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주: 이 글에는 영화 내용과 결말의 스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국(Empire)으로부터의 길, 위에서 아래로
기업에 의해 만들어진 제국, 엠파이어(Empire)는 불황과 함께 유령촌이 된다. 영화 노매드랜드(Nomadland)는 한때 번영을 누렸던 이 엠파이어 타운의 우편번호(ZIP)가 중단됐다(discontinued)는 자막과 함께 시작된다. 중단된 ZIP(Zone Improvement Plan), 엠파이어는 개선계획을 세울 필요조차 없는 타운이 되어버렸다. 남편만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제국 엠파이어를 떠나버려 혼자가 된 주인공 펀(Fern, 프랜시스 맥도먼드 분)은 가진 것을 이전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고 단출한 짐만 꾸려 흰색 밴에 몸을 싣고 길에 나선다. 클로이 자오(ChloZhao) 감독의 노매드랜드(nomadland)의 카메라는 그 길에 나선 펀의 뒤를 쫓는다. 하지만 노매드랜드 혹은 유목민의 나라는 1950년대 말 잭 케루악(Jack Kerouac)이 《길 위에서(On the road)》 부른 낭만적이며 과거 회귀적인 노래가 아니며, 영화 내내 나오듯 '길 아래서(down the road, 미래에, 앞으로라는 의미도 있음)'의 차가운 삶을 드러내는 엘레지(elegy) 혹은 비극적 노래다. 노매드랜드의 주인공 펀과 그가 길에서 만난 낯선 동료들이 하필이면 10대~20대에 케루악과 같은 비트족의 삶을 경험하고 은퇴한 노인들의 삶이라 그 엘레지는 더 슬프게 들린다. 그들이 10대~20대에 나섰던 길과 70대~80대에 나선 길은 완전히 다른 길이다.
노매드랜드의 유목민은 원주민이 아니라 그들을 '보호구역'으로 쫓아내고 대륙을 차지한 백인들이다. 거대한 엠파이어 미국의 광활한 대륙을 밴을 몰고 다니는 백인 노매드들은 아마존 창고부터 거친 들판의 비트 채취까지 온갖 일자리를 사냥 아니 채집하는 유목민이다. 그들이 건설했던 제국도 황혼이고, 은퇴한 그들의 인생 도정도 황혼이다. 그래서 노매드랜드에는 와이드 샷으로 잡은 황혼과 클로즈업으로 잡은 어둑한 밴 안의 주름진 펀이 자주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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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 속을 걷는 주인공 펀 | 자신의 밴 안에서 회상하는 주인공 펀 |
유목민에게 홈(home)과 하우스(house)의 의미
펀은 스포츠용품점에서 자신이 아는 가족과 우연히 조우한다. 펀이 임시 교사직을 할 때 제자였던 어린 소녀가 펀에게 "엄마가 그러는데 당신이 홈리스(homeless)라는데 사실이에요?"라는 물음에 펀은 "나는 단지 하우스리스(houseless)일 뿐이야. 그건 [홈리스와] 같은 게 아니지, 그렇지?"라고 되묻는다. 노매드 랜드에서 홈은 하우스 혹은 주택이 아니다. 노매드랜드의 하우스는 정주지고 고착된 곳, 매여 있는 장소며, 홈은 자유로운 공간 혹은 대륙을 거침없이 돌아다니는 유목민 그 자신이다. 펀이 아마존에서 일하던 첫날, 점심시간에 테이블에서 서로 자신을 소개하는 동료들 가운데 팔뚝에 잔뜩 문신한 안젤라의 대사는 노매드랜드에서 끊임없이 강조하는 홈이 무엇인지를 우회적으로 하지만 또렷이 드러낸다. 안젤라는 자신의 팔뚝에 새겨진 문신인 영국 록 그룹 더 스미스(The Smiths)의 다음과 같은 가사를 동료들에게 들려준다(안젤라의 말과 달리 이 가사는 스미스의 멤버였던 모리세이의 '홈은 물음표'라는 노래 가사다). "홈은 단지 한 단어일 뿐일까? 아니면 그것은 당신 내심 속에 간직하고 다니는 어떤 것인가?" 홈은 하우스처럼 고착되고 매여있는 장소가 아니다. 노매드에게는 그가 다니는 모든 공간이 곧 홈이다. 펀이 몰고 다니는 하얀 밴에는 펀이 한밤중 외로울 때면 꺼내 보는 아버지와 남편의 유품이 있으며, 펀의 어린 시절 사진이 있다. 홈은 펀과 함께 이동하며, 늘 펀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다.
영화 속 펀은 하우스리스처럼 그려지지만, 그는 하우스리스가 아니다. 그의 밴은 분명 하우스다. 모든 주택처럼 밴은 화장실이 있어야 하며, 장식품이 있고, 때론 수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정주민의 하우스에 개미들이 귀찮은 존재이듯 유목민 펀의 밴에도 개미는 같은 존재다. 무엇보다도 정주민의 하우스는 바닥에 고정된 안정감이 필요하다면, 유목민의 하우스는 바닥을 뜰 수 있는 이동의 안정감이 필요하다. 그 이동성을 상실했을 때 유목민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정체성을 상실한다. 타이어가 펑크가 났다며 도움을 요청하는 펀에게 스왕키는 "이 오지에 [타이어] 여분이 없다고?...너는 아무도 없는 황야에 있어. 너는 여기서 죽을 수도 있어?"라고 꾸짖는다. 또한 펀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같은 RV노매드족 데이브는 손주를 보기 위해 아들 집에 머물면서 고된 유목민에서 안락한 정주민이 되자고 펀을 설득한다. 아들 집 마당에 서 있는 데이브의 밴 타이어에 바람이 빠진 것을 보고 펀은 "당신 밴의 타이어 바람이 빠졌어."라고 알려주자 데이브는 "오, 오케이, 알아채지 못했어."라고 대꾸한다. 그러자 펀은 데이브에게 "당신이 정주하고 있어서?"라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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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분의 타이어가 없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펀에게 경고하는 스왕키 | 타이어 바람이 빠졌는지 몰랐다는 데이브 | "당신이 [유목하는 대신] 정주하고 있어서 [타이어 바람이 빠진줄 몰랐냐]?"라고 데이브에게 묻는 펀 |
뱅가드(vanguard)와 개척자(pioneer)로서 백인 유목민?
펀은 자신의 조그만 흰색 밴에 뱅가드(vanguard)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와 밴은 동일체이니 펀 자신은 뱅가드, 문자 그대로 전위(前衛) 혹은 전선의 최전방에 선 군인이다. 미국 독립은 광활한 대륙의 토지에 대한 탐욕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미국의 경계 혹은 프런티어는 끊임없이 서부를 약탈하며, 원주민을 몰아내고 태평양으로 확장되었다. 이 탐욕적 확장의 전위들은 종종 파이어니어 혹은 개척자들로 불렸다.
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사태 이후 불어 닥친 불황의 여파를 고스란히 체험하고 있는 펀 앞에서 여동생의 이웃은 태연히 "2008년에 돈이 있어서 모든 것을 살 수 있었다면 그것들을 지금 팔아 버릴 수 있었을 텐데"라며 부동산 가격이 오르고 있다며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 그에게 펀은 "사람들에게 전 재산을 투자해서 빚쟁이가 되고, 자기들이 감당할 수 없는 집을 사라고 부추기는 것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여동생의 남편은 "우리가 모두 가진 것을 처분하고 길 위에 나설 수는 없다."라며 펀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논쟁이 심해질 것 같아지자, 펀의 여동생이 나서서 "유목민들이 하는 일은 개척자들이 했던 일과 다르지 않다. 나는 펀이 하는 행동이 미국 전통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으론 그건 대단한 거다."라며 사태를 수습한다.
영화 노매드랜드는 제시카 브루더(Jessica Bruder)의 원작 《Nomadland: Surviving America in the Twenty-First Century》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 원작에 나온 유목족들의 현존 질서에 대한 거부감만 다루었을 뿐 그들의 고통과 그 원인으로서 시스템에 대한 비판은 외면한다. 야영객부대(CamperForce)라는 프로그램으로 2008년 경제침체 이후 몰락한 노인 백인 RV(recreational vehicle) 유목족들을 크리스마스처럼 바쁜 시즌에 저임금으로 유혹하는 아마존의 착취, 노인층을 고용함으로써 25%~40%의 세액공제 혜택을 받는 아마존의 탐욕은 영화 노매드랜드에 나오지 않는다. 펀과 같은 노인들, 관절과 허리가 아픈 은퇴자들이 아마존 창고의 딱딱한 시멘트 바닥 위의 고된 업무를 진통제 이부프로펜(ibuprofen)에 의존해야 하는 그 고통은 영화 노매드랜드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1970년대 한국의 여공들에게 타이밍은 강제로 깨어있음을 강요하는 각성제였다면, 아마존이 이들 노령 노동자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이부프로펜은 고통의 망각을 강요하는 진통제다. 영화 노매드랜드는 이 착취의 무통을 외면한다. 영화 노매드랜드는 유목족들을 오지를 달리는 전위, 다른 이들이 경험하지 못한 프런티어를 넓히는 개척자로 묘사한다. 그래서 영화는 책의 원제에서 "21세기 미국에서 살아남기"라는 부제를 빼고 단지 노매드랜드, 유목민의 나라라는 제목만 사용한다.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영화 주인공 펀에게 원작의 노인들의 '살아남기'는 없다. 그의 여동생이 말한 것처럼 펀에게 유목민의 삶은 자발적인 '즐기기'에 가깝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 화법, 원작의 서사를 갈아치운 영화의 서정
영화 노매드랜드는 감독 자오의 전작처럼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오가는 아슬한 경계의 화법을 사용한다. 주인공 펀을 분한 맥도먼드와 데이브 역을 맡은 데이비드 스트러세언(David Strathairn)을 제외하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배우가 아니며 실제 밴을 끌고 다니는 유목족들이다. 자오의 영화는 '사회적 리얼리즘'(social realism)을 현실을 조명하고, 이야기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한다. 그의 전작 'Songs My Brothers Taught Me'은 포스트식민시대의 미국 원주민의 삶을, 'The Rider' 사고로 말을 탈 수 없는 카우보이의 정체성을 사회적 리얼리즙으로 접근했다. 자오는 사회적 리얼리즘의 내러티브로 관객들에게 현실감을 불어 넣는다. 하지만 '화씨 9/11'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가 잘 짜인 드라마이듯, 리얼리티쇼가 논픽션을 가장한 픽션이듯, 자오의 노매드랜드의 사회적 리얼리즘에서 논픽션은 픽션을 위한 보조 장치로 전락한다.
화장실 청소, 비트 채취, 햄버거 불판 세척의 리얼리즘은 바위들이 가득한 대지 한가운데 한밤중 피어오르는 유목족의 모닥불 속에서 느끼는 펀의 공동체적 연대감, 바람이 스치는 바닷가 절벽을 걷는 펀의 자유로움, 맑은 물 속에 나체로 유영하는 펀의 여유 속에서 사라진다. 아니 고독하고, 각박하며, 고된 몰락한 유목족들의 노동은 펀의 그 연대감과 자유로움, 여유를 빛내기 위한 배경일 뿐이다. 담배를 빌려주었던 카우보이 청년 데릭에게 펀이 낭송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8번의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여름"과 "영원한 아름다움" 뒤로 흐르는 벌판의 황혼과 펀의 어린 시절 사진처럼 원작의 서사는 영화의 서정 속에 부질없이 사라지고 만다. 서사를 갈아치운 서정 때문에 미국의 평론가들과 관객들은 영화 노매드랜드에 열광하고, 박수를 보낸다. 고통의 현실은 영화의 서정 속에 가려지면서 또 고통받는다.
노매드가 없는 노매드랜드
영화 미나리가 낯선 곳에 정주하기 위한 이방인들의 이야기라면, 영화 노매드랜드는 낯선 공간으로 유목하기 위한 정착민을 자처한 자들의 이야기다. 미나리가 가족을 형성하고 지키기 위한 이야기라면, 노매드랜드는 가족을 떠나고 버리기 위한 이야기다. 미나리가 제국의 중심에 진입하고자 하는 질주의 이야기라면, 노매드랜드는 제국의 변방으로 나가고자 하는 탈주의 이야기다. 미나리가 일꾼 말(workhorse)에서 벗어나려는 이야기라면 노매드랜드는 일꾼 말을 수용하는 이야기다.
영화 노매드랜드의 유목족은 달러와 시장의 전제주의에 저항하지 않으며 이를 수용(embrace)한다. 유목은 그 시스템을 전복하기 위한 탈주가 아니라 그 틈새를 살아가는 또 하나의 안주다. 2008년 금융위기와 그 여파 속에 살아가는 노령의 프리캐리어트(precariat)들은 길의 풍광에서 시스템을 잊고, 야영캠핑장의 동표 캠퍼들과의 캠프파이어 속에서 잠시의 위안을 얻는다. 원작과 마찬가지고 그들은 노매드, 유목민을 자처하지만 정작 그 땅의 원래 유목민을 '보호구역'에 가둔 그들의 이동은 떠돌이나 유목의 코스프레일 뿐 그들은 원래 그리고 진정한 아메리카 대륙의 유목민이 아니다. Songs My Brothers Taught Me에서 포스트식민시대를 견디어내는 원주민을 그렸던 자오가 원주민 유목민 대신 백인 유목민을 들고 온 것은 의외다.
영화 노매드랜드가 미국 평론가들과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강력한 작품상 후보에 오른 것은 죄책감을 더는 그의 영화 화법 때문이다. 비참한 실제 삶은 자오의 노매드랜드에 녹아들기 보다는 녹아내렸다. 거대한 아마존 창고는 공동체의 공간으로, 광활한 비트밭은 아름다운 풍광으로, 거대한 햄버거 매장은 따뜻한 사랑이 피어나는 곳으로 그려진다. 사회적 사실주의 속에서 사실적 사회는 사라지고 없다. 영화는 힘들고 어려워도 언젠가 길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 길이 젊은 시절 그들이 섰던 길 위(on the road)가 아니라 길 아래(down the road)며, 이부프로펜으로 진통을 참아내며 세액공제를 받는 아마존의 거대한 아가리를 향한 죽음의 행진일지라도, 늙은 떠돌이 족들은 일자리를 위해 야영캠핑장 '사막의 장미'(Desert Rose)에 자신의 밴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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