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영화

영화 《맹크》(Mank), 《시민 케인》 저자 발굴의 고고학

Zigzag 2021. 3. 25.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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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이 영화평에는 영화의 줄거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핀처 부자가 다시 불붙인 《시민 케인》(Citizen Kane)의 창세기 논쟁

데이비드 핀처(David Fincher) 감독은 그의 전작 《소셜 네트워크》(Social Network)에서 페이스북의 저자를 찾아 나섰던 것처럼 그의 2020년 영화 《맹크》(Mank)에서도 영화 《시민 케인》(Citizen Kane) 각본의 저자를 발굴하려 든다. 그러나 그는 영화 《맹크》에서 《시민 케인》의 각본을 누가 썼는지에 대한 케케묵은 창세기 논쟁의 결론이 마치 이미 내려진 것으로 내러티브를 전개한다.. 자신의 아버지 잭 핀처(Jack Fincher)의 대본에 기초한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영화 《맹크》는 허먼 J. 맹키위츠(Herman J. Mankiewicz, 게이 올드만 분)가 《시민 케인》을 집필하게 된 동기와 과정, 그리고 저자의 권리를 주장하게 된 동기를 추적한다. 영화는 맹크라 불리는 맹키위츠가 시민 케인의 각본을 쓰던 1940년대 초와 그 계기가 된 1930년대의 두 시점을 오가며 흑백의 화면 속에 사건들을 엮어낸다.

핀처 감독은 마치 《시민 케인》 각본의 저자는 맹크임을 전제하며 오래된 저자 논쟁에는 관심이 없는듯 하다. 하지만 영화의 표면상 무관심은 실은 그 전제를 입증하기 위한 제스처에 불과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논쟁의 승자가 이미 정해져 있는듯 전개되는 핀처 부자의 내러티브는 그 전제가 도전받는 순간 무너져 내릴 수 있는 불완전하고 불안한 구조물이다. 영화 《맹크》는 그 전제에 기초해 여러 겹의 사건들을 포개어 얹어 놓았기에 영화 《맹크》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 그 전제의 검토부터 시작해야 한다.

작가주의와 《시민 케인》의 혁명

영화 《맹크》의 각본을 쓴 잭 핀처는 영화 《시민 케인》의 감독, 주연인 오손 웰스의 공동 저자의 지위를 부정하는 폴린 캐얼(Pauline Kael)의 1971년 글 'Raising Kane'('대소동을 일으키다'를 의미하는 raising cain과 동음이의어)에 의존하고 있다. Raising Kane은 웰스의 각본 기여도가 거의 없음을 그리하여 저작자와 창작자(author and creator)의 지위가 온전히 맹키위츠의 것이 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캐얼은 1950년대 초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1960년대 미국에 상륙한 작가주의(Auteurism)의 강력한 반대자였다. 작가주의란 미술, 음악, 문학 등의 작품에 각각 미술가, 작곡가, 소설가라는 표현 주체가 존재하는 것처럼 영화도 영화감독의 표현수단이자 표현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작가주의에 따르면 영화의 표현 주체는 배우나, 각본가, 촬영감독이나 기타 스태프가 아니라 영화 전체에서 유일한 개성을 지닌 영화감독이란 저자 개인의 생산물이다. 캐얼은 이러한 작가주의에 반대하며 《시민 케인》의 진정한 저자는 맹크라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후에 밝혀진 바와 같이 그의 주장은 이미 정해진 결론에 따라 쓰인 것으로, 부실한 취재, 편향적 인터뷰, 심지어 타인의 저작권 침해에 기초한 것이었다.

캐얼이 작가주의에 반대는 종합적 매체로서 영화를 고려할 때 일리가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그의 논점은 처음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다. 특히 그 영화가 《시민 케인》과 오손 웰스라면 더더욱이나 설득력이 떨어진다. 《시민 케인》은 주지하다시피 스토리텔링과 영화기법의 두 측면에서 혁명을 이루었다. 우선 그 이전까지 선/악, 진지함/경박함 등의 분명한 주인공의 시간의 단선적 흐름에 따라 진행되던 스토리텔링은 《시민 케인》에서 안티-히어로와 같은 선악의 경계에 걸쳐진 주인공과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플래시백 도입으로 시간의 단선적 진행을 교란하였다. 다음으로 《시민 케인》은 프레임 안의 모든 피사체에 초점이 주어지는 유니버설 혹은 딥 포커스, 여러 사운드의 오버랩, 아래에서 위로 찍어 주인공을 부각하는 로우앵글 샷(low-angle shot) 등을 도입했다. 스토리텔링의 플래시백이나 이러한 영화기술의 혁명은 웰스의 연극과 라디오 연출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시민 케인》에 대한 관객의 인상을 완전히 바꾸었으며, 기존 영화들과 완전히 구별시켰다.

《시민 케인》의 대표적인 유니버설 포커스. 프레임 안의 모든 피사체에 포커스가 주어졌다.

불확실한 전제에 괄호를 쳐버리는 영화 《맹크》

캐얼의 Raising Kane에 기반한 잭 핀처의 《맹크》 각본은 하지만 웰스의 이런 배경을 무시한 채 맹크에게 《시민 케인》 각본의 모든 공을 돌리려 했다. 아버지 잭 핀처의 안티-웰스적 시각을 누그러뜨리려 아들 데이비드 핀처는 저자를 둘러싼 논쟁 자체는 축소한 채, 맹크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언론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찰스 댄스 분)에게 등을 돌려 그를 비판하는 《시민 케인》 각본을 쓰게 된 계기, 그리고 원래의 계약과 달리 자신의 저작권을 주장하게 된 동기에 초점을 맞춘다. 즉, 아버지보다 더 교묘하게 핀처 감독은 《시민 케인》 각본의 저자는 맹크를 당연한 전제로 괄호를 쳐서 관객들에게 판단중지를 요구한다. 그 전제를 당연한 것으로 수용한 위에서 영화는 전개된다.

하지만 핀처 감독은 안티-웰스적 시각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은 채 맹크가 온전한 저자임을 영화 곳곳에 깔아 놓았다. 영화 《맹크》는 《시민 케인》에서 케인이 임종 시 읊조린 '로즈버드'란 현재 시점에서 플래시백으로 전개되듯, 맹크가 《시민 케인》의 각본을 쓰는 1940년대 초 현재로 시작해 그 각본을 쓰게 된 과거인 1930년대를 플래시백으로 끊임없이 교차하며 맹크가 저자임을 암시한다. 또한 《시민 케인》의 스토리텔링이 과거에서 현재로 흐르는 직선의 과정을 부정한 것이 웰스의 연극적 기법이 아니라 맹크의 아이디어임을 그의 입을 통해 드러낸다.

영화 《맹크》는 시민 케인의 플래시백을 채용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주인공 맹크는 영화판을 지배하고 있는 단선걱 스토리텔링을 거부한다.

또한 맹크가 이제 막 생긴 작가노조에 가입해달라는 동생 조지프(톰 펠프리 분)의 권유를 뿌리치면서 작가협회 명칭에 아포스트로피(')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지점은 영화와 각본에 대한 작가 혹은 맹크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포스트로피는 she's, it's 처럼 A=B란 정체성과 Jack's book처럼 소유권을 드러내는 기호다. 핀처 감독은 맹크의 입을 통해 Screen Writers Guild가 아니라 Screen Writers' Guild로 작가의 정체성과 저자로서의 소유권을 우회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할리우드 시스템에서 작가는 물론 배우와 감독마저도 MGM이나 워너스 같은 스튜디오에서 월급을 받는 피고용자에 불과했다. 오히려 영화 《맹크》도 인정하듯 《시민 케인》의 진정한 저자는 스튜디오로부터 전권을 받은 웰스 정도였다.

작가노조를 도와달라는 동셍 조지프에게 작가노조 명칭에 아포스트로피가 빠져있음을 지적하는 맹크

독점에 저항하는 맹크와 싱클레어의 거울 이미지와 오버랩

핀처 감독은 《시민 케인》 각본의 저자가 맹크라는 전제 위에 여러 이야기를 쌓아 올렸다. 그 이야기들은 역으로 그 전제를 합리화하기 위한 장치다. 1930년대 플래시백의 주요 사건 중의 하나는 1934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다. 공화당을 대표하는 프랭크 매리엄과 급진주의자로 민주당 경선에 참여해 민주당 대표로 출마한 업튼 싱클레어와의 대결을 영화 《맹크》는 주인공 맹크가 《시민 케인》의 각본을 쓰게 된 중요한 계기로 다루고 있다.

1929년 대공황의 여파가 아직 강하게 남아있는 상황에서 치러진 1934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는 캘리포니아 선거 역사상 가장 치열하고 더러운 선거 중의 하나였다. 특히 이 선거에 대한 영화산업의 개입에 의한 선전·선동은 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화에서 맹크는 웰스(톰 버크 분)처럼 젊고, '천재 소년'이라 불린 MGM 경영의 핵심 간부 어빙 솔버그(퍼디낸드 킹즐리 분)에게 킹콩도 보게 하는 영화산업이 "변절한 사회주의자[싱클레어를 의미]가 캘리포니아의 본질 위협한다고 믿게 하진 못하냐?"고 비꼰다.

맹크는 MGM의 젋은 경영천재 솔버그에게 싱클레어가 위험한 인물이라고 인식시킬 재주도 없냐며 비꼰다. 그의 말에 착안해 솔버그는 반싱클레어 선전물을 제작한다.

업튼 싱클레어는 《정글》이라는 밀리언 셀러 소설을 통해 쥐가 들끓고, 상한 고기를 사용하고, 손 씻을 곳도 없는 더럽고 참혹한 미국 식품 가공업체들의 비리를 폭로했다. 그는 독점자본의 횡포를 억제하고 국가의 개입을 강조했던 당시 미국 혁신주의의 흐름을 보다 급진적으로 대변한 저명한 작가였다. 그가 1934년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예상을 뒤엎고 민주당 후보로 선출되자, 공화당은 대대적인 반공산주의 캠페인을 전개한다. 영화 《맹크》에서 솔버그는 킹콩도 믿게 하는 할리우드가 싱클레어 정도를 박살 내지 못하냐는 맹크의 말에 착안해 반싱클레어 선거 캠페인에 개입한다. MGM은 실업자와 노숙자들이 그들의 남루한 복장 그대로 싱클레어 지지하는 캠페인을 하도록 매수한다. 그리고 감독 데뷔 기회를 노리던 맹크의 친구이자 싱클레어 지지자였던 셸리(제이미 맥셰인 분)에게 데뷔를 미끼로 반싱클레어 선전 영화를 제작도록 한다. 그 선전물에는 점잖은 백인들은 싱클레어를 비난하고 흑인 트럭 운전사, 이민자, 급진주의자들은 싱클레어를 지지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싱클레어의 당선이 미국을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 수 있음을 암시한다. 셸리는 다 큰 성인 유권자들이라면 자신의 선전물을 믿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그의 선전물은 효과적이었고, 싱클레어의 낙선에 가책을 느낀 셸리는 자살한다.

반싱클레어 선전영화에서 싱클레어를 사회주의자로 비난하는 백인 여성 반싱클레어 선전영화에서 싱클레어를 지지하는 흑인 이민 노동자 반싱클레어 선전영화에서 싱클레어가 사회주의자임을 암시하는 급진주의자

영화 《맹크》에서 싱클레어는 주인공 맹크의 거울 이미지다. 정치와 할리우드라는 더러운 판에 발을 담그고 있지만, 그 판을 지배하던 정치 문법과 영화문법을 바꾸려 했던 이들이 싱클레어와 맹크임을 영화는 암시한다. 웰스의 대리인으로 제작자 하우스먼(샘 트라우턴 분)은 맹크의 각본작업을 독촉하면서, 각본이 jumble(뒤죽박죽)이라고 한다. 그러자 맹크는 하우스먼에게 jumble이라고 했는지 아니면 jungle이라고 했는지 되묻는다. 싱클레어의 정글이 독점자본을 비판했듯, 자신의 《시민 케인》 각본이 MGM과 같은 스튜디오의 독점을 비판한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동시에 싱클레어가 정치판을 뒤엎는 데 실패한 것처럼, 그 또한 할리우드의 영화판을 뒤집는 데 실패할 것임을 암시한다. 동시에 핀처 감독이 싱클레어를 맹크의 거울 이미지로 이용한 것은 맹크가 《시민 케인》의 실질적 저자라는 영화의 전제에 현실성과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다. 싱클레어의 독점자본에 대한 비판과 맹크가 케인이란 인물을 통해 비판하는 허스트라는 독점자본가 그리고 그와 결탁한 할리우드는 오버랩된다.

제작자 하우스만이 글이 뒤죽박죽(jumble)이라고 하자 맹크는 그에게 뒤죽박죽(jumble)이라고 했는지 아니면 밀림(jungle)라고 묻는다.

복수와 응징으로서 저자의 발굴

맹크가 《시민 케인》의 진정한 저자임을 주입하기 위해 핀처는 전제에 괄호를 치는 방법으로 관객들의 판단을 중지시키고, 싱클레어와 맹크의 거울 이미지와 오버랩을 통해 그 전제에 현실성을 부여했다. 관객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하지만 한 가지가 더 필요했다. 그것은 맹크의 동기였다. 왜 맹크는 자신을 후원했던 언론재벌 허스트와 결별하고 그에게 비수를 겨누었는가, 그리고 애초의 계약을 뒤집고 자신의 저작권을 주장했는가라는 동기를 제공하지 않는 이상 핀처 부자가 만든 전제는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그래서 핀처 부자는 보복과 응징의 내러티브를 만들어 낸다.

할리우드를 장악했던 MGM의 창립자 루이스 버트 메이어(알리스 하워드 분)는 동부의 영화 평론가 출신 떠버리 맹크가 마음에 들지 않고, 맹크는 악어의 눈물로 배우와 스태프들의 임금을 삭감하는 이중인격자 메이어와 이류투성이인 할리우드를 증오한다. 하지만 언론재벌 허스트는 첫눈에 맹크를 극작가와 영화비평가로 부르며 그에게 친근감을 느끼며, 그가 영화산업의 셰익스피어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추켜세운다. 서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던 탐사저널리즘에서 서민들에게서 이익을 뽑아내는 황색저널리즘으로 변절한 "야심 찬 먹크래커"(vaunted muckracker, muckracker는 탐사와 폭로로 독점을 비판하던 19~20세 초 미국 저널리즘의 한 경향) 허스트가 영화에 관심을 가진 것에 놀란다.

맹크와 허스트의 친분은 하지만 1934년 싱클레어의 선거 패배와 양심과 권력을 바꾸며 반싱클레어 선전 영화를 만들었던 맹크의 친구 셸리의 양심 가책에 따른 자살로 금이 가게 된다. 셸리의 죽음에 이어, 천재 소년 솔버그가 요절한다. 솔버그의 장례식에서 사람들 앞에서는 그를 애도하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던 MGM의 메이어가 그 손수건을 버리고 떠나자, 할리우드와 그 배후의 허스트에 대한 증오심이 극에 달한다. 맹크는 허스트의 파티장에서 《시민 케인》의 각본과 유사한 '현대판 돈키호테'를 술에 취해 읊어댄다. 한때 서민의 편에서 독점자본을 폭로했던 무모했던 돈키호테였던 허스트는 실은 권력과 대중의 사랑을 원해 정치에 출마했지만 결국 실패해 자신의 성안에 안주해 젊은 여성과 함께 산다. 이제는 늙은 현대판 돈키호테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키는 싱클레어(맹크의 거울 이미지인)가 불쾌해 MGM의 사장 메이어를 산초처럼 부리며 그를 파멸시켰다고 허스트와 메이어 앞에서 맹크는 주절거린다. 그의 술주정으로 핀처는 《시민 케인》의 주요 줄거리가 이미 맹크의 머릿속에 있었음음 관객들에게 암시하며, 그를 《시민 케인》 각본의 원저자로 부활, 부각시킨다.

MGM 사장 메이어(왼쪽)을 산초에, 허스트(오른쪽)을 타락한 현대판 돈키호테에 비유하며 조롱하는 맹크(가운데)

그러자 참다못한 메이어는 맹크에게 너에게 급여의 반을 주는 사람이 허스트임을 밝힌다. 동시에 허스트가 너 같은 쓰레기에게 돈을 대는 이유는 "너의 글이 아니라, 말" 때문이라고 폭로한다. 이제 맹크에게는 《시민 케인》을 쓸 완벽한 동기가 생겼다. 허스트 역시 맹크를 부잣집에 입양되어 좋은 대접을 받고 오르간을 연주하며 자신이 잘났다고 착각하는 원숭이와 비유하며 비웃는다. 이제 복수의 완벽한 동기가 생겼다. 메이어와 허스트가 자신의 거울 이미지인 싱클레어를 파멸시킨 것은 맹크 자신을 파멸시킨 것이며, 진정한 복수는 입심이 아닌 글로, 그것도 허스트에게 직격을 가하는 대작으로 응징하며 저자로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다. 복수와 응징은 《시민 케인》의 저자로서 맹크라는 전제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MGM 사장 메이어는 맹크에게 허스트가 맹크에게 급여의 절반을 지원하는 이유는 그의 글이 아니라 말이라며 맹크의 작가로서 역량을 비하한다.

《시민 케인》저자 발굴 고고학의 완성, 주체로서 저자

맹크를 저자로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전제에 괄호 치기, 현실성의 부각, 동기의 제공 외에도 저자가 스스로 저자임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는 저자, 주체성이 없는 진정한 저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맹크의 글이 완성되어 가자 허스트는 그 각본이 영화화될 수 없도록 압력을 넣는다. 그의 동생 조지프, 아내 사라(터펜스 미들턴 분), 작가 동료이자 허스트의 둘째 부인인 매리언(아만다 샤이프리드 분)의 사촌인 레더러(조지프 크로스 분)가 차례로 맹크에게 허스트를 이길 수 없으며 할리우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각본을 포기하라며 압력을 가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웰스와 프로듀서 하우스먼 그리고 맹크를 도와 각본을 타이핑한 비서 리타(릴리 콜린스)는 그 각본이 걸작이라고 격찬한다. 맹크 자신도 그 각본이 자신이 쓴 "최고의 작품"이라고 인정한다. 맹크는 결국 자신이 저자임을 주장하기 위해 웰스를 만난다. 맹크와 웰스의 대화 혹은 논쟁은 맹크가 저자라는 전제를 더 확고히 굳히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웰스는 대작의 탄생을 위해 압력을 물리치고, 집을 제공하고, 쓸 수 있는 환경이란 기회를 제공한 자에 불과한 것으로 묘사된다. 웰스와 맹크의 대화는 갈등에도 불구하고 맹크가 허스트와 할리우드의 비난과 압력에 스스로 책임을 나눌 준비가 되어있음을 밝힘으로써 맹크에게 공동 저자의 크레딧이 주어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로서 맹크는 《시민 케인》 각본의 저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완벽하게 갖추었다. 하지만 웰스가 맹크를 저자로 인정하는 이 장면은 너무나 비논리적이고, 허술해 앞에서 핀처 감독이 쌓아 온 내러티브를 한꺼번에 무너뜨릴 정도로 설득력이 없다.

웰스가 맹크에게 저자로 크레딧을 올리려면 큰 책임을 져야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저자의 부활과 관객의 죽음?

영화 《맹크》는 작품상을 비롯하여 오스카 10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예전이라면 《맹크》는 두 가지 이유로 작품상 수상 가능성이 없다. 첫째로 오스카는 넷플릭스에 불친절했었다. 하지만 코로나 19 대역병으로 대면상영의 기회가 극도로 제한되었기에 오스카도 이제는 넷플릭스의 《맹크》에게 호의의 문을 열 수도 있는 시점이다. 두 번째로 오스카는 할리우드의 어두운 역사를 파헤치는 영화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영화기 이제는 과거처럼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바로 보는 과정의 일환이라는 관대한 시각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이유가 《맹크》의 작품상 수상 가능성을 배제하는 이유가 되기는 어렵다. 하지만 《시민 케인》에 대한 데이비드 핀처 감독과 《맹크》의 전제에 대한 이견이 작품의 수준을 떠나 작품상 수상에서 의외의 장벽이 될 수도 있다. 《맹크》는 오스카 10개 부문에 올랐지만 각본상과 각색상 그 어느 부문의 후보로도 오르지 못했다. 각본상과 각색상에 오르지 못한 영화가 작품상을 받은 전례는 오스카 역사상 고작 7번밖에 없었다. 핀처 부자가 고집한 《시민 케인》 각본 원작자 발굴의 고고학의 약한 설득력은 《맹크》의 오스카 작품상 경쟁에 아마도 만만치 않은 장애를 조성할 것이다.

핀처 부자의 저자 발굴 고고학은 하인리히 술레이만이 트로이 유적을 찾겠다며 수많은 고고학 층을 파괴하고 조작한 것처럼 맹키위츠를 발굴하기 위해 다른 수많은 의미층들을 파괴하고 왜곡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맹키위츠는 핀처 부자의 노력으로 화려하게 발굴되었다. 하지만 관객들은 맹크가 사회주의를 지지했고, 싱클레어에 공감했고, 본인이 보다 큰 책임을 지기 위해 저자의 권리를 제기했다는 핀처 부자의 주장만 들을 뿐 그 주장을 지원할 아무런 근거도 얻지 못했다. 롤랑 바르트는 작품 혹은 "텍스트에 저자를 부여하는 것은 그것에 제한을 가하고, 종국의 기의를 제공하고, 글쓰기를 봉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바르트의 말처럼 핀처는 《시민 케인》의 각본에 저자를 부여함으로써 《시민 케인》을 영화가 아닌 글로 제한하고, 그 각본의 특정한 시대적 개인적 맥락을 부과해 의미 혹은 기의를 제공하여, 《시민 케인》에 대한 다른 해석을 봉쇄하려 하였다.

오마주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에 바르트의 말처럼 작품은 "무수한 문화의 중심에서 끌어온 인용구들의 직조물"이다. 핀처 감독은 아버지 핀처가 쓴 안티-오웰의 각본에 1929년 공황, 1934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 1930~40년대 할리우드 시스템, 독점자본과 같은 역사적 층을 쌓고, 그 층을 맹크의 개인적 신념, 개인과 가족사, 인맥과 엮어냄으로써 《시민 케인》의 각본이 단순한 영화 각본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핀처가 영화 《맹크》에서 쌓아 올린 이런 의미층들과 할리우드의 어두운 역사 재조명은 분명 환영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핀처 부자는 연극과 라디오에서 이미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자신의 머큐리 극단 배우들을 고스란히 데려와 연극과 라디오의 스토리 전개, 영상, 음향 기법들을 결합함은 물론 거대 스튜디오의 압력을 물리치고 영화제작과 상영까지 성공시킨 웰스와 그 팀의 의미층을 파괴하고 왜곡했다. 《시민 케인》은 이제 저자보다 그 독자, 그 《시민 케인》이 선구했던 문법을 계승하고, 발전하고 혹은 파괴한 후대의 몫이 된 지 오래다. 더욱이 우리는 《파이트 클럽》의 실제 싸움꾼이 누구인지, 《조디악》의 진짜 살인마가 누구인지, 페이스북의 진정한 저자가 누구인지 확언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핀처 부자의 《시민 케인》 저자의 발굴 작업은 《맹크》의 흑백화면처럼 과거의 복원처럼 보이지만, 그 화면비율이 아날로그 《시민 케인》처럼 4:3이 아니라 디지털의 2.2:1인 것처럼 실은 과거에 대한 현재의 한 해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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