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자 주: 화석연료 연소로 인한 지구 온난화와 기후변화로 전기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도로 주행으로 인한 탄소 배출이 전체의 17%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저탄소 혹은 탄소 제로의 미래에 전기차는 가장 알맞은 운송수단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전기차 vs 가솔린차라는 이분법 혹은 프레임은 자칫 사람들에게 더 중요한 문제를 간과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전기차에 관한 두 개의 긴 글을 번역했다. 하나는 전기차에 대한 보다 긍정적인 시선으로 마차를 대신에 등장했던 초기 전기차 기술, 내연기관의 가솔린차 지지자들이 어떤 프레임을 동원해 전기차를 압살 했고, 전기차는 어떻게 다시 부활했는가, 그리고 도시의 운송 문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전기차에 대한 보다 비판적 시선으로 전기차의 배터리를 구성하는 리튬의 반환경적 영향과 인간의 운송과 이동 방식에 대해 다루고 있다. 두 글 모두 인간의 운송과 이동 문화에 대한 궁극적 변화를 요구하며, 전기차 그 자체를 온전한 대안으로 보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이번 글은 전자의 전기차에 대한 보다 긍정적인 기사의 번역이다.
말이 끄는 마차가 도시의 주요 운송 수단으로 배설물과 소음으로 심각한 보건상의 문제를 야기하면서 그 대안으로 차가 등장했다. 일반인들의 상상과 달리 초기 차는 화석연료에 의해 구동되는 내연기관의 가솔린차보다 전기차가 우세했다. 하지만 전기차는 배터리의 수명과 효율성, 무게, 교체, 짧은 주행거리 등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내연기관차는 복잡하고 고장이 잦았지만 남성이라면 그러한 복잡성과 고장과 같은 문제는 처리할 수 있으며, 먼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해야 한다는 담론으로 전기차의 숨통을 조였다. 전기차를 압살하고 등장한 화석연료를 태우는 내연기관 차는 하지만 마차 못지않은 배기 공해, 소음, 혼잡, 사고 등의 문제 그리고 이제는 기후 변화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전기차는 리튬 배터리의 등장으로 내연기관차의 문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했지만, 여전히 배터리에 들어가는 리튬과 코발트를 둘러싼 환경과 노동착취 문제를 안고 있다. 그리고 운송과 이동 방식을 개선할 수 있는 최근의 스마트 이동의 경우는 데이터의 악용이라는 치명적 문제를 안고 있다. 이 글은 Economist의 비즈니스 에디터 Tom Standage의 Guardian 2021년 8월 3일 자 기사 The lost history of the electric car – and what it tells us about the future of transport의 번역으로 초기 전기 자동차의 번성과 그 쇠퇴, 그 쇠락 뒤에 숨겨진 내연기관차 제조업계의 전술, 전기차의 부활과 문제, 새로운 스마트 이동이 가진 데이터 문제들을 분석하고 있다.
전기 자동차의 잃어버린 역사,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교통의 미래
공해, 사고, 교통 체증에 시달리는 모든 시대에 차세대 교통 솔루션은 분명해 보이지만 동일한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한다
Tom Standage
1890년대에 서구 세계의 가장 큰 도시들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 말이 끄는 운송 수단은 수천 년 동안 사용되어 왔으며 그것이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19세기 동안 그러한 운송 수단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에서 말을 사용하는 것의 단점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특히, 거리에 쌓인 말똥과 그에 따른 악취는 놓칠 수 없었다. 1890년대까지 약 300,000마리의 말이 런던 거리에서 일하고 있었고 150,000마리 이상이 뉴욕시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 말들 각각은 하루 평균 10kg의 분뇨와 약 1리터의 소변을 생산했다. 마구간과 거리에서 수천 톤의 쓰레기를 수거하고 제거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 문제는 수십 년 동안 쌓여왔다. 1857년 뉴욕의 한 신문 편집자는 "극소수의 완전한 도로를 제외하고는 모든 거리는 악취가 나는 역겨운 오물 덩어리이며, 어떤 곳에서는 거의 차량이 통행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쌓여 있다"라고 말했다. 엄청난 악취로 공기를 채울 뿐만 아니라 비가 올 때마다 말똥이 가득 차서 거리를 진흙 투성이의 오물 웅덩이로 만들었다. 1890년대 런던의 한 목격자는 도시의 주요 도로 중 하나인 스트랜드(Strand)를 자주 범람시킨 "진흙"(고상한 척하는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는 완곡어법)을 걸쭉한 완두콩 수프의 농도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지나가는 차량은 "바지나 치마가 막지 않는 곳에서 포장도로를 완전히 가로질러 그러한 수프 덩어리를 던질 것"이며, 근처의 집과 상점 앞면에 튀기고 얼룩지게 한다. 거리에서 모은 분뇨는 주요 도시와 도시 주변에 흩어져 있는 쓰레기 더미에 쌓였다. 마구간 옆에 거대한 거름 더미도 쌓여 파리에게 매력적인 환경을 제공했다.
이 모든 것이 공중 보건에 좋지 않았다. 1894년에 뉴욕 타임스지는 뉴욕 시의 보건 통계 위원회에서 “외딴 지역보다 50피트 이내의 주거지와 학교”에서 더 높은 수준의 감염성 질병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그 세기말의 한 계산에 따르면, 20,000명의 뉴요커가 "먼지를 날리는 질병"으로 매년 사망했는데, 이는 말에 대한 의존이 건강에 미치는 위험에 대한 분명한 증거이다. 설상가상으로 말은 과로하는 경우가 많았고, 쓰러지면 시체가 절단되어 제거되기 전까지 여러 날 거리에서 썩어가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건강에 더 큰 위험을 초래했다. 1880년대까지 매년 15,000마리의 죽은 말이 뉴욕시 거리에서 치워지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1830년대에 시작된 증기 기관차의 출현과 도시 간 철도 연결은 문제를 악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도시 간의 더 빠르고 효율적인 운송은 더 많은 수의 말이 끄는 차량을 필요로 하는 도시 내에서 사람과 상품의 신속한 운송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다. 1872년에 한 관찰자는 “말에 대한 우리의 의존도가 증기에 대한 의존으로 인해 거의 파리 파수(pari passu, 같은 비율로)로 증가했다. 1870년의 한 관찰자는 맨해튼의 브로드웨이가 하루 중 어떤 때는 “거의 지나갈 수 없는” 곳이라고 썼다. 그리고 차량이 움직일 때 금속 말굽과 철제 바퀴가 고르지 않은 표면에서 덜거덕 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밀짚이 소음을 줄이기 위해 때때로 병원 밖 도로와 일부 개인 주택에 흩어져있었다.
오염, 교통 혼잡 및 소음은 더 깊은 의존성의 가장 명백한 징후일 뿐이다. 1872년 10월 북미에서 말 인플루엔자가 발생하여 모든 말과 노새가 몇 주 동안 움직일 수 없게 되었으며, 이는 사회가 동물의 힘에 의존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상기시켜 주었다. 뉴욕 타임스는 거리에서 "트럭, 마차, 급행 마차 및 일반 운송수단의 실종"을 언급했다. 네이션(Nation)은 "현재의 전염병은 말 노동력의 갑작스러운 손실이 우리 산업과 상업을 완전히 혼란스럽게 할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직시하게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신문은 말과 마구간이 “우리의 위대한 사회적 기계의 바퀴와 같으며, 그 바퀴의 중단은 모든 계층과 조건의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상업, 농업, 무역 및 사회생활에 해를 끼친다"라고 논평했다.
그러나 대서양 양쪽의 사회는 계속해서 말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1870년에서 1900년 사이에 미국 도시의 말 수는 4배 증가했지만 사람의 인구는 2배 증가에 불과했다. 세기가 바뀌면서 영국에서는 10명당 1마리, 미국에서는 4명당 1마리의 말이 있었다. 말을 위한 건초와 귀리를 제공하려면 광대한 농지가 필요했고 사람들을 위한 식량을 재배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들었다. 미국의 2천만 마리의 말을 먹이는 데는 전체 작물 면적의 3분의 1이 필요했고, 영국의 350만 마리의 말은 오랫동안 수입 사료에 의존해 왔다.
말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자 지속 불가능한 존재가 되었다. 새롭게 부상하는 기술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해결책은 명백해 보였다. 말을 없애고 당시에는 말이 없는 마차로 알려진 자가 추진 운송수단(self-propelling motor vehicles)으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들을 자동차(car)라고 부른다.
최근 몇 년 동안 이러한 전환은 혁신의 힘에 대한 증거로 인용되었으며, 겉보기에 다루기 어려워 보이는 문제에 대한 간단한 기술 솔루션이 필요할 때 바로 등장한다는 예로 인용되었다. 그래서 예를 들어 기후 변화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지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다른 방향의 경고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 오늘 빠른 수정처럼 보이는 것이 내일은 광범위하고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동차는 도시의 지리학에서부터 석유의 지정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세상을 변화시켰고 많은 문제를 야기했기 때문에 말에서 자동차로의 전환은 보기에 깔끔하고 시기적절한 기술 솔루션이 아니었다.
자동차에 대한 초기 열정의 대부분은 소음, 교통 혼잡 및 사고를 포함하여 말이 끄는 차량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약속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각 항목에서 실패한 자동차는 수세기 동안 도시의 도로를 괴롭혀온 오염 물질(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말똥)을 제거하는 것을 포함하여 다른 많은 이점을 제공했기 때문에 용인되었다.
그러나 한 세트의 환경 문제를 없애면서 자동차는 완전히 새로운 세트를 도입했다. 그들이 내뿜는 오염 물질은 말똥보다 보기가 더 어렵지만 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폐 깊숙이 침투할 수 있는 차량 배기가스의 매연과 같은 미립자 물질, 호흡기를 자극하고 여러 종류의 암과 관련이 있는 휘발성 유기 화합물, 질소 산화물, 일산화탄소 및 이산화황, 그리고 기후변화의 원인이 되는 주로 이산화탄소와 같은 온실 가스 등이 포함된다. 자동차, 트럭 및 버스는 총체적으로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약 17%를 생성한다. 휘발유 및 디젤과 같은 화석 연료에 대한 의존은 20세기 동안 세계의 많은 부분이 중동의 석유에 의존하게 됨에 따라 지정학적으로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이 중 어느 것도 자동차 시대의 여명기에는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예상할 수 있었을까? 일부 사람들은 재생 불가능한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의 지속 가능성과 그러한 연료에 대한 접근의 신뢰성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다. 오늘날,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사용하여 충전되는 전기 자동차는 이러한 우려를 해결하는 논리적인 방법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전기 자동차의 장점에 대한 논쟁은 자동차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것으로 드러났다.
1897년,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자동차는 포프 제조 회사(Pope Manufacturing Company)의 컬럼비아 모터 캐리지(Columbia Motor Carriage)로 전기자동차였다. 전기 모델은 증기 및 가솔린 엔진 모델보다 많이 팔리고 있었다. 1900년에는 1,681대의 증기 자동차, 1,575대의 전기 자동차, 936대의 가솔린 자동차가 판매되었다. 1903년 올즈모터웍스(Olds Motor Works)의 커브드 대시 올즈모빌(Curved Dash Oldsmobile)이 출시되면서 처음으로 가솔린 차량이 선두에 섰다.
아마도 현대인의 눈에 전기 자동차의 경우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보여주는 가장 놀라운 예는 1890년대 후반에 잠깐 번창했던 전기 택시인 일렉트로바트(Electrobat)의 이야기일 것이다. 일렉트로바트는 1894년 필라델피아에서 전기 자동차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두 명의 과학자 겸 발명가 페드로 살롬(Pedro Salom)과 헨리 모리스(Henry Morris)에 의해 만들어졌다. 1895년 연설에서 살롬은 “수많은 체인, 벨트, 도르래, 파이프, 밸브 및 스톱콕이 있는 가솔린 차량의 놀랍도록 복잡한 구동 장치"를 조롱했다. "너무 많은 것들이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 중 하나가 항상 고장 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두 사람은 초기 디자인을 꾸준히 개선하여 결국 뒷좌석의 높은 좌석에 운전자가 제어할 수 있는 마차와 같은 차량을 만들고 앞 좌석 승객을 위한 더 넓은 좌석을 만들었다. 1897년 모리스와 살롬은 12대의 차량으로 맨해튼에서 택시 서비스를 시작하여 운영 첫 달에 1,000명의 승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했다. 하지만 그 택시들은 제한된 거리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배터리는 재충전하는 데 몇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모리스와 살롬은 다른 회사인 일렉트릭 배터리 컴퍼니(Electric Battery Company)와 합병했다. 이 회사의 엔지니어들은 브로드웨이 1684번지에 위치한 창고에 기반을 둔 영리한 배터리 교체 시스템을 고안하여, 몇 초 만에 완전히 충전된 배터리를 교체하여 일렉트로바츠(Electrobats)가 하루 종일 작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
1899년 이 유망한 사업은 전기 전차나 트램에 투자하여 부를 축적한 뉴욕의 정치인이자 금융가인 윌리엄 휘트니(William Whitney)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도시 교통의 독점을 꿈꾸었고, 말이 끄는 차량보다 깨끗하고 조용한 대안을 제공하는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운행하는 전기 택시들을 상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 감당할 수 없는 자동차를 사는 대신에, 도시 거주자들은 돌아다니기 위해 전기 택시와 전차를 이용할 것이다. 하지만 이 비전을 실현한다는 것은 일렉트로바트를 훨씬 더 큰 규모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래서 휘트니와 그의 동료들은 가장 잘 팔리는 컬럼비아 전기 자동차를 만든 포프와 팀을 이루었다. 그들은 전기 운송수단 회사(Electric Vehicle Company, EVC)라고 불리는 새로운 벤처 회사를 설립했고, 야심 찬 확장 계획에 착수했다. EVC는 자본을 조달하여 수천 개의 전기 택시를 건설하고 보스턴, 시카고, 뉴저지 및 뉴포트에 사무실을 열었다. 1899년에는 잠시 동안 미국에서 가장 큰 자동차 제조업체가 되었다.
그러나 뉴욕 외곽에서 운영되는 택시 운영은 형편없이 운영되어 돈을 벌지 못했다. 반복적인 조직 개편과 자본 확충으로 인해 EVC가 정교한 금융 사기라는 비난이 촉발되었다. 휘발유 자동차를 강력하게 옹호하는 산업 저널인 '말 없는 시대'(Horseless Age)는 이 회사가 독점자가 될 것이라고 공격했고 전기 자동차는 실패할 운명이라고 말했다. EVC가 부정하게 대출을 받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주가는 30달러에서 0.75달러로 급락해 지역사무소 폐쇄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말 없는 시대'는 그것의 몰락을 즐겼고 "믿을 수 없는 세계"에 전기 자동차를 "강제"하지 못한 것에 환호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더 많은 사람들이 개인용 자동차를 구입하면서 전기 자동차는 여성용 자동차라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연관성은 짧은 지역 여행에 적합하고 작동을 위해 수동 크랭킹 또는 기어 변속이 필요하지 않으며 단순한 디자인 덕분에 매우 안정적이기 때문에 발생했다. 1910년 밥콕 일렉트릭(Babcock Electric) 자동차 광고에 "밥콕 전기차를 운전하는 그녀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라는 문구를 넣었다. 그 의미는 휘발유 차량의 운전과 유지보수의 복잡성을 감당할 수 없는 여성들이 대신 전기 자동차를 구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조적으로 남성은 보다 유능한 정비사로 간주되었고, 그들에게 더 큰 복잡성과 낮은 신뢰성은 우수한 성능과 범위를 가진 강력하고 남성적인 가솔린 차량에 지불할 가치가 있는 가격이었다.
디트로이트 일렉트릭(Detroit Electric)과 웨이벌리 일렉트릭(Waverley Electric)이라는 두 제조업체는 1912년에 여성을 위해 완전히 재설계된 모델을 출시했다. 전동식일 뿐만 아니라 이 모델들은 운전자가 승객과 마주할 수 있도록 뒤쪽을 마주하는 앞 좌석을 이용해 작동했지만, 그것은 또한 도로를 보기 힘들게 만들었다. 조종을 위해 그들은 덜 힘들지만 덜 정확하고 더 위험한 바퀴 대신에 구식 틸러(tiller, 경운기 손잡이 같이 생긴 조종대 -역자 주)를 제공했다.
헨리 포드(Henry Ford)는 그의 아내인 클라라(Clara)에게 자신의 모델 T(Model T)가 아닌 디트로이트 일렉트릭을 사주었다. 일부 남성들은 전기 자동차의 제한된 범위가 운전자들에게 부여된 독립성이 엄격하게 제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191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운전자의 15%, 투싼에서 5%를 차지하는 소수 운전자였던 여성들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전기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더 넓은 시장에서 가솔린 자동차와 경쟁할 수 없음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 해 헨리 포드는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과 함께 저가 전기차를 개발한다는 소문을 확인했다. 그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지금까지의 문제는 재충전 없이 장거리 운행이 가능한 경량 축전지를 만드는 것이었다"며 전기차의 주요 약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에디슨이 전기차에 동력을 공급하는 데 사용되는 무겁고 부피가 큰 납-산 축전지에 대한 대안을 개발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하면서 그 차는 반복적으로 지연되었다. 결국, 전체 프로젝트는 조용히 포기되었다.
20세기 초 전기 자동차의 실패와 주요 추진 형태로서 내연기관의 출현은 액체연료가 납-산 축전지 캔보다 단위 질량당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제공하는 것과 많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 설명은 순수하게 기술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심리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당시 개인 자동차 구매자들은 지금처럼 전기 자동차의 배터리 범위와 충전할 수 있는 불확실성에 의해 제한을 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
역사학자 기즈 맘(Gijs Mom)의 말에 따르면, 이 시기의 자가용 자동차는 주로 소유자에게 자유를 주는 "모험 기계"(adventure machine)로 간주되었고, 전기 자동차는 가솔린 엔진보다 더 적은 자유를 부여했다. "차를 소유하는 것은 멀리 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라고 1903년 한 도시에 사는 자동차 애호가들은 썼다. 전기 자동차의 판매는 1910년대 초에 최고조에 달했다. 내연 기관의 신뢰성이 높아짐에 따라 이들은 전기 자동차를 먼지 속에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20세기 동안 자동차 소유가 극적으로 증가하면서 석유에 의존하는 것은 다른 비용이 드는 것으로 드러났다. 1960년대까지, 미국 자동차는 평균적으로 유럽과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보다 4분의 3 톤이 더 무거웠고, 그들의 V8 엔진은 다른 지역에서 가장 널리 보급된 4기 통 엔진보다 2배 이상 더 무거웠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훨씬 더 많은 연료를 사용했다. 그 연료의 점점 더 많은 비율이 수입 석유에서 나왔다. 1973년까지 대부분 중동으로부터의 수입이 미국 공급의 27%를 차지했다. 그해 12월, Opec(석유수출국기구)의 중동 회원국들은 미국이 제4차 중동 전쟁(Yom Kippur war)에서 이스라엘을 지지한 것에 항의하여 미국에 대한 석유 수출을 중단했다. 기름값이 급등했고, 급작스러운 공급 감소로 휘발유값 인상, 배급제 도입, 주유소 대기 행렬이 길어졌다. 처음으로, 미국 운전자들은 그들이 휘발유 공급을 당연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일 쇼크는 정부가 시속 55마일의 국가 속도 제한을 도입하도록 이끌었고, 미국 제조업체가 전체 제품 라인에서 1978년까지 갤런당 18마일, 1985년까지 27.5마일의 평균 연비를 달성하도록 요구하는 연료 경제 표준을 도입했다.
그러나 미국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제품을 거의 바꾸지 않았다. 70년대 후반까지 미국산 자동차의 80%에는 여전히 V8 엔진이 있었다. 1979년 2차 오일쇼크에서 중동으로부터의 석유 공급은 다시 한번 차질을 빚었는데, 이번에는 이란에서의 이슬람 혁명과 이란-이라크 전쟁의 다음 해에 발발한 결과로 나타났다. 실제 석유 생산량은 거의 감소하지 않았지만 가격이 급등하고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 2차 오일쇼크는 소형차에 대한 수요를 자극했다.
전기 자동차는 가스 소비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우려로부터 혜택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전기 자동차 기술은 1920년대 이후 거의 진전이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배터리였다. 납-산 배터리는 여전히 무겁고 부피가 커서 단위 중량당 많은 에너지를 저장할 수 없었다. 1970년대의 가장 유명한 전기 자동차인 미국 우주비행사들이 달에서 운전하는 네 바퀴 달 탐사 로봇들은 단지 몇 시간 동안만 작동하면 되기 때문에 충전되지 않는 배터리로 구동되었다.
90년대에 충전식 리튬 이온 배터리가 등장할 때까지 지구에서 전기 자동차를 상용 제품으로 부활시키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2003년까지 두 명의 전기 자동차 애호가인 앨런 코코니(Alan Cocconi)와 톰 게이지(Tom Gage)는 6,800개의 캠코더 배터리로 구동되는 tzero라는 전기 로드스터를 제작했으며, 이것은 4초 이내에 0-60 mph의 속도를 낼 수 있고 250마일 주행이 가능했다. 텍사(Tesla)는 이 기술을 상용화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전기차로의 전환을 가능케 했지만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연소로 움직이는 차량의 규제가 강화되면서 이제는 그 전환이 불가피해 보인다.
이 자동차는 한 가지 오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도입되었는데, 다른 하나는 화석 연료의 연소로 인한 이산화탄소 배출이다.
도로 차량을 전기화하는 것이 기후 위기를 해결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까? 전 세계적으로 운송(육상, 해상 및 항공 포함)은 화석 연료 연소로 인한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24%를 차지한다. 도로 차량에서 배출되는 배출량은 전 세계 총배출량의 17%를 차지한다. 이러한 배출량 중 약 3분의 1은 주로 디젤 동력 차량(예: 트럭 및 버스)에서 발생하고 2/3는 주로 가솔린 동력 차량(예: 자동차 및 밴)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화석 연료에서 대형 트럭, 선박 및 비행기를 전환해야 하는 과제는 남아 있지만 전기 자동차로 전환하면 전 세계 배출량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교통 혼잡, 도로 사망 또는 한 사람을 상점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1톤 차량을 사용하는 고유한 비효율과 같은 자동차와 관련된 다른 문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동차의 등장이 지속 가능성과 석유 의존의 지정학적 결과에 대한 우려로 이어진 것처럼 전기차도 비슷한 우려를 낳는다. 배터리를 만드는 데 필요한 리튬과 코발트와 전기 모터를 만드는 데 필요한 "희토류" 원소의 공급은 이미 환경 및 지정학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리튬은 상당히 풍부하지만, 코발트는 그렇지 않으며, 그 주요 공급원은 콩고 민주 공화국이며, 생산량의 약 4분의 1이 삽과 횃불을 사용하여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 광부들의 상황은 암울하고, 업계는 부패와 아동 노동 이용 혐의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코발트는 일단 채굴되면 대부분 중국에서 정제되는데, 중국은 전 세계 리튬 이온 배터리 생산 능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희토류 원소 생산량도 지배하고 있다.
지정학적 긴장은 이미 컴퓨터 칩과 관련 제조 도구의 공급을 둘러싼 중국과 서방 국가들 사이의 분쟁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전기 자동차를 만드는 데 필요한 광물과 부품을 놓고 비슷한 의견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이는 테슬라가 광업 대기업인 글렌코어[Glencore]와 코발트 공급을 보장하기 위해 계약을 체결하고 중국 내외에 자체 배터리 공장도 운영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또한 일부 기업이 코발트의 대체 공급원으로 심해 채굴을 고려하는 이유도 설명한다.)
더욱이, 역사는 한 형태의 추진력에서 다른 형태의 추진력으로 전환하면 상황이 그대로 계속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순진할 것임을 시사한다. 것은 자동차가 말이 끄는 차량을 대체했을 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일부 사람들은 자동차에 동력을 공급하는 추진 기술뿐만 아니라 자동차 소유에 대한 전체 개념을 재고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도시 교통의 미래는 단일 기술이 아니라 스마트폰 기술로 결합된 다양한 교통 시스템의 혼합에 기초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승차 호출 서비스(ride-hailing, 우버나 리프트와 같은 형태 - 역자 주), 마이크로이동성(micromobility) 및 주문형 렌터카는 자가용을 소유할 필요 없이 자가용의 편리함을 제공하는 새로운 교통수단을 제공하여 점점 더 많은 여행을 할 수 있게 한다. 기술 분석가인 호레이스 데디우(Horace Dediu)는 이것을 "자동차 분리하기"(unbundling the car)라고 부른다. 더 싸고, 더 빠르고, 더 깨끗하고, 더 편리한 대안들이 대량 자동차 소유의 근거를 서서히 깎아내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교통수단을 연결하고, "운동의 인터넷"(internet of motion)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은 스마트폰이, 어떤 특정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자동차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모션 인터넷은 많은 도시에 존재하는 자동차 기반 운송 단일 문화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다. 20세기의 경험은 말에서 자동차로 전환하는 것과 같이 하나의 운송 단일 문화(transport monoculture)를 다른 운송 단일 문화로 대체하는 것은 실수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에 환영해야 한다. 운송 단일 문화는 덜 유연하고, 의도하지 않은 결과는 더 쉽게 고착화되어 다루기 더 어려워진다.
연소 엔진이 단계적으로 폐지되고 자동차, 기차 및 다른 형태의 지상 운송이 전기화됨에 따라, 직접적인 배출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전기 운송은 탄소 제로 전력으로부터의 재생 가능한 전력에 의해 동력을 공급받을 때만 진정한 배출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운송 시스템은 잠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데이터라는 다른 형태의 결과를 생성할 것이다. 특히, 이 시스템은 누가 언제, 언제, 어떻게, 누구와 함께 갔는지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를 생산할 것이다. 그들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버는 영광의 승차(Rides of Glory)라는 악명 높은(그리고 이후 삭제된) 블로그 게시물에서 승객의 행동을 분석하여 원나잇 스탠드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도시와 날짜를 식별했다. 이 게시물은 분노를 일으켰고 당시 우버에 만연한 억제되지 않은 "테크 브로"(tech bro, 실리콘 밸리 기술 기업에서 일하는 초남성적[hypermasculine]인 남자들 - 역자 주) 문화의 징후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것은 더 넓은 점을 강조한다. 공유 자전거와 e-스쿠터는 또한 청구 목적으로 누가 언제 어디로 갔는지 추적한다.
모빌리티 서비스를 운영하는 회사는 이 데이터를 자체적으로 유지하기를 원한다. 이 데이터는 미래 수요를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되고, 새로운 서비스 출시를 준비할 때 유용할 수 있으며, 라이더를 프로파일링하고 광고를 타겟팅하는 데에도 사용할 수 있다. 도시는 공유 자전거 및 전자 스쿠터의 위치와 사용을 추적하여 자전거 차선 제공을 조정하고, 저소득 및 고소득 이웃의 사용 수준을 비교하고, 차량이 사용해서는 안 되는 곳에서 사용되지 않는지 점검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이유로 전 세계 수십 개의 도시에서 이동성 데이터 사양(Mobility Data Specification, MDS)이라는 시스템을 채택했다. 현재 MDS는 자전거와 e-스쿠터만 다루고 있지만 향후에는 승차 공유, 카 셰어링, 자율 택시 서비스로 확장될 수 있다.
그러나 이동 서비스 제공업체와 개인 정보 보호 그룹은 MDS가 도시에서 개인을 추적할 수 있게 하고 예를 들어 경찰이 시위에 참석하거나 특정 장소를 방문하는 사람을 식별하도록 허용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그들은 또한 MDS를 감독하는 재단이 데이터를 안전하게 저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권위주의 정권이 그런 데이터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모든 것은 개인 이동성 데이터가 미래에 인화점이 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막연한 고민처럼 보이지만, 자동차 시대의 여명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이산화탄소 배출에 대한 걱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과는 달리, 오늘날 새로운 모빌리티 서비스를 구축하고 사용하는 사람들은 너무 늦기 전에 그러한 우려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다.
이 글은 8월 18일 블룸즈버리(Bloomsbury)가 출판한 '모션의 약사: 바퀴에서 자동차까지, 다음에 올 것까지'(A Brief History of Motion: From the wheel to car to next next)에서 편집된 발췌이다.
'환경과 에너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환경과 계급 불평등: 상위 1%와 최빈곤층 사이의 엄청난 온실가스 배출 격차 (0) | 2022.11.03 |
---|---|
플라스틱 재활용의 잘못된 신화: 95%의 플라스틱은 재활용되지 않으며 매립된다 (0) | 2022.10.26 |
전기차와 환경 1: '화이트 오일' 리튬의 저주와 전기차의 더러운 비밀 (0) | 2022.10.09 |
지구의 또 다른 허파 습지의 생태적 이점 그리고 사라지는 습지 (0) | 2022.10.04 |
기후 변화와 열대성 폭풍: 기후 변화로 더 빨라지고, 더 길어지고, 더 강해지는 허리케인과 태풍 그리고 사이클론 (0) | 2022.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