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음악

NFL과 미국 애국가: 애국심과 스포츠의 영합, 애국과 저항, 통일과 분열의 뒤엉킨 역사

Zigzag 2022. 2. 13.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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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 주: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에서 허공을 찢는 전설적 기타리스트 흑인 지미 헨드릭스의 일렉기타 소리에서 튕겨 나오는 미국의 애국가 '성조기여 영원하라'는 백인 중산층 애국심에 대한 조롱이었다. 불과 1년 전인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미국 땅의 저주받은 자들인 흑인 단거리 선수 토미 스미스(Tommie Smith)와 존 카를로스( John Carlos)가 메달 시상대에서 검은 주먹을 들어 올리며 인종적 부정의에 항의했을 때 흘러나왔던 음악이었다. 오늘날 미국의 가장 사랑받는 스포츠인 미식축구는 2차 대전 전까지만 해도 야구와 복싱의 인기에 미치지 못했다. NFL의 인기를 끌어올린 것 중의 하나는 2차 대전 후 최대로 끌어올려진 애국심을 경기장으로 흡수한 것이다. 이전까지 드문 이벤트였던 애국가 연주를 매 경기마다 도입했다. 또한 민권운동과 베트남전으로 애국가가 조롱받고 더 이상 스포츠 경기에서 들을 수 없었던 시점을 지나 베트남전의 패배로 미국이 내부적으로 갈라지고 외부적으로 위신이 추락한 1976년 NFL은 애국가를 다시 경기장 안으로 불러들였다. 미국의 애국가와 그 의미는 시대에 따라 늘 변화했고, 그것은 때론 통일과 화합 때론 분열과 갈등의 상징이기도 했다. NFL과 애국가는 애국심과 스포츠의 영합을 잘 보여준다. 이 글은 미시간 대학교 Musicology, Arts Leadership & Entrepreneurship 부교수인 마크 클라크(Mark Clague)의 Conversation 2월 10일 자 기고  A brief history of the NFL, ‘The Star-Spangled Banner,’ the Super Bowl and their tangled saga of patriotism and dissent의 번역으로 간략한 NFL과 애국가의 역사, 미국 애국가가 시대에 따라 어떤 의미 변화를 겪었는가, 그리고 스포츠가 애국심과 어떻게 영합하였는가를 살펴보고 있다. 

NFL의 간략한 역사, '애국가', 슈퍼볼, 그리고 그들의 애국심과 반대의 얽히고설킨 이야기

휘트니 휴스턴이 1991년 1월 27일 걸프전 당시 슈퍼볼 XXV에서 국가를 부르고 있다. 이미지: Michael Zagaris/Getty Images

1945년 8월 NFL 커미셔너 엘머 레이든(Elmer Layden)이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현직 대통령은 프로 축구 경기에 참석한 적이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로 향하고 있었고 커미셔너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어느 날 어떤 게임이든 볼 수 있는 골든 패스를 제공했다.

프로축구는 아직 초기 단계였다. NFL은 겨우 25살이었고 야구와 복싱이 더 유명했다. 그래서 레이든은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홍보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약속을 했다. 그것은 매 경기마다 '성조기여 영원하가'(The Star-Spangled Banner, 이하 애국가)를 연주하는 전시 관행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것이다.

"애국가 연주는 킥오프와 마찬가지로 모든 게임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그는 선언했다.

'애국가'는 조지타운의 변호사였던 프랜시스 스콧 키(Francis Scott Key)가 1812년 전쟁 중 영국의 공격으로부터 볼티모어를 놀랍고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것을 목격한 후 썼다. 그는 대부분이 배웠던 것처럼 시를 쓰지 않았고 이미 잘 알려진 선율에 맞춰 가사를 만들었다. 그의 창작물은 언제나 심금을 울리고 마음을 변화시키는 단어와 음악을 결합하는 노래였고 여전히 그런 노래이다.

키의 목표는 분단된 국가를 통합하는 것이었다.

컨트리 스타 페이스 힐(Faith Hill)이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열린 2000년 슈퍼볼에서 애국가를 공연하고 있다. 사진: Brian Bahr/Getty Images

경기 전 의식

22년 만에 처음으로 올해 슈퍼볼 국가가 공식적으로 전쟁 상태가 아닌 시기에 노래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돌아왔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는 군사 행동이 시작되고 공중 보건 의무, 투표권, 교과서 그리고 흑인과 백인, 갈색과 파랑이란 미국인의 삶의 가치를 놓고 국내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미국 민주주의는 정의상 혼란스러운 실험이지만, 오늘날 많은 미국인들은 애국심보다는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느낌, 한계점에 대한 두려움을 공유하는 불안으로 단결될 수 있을 것이다.

'O Say Can You Hear?: A Cultural Biography of 'Star-Spangled Banner''라는 책에서 나는 미국 역사를 애국가를 통해 살펴보았다. 내 책의 장들은 프랜시스 스콧 키의 저술, ​​삶, 노예와의 관계를 검토하고 곡의 기원을 살피며 어떻게 오랫동안 항의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그것이 어떻게 연방(Union, 남북 전쟁 당시 노예제 폐지와 합중국 유지를 지지한 북부 20개 주 - 역자 주)의 외침이 되었는지를 검토한다. 내 책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남북 전쟁은 키의 노래를 신성시하여 1931년 의회가 마침내 그것을 국가로 선언할 때 국가의 애국가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 되었다.

미국 스포츠 행사에서 "애국가"의 기록된 첫 공연은 남북전쟁에서 발생했다.  1862년 5월 15일 브루클린의 새로운 유니언 베이스볼 그라운드(Union Base-Ball Grounds)를 헌납하는 야구 경기 전에 한 브라스 밴드가 키의 노래를 연주하였다.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이 노래가 드물었다. 왜냐하면 개막일이나 챔피언십에서만 연주할 밴드를 고용하는 비용을 들일 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1903년 첫 번째 월드 시리즈에서 '애국가'는 한 게임에서 두 번 연주되었다.

세계 대전은 프로 스포츠에 대한 애국적인 수사학의 비중을 높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야구 경영진은 자신들의 사업이 
국내 전선의 사기를 북돋아주는데 필수적이며, 프로 선수들은 병역 면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은 실패했다. 야구는 "비필수적"으로 선언되었고, 선수 명단은 삭제되었으며 1918년 시즌은 단축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야구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명령했고, 그 순간 애국심과 스포츠 사업은 영원히 연결되었다.

항의의 상징

매 경기마다 국가를 연주하는 것은 1960년대에 화약고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논란은 미식축구 경기가 아닌 올림픽 기간 동안 일어났는데, 1968년 미국의 단거리 선수 토미 스미스(Tommie Smith)와 존 카를로스( John Carlos)가 인종적 부정의에 항의하기 위해 메달 시상대에서 검은 주먹을 들어 올렸다. 1973년까지, 미국 올림픽 위원회는 논란을 피하기 위해 예선 대회에서 애국가를 건너뛰려고 시도했다.

반발은 즉각적이었다.

미국 단거리 선수 토미 스미스(Tommie Smith, 가운데)와 존 카를로스(John Carlos)가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미국 애국가 연주 도중 주먹을 들어 블랙 파워 살루트를 하고 있다. 사진: Bettmann/GettyImages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1976년 건국 200주년을 맞았을 때 애국가에 대한 시위가 잠잠해졌다. 1977년까지 NFL은 안전하게 그 약속을 어길 수 있었다. 그 해 슈퍼볼 주최 측은 국가 대신 'America Beautiful'을 불렀고 논란은 계속되지 않았다.

1991년 휘트니 휴스턴의 유명한 슈퍼볼 XXV 국가는 음악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전환점이 되었다. 그녀의 시그니처 편곡은 각 소절에 비트를 추가하여 그녀의 목소리가 확장되고 치솟도록 했다.

그녀가 연주한 곡은 황홀한 복음 발라드이자 국가(nation)에 대한 신성한 찬송이었다. 미국 주도의 사막의 폭풍 작전(Operation Desert Storm) 군대가 페르시아만에서 이라크 군대를 지배했을 때 낙관적인 순간을 발산한 휴스턴의 목소리는 애국적인 자부심의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 그녀가 노래하는 동안 경기장에 가득 찬 수만 명의 사람들이 미니어처 미국 국기를 흔들었다.

분열된 애국심

오늘날 NFL은 모든 경기에서 국가를 연주하겠다고 약속했다.

흑인 코치 채용 관행을 둘러싼 소송이 끓어오르면서 애국가는 다시 통일만큼이나 부족적 소속을 표현하는 화약고가 됐다. 2016년 콜린 캐퍼닉(Colin Kaepernick)이 인종 차별에 항의하며 무릎을 꿇고 도널드 J. 트럼프(Donald J. Trump) 대통령이 이 제스처를 비미국적이라고 공격했을 때, 애국가 의식은 항의의 발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화 전쟁의 분열적인 도구가 되었다.

2016년 경기 시작 전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에릭 레이드(Eric Reid)와 콜린 캐퍼닉(Colin Kaepernick, 7번)이 인종적 부정의에 항의하며 애국가 연주 도중 무릎을 꿇었다. 사진: Michael Zagaris/San Francisco 49ers/Getty Images

슈퍼볼 LVI를 위해 4명의 흑인 여성 보컬리스트가 부른 3곡이 분열을 맞아 단결된 음악적 모음을 선사할 예정이다.

가스펠 듀오 메리 메리(Mary Mary Mary)가 흑인들의 국가 'Lift Every Voice and Sing'을 부를 예정이다. 민권 운동가이자 시인인 제임스 웰던 존슨(James Weldon Johnson)이 1899년 작사한 가사로 '승리할 때까지 행진하라'는 가사는 인종 차별과 불의의 살아 있는 경험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평등의 원칙에 입각해 건국된 국가를 꿈꾸며 그의 영원한 신념을 긍정한다.

네오 소울 스타일리스트 제네 아이코(Jhené Aiko)가 'America the Beautiful'을 선보인다. 이 노래는 2009년부터 슈퍼볼의 국가보다 앞서 연주되었다. 평화로운 멜로디 선율과 복잡해 보이지 않는 목가적인 오프닝 가사는 일부 사람들에 의해 국가의 음악적인 특징으로 선호된다.

이 2021년 사진에서 컨트리 스타 미키 가이튼(Mickey Guyton)이 트리 점등 세레모니 무대 위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사진: Dimitrios Kambouris/Getty Images

마지막으로 텍사스 출신 컨트리 가수 미키 가이튼(Mickey Guyton)이 '애국가'를 선보인다. 그녀의 존재는 오늘날의 문화 전쟁의 양쪽에 대한 가정을 뒤집는다. 그녀는 역사적으로 백인의 보수적인 장르에서 보기 드문 흑인 여성 스타이다. 그녀의 2020년 히트작 'Black Like Me'는 라디오 방송을 거의 타지 못했지만 소셜 미디어에서 인기를 얻었다.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은 이 노래로 가이튼은 최초의 흑인 여성으로 최고의 컨트리 솔로 퍼포먼스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다.

내가 보기에, 올해 NFL이 모두를 위한 기분 좋은 노래를 만드는 시도는 어리석은 짓이다. 오늘날 어떤 정치적 제스처도 모두를 기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축구는 여전히 정치적 장벽을 넘어 미국인들을 하나로 모으는 유일한 기관일 수 있다. 그것은 매년 가장 많이 시청되는 TV 이벤트이며, 예상되는 1억 명의 다른 시청자와 마찬가지로 나는 여전히 매년 슈퍼볼 국가를 소중히 여긴다.

나에게 애국가는 낡고 변하지 않는 아이콘이 아니라 시민권의 당대적 행위이다. 모든 공연은 공동체의 살아있는 표현으로, 가사와 멜로디를 끌어올려 그 순간을 충족시키고 국가의 약속에 대한 집단적 믿음을 공유할 수 있는 음악 예술인들에 의해 거듭 새로워지는 표현이다. 새롭게 노래에서 그 약속은 다시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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