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역사에서 세계적 헤게모니를 유지했던 강국 혹은 제국은 우월감, 역사적 운명, 그리고 쇠락에서 자신을 되살리는 부활 프로젝트에 집착했었다. 오늘날 미국의 중국을 상대로 한 신냉전과 바이든의 민주와 자유를 중심으로 한 가치동맹은 그런 집착의 한 종류이다. 미국의 쇠퇴하는 패권에 대한 논쟁은 지난 수십 년 간 미국 정계와 학계, 서점가를 지배해왔다. 대부분의 미국 정치인들은 미국의 쇠퇴를 재앙으로 치부하며 이를 막기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발주해왔다. 그런 점에서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소위 마가(MAGA) 프로젝트와 바이든이 주도하는 반도체 법과 화웨이 등 중국 기업에 대한 제재는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이 패권 재활 혹은 부활 프로젝트는 종종 쇠락을 뒤집기 위해 백인 우월주의와 이민자에 대한 적대감 그리고 냉전적 적대주의를 부활시킨다. 최근 미국의 쇠퇴를 둘러싼 논쟁에 과거 논쟁의 주도자인 정치학자가 아닌 영문학자라는 특이한 경력을 가진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Jed Esty가 뛰어들었다. 그는 기존의 정치인과 학자들이 데이터를 통해 미국의 쇠퇴와 그 반전을 노렸던 것과 달리 데이터를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내러티브에 주목한다. 드라마 웨스트윙부터 정치학 저서, 영화 블랙 팬서 등 다양한 장르를 관통하는 미국 쇠퇴론(declinism)의 내러티브를 그는 분석한다. 여기서 그는 이 쇠퇴론이 미국의 화려한 영광을 부활시키는 재활에 집착하고 있음에 주목하며 이 쇠퇴론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균형감의 회복에 호소한다. 미국의 쇠퇴는 재앙도 회피 가능한 것도 아니기에 이 진부한 우화에 집착하기보다는 다극의 세계와 공생하는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그것이 영국의 쇠퇴를 받아들인 1960년대 이후 영국 신좌파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글은 Newstatesman의 기고 작가이자 'Shutdown' 'Crashed'의 저자인 Adam Tooze의 Newstatesman 12월 9일 자 기고 American hubris의 번역으로 Jed Esty의 새로운 저작 '쇠퇴의 미래: 한계에 부딪힌 영미 문화'(The Future of Decline: Anglo-American Culture at its Limits)에 대한 서평을 계기로 미국 쇠퇴론의 내용과 문제점, 그리고 영국과 미국의 쇠퇴의 차이, 이 둘을 비교하는 것의 문제, 현재 미국 부활 프로젝트의 위험을 지적하고 있다.
미국의 오만
미국은 위대함에 중독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의 상실에 시달린다.
Adam Tooze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강대국은 서로 연결된 세 가지 집착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국가적 우월감에 유혹되고 역사적 운명을 천명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허세는 쇠퇴에 대한 두려움을 유발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부활 프로젝트를 낳는다.
한때 자신들이 위대하다고 상상했던 유럽 제국들(특히 영국과 프랑스)이 극단적인 예이다. 1945년 이후 프랑스가 탈식민지화되면서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은 "웅장함"(grandeur)을 국가 정책의 표어로 삼았다. 영국 엘리트들에게 생활 수준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쇠퇴는 전후 내내 강박관념이었다. 1990년대 "쿨 브리타니아"(cool Britannia)와 토니 블레어의 유럽 포용이라는 표식 아래, 그 그림자는 걷혔다. 하지만 2008년 은행 위기와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그 질문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강력해졌다. 브렉시트 지지자들은 "글로벌 브리튼"을 약속하지만, 영국의 평균 생활 수준은 현대 역사상 처음으로 감소하고 있다. "속박되지 않은 브리타니아"(Britannia unchained)에 대한 민족주의적 허풍은 세계에서 영국의 실제 위치에 대한 냉정하고 실용적인 평가를 혼란스럽게 한다.
1945년 이후, 미국은 유럽 제국을 대체하여 비공산주의 세계의 패권국이 되었다. 영문학 교수인 제드 에스티(Jed Esty)가 그의 새 책 '쇠퇴의 미래: 한계에 부딪힌 영미 문화'(The Future of Decline: Anglo-American Culture at its Limits)는 미국이 이제 같은 영국 병에 굴복했는지 여부에 대해 질문한다. 미국은 상대적 쇠퇴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혀 점점 더 다극화되는 세계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일까?
에스티는 자신의 주장에서 부정할 수 없고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경제적, 군사적 측면에서 미국의 우위가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과 쇠퇴론(declinism)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집착을 구분한다. 에스티가 말했듯이, 중요한 것은 데이터가 아니라 데이터로 전달하는 스토리다. 문학 교수로서의 에스티의 전문성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이러한 현실과 서사의 복잡한 짜임새를 해독하는 데 있다. 그는 장르를 넘나들며 웨스트윙부터 예일대 역사학자 폴 케네디, 마블의 블랙 팬서에 이르기까지 영화, TV 쇼, 문학을 쇠퇴의 문화의 예로 읽는다.
미국의 상대적 지위에 관한 한,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들이 몇 가지 있다. 1945년에 세계 GDP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50%였다. 2020년까지 그것의 점유율은 16%로 떨어졌다. 군사비 지출은 미국이 최고 수준을 유지하는 몇 안 되는 범주 중 하나이지만, 중국이 따라잡고 있다. 에스티가 우리에게 보여주듯, 이러한 사실들을 중심으로 미국 분석가들은 기술관료적 개혁주의부터 도덕적 쇄신을 위한 보수적 호소, 미국의 임무에 대한 믿음의 재확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진단을 짜낸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특징은 그것들이 회복적(remedial)이라는 것이다. 쇠퇴의 진단 안에는 위대함을 회복하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ke America Great Again, MAGA)는 열망이 남아 있다. 그것은 도널드 트럼프의 슬로건이었다. 그러나 민주당 하에서 미국을 세계 리더십으로 회복시키려는 열망은 무엇보다 훨씬 더 분명하다. '미국 대학살'(American carnage, 2017년 트럼프는 취임사에서 미국 경제가 대학살에 직면하고 있다고 주장 - 역자 주)에 대한 암울한 경고가 미국의 탁월함에 대한 진정한 의구심을 시사한 트럼프와 달리 조 바이든은 더 밝은 견해를 취한다. 그에게 미국의 제1강국 지위는 신조다. 그의 본능은 항상 중국이 격차를 좁힐 수 있다는 주장을 가볍게 일축하는 것이었다.
에스티가 지적했듯이, 국가적 우위의 가정은 많은 미국 좌파들에 의해 공유된다. 그린 뉴딜(Green New Deal)은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와 2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미국의 독특한 생산력에 대한 비전에서 동기를 부여받았다. 미국의 세계 최고 수준의 민주주의 무기고를 지속 가능한 에너지 전환의 동력으로 바꾸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히 겉치레가 아니다. 올해 8월 의회가 인플레이션 감소법을 통과시켰을 때, 그것은 "지구를 구할" 법안으로 선언되었다. 이것은 기껏해야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13.5%에 대한 미국의 책임(중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집트 Cop27의 미국 대표단은 그들이 "역사상 가장 큰 기후 패키지"라고 부르는 것을 내놓은 것에 대해 박수갈채를 받지 못한 것에 놀랐다.
에스티에게 국가 예외주의의 소용돌이치는 변증법, 쇠퇴에 대한 두려움, 국가 부흥의 약속은 세계에 대한 비뚤어진 시각을 제공하는데 이는 영국 독자들에게 고통스러울 정도로 친숙하다. 강대국 지위에 대한 집착은 너무 많은 군사비를 지출하고 교육과 기반 시설에 충분한 돈을 지불하지 못하게 한다. 글로벌 가식은 미국을 인구의 대다수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합리적인 규모의 시민 계획으로부터 주의를 다른 곳으로 분산시킨다.
이전의 많은 미국 개혁가들과 마찬가지로, 에스티는 이러한 권력에 사로잡힌 사고의 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의 정치 문화는 새로운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에스티가 보기에, 그것은 적절하게 재설계된 인문학 교육 프로그램에 의해 가장 잘 주입될 것이다. 서구의 얽히고설킨 폭력적인 역사에 대한 적절한 이해는 예외주의 풍선의 공기를 빼고 더 많은 냉정함과 현실주의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에스티는 한때 영국의 쇠퇴에 대한 비판에 동기를 부여했던 우선순위를 뒤집으면서 기술 솔루션주의와 스템 교육(과학, 기술, 공학 및 수학)에 대한 미국의 현대적 초점이 불쾌감의 증상이자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거의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20세기 초부터 미국 개혁가들은 교육을 세상에 대한 보다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이해를 심어주는 수단으로 인식해왔다. 그러나 에스티는 미국의 전통과 결별할 것을 제안한다. 그의 제안은 강대국의 자만심을 넘어선 시대를 위한 새로운 커리큘럼을 만드는 데 있어 미국의 교육자와 지식인들은 모든 곳에서 영국으로부터 영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 퍼거슨은 세계 역사에 대한 서구 중심적 해석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 역자 주)과 같은 키플링적 (, '정글북'의 저자로 알려진 러디어드 키플링은 백인 우월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다 - 역자 주) 전문가가 아니라 그 반대이다. 에스티의 영감은 영국의 신좌파로, 그는 이들을 제국주의적 위대함의 종말을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의 모범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제안이지만 매력적이다. 스튜어트 홀(Stuart Hall, 자메이카 출신의 문화이론가이며 저널 New Left Review의 공동 창간과 편집을 이끌었다)이 이끄는 1970년대 영국의 노상강도에 대한 도덕적 공황을 이용해 위협에 처한 권력 구조를 해독한 획기적인 작품인 '위기관리'(Policing the Crisis, 1978)와 같은 고전을 재검토할 필요성에 동의하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문화 연구와 뉴 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의 과거 이슈들에서 도출된 커리큘럼이 마가(MAGA) 이데올로기에 대한 해독제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제안은 설득력이 없다. 다른 무엇보다도 미국의 제국주의적 쇠퇴가 영국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에스티의 기본적인 비유는 면밀한 검토를 견뎌내지 못한다. 대영제국은 오늘날 워싱턴이 지휘하는 무력을 결코 휘두르지 않았다. 영국은 핵 무장한 소련이나 현대 중국의 부상에 결코 직면하지 않았다. 반면에 미국의 국내 문제는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또는 오늘날 전후 영국이 직면한 어떤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폭력적이며 고착되어 있다. 그들이 대서양 노예제도에서 공통된 역사를 공유할지 모르지만, 영국은 포스트식민적(post-colonial) 사회가 아니라 식민지 이후(post-emancipation)의 사회이다. 짐 크로우(Jim Crow)나 쿠 클럭스 클랜(Ku Klux Klan)과 같은 대량 감금에 비견할 영국은 없다. 쇠퇴론의 전성시대였던 1960~70년대 영국은 복지국가를 건설하고 있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인 미국은 여전히 제대로 된 공공 의료 시스템이 부족하다. 미국의 기대수명은 영국의 기대수명보다 현저히 뒤떨어져 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영국과 현대 미국 사이의 에스티의 비유가 말이 되더라도 영국의 신좌파가 영국의 곤경에 대한 일관된 해석을 제공했거나 영국 사회나 정치가 자신의 쇠퇴를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실제로, 영국 신좌파가 그 나라의 쇠퇴하는 지위에 진정으로 화해한 적이 있는지 의아해할 수 있다. 홀과 같은 중요한 예외를 제외하면, 그들은 몰락한 제국의 자의식이 강한 상속자로서 글을 썼다. 오늘날에도, 뉴 레프트 리뷰의 배후이자 에스티에 의해 반복적으로 호출된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 영국 신좌파의 대표적 이론가로 오랫동안 뉴 레프트 리뷰의 편집장을 역임했다 - 역자 주)은 마치 올림픽의 높은 곳에서 온 것처럼 글을 쓴다. 최근 그는 그의 관심의 대부분을 미국 권력의 논리에 집중하고 있다. 역사에 대한 보다 민주적이고 겸손한 접근법을 제안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히스토리 워크숍 저널(History Workshop Journal, 기층으로부터의 역사를 모토로 1970년대 중반에 창간된 좌파 성향의 역사 학술지 - 역자 주)이나 라파엘 사무엘(Raphael Samuel, 히스토리 워크숍 저널을 창간한 영국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 역자 주)의 놀랄 만큼 방대한 대중 역사 이해와 같은 풀뿌리 노력에서 영감을 얻는 것이 더 말이 되지 않을까?
오늘날의 미국이 웅장함에 집착하지 않고 21세기 현실에 부합하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어 나가려면 그 세계로 성장할 젊은 미국인들부터 노력이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국가적 과대망상에 대한 면역을 부여하기 위해 새로운 학문적 커리큘럼이 필요하기보다는 최근 수십 년간 실시된 여론조사의 일관된 결과는 젊은 미국인들이 미국의 예외주의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났음을 시사한다.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의 확고한 대다수는 그들의 나라가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생각을 거부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경험을 고려할 때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침공 이후, 그들의 군사적 모험에 대한 관심은 주로 컴퓨터 화면에 국한된다. 그리고 오늘날 더 많은 젊은 미국인들은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에 대한 생각에 공감을 나타낸다.
현대의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에스티 프로그램의 대상이 될 젊은 미국인이 아니라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직면하여, 60세 이상의 미국인들, 즉 소위 침묵의 세대(silent generation, 1928년에서 1945년 사이에 태어난)와 붐 세대(boomers, 1945년에서 64년 사이에 태어난)는 미국의 위대함에 대한 주장에 여전히 중독되어 있다. 2016년과 2020년 선거에서 그들은 트럼프에게 확실하게 투표했다. 그리고 바이든과 낸시 펠로시를 필두로 한 민주당의 늙은 정치인들은 노골적인 예외주의자들이다. 그들의 생생한 아이디어는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가 냉전의 이해관계와 유사한 러시아 및 중국과 함께 세계적 권력 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미국의 국가적 쇠퇴라는 생각을 폐기할 뿐만 아니라 쇠퇴론적 담론의 용어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세를 취한다.
쇠퇴론자 담론은 경제 규모가 가장 크거나 교육 순위에서 가장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국가들이 서로 경쟁하는 경쟁적인 용어로 세상을 상상하는 불안감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의 비전은 현대에 경제 성과의 주요 기준이었던 제삼자 기준을 참조하여 완화된다. 이 경제 논리는 국가 쇠퇴를 정의하고 상대화한다. 결국 1945년 이후 서독이 영국을 따라잡은 것이 놀랍지 않은 것처럼 중국이 적어도 어느 정도 미국을 따라잡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경제적 측면에서 정의되는 하락은 상대적으로 효과가 낮다. 그것은 패배가 아니다. 이것이 에스티가 미국이 적응하기를 바라는 상식이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미국의 정책 엘리트들에 의해 뒤집힌 것은 바로 그 논리이다. 2011년 버락 오바마 시절 아시아 중시(pivot to Asia)를 시작으로 트럼프 대통령 시절 더욱 공격적인 기어로 전환한 바이든 행정부는 산업 정책의 중요한 분야에서 미국이 더 이상 중국과 마치 한 경기장에서 경쟁하거나 공통의 잣대에 대해 측정된 것처럼 경쟁하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것은 재산권을 보호하거나 미국 수출을 위한 시장을 여는 문제도 아니다.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와 AI의 최첨단에 관한 한, 미국 정책의 선언된 목표는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측면과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한 공격적인 "제재"를 통해 중국의 발전을 제한하는 것이다. 미국은 이 매우 공격적인 기술-군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중국이 미국의 기술에 접근하는 것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대만, 한국, 네덜란드 및 일본 기업의 중국으로의 주요 기술 수출을 차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것은 경쟁도 아니고, 쇠퇴론의 수사도 아니다. 이것이 경제 전쟁의 논리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이 순간에 대한 유추를 생각하기는 매우 어렵다. 소련은 오늘날 중국처럼 서방 경제와 얽힌 적이 없었다. 경제 무기와 봉쇄에 대한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 제국은 미국이 중국의 화웨이에 대해 추구한 정책만큼 특정 상업적 경쟁자를 고의적으로 파괴하는 정책을 추구한 적이 없다. 워싱턴의 현재 분위기에 대해 읽어보면, 에스티의 쇠퇴론에 대한 비판과 상식과 현실주의에 대한 그의 선의의 호소는 거의 현실 도피처럼 느껴진다. 오늘날 미국이 1950년대나 1960년대 영국과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상상하면 위안이 될 것이다. 그곳에서 최악의 상황은 피비린내 나지만 국지화 된 포스트식민 탐험일 것이다. 단극(unipolar)의 순간에, 미국은 이라크와 리비아에서 충분히 대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오늘날 위험은 그보다 더 높다. 1956년의 수에즈 사태보다 오늘날 관련된 역사적 예는 쿠바 미사일 위기이다.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러시아와의 긴장과 대만을 둘러싼 중국과의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우리 시대를 어둡게 하는 문제는 미국의 국가적 쇠퇴가 아니라 2차 냉전이 3차 세계대전을 촉발할 수 있는 위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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