 유명한 쇼의 원동력이었다.
브로드웨이 역사의 작곡 거물 중 한 명인 스티븐 손드하임(Stephen Sondheim)이 코네티컷주 록스버리에 있는 자택에서 금요일 일찍 사망했다. 그의 음악과 가사는 미국 무대 뮤지컬의 예술적 기준을 높이고 재설정했다. 그는 91세였다.
그의 변호사이자 친구인 F. 리처드 파파스(F. Richard Pappas)가 그의 사망을 발표했다. 그는 원인을 알지 못하지만 손드하임 씨가 아픈 것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며 갑작스럽게 사망했다고 덧붙였다. 전날 손드하임 씨는 록스베리에서 친구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추수감사절을 보냈다고 파파스는 전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창작 경로를 모색한 지적으로 엄격한 예술가인 손드하임 씨는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20세기 후반의 연극계에서 가장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작곡가이자 작사가였다.
그의 작업은 단어와 음악을 결합하여 두 가지 모두를 향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웨스트 사이스 스토리'(West Side Story)와 '집시(Gypsy)의 가사를 쓴 1950년대 후반 초기 성공부터, 미국 대통령을 죽이거나 죽이려 했던 남성과 여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어쎄신'("Assassins) 그리고 진정한 사랑의 본질에 대한 오페라적 탐구인 '패션'(Passion)이란 두 개의 대담한 뮤지컬의 곡과 가사를 썼던 1990년대까지 그는 가차 없이 혁신적인 연극적 동력이었다.
손드하임이 가사와 음악을 모두 쓴 최초의 브로드웨이 쇼인 1962년 희극 코미디 '광장으로 가는 길에 생긴 재미있는 일'(A Funny Thing Happened on the Way to the Forum)은 토니상 최우수 뮤지컬상을 수상하고 2년 이상 계속 공연되었다.
그의 가장 생산적인 시기인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그는 '컴퍼니'(Company, 1970), '폴리스'(Follies, 1971), '리틀 나이트 뮤직'(A Little Night Music, 1973), '퍼시픽 서곡'(Pacific Overtures, 1976), '스위니 토드'(Sweeney Todd, 1979), '메릴리 위 롤 어롱'(Merrily We Roll Also, 1981), '선데이 인 더 파크 위드 조지'(Sunday in the Park With George, 1984), '인투 더 우즈'(Into the Woods, 1987) 등 놀랍도록 독창적이고 다양한 작품들을 내놓았다.
연극계 역사상 손드하임 씨를 동료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자신의 악보에 따라 가사를 쓴 주요 연극 작곡가의 목록은 짧다. 여기에는 어빙 벌린(Irving Berlin), 콜 포터(Cole Porter), 프랭크 로서(Frank Loesser), 제리 허만(Jerry Herman) 및 노엘 코워드(Noël Coward)가 포함된다.
손드하임 씨는 작곡이나 작사를 할 때 대개 늦은 밤 독방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그는 종종 극단의 협력적 성격에 대해 사랑스럽게 말했다. 경력의 첫 10년 후, 그는 다시는 피고용 작가가 되지 않았고, 그의 쇼에 대한 기여는 항상 작품의 개념과 실행에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는 공동작업자들, 특히 프로듀서이자 감독인 할 프린스(Hal Prince), 오케스트라의 조나단 튜닉(Jonathan Tunick), 그리고 나중에는 작가이자 감독인 제임스 라핀(James Lapine)을 선택했는데 이들은 음악적 형식을 엔터테인먼트의 한계를 넘어 확장하려는 야망을 공유했다.
손드하임 씨의 음악은 항상 그 자신의 음악으로 인식될 수 있었지만 그는 눈부시게 다재다능했다. 그의 멜로디는 1964년에 실패한 뮤지컬 'Anyone Can Whistle'의 타이틀 곡, 'Merrily'의 Our Time, 'Night Music'의 그의 개인 노래 중 가장 유명한 Send In The Clowns와 같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으로 단순할 수 있다. 또는 'Forum'에서 Everybody Ought to Have a Maid와 같이 경쾌하고 기발하다.
또한 'Company'의 Ladies Who Lunch처럼 뻔뻔하고 씁쓸할 수도 있고, '스위니 토드'의 웅장하고 섬뜩한 왈츠 A Little Priest처럼 광범위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Passion'의 애절한 I Read처럼 필사적으로 갈망할 수 있다.
토니상과 퓰리처상
그는 연설을 하는 독백, 대화식 듀엣, 수다스러운 트리오와 4중창을 작곡했다. 그는 박자표와 형식을 이용했다. 'Night Music'을 위해 그는 왈츠, 두 개의 사라반드, 두 개의 마주르카, 폴로네즈, 에뛰드 및 지그를 썼다. 거의 모든 악보가 삼박자의 순열로 쓰였다.
전반적으로 그는 'Side by Side by Sondheim, 'Putting It Together 및 자서전적인 'Sondheim on Sondheim'과 같은 개요적 시사극을 제외한 십여 개의 브로드웨이 쇼의 음악과 가사를 모두 썼다. 그중 5개는 토니상 최우수 뮤지컬상, 6개는 최우수 오리지널 스코어상을 수상했다. 둘 다 수상하지 못한 쇼 "Sunday in the Park"는 1985년 드라마 부문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의 쇼의 많은 리바이벌 중 3개는 2004년 'Assassins'를 포함하여 토니상을 수상했다. 비록 'Assassins'는 1990년 오프 브로드웨이(Off Broadway, 브로드웨이 외곽의 소규모 혹은 비상업적 무대 - 역자 주)에서는 선보였고 브로드웨이에서는 공연된 적이 없었지만 말이다.
1993년 손드하임 씨는 평생 공로를 인정받아 케네디 센터 훈장(Kennedy Center Honors)을 받았으며 2015년에는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 메달을 수상했다. 2008년에는 평생 공로로 토니상을 받았고, 2010년에는 아마도 최고의 쇼 비즈니스 영예로 웨스트 43번가에 있는 브로드웨이 하우스인 헨리 밀러 극장이 그를 기리기 위해 개명했다.
2020년 3월 그의 90세 생일을 맞아 바비(Bobby)의 중심역에는 카트리나 렝크(Katrina Lenk)가 연기한 'Company'가 브로드웨이에서 재공연 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바이러스 대역병으로 연기되었다. 뉴욕타임스는 그를 위한 특별 섹션을 게재했으며 브로드웨이 공연자들이 그의 노래를 부르는 가상 콘서트 'Take Me to the World: A Sondheim 90th Birthday Celebration이 Broadway.com YouTube 채널에서 스트리밍 되었다.
맨해튼의 East 49th Street에 있는 타운하우스를 유지하기도 했던 손드하임 씨는 대역병 기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코네티컷 서부의 록스베리(Roxbury)에서 보냈다.
그러나 그는 이번 달에 자신의 두 뮤지컬 리바이벌, 11월 14일 로어 맨해튼의 클래식 스테이지 컴퍼니에서 열린 'Assassins'의 개막식 공연과 다음날 밤 Bernard B. Jacobs Theater에서 열리는 오랫동안 연기된 패티 루폰(Patti LuPone)이 출연한 'Company"의 첫 번째 프리뷰를 보기 위해 뉴욕으로 돌아왔다.
손드하임 씨는 두 작품 모두에 "매우" 만족했다고 그의 변호사인 파파스 씨가 말했다.
손드하임은 연극 활동 외에도 프랑스 금융가이자 횡령자에 관한 알랭 르네(Alain Renais)의 1974년 영화 "스타비스키(Stavisky)"에서 그의 노래 Sooner or Later(I Always Get My Man)"를 비롯한 영화 음악을 가끔 작곡했다. 그는 워렌 비티(Warren Beatty)의 Dick Tracy로 1991년 아카데미 상을 수상했다. 그의 쇼에서 6개의 캐스트 앨범이 그래미 상을 수상했으며 Send In the Clowns는 1975년 그래미 올해의 노래 상을 수상했다.
아마도 'Forum'을 제외하고 손드하임 씨의 쇼는 주제, 형식 또는 둘 다에서 엄청난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커플과 서로의 독신 남자 친구가 등장하는 삽화로 구성된 'Company'는 결혼에 대한 씁쓸한 반성이었다. 'Pacific Overtures'는 일본의 근대화를 일본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세기 런던의 복수심에 불타는 이발사에 대한 피 묻은 이야기인 'Sweeney Todd'는 무대와 음악의 음색과 오페라에서 그랑기뇰(Grand Guignol, 공포와 선정성을 강조한 극 - 역자 주)에 접근했다. 1974년 메릴 스트립이 출연했던 'The Frogs'는 1974년 예일 대학교 수영장에서 초연되었고 2004년 브로드웨이로 바뀌었다.
손드하임 씨는 비록 매우 짧은 희곡을 쓰고 작곡을 했지만, 자신을 작곡가라기보다는 극작가라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가사는 꼼꼼하게 지적이고 복잡한 생각이나 감정적 양가감정에 반향을 일으키며 종종 불가능할 정도로 영리했지만 영리하기만 한 경우는 드물었다. 그의 언어는 때로 박식했지만 미사여구는 아니었다. 그는 라인 끝에서 뿐만 아니라 라인 안에서도 세계적인 수준의 운율을 지닌 체조 선수였다. 'Sweeney Todd'의 엽기적인 메뉴에서 구운 요리 중 하나는 "실제 양치기가 뿌려진 양치기 파이"(shepherd’s pie peppered with actual shepherd)였다. 그리고 그는 허용 가능한 말장난을 위해 최고 기준을 유지했거나 또는 적어도 그러한 시도를 했었다.
라임과 비트
그의 2010년 예술 회고록 Finishing Hat(이 명칭은 'Sunday in the Park'의 노래 제목에서 따왔다. 2011년에 후속작 Look, I Made a Hat이 발표됨)는 여러 면에서 작사 기술에 대한 입문서였다. 그 속에서 그는 불필요한 형용사를 덧붙여 리드미컬하게 줄을 채우고 멜로디 선에 주의력이 부족한 것 등 수많은 죄에 대해 스스로 책망했다. 예를 들어, 'West Side Story'의 Somewhere에서, 오프닝 구절의 가장 높은음은 2박자에 있는데, 이것은 잘 알려진 가사인 '“There’s a place for us”에서 "a"라는 단어에 강세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서두에서 가장 중요하지 않은 단어가 가장 중요한 음 얻은 단어"라고 썼다.
'West Side Story'의 또 다른 예에서 그는 젊은 푸에르토리코 여성 합창단이 부르는 America의 스탄자에 대해 불평했다.
그는 그의 자서전 작가 메릴 세크레스트(Meryle Secrest)에게 1998년 저서 'Stephen Sondheim: A Life'에서 "청중에게 명확하기 위해 가사는 음악 위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가사를 두 번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으며, 만약 가사가 자리잡지 못하고 음악이 튈 때 튀지 못하고, 음악이 고조될 때 고조되지 못하면 청중은 혼란스러워집니다."
'America'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나에게는 다음과 같은 멋진 4 행시 있습니다: 나는 미국에 있는 것이 좋다/미국에서 나는 OK/미국에서 모든 것이 무료/미국에서는 적은 비용이면 된다.(I like to be in America/OK by me in America/Everything free in America/For a small fee in America). 작은 'for a small fee'는 의 재치(zinger)였습니다. 'for'가 강조되고 'small fee'가 그렇게 빨리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말이죠. 그래서 이 구절은 '포 스모피 인 어메리카.'(For smafee in America.)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무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손드하임 씨의 가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가사가 대체로 캐릭터 중심적이며 감정적 양가성, 고뇌 또는 깊은 갈등을 표현하는 정신에 대해 종종 탐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Send In the Clowns에서 그는 이 노래를 부르는 캐릭터가 나이 든 여배우이기 때문에 로맨틱한 기회를 놓친 유명한 원고를 극장의 언어로 표현했다.
내가 문을 여는 것을 멈추었을 때,
마침내 내가 원했던 것이 당신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늘 하던 솜씨 다시 입장을 하고,
내 대사는 확실하고,
아무도 없었다.
'Anyone Can Whistle'의 타이틀곡에서 그는 사랑하기 힘든 여성의 관점에서 이렇게 썼다.
누구나 휘파람을 불 수 있어,
그들은 그렇게 말하지
쉬워.
누구나 휘파람을 불 수 있어,
과거의 아무 날에
쉬워.
매우 간단해.
긴장을 풀고, 내려놓고, 날려 보내.
누군가 내게 왜냐고 묻겠지
내가 못할 것 같아?
나는 탱고를 출 수 있고
나는 그리스어를 읽을 수 있어.
쉽지.
나는 용을 죽일 수 있어
과거의 아무 주에
쉬워.
어려운 것은 간단하고,
자연스러운 것은 힘들지
어쩌면 네가 보여줄 수 있겠지
놔주는 방법을
경계를 낮춰.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워.
휘파람을 불게 되면
나를 위해 불러줘.
수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은 'Anyone Can Whistle'은 저자 자신의 절실한 외침(cri de coeur)라고 이론화했지만 손드하임 씨는 부인했다. 'Anyone Can Whistle'이 내 신조라고 믿는 것은 내가 전형적인 억압된 지식인이고 그것이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믿는 것입니다."라고 그는 'Finishing Hat'(손드하임의 자서전 - 역자 주)에서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수년 동안 대체로 고독한 낭만적인 삶을 살았던 것은 사실이다.
'Anyone Can Whistle'과 'West Side Story, 'Gypsy' 및 'Do I Hear Waltz? '를 쓴 극작가이자 감독인 아서 로렌츠(Arthur Laurents)는 "나는 항상 그 노래가 스티브(스티븐 손드하임 - 역자 주)의 묘비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세크레스트에게 말했다.
60대에 잠시 동안 손드하임 씨는 맨해튼 타운하우스를 젊은 작곡가 피터 존스(Peter Jones)와 함께 썼고, 2017년에는 유족인 제프리 롬리(Jeffrey Romley, 손드하임의 남편 - 역자 주)와 결혼했고, 이복형 월터 손드하임(Walter Sondheim)과 함께 살았다.
박스 오피스 투쟁
고결한 야망, 주제의 진지함, 선율적 실험, 감정적 불협화음과 같은 이러한 모든 이유 때문에 손드하임 씨의 쇼는 대부분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지만 거의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는 쉽게 흥얼거릴 수 있는 곡을 쓰지 않고, 그의 관점은 암울하지는 않더라도 엄격하다는 평판에 시달렸다. 같은 이유로 모든 출연자들이 그의 쇼에 적합한 것은 아니었지만, 수년에 걸쳐 일레인 스트리치(Elaine Stritch), 안젤라 랜즈베리(Angela Lansbury), 바바라 쿡(Barbara Cook) 그리고 버나뎃 피터스(Bernadette Peters)와 같은 몇몇 유명한 가수들이 그의 충실한 통역사가 되었다.
손드하임 씨는 청중들에게 전임자들의 쇼가 기대하게 만들었던 상쾌하고 기분 좋은 음악적 경험이나 행복하게 해결된 내러티브를 거의 제공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영국에서 온 앤드류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의 메가 히트인 "캣츠(Cats)"와 "오페라의 유령(Phantom of the Opera)", 그리고 알랭 부블릴(Alain Boublil)과 클로드-미셸 쉔베르그(Claude-Michel Schönberg)의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과 '미스 사이공'(Miss Saigon), 뒤이은 디즈니의 기업 프로덕션처럼 1980년대와 90년대의 지배적인 뮤지컬 극장 스타일이 된 호화로운 스펙터클, 힘찬 악보 또는 멜로 드라마틱한 스토리텔링을 제공하지 않았다.
손드하임 씨가 음악과 가사를 모두 쓴 쇼 중에서 그의 첫 번째 "Forum"은 브로드웨이에서 964회 공연으로 가장 긴 공연이었으며, 그의 두 번째 쇼인 'Anyone Can Whistle'은 9회 동안 계속되었다. 어떻게 이상주의적인 젊은 예술가들이 나이가 들면서 냉소적으로 성장하는가에 대한 코프만과 하트(George Kaufman와 Moss Hart는 연극 9편을 공동 저술했다 - 역자 주) 역 연대기(reverse-chronology) 연극을 문제적으로 각색해 유명한 "Merrily We Roll Also"는 16회 만에 무대에서 내려졌다. 하지만 그의 성공조차도 거의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의 브로드웨이 쇼 대부분은 초기 공연에서 공연 비용을 회수하는 데 실패했다.
손드하임은 2000년 70세가 되었을 때 뉴욕타임스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항상 같은 일을 두 번 하지 않으려고 양심적으로 노력했습니다."라고 자신의 경력을 회상했다. “당신이 지그 재그로 뛰면(broken-field running, 미식 축구에서 주자가 상대의 태클을 피하기 위해 요리 조리 뛰는 모양 - 역자 주), 토마토가 그렇게 많이 당신을 맞출 수 없습니다. 나는 확실히 주류에서 벗어난 느낌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뮤지컬에서 일어난 일은 기업적이고 천편일률적인 일(cookie-cutter stuff)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유행에 뒤떨어진다면, 유행에 뒤떨어진 것이겠지요. 독불장군(maverick)이 된다는 것은 단지 다르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쇼가 어떻게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당신의 비전을 갖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어머니와 단둘이
스티븐 조슈아 손드하임(Stephen Joshua Sondheim)은 1930년 3월 22일 맨해튼에서 태어나 처음에 어퍼 웨스트사이드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인 허버트 손드하임(Herbert Sondheim)은 양장 회사의 소유주였다. 그의 어머니인 폭시(Foxy)로 알려진 전 에타 자넷 폭스(Etta Janet Fox)는 스티븐이 10살이 되던 해 남편이 떠날 때까지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는 잠시 군사 학교에 보내졌다가 나중에는 펜실베이니아의 조지 학교에 보내졌다. 16세가 될 때까지 그녀의 외아들인 스티븐은 대부분 어머니와 함께 살았고, 어머니와 평생 동안 관계가 좋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재혼하여 두 아들을 더 낳았다.)
손드하임 씨는 부모가 별거한 후 몇 년 동안 그의 어머니가 자신을 남편과 똑같이 대했다고 회상했다. 그의 어머니는 한편으로는 성적으로 추근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경시했다. 손드하임 씨는 성인이 되어서 그녀를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심장 수술을 받기 전날 밤, 그녀는 아들에게 편지를 써서 손으로 배달시켰다. 그 편지에는 "내 인생에서 유일한 후회는 너를 낳은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역할을 했다. 그녀는 도로시 해머스타인의 친구였는데, 그의 남편은 작사가인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Oscar Hammerstein II)였다. 그들의 아들 제이미(Jamie)는 어린 스티브와 친구가 되었고 해머스타인 가족이 펜실베이니아 농장으로 이사했을 때 7세에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스티븐은 그곳을 방문하여 여름 동안 머물렀다.
그의 어머니는 그 후 근처에 집을 샀고 스티븐은 해머스타인 가족의 집에 너무 자주 갔기 때문에 그는 가족 구성원으로 생각되었다. 해머스타인 자신은 아버지 대신이자 멘토가 되었다. 비록 손드하임은 후에 해머스타인을 높은 능력의 작사가이지만 종종 결함을 가진 작품의 작사가로 평가했음에도 불구하고, 'Finishing Hat'에서 "내가 작곡가가 된 것은 10대 시절 그를 존경했기 때문입니다."라고 썼다. 해머스타인은 조지 스쿨에서 쓴 소년의 첫 뮤지컬을 "내가 읽은 것 중 최악의 것"이라고 잔인하게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나는 그것이 재능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끔찍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왜 끔찍한지 알고 싶다면 내가 말해줄게."
손드하임 씨의 설명에 따르면, 오후 내내 그에게 대부분의 작곡가들이 평생 배우는 것보다 더 많은 기술 대해 가르쳐 주는 개별지도가 이어졌다. 해머스타인은 그를 위해 작문 연습의 길을 제시했다. 그것은 좋은 연극을 뮤지컬로 각색하고, 결점이 있는 연극을 뮤지컬로 각색하고, 다른 매체의 스토리를 뮤지컬로 각색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독창적인 이야기를 뮤지컬로 쓰는 것이다. 이 젊은 손드하임 씨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매사추세츠 윌리엄스 칼리지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지적이고 엄격한 하모니 전문가인 로버트 바로우(Robert Barrow) 아래서 진지한 작곡 연구로 연극 작업을 보완했다. 그에 따르면 그는 바로우로부터 “예술은 영감이 아니라 작업이며, 발명은 기술(craft)과 함께 온다”는 교훈을 모았다. 손드하임은 나중에 아방가르드 작곡가인 밀턴 바비트(Milton Babbitt)와 독립적으로 공부했다.
손드하임 씨의 첫 번째 전문 쇼 비즈니스 직업은 극장이 아니었다. 해머스타인을 대리하는 에이전시를 통해 그는 한 쌍의 도시 유령이 출몰하는 소란스러운 은행가에 관한 1950년대 텔레비전 코미디 'Topper'의 작가로 고용되었다(훨씬 후에 손드하임 씨는 배우 앤써니 퍼킨스[Anthony Perkins]와 함께 "The Last of Sheila"라는 대본을 썼다. 이 영화는 1973년에 제작되었고 허버트 로스[Herbert Ross]가 감독했다.). 50년대에 그는 단어 게임과 퍼즐의 전문가가 되었고 정교한 게임의 발명가가 되었다. 1968년부터 1969년까지, 그는 뉴욕 잡지를 위해 수수께끼 같은 십자풀이를 만들었다.
그의 연극적 주의교란(misdirection, 마술에서 관객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유혹하는 것 - 역자 주)과 미스터리에 대한 그의 친화력은 그의 친구이자 극작가인 앤서니 쉐퍼(Anthony Shaffer)에 의해 인정받았다. 그는 자신의 연극 'Sleuth'에서 교활한 복수심에 불타는 오쟁이 진 남편은 부분적으로 손드하임 씨를 기반으로 했다. (이 연극에는 한 때 '누가 스티븐 손드하임을 두려워하나?'[Who’s Afraid of Stephen Sondheim?]라는 잠정 제목이 붙었다.)
브로드웨이 진출
손드하임 씨는 20대 초반에 첫 번째 전문 쇼를 작곡했는데, 그것은 필립 G.(Philip G.)와 줄리어스 J. 엡스타인(Julius J. Epstein)의 연극 'Front Porch in Flatbush'를 각색한 뮤지컬 'Saturday Night'이었다. 손드하임은 작곡가 프랭크 레서(Frank Loesser,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의 작곡가 - 역자 주)가 거절한 일자리인 가사와 음악을 모두 쓰는 직업을 얻었다. 이 쇼는 1955년에 발표될 예정이었으나 제작자인 레무엘 에이어스(Lemuel Ayers)가 자금 조달을 완료하기 전에 사망하여 제작이 중단되었다. 이 쇼는 1997년에서야 런던의 작은 회사에 의해 선보였다. 그 후 시카고에서 상영되었고 마침내 2000년에 뉴욕의 오프 브로드웨이 Second Stage Theatre에서 초연되었다.
손드하임 씨는 'West Side Story'와 Gypsy' 중 그 어느 하나를 그의 브로드웨이 첫 공연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싫어했다(손드하임은 두 공연 모두 작사자로 참여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작사가일 뿐만 아니라 작곡가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Finishing the Hat.'에서 그는 "저는 가사를 쓰는 것보다 곡 쓰는 것을 더 즐겼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헤머스타인의 조언에 따라 두 가지 모두를 하는 것에 동의했다. 해머스타인은 첫 번째로 그가 번스타인, 로렌츠(그가 그 책의 저자, 로렌츠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와 '집시'를 집필했다 - 역자 주), 제롬 로빈스(Jerome Robbins,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안무가이자 동명 영화의 감독 - 역자 주) 감독과의 협업으로 이득을 얻을 것이며, 두 번째로 에설 머먼(Ethel Merman, 성량이 풍부한 뮤지컬 가수로 뮤지컬 'Gypsy' 포스트에 그의 이름이 제목보다 크게 인쇄될 정도로 유명했다 - 역자 주)과 같은 스타를 위해 집필하면서(비록 머먼은 보다 경험이 많은 줄리 스타인[Jule Styne]을 작곡가로 원했지만) 이득을 볼 것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손드하임은 'Gypsy' 이후에 한 번만 다른 작곡가의 가사를 썼는데, 그것은 로렌츠의 희곡 'The Time of the Cuckoo'를 기반으로 한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dgers)와의 불행한 공동 작업인 'Do I Hear a Waltz?'이다.
손드하임 씨는 로렌츠와 리처드의 큰 딸 메리 로저스(Mary Rodgers)로부터 그 일을 할 것을 요청받았다. 그는 십 대 시절 로저스를 해머스타인 가족의 집에서 만났고 여러 해 동안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글쓰기 파트너로서 적대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몇 년 후 손드하임 씨는 해머스타인이 "제한된 재능과 무한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고 로저스는 그 반대였다. 이 쇼는 비록 1965년 220회 공연되었지만, 브로드웨이의 리바이벌 한 번도 없었고, 둘 중 어느 누구도 그것을 성공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손드하임 씨의 가장 위대한 작품의 시대는 해롤드 프린스(Harold Prince)가 그의 감독이 되었을 때 시작되었다. 그들은 1940년대 후반이나 1950년대 초반에 로저스 씨가 소개한 오랜 친구였으며 프린스 씨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프로듀서였다. 그는 'She Love Me'(1963)와 'Cabaret'(1966)과 같은 음악적 성공으로 감독으로서도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프린스 씨는 1970년대에 'Company', 'Follies', 'A Little Night Music', 'Pacific Overtures' 및 'Sweeney Todd' 등 5개의 손드하임 뮤지컬을 감독했으며 상업적으로 모두가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 혁신적이었다. 그것은 개별적으로 권위 있는 비전이 대부분 상호보완적이었던 뛰어난 재능을 지닌 두 예술가의 산물이다. 프린스 씨가 자연스럽게 쇼의 빅 픽처, 그 모습(look), 페이스를 보았을 때, 노래가 극의 핵심 요소라는 믿음을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에게서 물려받은 손드하임 씨는 그 아이디어를 더 발전시켰다. 그는 언어와 음악을 통합했을 뿐만 아니라 노래에 극작가의 관심을 불어넣었다. 즉, 가수에게 캐릭터 묘사를 심화하기 위한 자료를 제공하고 리허설에서 전달 및 딕션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 파트너십은 'Merrily We Roll Also'에서 무너졌는데, 부분적으로 젊은 캐릭터뿐만 아니라 환멸을 느끼는 성인까지 연기해야 하는 젊은 출연진에 의해 방해받았으며, 프린스 씨가 인정한 전체로서 쇼의 적절한 모습 찾기의 실패에 의해 방해받았다.
프린스 씨는 손드하임의 전기에 대해 세크레스트 씨에게 “나는 그것을 어떻게 감독할지 결코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난는 상당한 정도로 '그것이 어떻게 보일 것인가?'로부터 작업을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그것이 쇼의 원동력이 됩니다. 나는 결코 그것을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Merrily'는 그 이후로 오프 브로드웨이, 지역 극장 및 해외에서 여러 삶을 살았는데, 여러 프로듀서와 감독들이 문제를 해결하고 생생하고 심금을 울리는 작품으로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젊은 협력자
어쨌든 두 사람은 20년 넘는 창조적인 동료관계를 청산했고, 20세기 초 한 쌍의 기업가적 미국 형제에 관한 많은 수정된 뮤지컬 버전에 합의하기 전까지 함께 일 하지 않았다. 이 작품은 이 전과 후의 공연에서 'Gold', 'Wise Guys', 'Road Show' 등 다양한 타이틀이 붙여졌다. 프린스 씨 아래서 이 작품은 'Bounce'라는 이름으로 2003년 시카고 Goodman Theater와 워싱턴 Kennedy Center에서 제작됐다.
프린스 씨가 그의 창작 활동에서 부재한 동안 손드하임 씨는 젊은 공동 작업자인 제임스 라핀(James Lapine)과 팀을 이루어 손드하임 씨의 경력에서 가장 지적인 작품을 함께 만들었다. 여기에는 친숙한 어린이 동화를 어두운 성인 우화로 재구성한 "Into the Woods"가 포함되었다. 'Passion'은 사랑의 본질에 대한 거의 오페라 같은 명상이다. 'Sunday in the Park With George'의 1막은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가 그의 걸작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A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를 그리면서 화가인 그의 예술적 과정을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며, 2막은 한 세기를 건너뛰며 어떻게 당대의 예술가들이 보다 소비자 의식이 높은 시대에 예술을 만드는가를 그린다.
춤도 추지 않고 단순한 줄거리로 인해 쇼에서 뮤지컬 극의 관습은 거의 없었지만 프랭크 리치(Frank Rich, 뉴욕타임스의 날카로운 뮤지컬 칼럼으로 유명한 평론가 - 역자 주)가 타임스(뉴욕타임스를 의미 - 역자 주)에서 썼듯이 놀라울 정도로 독창적이고 매우 만족스러웠다. 리치는 이렇게 적었다. "내가 아는 것은 손드하임 씨와 라핀 씨가 대담하고 잊혀지지 않는 독특한 방식으로 감동적인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손드하임 씨의 가장 비평적으로 찬사를 받은 쇼 중 하나로 604회 공연되었다. 그리고 많은 비평가들과 다른 손드하임 애호가들은 마치 그가 예술가의 삶에 대한 쇠라의 견해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사용한 것처럼 그의 가장 개인적인 진술을 발견했다. 쇼의 시그니처 곡인 Finishing the Hat*에서 쇠라의 그림에 대한 헌신이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헌신을 대체함으로써 그녀를 잃게 된 상황에서 쇠라는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세상에 가져오는 기쁨에 대한 슬프지만 힘찬 찬가를 제공한다. 그것은 이렇게 끝난다.
* 역자 주: Finishing the Hat은 '모자를 완성하다'는 의미지만, Hat은 모자 외에도 '맡은 바 일', '역할'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Finishing the Hat은 '모자를 완성하다'는 문자적 의미 외에 은유적으로 '맡은 바 일을 마치다' '역할을 다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Finishing the Hat'는 조르주 쇠라는 사랑하는 여인이 떠나도 화가로서 자신의 걸작인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를 완성해야 하는 비극적이면서도 동시에 장엄한 화가로서의 운명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당신이 원했던 여자가 갔을 때,
당신은 스스로에게 “글쎄, 나는 내가 주는 것을 준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당신을 기다리지 않을 여자는 알고 있지
당신이 어떻게 살아가든
항상 곁을 지키고 있는 일부가 있어,
하늘을 그리고,
모자를 완성하고
모자를 시작하고
모자를 완성하고
봐, 내가 모자를 만들었어
모자가 없었던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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