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영화

영화 《더 파더》, 상실된 주체와 왜곡된 시공 그리고 껍데기만 남은 '아버지'

Zigzag 2021. 4. 6. 07:10
반응형

필자 주: 이 글은 영화에 대한 줄거리와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더 파더》, 잡을수록 미끄러지는 정체성

한 중년 여성이 바쁜 걸음으로 거리를 지나 한 건물 입구로 들어가 계단을 오른다. 그 바쁜 걸음 뒤로 헨리 퍼셀과 드라이든의 오페라 《킹 아서》 3막의 '당신은 어떤 권능을 가졌는가'(원제: What Power art thou이며, 흔히 Cold song이라 불림)가 흐른다.

당신은 어떤 권능을 가졌는가? / 바닥으로부터 나를 불러일으켜 세운 그대는 누구인가? / 마지못해 천천히 영원한 눈의 침상으로부터
당신은 보지 못하는가 내가 얼마나 굳어 있고( / 놀랍도록 늙었는지 / 가혹한 추위를 견디기에는 너무 부적합한지
나는 움직이는 것도 힘들고 / 숨을 들이켜는 것조차 어렵다 / 나는 움직이는 것도 힘들고 / 숨을 들이켜는 것조차 어렵다
나를 다시 얼려주오 / 나를 다시 죽음으로 얼려주오)

그가 아파트 문을 열고 거실에 앉아 있는 노인을 향해 "아빠"라고 부른다. 노인은 돌아보며 헤드폰을 벗는다. 동시에 음악소리가 그친다. 그제서야 관객들은 배경으로 흐르던 '당신은 어떤 권능을 가졌는가'가 영화의 캐릭터들은 들을 수 없는 외부 배경(non-diegetic) 음악이 아니라 그 캐릭터가 듣는 내부(diegetic) 음악임을 깨닫게 된다. 그의 머릿속에 퍼지던 노래는 영화 《더 파더》(The Father)의 무대가 인간의 외부가 아닌 인간의 내부임을 암시한다. 《더 파더》는 치매에 걸린 노인 앤서니(Anthony Hopkins 분, 원작의 이름은 André이지만 앤서니 홉킨스의 이름으로 바뀌었다)의 자기 상실 과정과 혼란을 그린 영화다.

영화 《더 파더》는 플로리안 젤러(Florian Zeller)가 자신의 프랑스 연극 《Le Père》(아버지)를 각색하고, 감독한 작품이다. 《더 파더》는 《스틸 앨리스》(Still Alice)처럼 정체성의 끈을 악착같이 놓지 않으려는 주인공과 그 가족들의 따뜻한 휴먼드라마가 아니다. 《더 파더》의 주인공에게는 잡아야 할 정체성의 끈은 이미 다 닳아 없어졌으며, 그가 정체성을 고정하는 순간 그 정체성은 이미 자아로부터 미끄러져 나간다. 《더 파더》는 제목과 달리 아버지-자식이라는 가족의 테두리를 다룬 영화가 아니며, 주인공의 정체성을 찾는 임무가 관객들에게 주어진 서늘한 추리물에 가깝다. 에드거 앨런 포와와 코난 도일이 장르로서 추리물을 개척했을 때, 그들은 합리적인 이성과 지능을 갖춘 인텔리적 주체와 그 주체가 위치한 왜곡되지 않은 시공간, 그리하여 인과의 사건이 그 시공을 따라 발생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 하지만 영화 《더 파더》의 관객들은 그런 이성적 주체도, 왜곡되지 않은 시공간도 없는 상황 속에서 추리가 얼마나 사치인가를 화면을 지켜보는 내내 경험한다.

일그러지고 뒤섞인 시간과 쪼그라들고 바뀌는 공간

주인공 앤서니에게 시계는 곧 자기 자신이다. 시계는 시간을 의미하며, 시간은 역사다. 그에게 시계는 개인의 역사며, 시계를 상실하는 순간 자기 자신을 잃는다. 그래서 자신을 돌보는 사람이 시계를 훔쳐 가지 않았을까, 자신의 사위가 찬 시계가 자신의 것이 아닐까 늘 의심하며 시계에 집착한다. 시계의 상실은 자신의 역사를 상실하는 것이다. 그 역사는 수많은 기억으로 구성되지만, 시계를 어디에 두었는지 망각한 앤서니는 결국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으로서 기억을 상실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자아를 잃어 버리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된 절망의 그 순간에도 앤서니는 빈 손목을 가리키며 "나는 내 시계가 내 손목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여정에서"라고 말한다. 시계의 상실은 시간, 인생의 여정, 그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돌보미가 시계를 훔쳐갔다고 말하는 앤서니(상단). 사위가 찬 시계가 자신의 것이 아닌지 의심하는 앤서니(하단)

내러티브 혹은 서사(敍事)는 문자 그대로 사건의 차례(敍), 즉 시간의 순서에 따라 정해진다. 원인은 결과에 앞서며, 그 원인에 따라 결과가 발생한다. 그것이 인간의 기억법이며, 세상을 이해하고 구성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앤서니의 시간은 일그러져 있다. 앤서니가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하는 아파트의 시간은 늘 느즈막 여름 오후다. 그의 딸 앤(Olivia Colman 분)은 겨울 코트를 입고 다니지만, 창을 통해 들어 오는 빛은 여름 늦은 오후의 그것이다. 앤서니가 반복해서 치킨을 먹는 저녁 8시 즈음의 창밖도 여전히 여름 오후다. 앤서니는 파자마를 입고 아침을 먹지만, 때론 저녁 8시에도 파자마를 입고 있다. 앤서니는 저녁 식사 전에 사위(Rufus Sewell 분)가 그가 병들어 있어서 요양 시설에 보내야 한다고 딸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지만 식사가 끝난 뒤에도 똑같은 대사가 반복되는 것을 듣는다. 딸이 장에서 사 온 치킨이 담긴 파란 비닐봉지는 같은 자리에 있지만, 그가 경험하는 파란 비닐봉지를 둘러싼 사건은 매번 다르다. 그의 시간에는 전후가 없고, 따라서 그에게 세상의 인과와 역사는 사라졌다. 타임은 그에게 더 이상 단선적으로 흐르는 타임라인이 아니다.

앤서니에게 공간은 사건이 발생하는 곳도,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는 곳도, 열려 있는 곳도 아니다. 그의 공간은 늘 쪼그라든 실내며, 그의 자리는 늘 그 실내에 머물러 있다. 딸도, 그의 돌보미도, 간호사도 그에게 산책하자고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파트, 병원, 진료실에 머물러 있다. 그와 외부를 연결하는 것은 창문이다. 그는 창밖을 통해 그의 딸이 거리를 건너는 것을, 철없는 아이가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를 가지고 노는 것을 보며 부러운 시선을 보낼 뿐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가 지속해서 자신의 공간, 자신의 아파트(flat)라 주장하는 곳은 실은 아내와 사위의 공간이며, 그의 임시 거처일 뿐이다. 더욱이 그 실내 공간은 불확실하다. 파란 비닐봉지가 놓인 식탁도, 부엌 가구도, 타일도 매번 다르며, 거실과 그 가구와 장식품도 매번 다르다. 부엌과 거실, 침실이란 공간은 같지만, 매번 다른 장소에 그는 놓여 있다. 왜냐하면 그가 거주하는 그 공간은 그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공간일 뿐이며, 치매로 불안정한 그 공간은 매번 바뀐다.

앤서니가 같은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부엌, 거실, 서재는 실은 매번 다르다.

연극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더 파더》는 무대의 공간적 세팅을 영화의 카메라 프레임 안으로 가져오면서 공간을 더 과감하게 왜곡한다. 영화가 흐를수록 관객들은 그가 지나는 하나의 복도가 같은 곳이 아님을 알게 된다. 동시에 그 복도가 그의 집인지 아니면 병원 복도인지, 그 복도의 끝이 그의 침실인지 아니면 그의 병실인지, 그리고 그 복도와 침실/병실이 물리적인 공간인지 아니면 그의 무의식으로 이르는 과정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앤서니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지나는 복도는 매번 다르지만 구조상 병원 복도와 거의 유사하다.

그 불안정한 실내 공간과 달리 창밖은 안정된 공간이다. 그는 혼란과 불안정을 느낄 때면 창밖을 통해 길 건너에 존재하는 상점 아발론(Avalon)을 보곤 한다. 아서 왕이 자신을 치료하기 위해 떠난 마지막 행선지와 같은 이름의 상점 아발론은 앤서니에겐 그저 바라만 볼 수 있는 장소일 뿐 불안정한 그가 결코 넘볼 수 없는 곳이다.

자신이 알고 있던 딸과 다른 모습의 딸이 나타나자 혼란스러운 앤서니는 자신이 알던 세상이 맞나 확인하기 위해 그동안 보아왔던 길 건너 상점 아발론을 본다

상실된 주체, 분열된 자아와 겹쳐진 타자

자신이 위치한 시공간은 왜곡되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인과는 엉망이 되는 상황에서 독립된 주체, 단일한 주체, 이성적 주체는 더는 존재할 수 없다. 80이 넘었지만, 탭댄스 정도는 쉽게 출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육체를 지닌 앤서니는 모든 것을 혼자 감당(manage)할 수 있다고 큰소리친다. 하지만 딸이 파리로 떠난다고 하자 그 강인한 주체는 이내 독립성을 상실하고, "나를 버린다는 말이냐?"며 좌절한다. 그는 더는 세상을 합리적으로 이해(sense)할 수 있는 이성적 주체가 아니다. 보통 영화 캐릭터들의 변화와 모순에는 캐릭터의 모티브가 존재하며, 이 캐릭터 모티브는 그 모순과 변화를 설명하는 가교다. 예컨대 어린 시절 부모의 학대, 과거 연인의 상실, 혹은 이성애 사회의 동성애와 같은 동기는 한 캐릭터의 강인함과 나약함, 외향성과 내향성, 침착성과 다혈질 이란 충돌하고, 모순되는 성격과 행동을 관객들에게 이해시키는 연결고리다. 하지만 강인한 주연과 나약한 조연, 우울한 주연과 활기찬 조연, 이성적 주연과 감정적 조연의 자리를 수시로 바꾸는 앤서니에게는 동기가 없다. 그 모순과 충돌의 대립을 하나로 엮는 자아가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치매는 모순된 자신을 연결하고 설명하는 캐릭터 동기를 창밖으로, 그의 자아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는 더이상 이성적 주체가 아니다.

앤서니는 강인한 주체와 나약한 주체 사이를 방황하며, 종국에는 세상을 이해(sense)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진다.

주체는 상실되고 자아는 분열됐지만, 그와 관계하는 타자들은 중첩되고 중복된다. 그의 딸 앤은 때론 올리비아 콜만(Olivia Colman)이지만 때론 올리비아 윌리엄스(Olivia Williams)이며, 올리비아 윌리엄스는 때론 그의 딸이지만 때론 그의 간호사다. "왜 주변 사람을 늘 괴롭히냐?"며 앤서니를 힐난하며 심지어 폭력을 가하는 사위 폴은 때론 루푸스 스웰(Rufus Sewell)이며, 때론 마크 게티스(Mark Gatiss)다. 마크 게티스는 때론 그의 사위이자 병원의 간호사다. 앤서니의 돌보미 로라로 분한 이모젠 푸츠((Imogen Poots)는 사고로 세상을 떠난 그의 딸 루시로 등장한다. 딸도, 사위도, 돌보미도, 간호사도, 그들의 의미는 계속 미끄러진다. 하지만 주체의 상실과 자아의 분열과 달리 그 미끄러지는 의미는 중첩과 중복으로 나타난다.

영화 《더 파더》에는 한편으로는 앤서니의 분열된 자아와 그 내면, 그리고 그를 둘러싼 캐릭터의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는 클로즈업이 주로 사용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와 그의 딸, 사위, 돌보미, 간호사와의 긴장과 대립을 보여주는 미디엄 샷이 주로 사용된다. 주체와 그 주변 맥락을 함께 보여주는 와이드 샷(wide shot)은 등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체는 상실되었고, 맥락은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공허한 껍데기 뿐인 아버지

《더 파더》는 함께 2021년 오스카 작품상 후보에 오른 작품들과 비교할때 특이한 내러티브를 가진 영화다. 《미나리》가 낯선 땅에 들어온 변방인들의 중심과 주체가 되기 위한 이야기라면, 《노매드 랜드》가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이들이 주체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이야기라면, 《맹크》가 《시민 케인》을 만든 실질적인 주체를 찾는 이야기라면,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이 당대를 지배하는 주체의 고발과 주체의 교체를 위한 이야기라면, 《더 파더》는 상실된 주체의 이야기다. 《더 파더》는 《미나리》나 《노매드 랜드》처럼 광활한 대지를 담는 대신, 비좁은 앤서니의 내면을 담고 있다. 《더 파더》는 《맹크》나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처럼 적아 간의 대립과 갈등 대신, 앤서니 내면의 대립과 갈등을 다룬다. 영화 《더 파더》는 이들 작품과 달리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하지만 한때 해가 지지 않던 제국의 역사와 영화를 상징하는 강한 백인 노인이 이제는 쪼그라든 자신만의 공간에 갇혀 내면과 씨름하는 과정, 자신의 공간에서 코로나 19의 가장 심각한 피해를 보고 있는 요양원으로 보내지는 과정은 지금 영국이 처한 맥락, 그리고 지배를 상징하는 '아버지'의 몰락이라는 상징적 함의와 분리할 수 없다.

영화 《더 파더》는 플로리안 젤러가 각색자와 감독으로 영화의 이야기를 만들고 구성하는 책임자지만, 영화의 화면은 앤서니 홉킨스에 의해 장악되었다. 주인공의 이름, 연령, 성격까지 앤서니 홉킨스에 맞춰진 영화 《더 파더》는 그가 앤서니란 배역을 소화했기에 나올 수 있는 영화였다. 젤러는 홉킨스라는 인간 자체가 앤서니라는 캐릭터에 더 몰입하도록 생년월일까지 일치시켰다. 홉킨스의 인간으로서 자신과 배우와 배역 간의 공명은 관객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현실과 상상,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기 위한 관객들의 노력이 점점 미궁에 빠질수록 그들의 앤서니에 대한 몰입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 몰입은 영화의 초입에서 강한 육체와 자아를 가진 아버지였던 앤서니가 종결부에서는 무너져 내리며 엄마를 찾는 장면에서 최정점에 이른다. 그 장면에서 앤서니는 "마치 이파리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그는 그 이파리와 연결된 "가지도, 바람도, 비도" 잃는다. 즉, 세상과의 모든 고리를 상실한 앤서니는 그 모든 고리가 생성되기 이전의 상태, 오직 탯줄로만 연결되었던 엄마의 자궁, 자신의 출발점으로 귀향하고 싶은 것이다. 망향 끝의 귀향을 원하는 무너진 앤서니 앞에서 관객들의 이성적 추리는 정지하고 서늘하면서 뭉클한 양가의 감정이 교차한다.

영화 《더 파더》의 아버지라는 명사는 가족의 일부를 지시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딸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사랑하는 딸은 그의 곁을 떠난 지 오래다. 그는 앤서니라는 이름으로 불릴 뿐, '아버지'는 공허한 명사일 뿐이다. 그는 지켜야 할 가정도, 세워야 할 권위도, 거느리고 있는 자식도 없다. '아버지'는 공허한 자리가 되었다. 그 공허뿐인 자리를 지키던 앤서니도 마지막에는 엄마를 찾는다. 이 순간 우리는 'The Father'가 가족을 지시하고, 가족과 관련을 맺는 '아버지'가 아니라 낡은 질서의 상징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