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영화

영화 《쿵후 타이거》(The Paper Tigers): 미국으로 건너간 쿵후 디아스포라, 백인의 지배도 원조(元祖) 중국도 거부하다

Zigzag 2021. 5. 30.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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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이 글에는 영화 줄거리 일부와 결말이 포함되어 있다.

중국 무술 영화의 혼종과 디아스포라(Diaspora)

중국 무술 영화는 처음부터 중국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 시작은 1928년에 상하이에서 제작된 화연홍련사(火燒紅蓮寺), 불타는 홍련사라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영화는 평강불초생(平江不肖生, 본명은 시앙 카이란 向恺然)이 쓴 강호기협전(江湖奇俠傳)에 기초한 것이었다. 평강별초생은 일본 유학 시절 유도와 검도에 심취해 일본 무술인들과 교류했다. 중국 근대 무협 소설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그의 작품에는 그 교류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화연홍련사 이후 무술 영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장개석은 무술 영화를 금지하기도 한다. 중국 무술 영화의 시작은 그 출발부터 순수한 중국이 아닌 일본, 중국의 반식민지화와 제국주의의 영향을 받은 일종의 혼종(混種, hybrid)적 성격을 띤다.

국공내전으로 대거 홍콩으로 이동한 상해의 영화인들은 1950년대 이후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한 홍콩 무술 영화의 기반이 되었고, 그 무술 영화들은 일본 사무라이, 중국 오페라와 쿵후의 혼종이었다. 홍콩의 무술 영화는 처음부터 홍콩 자체 시장보다 전 세계 화교시장을 겨냥하는 성격의 영화였다. 1960년대 일종의 장르 혁명을 일으킨 장철(張徹) 감독의 《3인의 협객》(邊城三俠)과 외팔이 시리즈는 일본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와 자토이치 영화의 영향 속에서 만들어졌다. 브루스 리의 영화는 더 현실적이고, 중국 오페라풍의 화려한 무술 영화보다 간결하고 빠르며, 시대적으로 현대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았다. 척 노리스 같은 퇴역 GI 출신들이 동양 무술을 사용해 베트남전의 패배 이후 미국 내 팽배하던 패배주의와 대결을 벌이는 할리우드 영화는 이미 무술 영화의 국적주의를 부정하였다. 성룡의 《러시아워》, 오우삼의 《영웅본색》과 《페이스오프》, 이안의 《와호장룡》, 장이머우의 《영웅》 등에 포함된 '중국'의 농도는 각기 다르지만, 이 영화들이 표현하는 액션과 무술은 이미 세계영화적 문법을 가지고 있다.

저예산 쿵후 영화 《쿵후 타이거》(The Paper Tigers)는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부담 없는 영화다. 하지만 《쿵후 타이거》는 제법 많은 의미층을 영화 속에 녹여낸 흥미진진한 영화다. 무엇보다도 《쿵후 타이거》는 미국으로 건너간 쿵후 디아스포라(diaspora) 혹은 이산(離散)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영화이며, 쿵후를 매개로 미국의 백인 중심 사회와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중국 원조(元祖) 주의에 도전한다.

《쿵후 타이거》가 쌓아 올린 층들을 파고들기 전에 먼저 그 줄거리를 살펴보자. 영화는 한밤중 시애틀의 한 뒷골목에서 한 노년의 동양인이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혈도를 제압당한 채 싸우다 쓰러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쓰러진 그는 요리사이자 쿵후 선생인 정 사부(Roger Yuan 분)였다. 그는 생전에 자기 문파의 계승을 위해 세 명의 후계자를 두었는데, 그들은 오래전에 정 사부와 쿵후, 그리고 서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로 인해 이들은 정 사부의 사망소식을 나중에 접하게 된다. 경찰은 심장마비라고 밝혔지만, 그 죽음에 석연치 않은 점을 느낀 그들은 정 사부의 살인자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한창일 때는 도장 깨기를 하며 무적이었던 이 호랑이들 혹은 '타이거스"는 이미 중년이고, 그들이 오랫동안 거리를 두었던 쿵후와의 간격을 좁히기는 쉽지 않다. 《쿵후 타이거》는 중년에 접어들어 종이호랑이가 된 그들이 자신들이 거리를 둔 쿵후와 그 가치와의 간격을 좁혀가면서, 살인자와의 간격을 좁혀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자 쿵후

처음에 정 사부의 죽음을 보여준 영화는 순간 1980년대 중반의 미국으로 돌아간다. 1980년대 중반은 《로키》를 만든 존 G. 아빌드센(John G. Avildsen)이 1984년 내놓은 《가라테 키드》와 그 후속작이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시기다. 《취권》의 은둔 고수가 초보자에게 무술을 가르치는 것과 《용쟁호투》의 토너먼트식 대결을 섞은 《가라테 키드》는 미국 내에서 무술 붐을 일으킨다. 《쿵후 타이거》는 그 시절의 아이들이 장년이 된 이야기다. 《가라테 키드 II》에 악역으로 출연했던 유지 오카모토(Yuji Okamoto)는 《쿵후 타이거》의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본인이 제작자를 맡고, 심지어 직접 출연(중국 식당 매니저) 했다. 하지만 《가라테 키드》의 은둔 고수 미야기와 달리 《쿵후 타이거》의 정 사부는 요리사이며, 담배를 피우고, TV의 경마를 즐겨 보는 보통의 중국 이민자다. 《쿵후 타이거》에는 전통 무술 영화가 가진 은둔의 신비나 무협 영화의 대의俠처럼 일상과의 거리를 찾을 수 없으며, 찌든 일상을 살아가는 이민자 쿵후만이 존재한다.

정 사부의 제자들은 오래 전 비디오 클립에서 자신들을 위해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주던 그의 모습을 본다. 그는 쿵후 한 문파의 사부이자 이민자 요리사다.

또한 《쿵후 타이거》는 《용쟁호투》나 《가라테 키드》처럼 자본주의적 무술 토너먼트를 거부한다. 정 사부의 "명예 없는 쿵후는 싸움질과 다름없다"는 가르침은 대니가 그 가르침에 반발함으로써 영화 내 갈등의 주요 모티브가 되기도 하지만 대단원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 《쿵후 타이거》는 그 배경과 내러티브에서 확실히 미국으로 건너온 쿵후의 디아스포라 역사다. 그런 의미에서 완전히 중국적인 것도, 완전히 미국적인 것도 아닌 일종의 혼종이며, 가벼운 영화지만 그 혼종의 성격으로 기존의 무술 영화와는 다른 영화다. 《쿵후 타이거》는 배경과 내러티브뿐만 아니라 그 세팅과 캐릭터들도 쿵후의 디아스포라와 혼종이다.

대변자를 거부하는 《쿵후 타이거》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을 “그들은 스스로 대변할 수 없으며 대변되어야 한다”는 카를 마르크스의 인용과 “동양은 경력이다.”라는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인용으로 시작했다. 동양인이나 흑인과 같은 소수자와 약자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백인은 너무나 닳고 닳아 너덜너덜해진 할리우드의 내러티브지만 영화 《헬프》, 《히든 피겨스》, 《그린 북》 같은 영화에서 지겹도록 반복되고, 그럼에도 흥행과 비평에 성공한다. 《쿵후 타이거》에는 그런 백인은 없다. 《쿵후 타이거》의 주인공들은 백인에 의해 대변되기를 거부한다.

이소룡의 《용쟁호투》처럼 《쿵후 타이거》의 주요 인물은 3명은 다양한 인종을 대변한다. 하지만 《용쟁호투》와 달리 《쿵후 타이거》에는 백인 주인공은 없다. 대니(Danny, Alain Uy 분)는 필리핀계, 힝(Hing, Ron Yuan 분)은 중국계, 짐(Jim, Mykel Shannon Jenkins 분)은 흑인이며, 이들 중 대사형은 중국계 힝이 아니라 필리핀계 대니이다. 젊은 시절 쿵후를 좀 안다고 전통 중국 복장을 하고 타이거스 앞에서 까불다 번번이 패배를 당하는 카터(Carter, Matthew Page 분)는 백인이다. 쿵후는 이들 타이거스에게 쿵후 흉내를 낼 뿐 그 정수는 모르는 오리엔탈리스트 카터와 같은 백인에 맞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일종의 무기였다. 타이거스보다 더 쿵후 흉내를 잘 내고, 그들보다 광둥어를 더 유창하게 쓰며, 늘 중국의 격언을 빌어 타이거스를 가르치려 들며, 중국인보다 더 중국인 같은 하이퍼-차이니즈(hyper-Chinese) 카터는 피식민지인을 대하는 제국주의 오리엔탈리스트의 시선이다.

중국인 보다 더 중국인스러우려는 카터는 백인 카터는 동양을 스스로 대표하려는 제국의 상징이기도 하다. 좌측은 젊은 시절의 카터, 우측은 나이를 먹어서 중국 속담으로 타이거스를 가르치려 드는 카터

이혼한 아내 카린(Caryn, Jae Suh Park)과 아이의 양육을 놓고 티격태격하면서도 일을 핑계와 아들과 카린에게 거짓말을 일삼은 중년의 대니는 젊은 시절의 우람한 체격을 잃은 왜소하고, 세상사에 찌든 인간이 되었다. 힝은 오래전에 공사장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치고, 지금은 살이 너무 쪄서 머리띠를 뒤로 메지도 못할 뿐 아니라 가발이 벗겨질까 늘 전전긍긍한다. 짐은 쿵후와 관련이 없는 격투기 도장에서 일개 사범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대니와 힝 그리고 짐은 오즈의 마법사의 뇌 없는 허수아비, 용기 없는 사자, 심장 없는 양철 나무꾼처럼 인간을 이루는 중요 부분을 서로 분담하고 있다. 격투기 사범을 하는 짐은 몸은 살아 있지만 그의 머리는 쿵후를 망각한 지 오래며, 힝은 머리는 살아 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으며, 현실주의적인 대니는 냉소만 있을 뿐 심장이 없다. 3명의 제자가 하나로 뭉쳐야 머리와 몸, 심장을 가진 하나의 인간이 탄생할 수 있으며, 그들에게 머리와 몸, 심장을 되돌려주는 오즈의 마법사는 정 사부의 죽음과 쿵후의 가르침이다.

수단과 삶의 외부로서 무술 vs 목적과 삶의 일부로서 무술

《쿵후 타이거》에는 《취권》의 기교도, 《황비홍》의 화려한 무술도, 《와호장룡》의 세련된 와이어도, 《영웅》의 웅장한 스케일도, 《엽문》의 몰아치는 권법도, 《일대종사》의 비장한 액션도 없다. 하지만 《쿵후 타이거》의 무술은 개인의 재능을 뽐내거나, 강호를 지배하거나, 외적을 물리치기 위한 도구나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 삶의 목적에 녹아든 삶의 일부이자 내부이다.

성룡이 등장했던 《취권》의 황비홍에서 무술은 개인의 기술을 뽐내기 위한 순수한 기술이었다. 그래서 《취권》의 황비홍은 기존의 공동체적 정의를 위해 싸우는 무협 영화 주인공처럼 깨어 있기보다는 일부러 취해 있었다. 취기만이 협객, 의리, 정의의 장엄한 기존의 무협 영화의 내러티브를 깰 수 있었다. 지배층의 진지한 담론에 질린 이제 막 성장하는 1970년대 중반 이후 동아시아의 노동계급과 대중들은 《취권》의 그 취기에 실린 우스꽝스러운 슬랩스틱에 열광했다. 하지만 《취권》에서 무술은 여전히 삶과 동떨어진 것이었으며,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다. 이연걸의 《황비홍》에서 무술은 청이나 제국주의를 상대하기 위한 도구였으며, 그 도구는 정치적 목적을 비정치적으로 풀어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문화대혁명의 폐해를 《인생》을 통해 신랄하게 비판했던 장이머우가 《영웅》으로 진시황이라는 독재자를 찬양하고, 중화민족주의를 고취했을 때 무술과 액션은 관객의 탈정치화로 정치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의 그 극한을 보여주었다. 왕자웨이의 《일대종사》의 비장한 쿵후는 거친 당대와 담을 쌓은 목가적 서정시에 가까웠다. 이 모든 영화에서 무술은 삶의 일부가 아니었고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었고, 영웅 찬가의 장신구였다.

《쿵후 타이거》에는 일상을 뛰어넘는 영웅이 없다. 대사형 대니는 더이상 근육질과 무패의 타이거가 아니며, 발을 한 번 내지르는 것도 너무나 힘들어하는 중년의 종이호랑이다.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 바로 그 이유로 《쿵후 타이거》에서 쿵후는 삶의 외부가 될 수 없다. 《쿵후 타이거》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right 혹은 righteous이다. 의로운 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지만 《쿵후 타이거》의 right와 righteous는 바른, 옳은의 의미가 더 강하다. 이 옳음은 개인을 위해 좋은(good) 무술, 거대한 정의로운(just) 것을 위한 무협과 다른 공동체적이며, 생활적인 것이다.

사부를 살해한 젠 판과의 대결을 대니와 짐이 외면하자, 힝은 분노하며 사부의 가르침은 올바른 사람이 되어 약자를 보호하라는 것이었다고 외친다.

대니는 아들에게 아빠를 계속 보고 싶으면 놀이공원에 놀러 갔다고 엄마에게, 즉 그의 이혼한 전 부인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강요한다. 그는 나중에 그것이 잘못됐음을 깨닫고 바로 잡으려고 한다.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를 위해 나선 아들에게 맞서지 말라고 말리다 결국 올바른 것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면 싸우라며 주먹 쥐는 법을 가르친다. 또한 자신들이 떠난 정 사부가 말년에 거두었던 젠 판(Ken Quitugua 분, 그는 이 영화의 무술 감독이다)이 도장 깨기와 청부살인을 하고, 심지어 이를 바로 잡으려는 정 사부마저 살해하자 대니, 힝, 짐은 올바른 것을 위해 젠 판과 맞선다.

사부를 살해한 젠 판과 대결을 벌이기 위해 가던 중 대니는 아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상대의 얼굴에 정면으로 주먹을 날리라며 주먹쥐는 법을 가르친다.

무술, 화해와 깨달음의 과정

《쿵후 타이거》에서 타이거스는 중요한 3번의 격투를 치른다. 그들은 정 사부의 제자를 사칭하는 동네 불량배들과 대결 할 때, 카터에게서 정 사부의 새 제자를 알아내려고 할 때, 그리고 정 사부를 살해한 젠 판과 대결을 벌일 때 무술을 사용한다. 그 무술은 화려하고 거창한 무술 대결이 아니다. 무예를 겨루자며 "베이모"(Beimo, 比武: 북경어로는 비우지만 광둥어로는 베이모이다)를 외치며 대결을 하지만 발차기 한 번에 가랑이가 찢어지고, 주먹 한 방에 혼절하는 일상의 무술이 좁은 도시 공간에서 펼쳐진다. 《쿵후 타이거》의 쿵후는 일상의 잘못된 것을 올바르게 바로잡는 수단이자 삶의 방식이다. 이 세 번의 대결은 과거의 영예를 되찾고 새롭게 영웅이 탄생하는 과정이 아니며, 과거와 현재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옳은 일상을 살아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싸움의 끝은 화해나 깨달음으로 마무리된다.

타이거스는 정 사부의 장례식장에서 제자를 사칭한 동네 불량배들과 대결 이후 정 사부가 그들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그들과 서투른 화해를 한다.

정 사부의 제자를 사칭하던 동네 불량배들과의 대결에서 타이거스는 정 사부의 진심을 이해하고 동네 불량배들을 용서한다. 카터와의 대결은 타이거스의 일방적 패배로 끝나지만, 카터는 자신이 무서워서 피했던 정 사부의 살인자 젠 판을 대니가 죽음을 각오하고 맞서겠다는 것을 알고, “한 사람의 덕이 그의 재능을 능가할 때 그는 군자가 된다”며 타이거스에게 화해를 청한다. 마지막 젠 판과의 대결에서 대니는 과거 사부로부터 얻었던 호흡과 명상의 깨달음을 되찾는다. 그는 명상을 통해 세상의 미세한 것을 더 강렬하게 느끼고, “세상을 느리게 가게 할 수도 있었다”(I could get the world to slow down). 《용쟁호투》에서 브루스 리의 빠른 속도를 보여주기 위해 슬로비디오로 보여주었던 천수관음과 같은 여러 개의 손은 《쿵후 타이거》에서 반대로 대니가 상대방을 느리게 보는 혹은 세상을 느리게 가게 만드는 장면이다.

대니는 젠 판과의 대결에서 잊고 있었던 명상을 통해 세상을 느리게 가게 만드는 법을 다시 깨닫는다. 동시에 대니에게 젠 판의 손동작이 느리게 보인다.

혼종의 쿵후 디아스포라, 백인 우월주의도 중국 원조주의도 거부하다

비겁하게 젠 판과의 대결을 미루던 대사형 대니에 실망한 힝이 젠 판과 직접 맞서다 쓰러지자 대니는 결국 젠 판과 대결에 나서 승리한다. 타이거스를 가르치려 들던 카터와 정 사부를 살해한 젠 판은 일산불용이호(一山不容二虎) “가장 용맹스러운 호랑이는 결코 같은 산을 공유하지 않는다(The fiercest tigers can never share the same mountain.)는 중국속담을 들먹이며 패자(霸者) 혹은 영웅이 되려 하지만 대니는 패자(霸者)도 영웅도 포기한다. 그는 쓰러진 젠 판을 향해 “그 망할 산은 너나 가져”라고 외치며 돌아선다.

대니는 젠판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지만, 패자( 霸者)나 영웅이 되기를 거부한다.

《쿵후 타이거》에서 미국에 이민 온 쿵후는 미국에 의해 대변되는 것도 거부하지만 순수한 중국적인 것도 거부한다. 디아스포라는 그것이 떠나 온 본토와 그것이 머무는 정주지 틈새를 살아가는 혼종의 운명을 타고났다. 카터가 백인 우월주의를 대변한다면 젠 판은 중국적인 것 혹은 동양적인 것의 대변이다. 정 사부가 은둔의 고수가 되어 순수한 중국과 순수한 동양에 머물기보다는 이민자 주방 요리사로 미국 경마를 즐겨 보는 혼종의 길을 택한 것처럼 대니와 타이거스는 하나의 산에 갇혀 살 생각이 없으며, 이민자들이 섞여 사는 미국의 들판으로 나아가는 호랑이를 선택한다.

트란 쿠옥 바오(Tran Quoc Bao)는 이 영화의 대본, 편집, 감독을 맡았다. 《쿵후 타이거》는 무술 영화에 관심이 많은 그의 첫 장편 감독 데뷔작이다. 첫 영화에서 그는 꽉 찬 내러티브를 보여주었으며, 한동안 지루했던 무술 영화의 새로운 틈새를 열었다. 앞으로 나올 그의 또 다른 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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