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보이듯 보이지 않는 기지국: 현대인의 집단적 불안의 상징 그리고 비가시적 권력의 가시적 신호

Zigzag 2022. 8. 24.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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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 주: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는 종종 기지국(cell tower)에 의해 둘러싸인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기지국을 마치 도시에 들어 찬 인공적인 건조 환경(built environment)의 일부로 간주한다. CCTV와 달리 기지국은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덜 준다. 오직 이들이 발생하는 엄청난 전자파가 우리의 주거환경과 집값을 위협한다고 생각될 때만 이들은 우리의 가시권에 들어온다. 기지국에 대한 반응은 가시권에 있지만 못 본 척 외면하거나 아니면 위협적인 존재로 반발을 부르는 양 극단의 형태로 드러나곤 한다. 이 때 반발을 모면하기 위한 위장기지국조차 그 목적은 기지국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분산시키는 것이며, 관심을 끄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들이 형성하는 전자파와 헤르츠의 우주 그리고 이들의 연결을 통해 생산하는 빅데이터의 바닷속을 유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우리를 연결하며 그 연결 속에서 생산되는 일거수일투족의 인간의 기록은 일상으로 침투할 수 있는 감시의 망에 우리를 개방하고 있다. '1984'의 빅브라더는 보이지 않지만 중앙의 권력을 드러낸다. 하지만 기지국은 자신을 드러내지만 중앙의 권력을 드러내지 않는다. 명백히 보이지만 안 보이는 기지국은 다른 측면에서 그런 빅브라더에 대한 현대인의 깊은 집단적 불안감을 상징하는 가시권에 있는 비가시적 상징이고 신호하지 않는 신호이다. 이 글은 사우스 플로리다 대학교 영어 및 디지털 인문학 교수 Steven Jones의 The Conversation 8월 22일 자 기고 Cell towers have come to symbolize our deep collective anxieties의 번역으로 기지국이 왜 현대인의 집단적 불안과 연결되어 있고, 기지국이 현대인에게 어떤 다른 반응들을 불러내며, 기지국이 실제로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기지국은 우리의 깊은 집단적 불안을 상징하게 되었다

Steven Jones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전파의 전자기파 수프에 빠져 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것다. 사진: RapidEye/E+ via Getty Images

새 영화 '폴'(Fall)은 두 명의 열렬한 암벽 등반가 여성 베키(Becky)와 헌터(Hunter)의 서바이벌 스릴러다. 등반 사고로 베키의 남편이 사망한 지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그들은 버려진 2,000피트 높이의 TV 타워를 오르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사다리가 부러지면서 그들은 녹슨 강철 격자 위에 발이 묶인다. 아이러니하게도, 통신탑 꼭대기에서 등산객들은 구조를 요청하는 전화 신호를 받기에는 너무 높은 곳에 있다.

다른 최근 영화에서도 무시무시한 통신탑이 등장했다.

스티븐 킹(Stephen King)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2016년 영화 '셀'(Cell)을 예로 들어 보자. 이 영화에서 기지국(cell tower) 신호는 일반 사람들을 좀비로 바꾼다. 이것은 휴대폰이 사용자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진부한 표현이다. 2018년 인도 SF 블록버스터 '2.0'에는 고질라 또는 모스라와 유사한 휴대폰으로 만든 거대한 카이주 괴물이 등장한다. 그것은 기지국 방사선에 의해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수백만 마리의 새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해 일어난다. (매년 수백만 마리의 새가 타워에 충돌하여 죽지만, 아마도 그들이 방출하는 방사선이 아니라 빛에 의해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통신탑은 왜 그렇게 무서운가? 왜 '폴'에서 철탑이 베키의 남편이 죽은 바위 절벽보다 더 불안한가?

그것은 고소공포증 그 이상의 문제인 듯하다. 기술에 대한 태도를 연구하고 러다이트(Luddites)에 대한 책과 기지국에 관한 또 다른 책을 저술한 학자로서 나는 기지국이 그 이전의 라디오 및 TV 타워와 같은 깊은 집단적 불안의 초점이라고 본다.

보이지 않는 힘의 전달

인류학자 섀넌 매턴(Shannon Mattern)이 주장한 바와 같이, 타워와 안테나는 광대한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대부분 무선 또는 지하)의 가시적인 표현이며, 사람들이 점점 더 의존하게 되더라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것들은 우리 대부분이 오히려 잊고 싶어 하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우리는 전파의 전자기 수프에 잠겨 있으며 디자인 학자 앤서니 던(Anthony Dunne)이 "헤르츠 공간"(hertzian space)이라고 불렀던 곳을 매일 돌아다니고 있다. 그 보이지 않는 물결은 또한 유비쿼터스 감시와 조작의 가능성을 나타낸다.

캘리포니아 주 라하브라(La Habra)에 있는 그린힐 침례교회(Green Hills Baptist Church)에서 통신 노드 역할을 하는 크로스 타워. 사진: Gina Ferazzi/Los Angeles Times via Getty Images

따라서 격자 구조의 철탑이나 꼭대기에 군집된 직사각형 안테나 패널 배열을 가진 매끈한 전봇대는 강력한 반응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

한편에는, 거부가 있다. 사람들은 반의식적으로(half-consciously) 그들을 "안 본 것으로 하고"(unsee) 그들이 그곳에 없는 척할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기지국은 편집증의 근원이 될 수 있으며 때로는 음모론으로 전이되기도 한다.

잘 보이는 곳에 감춰져 있는(Hidden in plain sight)

기지국은 종종 잘 보이는 곳에 숨기도록 설계된다. 일부는 심지어 소나무나 야자수로 위장하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 서툴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스텔스 타워는 실제로 그들이 모방하는 자연 물체로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모든 위장과 마찬가지로, 기지국은 우리가 그들을 간과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우리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도록 되어 있다. 갈색으로 칠해진 "나무껍질"과 녹색 플라스틱 "잎", 또는 건물 정면과 조화를 이루도록 칠해진 직사각형 안테나 패널은 단순히 우리의 안 본 것으로 하기(unseeing)를 촉진하는 신호일뿐이다. 여기서 볼 것이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기지국 '위장'은 선의의 무시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사진: George Rose/Getty Images

그 사이 탑은 조용히 늘어난다.

최근 몇 년 동안 5G 안테나는 독립형 기둥이나 가로등에 라벨이 붙지 않은 상자 또는 실린더로 어디에나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형 셀 네트워크로 알려진 이러한 더 빠르고 강력한 5G 시스템에는 더 많은 안테나가 서로 가깝게 배치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더 큰 밀도는 건강과 안보에 대한 잠재적 위험에 대한 두려움을 증가시켰고, 세포 방사선과 암을 연결하는(이러한 연계는 과학적 연구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았다) 편집증적 반응도 증가시켰다. 일부 사람들은 심지어 코로나19 범유행의 책임을 5G로 잘못 돌리기도 했다.

이러한 음모론의 결과로 22020년에는 19세기 영국의 섬유 노동자들이 그들을 일자리에서 쫓아냈던 새로운 기계 직기를 파괴하는 러다이트를 연상시키는 기지국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200년 후, 러다이트라는 이름은 새로운 기술에 대한 모든 반동과 동의어가 되었다.

2020년 5월 영국 리버풀에서 방화범들에 의해 파괴된 5G 전봇대의 바닥. 사진: Christopher Furlong/Getty Images

기지국에 대한 극단적인 반응 중 일부는 일상 기술의 실제 위험에 대한 불안의 결과일 수 있다.

우리가 종종 잊는 것을 선호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각각의 강철 기지국이나 세련된 5G 박스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감지한다. 그것은 우리의 사생활과 자율성을 점차적으로 침식하는 상업 및 정치권력의 중심에 묶여 거의 보이지 않는 글로벌 통신 네트워크의 가시적 신호이다.

그들이 그렇게 무서운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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