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영화

누벨바그 주역에서 액션스타, 다시 예술영화로: 향년 88세로 별세한 장폴 벨몽도의 삶과 영화

Zigzag 2021. 9. 7.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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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영화의 거물 장폴 벨몽도(Jean-Paul Belmondo)가 향년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멍든 얼굴, 간결한 스타일, 악동 같은 미소는 1960년대 프랑스와 세계 젊은이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사친 출처: Getty Images

벨몽도는 88세의 나이로 파리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그의 변호사가 AFP에 이 소식을 확인했다. 프랑스 관객들로부터 베벨(Bébel)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벨몽도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프랑스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가장 큰 흥행 스타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외모는 라이벌이자 한때 협력자였던 알랭 들롱(Alain Delon)의 조각 같은 외모와는 대조적이다. 알랭 들롱처럼 벨몽도는 고다르와 함께 만든 영화 시리즈로 당대 유럽 영화 제작의 걸출한 세대의 핵심 인물이었다.

전직 권투선수, 누벨바그의 주역이 되다.

벨몽도는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의 1960년작 고전 'A Bout de Souffle'(한글 제목은 '네 멋대로 해라')에 등장하는 프랑스 영화 누벨 바그(new wave)의 반란자 중 하나였다. 불운한 도둑과 험프리 보가트 팬으로서의 우울한 연기는 공명을 불러일으켰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프랑스의 제임스 딘이라고 부르게 만들었다.

장폴 벨몽도는 1933년 4월 9일 파리 교외 뇌이쉬르센(Neuilly-sur-Seine)에서 조각가 폴 벨몽도(Paul Belmondo)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양육에서 집안의 강렬한 보헤미안적 분위기는 그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일련의 엘리트 사립학교를 다녔지만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는 학교에서 낙제하여 십 대 때 아마추어 복싱 경력을 시작했다. 연기에 집중하기 위해 포기하기 전까지 짧은 권투 경력 동안 그는 23번의 출전 중 15번을 이겼다. 하지만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울퉁불퉁한 코는 링이 아니라 학교 운동장에서 싸운 결과였다. 결핵에 걸린 후 그는 공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엘리트 국립 연극 아카데미(National Academy of Dramatic Arts)에 지원하여 결국 1952년에 합격했다.

'제 멋대로 해라'에서 첫 주연을 맡은 벨몽도. 사진 출처: Ronald Grant Archive

졸업 후, 벨몽도는 조지 버나드 쇼 등의 연극에 출연하며 연극을 시작했다. 그는 1958년 일련의 소규모 영화 배역을 얻었다. 그는 마크 알레그레트(Marc Allegret)의 1958년작 코미디 영화인 'Do Dolle de Dimanche'(영어 제목은 Sunday Encounter')과 클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의 영화 'Les Tricheurs'(한국 제목 '사기꾼들')에 출연하면서 Cahiers du Cinéma에서 비평가로 활동했던 고다르의 눈에 띄게 되었다.

고다르는 12분짜리 단편 Charlotte and Her Boyfriend에서 그를 캐스팅했다. "Cocteau에 대한 오마주"로 불리는 이 영화는 벨몽도의 캐릭터가 호텔 방에서 여자 친구에게 호언장담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목소리는 벨몽도가 알제리 전쟁으로 군대에 징집된 후 고다르의 목소리로 대체되었다.) 고다드의 동료 비평가인 클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은 1959년 그의 스릴러물인 'A Double Tour'(한국어 제목 '이중생활')에 벨몽도를 캐스팅하여 살인 피해자의 남자 친구 연기를 시켰다. 그가 맡은 라즐로 코박스(Laszlo Kovacs)라는 캐릭터 이름은 고다르의 'A Bout de Souffle'에서 교활한 농담으로 되풀이되었다.

고다르가 1959년 늦여름 촬영하기 시작한 'A Bout de Souffle'는 벨몽도를 프랑스 뉴웨이브의 새로운 얼굴로 등극시킨 작품이다. 프랑수아 트뤼포(François Truffaut)의 원고에 기초한 이 작품은 킬러 Michel Portail의 실제 활동에서 영감을 얻었다. 고다르는 매일 새로운 각본을 쓰고 즉흥 연기를 위해 조명 없이 촬영했다. 벨몽도는 고다르의 그런 거친 전술에 잘 적응했고, 이 영화는 1960년 개봉과 동시에 상당한 히트작이 되었다. 한 평론가는 그를 "매혹적으로 추한 남자"라고 표현했다.

벨몽도는 또한 보다 직선적인 역할을 맡았다. 1960년에 개봉된 Classe Tous Risques(한국 제목 빅 리스크)에서 그는 무장 강도가 자녀들과 함께 파리로 탈출하는 것을 돕는 젊은 갱단을 연기했다. 그의 컬트 이미지는 'Les Distractions'(영어 제목은 'Trapped by Fear')과 La Novice와 같은 여러 액션 영화를 통해 표현되었다.

스테레오 타입을 벗어나려 했던 한 벨몽도는 1961년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의 'La Ciocara'(한국어 제목은 '두 여인')의 이상주의 지식인 역 같은 더 까다로운 역할도 받아들였다.

그는 또한 고다르의 'Une Femme estune Femme'(한국어 제목은 '여자는 여자다' )에서 코믹한 배역을 즐겼으며, 특히 드 브로카의 'L'Homme de Rio'(한국어 제목은 '리오의 사나이')에서 정중하고 흔들림 없는 비밀 요원을 연기했다. 그는 뉴웨이브 비평가들의 총애를 받았으며 'A Bout de Souffle'에서 카메오로 출연했던 장-피에르 멜빌(Jean-Pierre Melville)과의 관계도 발전시켰다. 벨몬도는 1962년 멜빌의 Léon Morin, Priest(한국어 제목 '레옹 모랭 신부')에서 모호하고 섹시한 성직자 역을 맡았고, 1963년 멜빌의 'Le Doulos'(한국어 제목 '밀고자')에서 프락치로 의심되는 강도 역을 맡았다.

예술 영화에서 대중 영화 스타로

그는 점차 수익성이 높은 상업 배우가 되기 위해 예술 영화를 포기했다. 그는 코미디에서나 드라마에서 모두 능숙했다.

벨몽도는 갱스터와 하층민을 전문적으로 연기했지만, 1962년 필립 드 브로카(Philippe de Broca)의 'Cartouche'(한국어 제목은 도적 카르투쉬)에서 Cartouche에서 검술에 뛰어나 18세기 도적을 연기했으며, 이 작품은 대 히트를 치게 된다. 같은 감독의 1964년 작품 'L'Homme de Rio' 역시 큰 히트를 치게 되며 자신의 대중적 취향의 선택을 더욱 발전시킨다. 1964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지적인 영화보다 모험 영화를 더 선호한다"라고 밝혔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그는 상업 주류로 완전히 전환한다.

그는 1966년 'Paris Burning?'(한국어 제목은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1967년 제임스 본드 패러디 '카지노 로얄'(한국어 제목은 '007 카지노 로열')을 찍었다. 1967-8년 1년간 연기를 쉰 벨몽도는 복귀했다. 그는 트뤼포와 'Mississippi Mermaid'(한국어 제목 '미시시피 인어', 1969년), 클로드 를루슈와 Love Is a Funny Thing(한국어 제목 '러브 이즈 어 퍼니 씽', 1969년), 자크 드레이와 Borsalino(한국어 제목 ;볼사리노, 1970년)에 출연했다. 볼사리노에서 그는 알랭 들롱과 출연료 문제로 관계가 들어졌다. 여기서 교훈을 얻은 벨몽도는 1971년 자신만의 제작사인 Cerrito(벨몽도의 할머니 Rosine Cerrito에서 따온 명칭이다)를 설립하였다.

'Mississippi Mermaid'에 캐서린 드뇌브와 함께 출연 중인 벨몽도. 사진 출처: Guardian

그는 액션 영화를 찍으면서 스턴트 대역 없이 직접 찍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심지어 1985년 영화 Hold-up(한국어 제목은 '유쾌한 은행털이')에서 사고로 연습을 포기했지만, 1965년 'Les Tribulations d'Un Chinois en Chine'(한국어 제목은 '중국인의 모험')에서 스턴트 연기를 하기도 했다.

액션 영화로부터의 거리 두기

벨몽도는 코미디, 액션 영화 및 범죄 드라마로 80년대 중반까지 프랑스에서 일련의 인기 있는 히트작들을 내놓았지만, 점차 인기가 식기 시작했으며, 1980년대 변화를 시도한다. 그는 "나는 프랑스 영화의 날아다니는 할아버지(flying grandpa)가 되고 싶지 않다"며 액션 영화로부터 멀어졌다.

벨몽도는 프랑스 시네마의 원로로서의 역할을 즐겼다. 사진 출처: Reuters

1987년 벨몽도는 거의 30년 만에 처음으로 무대에 복귀했고 남은 생애 동안 연극과 영화를 오가며 일했다.

2년 후, 그는 Itineraire d'un Enfant Gate(한국어 제목은 '여정')에서의 공연으로 프랑스의 오스카에 해당하는 세자르 상을 수상했다.

그는 1995년 국제 영화 Les Cent et une Nuits de Samon Cinema(한국어 제목은 '101의 밤')에 대한 바르다(Varda)에 대한 오마주로 앙상블의 일부로, 같은 해 클로드 를루슈(Claude Lelouche)의 레미제라블 재작업에서 장발장 같은 인물로 독창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2001년 뇌졸중으로 입원했고, 2009년이 되어서야 영화 'A Man and His Dog'(한국어 제목 '맨 엔 히즈 독')에 참여했다. 영화는 그가 뇌졸중의 후유증을 아직 가지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지난해 6월 파리에서 열린 코미디언이자 시나리오 작가 가이 베도스(Guy Bedos)의 장례식에 참석한 모습이 포착됐다.

장폴 벨몽도는 3주 전 자신의 88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에서 많은 자녀들과 함께 미소 짓는 모습이 사진에 찍혔다.

장폴 벨몽도는 1965년 첫 부인 엘로디(Elodie)와 이혼했다. 콘스탄틴(Constantin)과의 두 번째 결혼도 실패했다. 그는 후에 여배우 우르줄라 안드레스(Ursula Andress)와 라우라 안토넬리(Laura Antonelli)와 오랜 관계를 가졌다. 그는 또한 2012년 헤어진 나이트클럽 사장 바바라 간돌피(Barbara Gandolfi) 등 유명 인사들과도 인연을 맺었다.

국내외 영화관 관객들은 그의 매력에 이끌려 스크린에서 벌어지는 부조리가 무엇이든 무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엠파이어(Empire) 잡지에 의해 영화 역사상 가장 섹시한 스타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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