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영화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 핑크빛 여성성(Femininity)의 복수극

Zigzag 2021. 4. 1.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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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이 글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성 복수극의 내러티브와 여성성에 기대 복수극의 내레이션

배우 에메랄드 펜넬(Emerald Fennell)의 감독 데뷔작 《프라미싱 영 우먼》(Promising Young Woman)은 꼭 30년 전에 발표된 《델마와 루이스》나, 2017년 《리벤지》와 같은 여성 복수의 내러티브를 공유한다. 그러나 그 내러티브를 이야기하는 방식으로서 내레이션은 완전히 다르다. 《델마와 루이스》는 가부장제로부터의 탈주를 그린 로드무비고, 《리벤지》는 강간범을 향해 질주하는 피 묻은 복수극이다. 무법을 상징하는 서부를 배경으로 하는 이들 영화에서 복수는 여성성 대신 피 묻은 남성성에 기댄다. 하지만 준법의 반듯한 교외(suburban)지역을 무대로 하는 《프라미싱 영 우먼》은 가부장제와 그 시스템을 폭로하는 파스텔 톤 핑크색의 여성성 내레이션에 기댄 복수 스릴러를 꿈꾼다.

주인공 캐시 혹은 카산드라(Carey Mulligan 분)는 영화 제목 그대로 한때 촉망받는 의대생이었지만 의대를 중퇴한 후 부모님 집에 얹혀살면서 카페의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다. 절친이자 동료인 니나가 남학생들에 의해 강간당했지만, 그 범죄가 흐지부지 처리되면서 니나는 자살한다. 카산드라는 아무도 처벌받지 않은 것에 분노하며 대학을 중퇴했다. 카산드라는 매주 클럽에서 밤늦게 술 취한척하며 자신에게 접근한 남성들이 그를 자신들의 집으로 데려가 그의 동의 없이 섹스를 시도하려 할 때마다 온전한 정신으로 일어나 남성들의 욕망의 추함을 일깨우는 작은 복수를 저지르며 일상을 버티어 간다. 어느 날 니나를 강간했던 알렉산더 먼로(Chris Lowell 분)가 비키니 모델과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카산드라는 큰 복수를 준비한다. 영화의 복수는 가해자를 옹호하고, 피해를 은폐하며, 피해자/생존자를 실종시키는 담론과 구조에 대한 폭로와 함께 진행된다.

성폭행 친화적 담론: 주체의 망각, 미성숙, 상실, 함몰의 담론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의 주인공 카산드라는 강간 피해 후 자살한 니나의 분신이다(그는 실제로 친구 니나를 강간한 가해자 먼로에게 자신의 이름을 '니나'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그의 이름 카산드라가 상징하듯 그의 말은 반향과 동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 신화의 카산드라처럼 그와 니나는 촉망받고 아름답지만 아무도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 저주받은 백인 남성 중심의 가부장 구조 속에 갇혀 산다.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은 카산드라와 니나의 말을 믿지 않게 만드는 사회의 담론을 폭로한다.

예전에 같은 의대를 다녔던 주인공 캐시를 알아보는 라이언. 하지만 라이언은 그를 캐시 대신 카산드라라고 부른다.

강간을 은폐하고 가해자와 피해자/생존자를 실종시키는 담론은 주체의 망각, 주체의 미성숙, 주체성의 상실, 주체의 함몰로 나타난다. 우선 가부장적 사회는 성폭행의 주체를 망각한다. 같은 의대를 다니던 동료이자 남자친구 라이언(Bo Burnham 분)에게 카산드라는 니나가 성폭행을 당하는 순간을 찍은 동영상에서 라이언에게 보여준다. 그 자리에 있었던 라이언은 "나는 기억나지 않아."라며 발뺌한다. 당시 성폭행 신고를 받았던 학장 워커(Connie Britton 분) 역시 카산드라의 친구 니나와 니나의 성폭행 사건 자체를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성폭행 피해자인 니나는 아예 실존하지 않는 주체가 된 것이다. 두 번째 주체 실종의 담론은 주체의 미성숙이다. 카산드라가 니나 성폭행 사건을 상기시키자 성폭행 가해자 먼로와 성폭행 방관자이자 소아과 의사인 라이언은 자신들은 "아이"(kid) 였다고 변명한다. 즉, 어떤 일에 책임을 지는 성인이 아닌 미성숙한 주체였다는 것이다.

성폭행 사건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캐시의 남자친구 라이언과 학장 워커(상단), 그리고 자신들은 당시 아이들이었다고 변명하는 라이언과 먼로 (하단)

세 번째로 가부장제는 성폭행을 술에 취했다는 주체성의 상실로 무마하려 든다. 학장 워커도, 카산드라와 니나의 친구였던 매디슨(Alison Brie 분)도, 술에 취한 척한 카산드라에게 약을 먹이고 섹스를 시도하려 했던 닐(Christopher Mintz-Plasse 분)도, 그리고 니나의 성폭행범 먼로도 모두 술에 취해 주체가 상실되면 성폭행을 할 수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정당화하려 든다. 매디슨은 니나의 평소 행실이 좋지 않았고 술에 취했다면 낯선 이를 스스로 끌어들인 것이며, 학장 워커는 사람들은 술이 그들 스스로를 "다칠 수 있게(vulnerable) 만든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고 강변한다. 네 번째는 성폭행 발생과 묵인을 주변 환경이나 사회로 돌리며 그 속에 주체를 함몰시키는 담론이다. 가해자 먼로는 "파티"였고,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성폭행을 파티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매디슨은 성폭행의 묵인이 자기 책임이 아니며, 자기가 룰을 만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술로 주체성을 상실하면 성폭행을 해도 되거나, 이를 자초한 것이라고 강변하는 학장 워커, 친구 매디슨, 가해자 먼로, 닐(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성폭행 친화적 사회구조: 인정받지 못하는 촉망받는 여성 주체와 인정받는 촉망받는 남성 주체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은 성폭행을 방관하고 심지어 부추기는 가부장적 시스템을 드러낸다. 학창 시절 '방탕'한 생활을 즐겼던 카산드라의 친구 매디슨은 결혼하여 아이를 둔, 이제는 중산층 가정의 조숙한 주부다. 그는 남성 대학생들은 여자 친구로 페미니스트를 원하는데 그 이유가 뭔가 아는듯한 이미지를 가진 여자 친구가 있는 게 "쿨"하게 보이고, 그리고 페미니스트들이 "통계적으로 항문성교를 더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떠벌린다. 하지만 그는 사회의 요구에 맞게 가정을 이루어 "굿 걸"(good girl)로 지내는 지금의 상황에 만족한다고 카산드라에게 말한다. 그는 가정이 페미니스트의 자리가 아니며, '정숙'한 곳임을 그리하여 그 '정숙'의 의무를 저버린 이들의 '문란'을 우회적으로 비난한다.

카산드라가 실종된 후 찾아온 형사들에게 그의 아버지는 그가 "이렇게 사라질 아이가 아니"라는 엄마의 말을 부정한다. 이 말을 들은 백인 남성 형사는 실종 수사 중 카산드라의 (전) 남자 친구 라이언을 방문한 자리에서 카산드라의 아버지가 카산드라가 평소 "불안정"했다고 자신의 해석을 덧붙이며 라이언의 동의를 구한다. 가정은 여성 주체를 억압하거나, 여성 주체가 말하는 순간 그 주체를 "불안정"한 것으로 본다.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은 성폭행 친화적 구조가 가정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구조적 문제임을 카산드라와 학장 워커의 대화를 통해 드러낸다. 둘은 같은 책상을 놓고 마주하지만, 카메라의 앵글은 카산드라가 학장 워커를 약간 올려보는 듯한 각도로, 반대로 워커는 카산드라를 약간 내려보는 듯한 앵글로 잡았다. 더구나 학장의 뒤로는 권위적인 남성의 포스터가 걸려 있다. 이 대화에서 학장은 "촉망받는" 젊은 여성이었던 니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촉망받는 젊은 남성 먼로는 "나이스"하고 "스마트"한 청년으로 또렷하게 기억한다.

친구 니나의 성폭행 사건을 접수받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학장 워커(상단)를 찾아간 카산드라(하단)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은 똑같이 촉망받는 청년이지만 여성 주체 니나는 "거짓 소동"(crying wolf)을 벌이는 습관적 거짓말쟁이에 불과하며, 남성 주체 먼로는 특별한 조사도 없이 무죄 추정(benefit of the doubt)의 특혜를 받는 "스마트"하고 "나이스 한 가이"다. 사회 구성원을 생물학적, 교육적으로 재생산하는 가정과 학교를 포함한 사회 시스템은 이렇듯 남녀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로 성폭행을 재생산하고 있음을 《프라미싱 영 우먼》은 드러내고 있다.

니나의 성폭행 피해를 "거짓 소동"(crying wolf)로 간주하는 매디슨과 가해자 먼로에게 "무죄추정"(benefit of the doubt)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학장 워커

매장 대신 각성의 복수, 망각 대신 기억의 용서

성폭행 친화적인 담론과 구조를 폭로하는 카산드라의 복수는 기존의 여성주의 복수극과 달리 남성의 거세와 제거 대신 각성을 복수의 방식으로 선택한다. 술에 취한 척 연기를 하는 카산드라를 자신들의 집에 데리고 가 성폭행하려는 남성들에게 카산드라는 성폭행 직전에 자신이 술에 취해 주체성을 상실하지 않았음을, 자신은 성행위를 원치 않음을 명백히 밝힘으로써 남성들을 당황하게 한다. 자신을 꽤 괜찮은 남자라고 주장했던 남성들은 카산드라의 행동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또한 술에 취하면 스스로 자신을 성폭행에 노출하는 것이라는 옛 동료 매디슨은 술에 취하게 해 낯선 남자와 함께 호텔 방에 넣음으로써, 학장 워커에게는 그의 딸을 납치해 술과 함께 남자들이 있는 호텔 방에 집어넣었다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그들의 담론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고, 성폭행 친화적인 구조에 동조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카산드라는 술에 취해 낯선 남자에 이끌려 호텔방에 간 일로 걱정하는 매디슨을 안심시킨다(좌측) / 카산드라에게 추근대던 남자가 그가 취하지 않은 것에 놀란다(우측).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은 망각하는 주체는 용서하지 않지만 기억하는 주체는 용서한다. 카산드라는 니나를 협박해 성폭행 고소를 취하하게 만든 먼로의 변호사 조르단(Alfred Molina 분)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연 조르단에게 카산드라는 "당신의 심판의 날"이라고 말하자, 조르단은 체념한 듯 "기다리고 있었다"며 카산드라를 집 안으로 들인다. 카산드라는 지금까지 복수를 가했던 상대들과 달리 자신의 친구 니나를 기억하는 조르단에게 놀란다. 조르단은 자신은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다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나 자신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라고 카산드라에게 무릎을 꿇는다. 그러자 카산드라는 그의 등에 손을 얹고 그를 용서한다. 영화는 그리스도가 죄인의 죄를 사하는 모습과 카페로 돌아온 카산드라의 머리 뒤의 아우라를 비추며 신과 피해자/생존자의 영역인 용서를 베푸는 카산드라에게 그들 모두가 깃들어 있음을 암시한다. 기억하고 깨어있는 자에게 용서를 베푸는 카산드라지만, 성폭행을 방관하며 자신은 기억도 나지 않고 아무 짓도 안 했다며 용서를 구걸하는 남자 친구 라이언에게는 단호하게 "NO"를 외치며 돌아선다.

"당신의 심판의 날"이라며 변호사 조르단을 찾아간 카산드라(좌측), 그에게 용서를 비는 조르단(중간), 조르단을 용서하고 카페로 돌아 온 카산드라(우측)

백인 여성의 핑크 빛 복수극의 뒤늦은 미투 노젓기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의 결말은 짜릿한 복수극을 기대했던 이들에겐 실망감을 안겨줄 수도 있지만, 너무 뻔한 해피앤딩의 복수극에 질린 이들에게는 나름의 의미를 가진 결말이다. 영화는 카산드라에게 움직임(moving)을 요구한다. 그의 부모는 짐을 싸서 나가길(moving out) 바라며 여행용 가방을 생일 선물로 주며, 죽은 친구 니나의 엄마는 그에게 과거를 놔주고 앞으로 나아가길(moving on) 원하며, 가해자 먼로는 그에게 움직임을 멈추길(stop moving) 요구한다. 그 움직임은 과거를 직면하기보다는 과거에서 벗어나고, 현재를 뒤엎기보다는 현재를 높아두고, 가부장제에 저항하기보다는 순응하길 요구한다. 하지만 카산드라는 과거를 직면하고, 현재를 전복하고, 가부장제에 저항한다. 그 직면과 전복과, 저항의 복수에서는 제거와 거세의 붉은 빛의 피비린내 대신 각성과 기억의 핑크빛의 캔디(총각파티에 간호사로 분장한 카산드라에게 먼로가 이름을 묻자 처음에 그가 댄 이름이 캔디이기도 하다) 향이 난다. 제작자 마고 로비(Margot Robbie)가 만약 카산드라의 역을 맡았다면 섹시함이 복수를 덮었겠지만(마지막의 간호사 분장은 누가 봐도 마고 로비의 할리 퀸 분장이다) 캐리 멀리건의 카산드라는 핑크빛과 복수극 사이의 균형을 제법 잘 맞추어 낸다.

카산드라에게 독립하라며 여행용 가방을 선물하는 부모(좌측), 그에게 앞으로 나아가라는 니나의 엄마(중앙), 그에게 저항을 멈추라는 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은 백인 여성이 주도하는 미투의 끝물에 편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성의 주체성은 아직 백인 여성 혹은 백인 여성들에 준하는 지위를 가진 유색 여성들에게만 한정된 특권에 가깝다. 사실 《프라미싱 영 우먼》이 제기하는 성폭력 친화적인 담론과 구조는 이미 1960년대 여성주의 제2 물결 이후 너무나 익숙하게 알려진 문제 제기다. 그 문제 제기를 핑크빛 복수극 내레이션으로 전복하려는 시도는 신선했지만, 과연 영화 제목대로 만약 카산드라가 한때 촉망받는 백인 여성이 아니었다면 가해자를 심판할 수 있었겠느냐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과연 아시아 여성은, 흑인 여성은 핑크빛 복수를 할 수 있을까? 남성들은 비백인 여성의 문책에 계몽되고, 각성되고, 기억할 수 있을까? 핑크빛 복수극은 어찌 보면 백인 여성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일지도 모른다.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은 아쉽게도 그 특권의 다른 버전의 재방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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