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와 변화의 경제-정치 환경 그리고 폐쇄적 독점의 온실에서 자란 한국화약의 군림자 김승연
1980년 광주항쟁 이후 온실 속에서 성장해온 재벌들은 완전히 새로운 생태계에 직면한다. 1960년대 삼분 파동 이후 대중적인 관심사로 부각한 독점에 대한 규제는 1980년 공정거래법의 제정으로 결실을 보았다. 공정거래법은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의 빈약한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일종의 생존책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중공업 과잉중복투자로 인한 경제 위기 극복과 막대한 재벌 권력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이 공정거래법의 제정이었다. 1987년 민주화는 재벌에 대한 실질적인 규제로서 상호출자규제로서 출자총액제한이 본격화된 시점이었다. 1993년 금융실명제 도입은 시중의 검은돈을 추방해 금융거래 투명성을 높였다. 그리고 1997년 금융위기는 기업에 사외이사제도와 회계 투명성 강화제도의 도입으로 이어졌다. 또한 2002년 대선 전후 '차떼기' 파동과 같은 기업의 불법 정치자금을 막기 위해 2004년 정치자금법이 개정되었다.
민주화와 함께 불어닥친 새로운 경제환경, 그리고 기업-정치 관계는 재벌에게는 일종의 큰 도전이었다. 체질적으로 화약과 베어링이라는 독점시장에서 성장하여 매 정권 실세들과의 혼맥으로 규모를 키워온 폐쇄적인 한화 그리고 29세의 젊은 나이에 총수에 오른 김승연에게 이 환경은 적응하기 쉽지 않은 아니 적응하기 싫은 환경이었다. 한화가 누려온 느긋한 독점과 끈끈한 정경유착 그리고 창졸간에 막대한 권력을 거머쥐게 된 한화의 김승연은 어쩌면 이 새로운 환경에서 가장 진화하지 못한 퇴행적 총수였을 수도 있다. 그가 저지른 범죄행각은 권력에 기대어 법을 조롱했던 그의 태도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독점의 특혜로 자란 한화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한화의 시작, 적산 기업 관리인 김종희
한화는 김승연의 아버지 김종희에 의해 설립되었다. 김종희는 서울 소재 경기도립상업 학교에 입학했다, 패싸움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한다. 그의 퇴학은 종종 일본학생과의 민족적 갈등으로 미화되곤 하지만, 그가 이후 고이께 스루이치 원산경찰서장의 도움으로 원산상업학교에 입학한 것을 보면 단순 폭력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는 원산상업학교 졸업 후 1942년 조선화약공판에 한국인 최초로 정규사원으로 입사해, 그 이듬해 1월 다이너마이트 계장으로 승진한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그는 사내 일본인들에게 제한을 가하려는 동료들을 말리며 조선화약공판을 지켰고, 1946년 미군정에 의해 관리책임자 및 지배인으로 임명됐다.
한화의 성장은 정경유착 없이는 불가능했다. 김종회와 미군정과의 밀착 관계는 1952년 전쟁 와중에 그에게 조선화약공판의 낙찰로 이어진다. 그가 한국화약을 창립한 1952년 장남 김승연이 태어난다. 전후 복구공사 수요를 위해 김종휘는 보통 시중 환율의 1/2 혹은 1/3로 제공되던 정부보유불 15만 불을 60:1인 900만 환에 구매해 이미 상당한 이득을 얻었는데, 거기에 더해 당국의 환율 정상화로 환 대 달러를 180:1로 정하면서 앉은 자리에서 3배 장사를 하게 된다. 화약 수입과 국내 판매 확대로 한화의 매출은 1953년 8,500만 환에서 1954년 2억 환으로 급성장한다.
한국화약의 성장사: 독점과 결탁의 역사
김종희는 1955년 조선유지 인천공장을 인수하여 국내 화약 독점의 길을 열었다. 이 인천공장은 6.25전 국방부가 상공부로부터 인계받아 수류탄과 지뢰 등을 생산하고 있었다. 당시 대한광업회장 정 모 씨는 인천공장을 임차해 운영하고 있었는데, 산업은행에 진 부채 4천만 원으로 정 씨가 실랑이하는 동안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인천공장을 한국화약에 넘겨주라고 지시했다 한다.
김종회는 1958년 본격적인 조업에 들어가 다이너마이트 국산화에 성공한다. 김종회는 1960년 정부의 화약류 수입금지 조처로 국내 화약 수요를 독점하는 특혜를 얻는다. 화약독점으로 김종희는 이미 1960년대 중반 국내 납세자 순위 13위에 오를 정도로 자금력을 확보했다. 1960년대 본격적인 경제개발과 함께 시작된 각종 건설 붐에 힘입어 김종회의 한국화약은 급속히 성장한다. 발파용으로 주로 쓰이는 초안폭약의 수요는 1958년~1968년 사이 수요가 3배 성장했으며, 다이너마이트는 6배나 증가했다. 한국화약의 1967년 총매출액은 15억 원이었지만 순이익은 1억6천만 원에 불과했다. 그 이유는 한국화약 측의 원가 부풀리기를 통한 순이익 축소 때문이다. 한국화약은 폭약의 원가를 국제가격의 5~6배가 넘게 책정해 폭리를 취했다. 매일경제 1968년 10월 19일 기사는 한국화약이 “늘어나는 국내수요에 가격 인상으로 10여 년 간이나 단물을 만끽”했으며 “경쟁자 없이 폭주한 이 화약의 과거는 판매가격인상의 역사”라고 쓰고 있다. 당시 국회 상공위원회 회의에 따르면 한국화약이 밝힌 위의 순이익은 1억6천만 원이 아니라 위의 총매출액 15억 원의 2/3인 10억 원이었다. 상공위는 한국화약은 또한 1964년에 인수한 신한베어링이 실질적인 독점적 지위를 획득하면서 품질개선 없이 폭리를 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화약이 인수할 당시 신한베어링은 국제협조처(ICA) 자금으로 독일(서독)로부터 최신 기계를 도입해 낙후한 다른 국내 기업과 비교해 월등한 장비로 국내시장을 실질적으로 독점하고 있었다.
김종희의 한국화약 성장은 정치권과 끈끈한 관계없이 상상할 수 없다. 김종희의 형 김종철은 자유당과 공화당 국회의원이었고, 1970년대 국회 상임위 국방위 소속으로 한국화약의 든든한 뒷배가 되었다. 그는 동생 김종희를 자신과 친분이 두터운 김종필에게 연결하였고, 이것이 후에 경인에너지(지금의 SK인천석유화학) 설립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김종희는 또한 첫째 딸을 통해 이후락과 사돈 관계를 맺으면서 이승만, 박정희 정권과의 관계를 기업 성장의 발판으로 삼았다.
특정 품목 시장에서의 독점적 지위 확보와 권력과의 유착은 한국화약에 자본주의의 기업이 생존을 위해 가져야 할 파괴적 혁신의 본성을 생략하게 했다. 1970년대 한국화약은 흔히 '관리의 기업'이지만 '영업의 기업'은 아니라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기업에 관해 좋은 이야기만 쓰는 <경영사학>지 2010년 김승연과 한화 기업문화에 대한 글조차 한화는 보존적이고, 친화적인 문화가 강하고, 합리적이고 진취적 문화가 낮다고 지적하고 있다. 김종희와 한화의 안이함과 폐쇄성은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란 참사로 이어진다.
이리역 폭발 사건: 독점재벌 한화가 빚어낸 참사
1977년 11월 11일 밤 9시경 이리시(지금 익산시 일부) 역내에 대기 중이던 화물열차의 다이너마이트 등 폭약 30t과 뇌관 280kg이 폭발해 56명이 사망하고 1,344명의 중경상자와 8명의 실종자, 그리고 9,973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 폭발사고로 이리 시내 약 13,000개 동 가옥의 71%가 전파 혹은 반파되었으며, 총 130억(2020년 물가로 약 1,000억 원)의 피해가 발생했다.
사고는 철도청과 한국화약의 부패가 겹쳐지면서 발생했다. 철도청 직원들은 인천에서 출발한 화약 화차의 목적지 광주까지 직송 원칙을 어기고 영등포역 주변에서 10시간, 이리역에서 22시간 이상 정거 시켜 직송으로 몇 시간이면 갈 거리를 무려 이틀 이상 지체시켰다. 또한 여객용 일반 객차와 화약용 화차를 분리 정거시키지 않았다. 화약 화차의 오랜 정거 시간은 철도청 직원들이 뇌물을 받고 다른 화차들을 먼저 배차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화약은 폭약과 뇌관을 함께 수송하지 않는 원칙을 위배했고, 철도운송법에 따라 다이너마이트를 두께 3cm 이상의 나무상자에 운반해야 하는 지침을 어기고 대신 종이상자를 사용했고, 다이너마이트를 사방 벽으로부터 30cm 천장에서 60cm 거리를 두고 적재해야 하는 원칙을 무시한 채 벽에 닿도록 적재했다. 한국화약은 수송인은 화약을 실은 화차에 승선하는 대신 승무원실에 있게 되어 있는 규정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수송인에게 화약 칸 옆에 숙박 칸을 마련하여주었다. 또한 화약 호송인들이 총포·화약류 취급 면허를 소지하지 않았으며, 수송인으로 등록되지 않은 사건의 주범 신 모 씨를 승차시켰다. 신 모 씨는 안전교육 없이 7년간 같은 업무에 종사했다. 그는 화약 화차가 오랫동안 정거하자, 그 틈에 역사 밖에서 양초와 소주를 구매해 화물칸에서 술을 마신 후 화약 화차에 둘 수 없는 화기위험물인 성냥(경인에너지의)으로 양초를 켜고 잠이 들었는데, 그 촛불이 주변으로 번지면서 대참사로 이어졌다. 한화는 안전관리, 포장, 적재, 운송에서 모두 실패했다.
김종희가 아니라 "현암 김종희 회장"이라고 호와 직위까지 표기해 마치 한화그룹 관계자가 쓴 인상을 풍기는 아래 나무위키의 '한화그룹' 항목은 김종희가 이리 참사와 관련해 "즉각 대국민 사과"를 했고, 김종희가 사재 90억 원을 털어 보상한 것처럼 쓰고 있다.
이리역 폭발사고에 대한 사과문은 한국화약 이름으로 사고 다음 날인 11월 12일에 광고 형식으로 신문에 게재되었다. 하지만 1차 사과문은 참사로 국민 여러분께 "걱정"을 끼친 것에 "심심한 사과"를 하고, 사망자의 명복만 빌었을 뿐 한국화약의 책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김종희는 사고 다음 날 현장에 찾아가 수해지원금처럼 1억 원을 내고 직원들을 동원해 헌혈시키고, 심지어 직원들의 월급 2%를 각출해 위문금을 내게 했다.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고 1차 사과문의 진정성이 의심되고 여론이 한국화약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제야 김종희는 본인 이름으로 2차 사과문을 내고 비로소 "국민 여러분께 큰 충격과 경악"을 불러일으킨 것에 "머리 숙여" 사과하고 "법적, 도의적 책임"을 꺼냈다. 이 1, 2차 사과문에 대해 당시 제일변호사회 같은 단체는 한국화약이 "형식적인 사과문만 발표했을 뿐 피해 보상에 구체적인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며 비판했으며, 당시 신문은 한화의 "사력을 다하겠다." "성의를 다하겠다"는 사과문을 "공자님 같은 문구만 나열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한국화약은 정부가 90억 원을 제시하기 전까지 보상 규모나 방법은 물론 보상 여부조차 모호하게 말을 흐렸다.
90억 원의 보상금은 국가에서 정한 것이며, 김종희의 한국화약은 3차례에 걸쳐 분납했으며, 그 돈은 김종희의 사재와 무관한 한국화약 차원에서 낸 것이다. 한화는 1977년 총매출액 141억 원으로 50%가량 매출이 신장했고, 순이익이 13억 원이었지만 이리 보상금 때문에 주주에게 배당을 시행하지 않았다. 1978년 한국화약은 이리 보상금으로 55억 원의 결손이 발생해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지불하지 않았고, 대신 김종희가 사재 2억 원으로 주주들에게 위로금을 지불했다. 1978년 물가상승률은 1977년의 1.145배, 1979년은 1977년의 1.354배로 한국화약이 실제로 부담한 돈은 1977년 가치로 계산하면 90억 원이 아니라 60억 원~70억 원 정도다.
이 모든 참사의 법적 책임은 한국화약의 실질적 주인인 김종희 대신 사장 신현기가 졌다. 김종희는 교묘하게 재정적, 법적, 도의적 책임으로부터 빠져나갔다. 한화는 이리 폭발사건으로 타격을 받는 대신 오히려 급속히 성장한다. 1978년 그룹 전체 매출액은 3,171억 원으로 10대 재벌에 들어갈 정도로 성장했다.
29세에 총수가 된 김승연, 정경유착과 혼맥으로 기업 확장
이리 참사로 김종희는 경영일선에 직접 나서기 곤란해졌으며, 이 사건은 25세의 김승연은 본격적인 경영'수업'에 참여하는 계기가 된다. 더욱이 김종희는 1981년 59세로 타계하면서 김승연은 29세의 젊은 나이로 회장에 취임한다. 그는 회장 취임 이듬해인 1982년 당시 내무부 장관이던 서정화의 딸 서영민과 결혼함으로써 전두환의 5공 정부와도 끈끈한 인맥을 형성한다. 서정화는 국정원 차장, 1982년에 이어 1997년에도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1987년 대선 수도권 단장을 함으로써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권 아래서 권력의 핵심 실세였으며, 2000년에는 3선의 지역구를 떠나 한나라당의 비례 6번이 될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정치인이었다. 김종희로부터 김승연이 계승한 첫 번째 유전자는 정경유착과 혼맥 형성이었다.
그의 정경유착과 혼맥은 1986년 정아그룹(명성그룹의 법정관리 후 명칭) 수의계약에 의한 헐값 인수로 이어졌다. 레저산업을 실질적으로 시작했던 명성그룹은 전두환의 저인망식 세무조사로 부실기업의 낙인이 찍힌다. 명성그룹의 경영상태가 양호한 남태평양 레저타운, 명상관광, 컨트리클럽 등 6개 사를 묶은 정아 그룹은 공개매각이 아닌 한화에 수의계약으로 매각되었다.
1988년 5공 청문회에서 드러난 바에 따르면 한화 측은 명성에 "3억 원만 받고 포기"하라고 강요했으며, 이는 고위층의 지시며 그 고위층은 "청와대 민정비서실"이라고 밝혔다. 한화는 정아그룹을 20억 원에 계약하고, 그룹 부채를 8년 거치 12년 분할상환이란 특혜로 인수했는데, 거기에 1천억 원가량의 지원을 받았다. 한화의 정아그룹 인수는 전두환에게 직접 보고되어 챙길 정도로 권력의 관심사였다. 한화는 법정관리란 정아그룹을 법정관리란 특혜 상황에서 인수한 데다가 법정관리 기업의 경우 비업무용토지를 매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정으로 레저기업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명성/정아가 구매한 약 1천만 평의 토지를 매각하지 않았고, 1991년까지도 약속했던 정아의 채무를 채권은행에 거의 갚지 않았다.
김승연, 외국환관리법 위반 구속이란 특혜
이리역 폭발사고로 잠시 뒤로 물러난 김종희를 대신해 김승연이 기업경영 전면에 등장한 건 1977년, 그가 25세 때이다. 그는 계열사인 태평양 건설 이사로 공식 행보를 내디뎠고, 입사 4년만인 1981년 29세로 그룹의 총수가 된다. 폐쇄적인 한화로서는 좀 더 혁신적인 방향으로 움직일 기회를 잡았고, 김승연은 제2 창업의 기치를 들고 한화를 10년 만에 계열사 25개, 총매출액 4조를 넘는 기업으로 키웠다. 하지만 김승연 그 자신으로 보면 젊고 혈기방장한 나이에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이다. 그는 심지어 전두환조차 "한화 김승연 회장도 문제가 있어서 교육을 하고 해서 보낸 적이 있다"고 말할 정도로 행동이 거칠었다.
다른 재벌 총수와 달리 김승연에게는 범죄사犯罪史, 즉 단순한 범죄의 기록이 아닌 일련의 역사가 있다. 그 첫 시작은 1993년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지 넉 달 뒤인 12월에 터져 나왔다. 김승연은 산하 계열사 태평양 건설을 통해 1979년~1983년 사이에 수주했던 해외건설 수주와 관련해 사우디아라비아 중개인에게 지급했던 커미션 중 650만 달러를 돌려받고 국내로 다시 돌려보내지 않은 채 해외은행에 가명으로 분산 예치하고 김승연 개인 용도로 사용해 외국환관리법을 위반했다. 그는 그 돈으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복싱 영화 '로키'의 스타 실베스터 스탈론 저택을 470만 달러에 구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 사실이 처음 폭로되자 곧바로 출국해 무려 5개월 동안 해외에 체류 후 귀국했다. 김승연은 별장을 그리스인에게 명의만 빌려준 것이라고 우기다 87년부터 93년 8월까지 100억 원 가량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8월 이후인 9월~10월 사이 그의 차명계좌를 "남대문 지게꾼" 최 모 씨를 통해 변칙 실명 전환한 사실을 검찰이 들이밀자 결국 혐의를 인정했다. 그가 조성한 불법 자금의 일부는 김승연의 주식 판매 대금을 차명계좌에 넣은 것이고, 그중 34억 원 명목상 접대비 지출로 된 자금으로 조성한 것이다. 이 회사자금으로 그는 개인 용도로 전용하고, 일부는 성금과 격려금을 내는 등 회장 생색용으로 사용했다.
김승연은 최종적으로 외국환관리법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역사상 10대 재벌 가운데 처음으로 구속된 총수가 되었다. 일부에서는 그가 김영삼과 등을 진 박철언의 돈줄이라는 이유로 미움을 샀고, 일종의 보복성 구속이었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장인 서정화조차도 그를 구제할 수 없을 만큼 김승연의 범죄행위는 뚜렷했다. 오히려 그가 횡령이 아닌 외국환관리법 위반으로 구속된 것은 김영삼 정권이 그를 오히려 구제한 것이며, 그는 집행유예로 나올 수 있는 일종의 특혜를 받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구속된 지 두 달 만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47억2천300만 원을 선고받고 석방됐다.
김승연의 불법정치자금과 대한생명 인수
권위주의 시대 김승연의 줄잡기는 늘 성공했지만, 민주화 시대에 들어와 그의 줄잡기는 실패를 거듭한다. 2002년 대선 직후 삼성과 현대 등 대기업의 이회창 후보에 대한 거대한 불법정치자금 제공이 '차떼기' 파동으로 불거져 나오면서 정지자금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래서 2004년에 정치자금법은 공급의 측면에서 기업이나 법인과 같은 단체의 정치자금 제공을 금지하고, 제공 한도와 횟수를 대거 낮추었으며, 대신 선거 공영제를 확대했다. 동시에 수요의 측면에서 중앙당과 지구당 규모와 운영 규모, 선거운동 방식에서 대규모 정치자금이 소요되는 활동 자체를 제한했다.
정경유착으로 기업을 키워온 김승연에게 이 새로운 환경은 낯설었다. 그는 여전히 퇴행적 범법에 의존했다. 2002년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은 한화가 대한생명 인수를 위해 정치권에 불법정치자금을 제공했다고 폭로했다. 김승연의 한화는 2002년 대선 당선이 확실시되던 이회창의 한나라당 당 대표 서청원에게 10억 원의 채권을 제공했다. 이 불법정치자금의 목적은 대한생명 인수를 위한 특혜제공이었다.
한화는 한화종금과 충청은행의 부실 책임으로 공적자금 3조5천5백억 원이 투입된 대한생명 입찰 자격이 없었다. 또한 기업 부채 규모가 232%로 보험업법의 주요출자자요건인 200% 미만 부채 규모를 초과했다. 대한생명 인수 자격을 얻기 위해 익금산입의 방식으로 분식회계를 했으며, 금감위는 5년간 부실금융기관의 대주주에게는 금융기관 설립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지침을 개정해 한화의 입찰 자격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2001년 이 모든 입찰 자격 조건 문제가 해소되면서 공적자금관리위원회는 국내 보험사가 51%의 지분을 가진 컨소시엄에 매각한다는 방침을 세움으로써 한화가 참여한 컨소시엄에 입찰 기회를 확대했다. 나아가 1조 원 이상의 추가 공적자금을 투입했고, 한화는 국민의 혈세 3조5천5백억 원이 들어간 대한생명을 단돈 8,236억 원에 인수했다.
김승연이 서청원에게 제공한 불법정치자금 10억 원은 조 단위의 이익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그러나 김승연은 이 범죄로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벌금 3천만 원을 선고받았을 뿐이다.
사업도 일상도 복싱으로 살아 온 복싱연맹 회장 출신 김승연의 청계산 보복폭행
김승연은 학창 시절 아마 복싱 선수였고, 그 때문에 1982년~1997년까지 대한아마복싱연맹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2010년 한화 출입 기자들과의 한 만남에서 "뭘 해도 복싱이다. 신사업도 복싱이고 M&A도 복싱"이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는 사업만 복싱으로 산 게 아니라 일상도 복싱으로 살았음이 2007년 소위 '보복 복행' 사건을 통해 드러났다.
김승연의 2남과 3남은 대한항공 조현아의 '땅콩 회항' 못지않은 사건들로 경제면이 아닌 사회면을 장식했다. 그의 차남은 2011년 뺑소니 운전으로 벌금을 받았고, 그의 삼남은 2010년과 2017년에는 주점에서 성추행과 폭행 사실이 알려져 큰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문제는 김승연의 아들로 끝나지 않고 김승연 자신의 범죄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김승연의 차남 김동원은 2007년 3월 8일, 북창동 한 술집에서 종업원들과 시비가 붙어 싸움을 벌이다 구타를 당해 부상을 입었다. 김승연은 조직 폭력배와 경호원들을 동원해 폭행에 가담한 종업원들을 쇠파이프와 전기 충격기를 동원해 위협하고, 복싱 자세로 그들을 구타했으며, 심지어 차남에게 그를 때린 종업원을 상대로 보복폭행을 가하게 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김승연의 한화가 회장의 관여를 감추기 위해 조폭을 고용하고, 경찰에 로비를 전개했다는 것이다. 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청장은 남대문 경찰서장과 서울청장에게 전화해 광역수사대 사건을 남대문 경찰서로 이첩했다. 사건을 담당한 남대문서 수사과장은 한화로부터 사건 수습을 청탁받은 조폭과 접촉해 김승연 회장 무관설로 조서를 꾸미다 사건이 언론에 폭로되자 수사보고서를 새로 꾸며내기도 했다. 한화는 이 과정에서 5억8천만 원을 쓰고, 사건이 확산하자 합의를 위해 7억여 원을 더 썼다. 그리고 법정에서 김승연은 검사에게 충고하고, 불온한 자세로 법정을 무시하고, 아구를 돌렸다는 등 범죄사실을 자랑했다.
하지만 김승연은 1심에서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겨우 4개월 정도의 복역 후 결국 2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으로 석방된다. 이 사건은 29세로 총수가 되어 권력과의 유착으로 승승장구해 온 김승연이 법을 스스로 집행하려 했고, 현행 법질서를 무시하고 조롱한 사건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는 한화 내에서 "신의 경지"에 오른 "비교할 수 없는" 존재로 군림하며, 한화라는 기업을 자신의 개인 소유물처럼 다루고 있었다.
김승연의 배임: "신"으로 추앙받는 김승연의 '눕판'과 특혜
2010년 검찰의 한화빌딩 경영기획실 압수 수색 과정에서 이상한 문서가 하나 발견된다. 문서의 제목은 '본부조직의 역할과 자세'였다. 문건은 본부조직(필자 주: 한화그룹 전체를 통제하는 경영기획실을 의미)의 존재 이유를 “CM(Chairman, 김승연 회장 지칭)을 위한 조직, CM의 안위 및 재산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조직”이라고 정의하며 김승연은 “충성의 대상 : CM only” “CM은 신의 경지" 비교 불가능한 존재로 규정했다. 나아가 본부조직은 "CM이 바라는 지배구도가 연속될 수 있도록 보좌하고, CM을 호위하고 CM이 심신 모두 최대한 평온한 상태에서 생각하고 판단하실 수 있도록 잘 모시”며 “CM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발휘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폐쇄적인 기업문화의 한화에서 신처럼 군림했던 김승연이기에 2011년 그가 기업의 주인인 주주들에게 3천억 원대의 손실을 입힌 혐의로 구속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2012년 김승연의 구속은 한화증권 퇴직자의 제보에서 시작됐다. 2010년 금감원은 한화증권 퇴직자로부터 한화의 차명계좌 5개에 대한 제보를 받고 대검찰청에 한화그룹 수사를 의뢰한다. 검찰은 9월 16일 한화그룹 장교동 본사와 여의도의 한화증권을 압수 수색한다.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를 받던 김승연은 한화그룹 계열사들을 동원하여 부실 위장계열사 한유통·웹롭의 부채를 해소하기 위해 유휴부동산의 저가매각과 회사의 다단계 분할·합병 및 유상증자와 부동산 내부거래 등으로 그룹에 약 2,883억의 손실을 입히고, 김승연의 누나에게 저가로 동일석유 주식을 양도해 계열사에 141억 원의 손해를 발생시키고, 한화, 한화증권, 한익스프레스, 한화석화 등의 주식 약 265만 주를 직원들의 이름으로 차명 보유하고 주식 합계 2,645,899주를 차명으로 보유·거래하여 약 70억 원의 양도차익이 발생하였지만 이를 신고하지 않고 세금포탈을 했다. 그는 1심에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혐의 등으로 징역 4년 형을 언도받았지만, 5개월 만에 구속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는 최종적으로 대법원 파기환송심에서 횡령과 배임 혐의가 적용되었지만 소위 재벌총수 3·5 법칙, 즉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자유의 몸이 됐다. 이 형량은 횡령·배임 범죄의 경우 300억 원 이상이면 형의 감경구간이 4~7년임에도 김승연은 배임 액수가 1천억 원을 훨씬 넘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낮은 징역 3년에 5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는 특혜를 누렸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재판과정에서 침대까지 동원해 누워서 재판받는 '눕판'을 벌인 끝에 5개월 만에 구속집행정지로 나왔다. 그는 우울증과 호흡곤란 증상으로 구속집행정지를 신청했는데 그의 호흡곤란은 폐 질환과는 무관한 감옥생활 중 과식으로 인한 20kg의 체중증가와 수면유도제 중독 때문이었다. 2개월의 형집행정지는 그의 재판 진행 동안 4차례 연장되었고 그는 재판을 감옥 안이 아닌 바깥에서 체류하면서 받을 수 있었다. 뉴스타파에 따르면 서울대 병원의 신경정신과 모 교수의 김승연에 대한 '알츠하이머성 치매' 진단은 그의 구속집행정지 연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배임의 경우 형의 종료 2년간 회사 취업을 금지하는 규정에 따라 김승연은 2014년 (주)한화를 포함한 7개 계열사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났다가 올해 7년 만에 (주)한화 등의 주요 계열사 미등기 임원으로 다시 복귀했다. 다시 복귀하는 김승연에게 한화가 그의 알츠하아머 증상에 대해 묻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만약 7년 전 진단이 유효하다면 한화는 알츠하이머 증상이 있는 김승연에게 기업을 맡기는 셈이다. 폐쇄적 기업 속에서 황제처럼 군림하는 그가 앞으로도 과거에 그가 보였던 것처럼 법을 한없이 가볍게 볼 위험은 적지 않다. 지나온 행적에서 그는 정치적 민주화와 건전한 시장에 뒤떨어진 퇴행적 행보를 보였다. 더이상 젊지 않은 그의 나이 속에서 그가 새로운 지혜를 얻지 않았다면 그의 범죄사는 여전히 새로운 기록을 준비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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