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자 주: 흑인 최초로 오크사 남우 주연상을 수상했던 시드니 포이티어가 향년 94세로 별세했다. 그는 1950년대 후반부터 영화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이는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민권운동이 일어나던 시기이다. 영화에서 그는 종종 인종 간 조화, 인종 간 화해의 역을 맡았는데, 이는 1960년대 들어 전투화된 민권운동 세력에 의해 '엉클 톰'이란 조롱을 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이 행해진 1963년 대규모 워싱턴 행진에 참여했던 할리우드 대표단의 일원이었으며, 인종 정의와 민권 운동을 오랫동안 지지해 왔으며, 급진적 인사들과의 교우로 영화 제작자들에 의해 경계를 받기도 했다. 그에 이어 두 번째로 오스카 남우 주연상을 수상했던 덴젤 워싱턴은 수상 소감에게 직접 포이티어를 언급하고 그가 자신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고 감사를 표했다. 포이티어는 백인들이 지배하던 할리우드에서 흑인들의 입지를 다지고 길을 낸 역사적 인물이다. 이 글은 뉴욕타임스 부고 국 기자이자 뉴욕 타임스의 기존 문화 섹션 그리고 논픽션 비평가인 William Grimes의 1월 7일 자 기사 Sidney Poitier, Who Paved the Way for Black Actors in Film, Dies at 94의 번역으로 포이티어의 생애, 작품, 그리고 그의 인종 문제와 정치-사회 문제에 대한 입장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흑인 배우의 길을 열은 시드니 포이티어, 향년 94세로 별세
'들백합'(Lilies of the Field)으로 흑인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그는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1,500만, 1,800만 명의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언제나 마음은 태양'(To Sir, with Love), '밤의 열기 속으로'(In the Heat of the Night), '초대받지 않은 손님'(Guess Who's Coming to Dinner)과 같은 영화에서 단호한 영웅을 연기한 시드니 포이티어(Sidney Poitier)는 그를 할리우드 최초의 흑인 마티네 아이돌(matinee idol, 여성들에게 인기 있는 배우 - 역자 주)로 확립하고 영화산업에서 흑인 배우들에게 문을 여는 데 일조했다. 그는 목요일 밤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는 94세였다.
그의 사망은 포이티어가 자란 바하마에서 유진 토르촌뉴리(Eugene Torchon-Newry) 외무부 국장 직무대행이 확인했다.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1963년 영화 '들백합'(Lilies of the Field)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여 흑인 배우로는 최초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포이티어 씨는 미국에서 시민권 운동이 진전되기 시작했을 때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역할은 투쟁의 평화적 통합주의 목표를 반영하는 경향이 있었다.
억눌린 분노로 끓어오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의 캐릭터들은 불의에 조용히 결단력 있게 대응했다. 그들은 이성과 용서로 증오를 만났고, 백인 관객들에게 위안을 주는 메시지를 보냈고, 1960년대 후반 민권 운동이 더욱 전투적으로 변했을 때 포이티어 씨를 톰 아저씨(Uncle Tom)*라는 공격에 노출시켰다.
* 역자 주: 해리엇 비처 스토우(Harriet Beecher Stowe)의 1852년 작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 주인공의 이름에서 따온 말로 흑인들이 보통 백인에게 순종적인 흑인들을 향해 던지는 조롱적인 언사이다.
포이티어 씨는 1967년 인터뷰에서 자신의 영화 배역에 대해 "그것은 선택, 분명한 선택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는 "만일 사회의 구조가 다르면 악역을 연기하고 더 입체적인 흑인(Negro) 삶의 다른 모습을 다루기 위해 크게 목청을 높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결코 그러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포이티어 씨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많은 출연료를 받는 배우 중 하나였으며 박스 오피스 매거진의 극장주 및 비평가 여론조사에서 남자 배우 중 5위를 차지했으며 그의 앞에는 오직 리처드 버튼, 폴 뉴먼, 리 마빈, 존 웨인만이 있었다. 그러나 인종 까탈스러움은 그의 잘생긴 외모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가 그를 로맨틱한 주연으로 캐스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인터뷰에서 "미국 흑인(Negro)이 로맨틱한 사회적-성적(social-sexual) 환경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파고 들어가기에는 너무 차고 넘칩니다."
이티어 씨는 종종 과거에 할리우드가 제공했던 비하적인 배역들에 대한 중요한 발전을 나타내는 제한적이고 성스러운 역할 속에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의 첫 번째 실질적인 영화 배역인 '노 웨이 아웃'(No Way Out, 1950년)에서 인종차별주의 환자에 의해 박해받는 의사를 연기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종차별을 다룬 앨런 패튼 소설을 원작으로 한 '내 사랑 나의 조국'(Cry, the Beloved Country, 1952년)에서는 젊은 사제 역으로 출연했다. '폭력 교실'(Blackboard Jungle, 1955년)에서 그의 역할은 거친 뉴욕 공립학교의 말썽꾸러기 학생으로 깨달음을 얻고 결국 그에게 다가가려는 교사 글렌 포드(Glenn Ford)의 편에 선다.
인종 우화인 '흑과 백'(The Defiant Ones, 1958년)은 그를 스타로 만들고, 그를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로 만들었다. 여기서 그는 그는 토니 커티스가 연기한 동료 죄수(악랄한 인종차별주의자)와 수갑을 찬 채 도주 중인 죄수였다. 남우주연상은 1964년에 저예산 영화 '들백합'(Lilies of the Field)에서 한 무리의 독일 수녀들이 남서부 사막에 교회를 짓는 것을 돕는 떠돌이 잡역부 역할 연기로 주어졌다.
1967년 포이티어 씨는 헐리우드의 최고 수익을 올린 세 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그를 인기의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밤의 열기 속으로'는 그를 나태하고 편협한 보안관으로 로드 스타이거(Rod Steiger)의 반대편에 두었고, 포이티어 씨는 필라델피아 형사 버질 팁스(Virgil Tibbs) 역으로 미시시피에서 살인 수사를 해야한다.(잊혀질 수 없는 대사 속에서, 형사는 보안관의 존중을 주장하며 "사람들은 저를 팁스 씨라고 부릅니다!"라고 선언한다.) '언제나 마음은 태양'(To Sir, with Love)에서 그는 거친 런던 고등학교의 걱정스러운 교사였으며 '초대받지 않은 손님'(Guess Who's Coming to Dinner)은 인종 간 커플에 관한 금기를 깨는 영화로 그는 의사 역을 연기했는데 그의 인종은 스펜서 트레이시(Spencer Tracy)와 캐서린 헵번(Katharine Hepburn)이 연기한 그의 예비 처가의 자유주의 원칙을 시험한다.
그의 경력 내내, 인종적 중요성의 무거운 무게가 푸아티에와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을 짓눌렀다.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1,500만, 1,800만 명의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그는 쓴 적이 있다.
포이티어 씨는 바하마에서 자랐지만 1927년 2월 20일 마이애미에서 태어났으며, 마이애미는 그의 부모가 토마토 작물을 팔기 위해 정기적으로 여행을 했다. 9남매 중 막내인 그는 플로리다가 바하마 토마토 수입을 금지한 후인 1937년 그의 아버지 레지날드(Reginald)와 가족이 캣 아일랜드(Cat Island)에서 나소(Nassau)로 이사할 때까지 밀가루 자루로 만든 옷을 입었고, 차를 본 적도 없었으며, 거울을 보거나 아이스크림을 맛본 적도 없었다.
그가 12살이었을 때, 포이티어 씨는 학교를 그만두고 육체노동을 노동자들을 위해 음료수를 나르는 일을 했다. 그는 또한 비행을 저지르기 시작했고, 그의 부모는 그가 비행 청소년이 될 것을 염려하여 그가 14살 때 결혼한 형인 시릴(Cyril)과 함께 살도록 하기 위해 그를 마이애미로 보냈다.
이티어 씨는 캣 아일랜드에서 자라면서 인종 차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남부의 미국 흑인들을 통치하는 규칙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나중에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해 "사방이 철조망처럼 되어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과 계속 충돌했고 상처를 입었습니다."
1년도 채 되지 않아 그는 마이애미를 떠나 뉴욕으로 갔고, 도착했을 때 주머니에 3달러와 잔돈 몇 푼이 있었다. 그는 설거지를 하고 배수로 일꾼, 부둣가 노동자, 의류 지역 배달원으로 일했다. 삶은 암울했다. 할렘에서 인종 폭동이 일어나는 동안 다리에 총을 맞았다. 그는 추운 밤에 유료 화장실에서 잠을 자기 위해 동전을 저축했다.
1943년 말, 포이티어 씨는 나이를 속이고 군에 입대하여 롱아일랜드에 있는 퇴역군인 병원에서 제1267 의료 분견대 잡역병이 되었다. 정신 장애를 가장하여 그는 1945년에 제대를 하고 뉴욕으로 돌아와 암스테르담 뉴스(The Amsterdam News)에서 미국 흑인 극단(American Negro Theater)이 배우를 찾고 있다는 것을 읽었다.
그의 첫 오디션은 실패였다. 교육을 받은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은 그는 서인도 억양으로 주저하며 대본을 읽었다. 그 극장의 설립자인 프레드릭 오닐(Frederick O’Neal)은 그에게 문을 보여주며 식기세척기 일을 하라고 조언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포이티어 씨는 라디오를 구입해 다양한 스태프 아나운서들로부터 들으며 영어 말하기 연습을 했다. 그가 설거지를 했던 식당의 친절한 동료 직원이 그의 독서를 도왔다. 포이티어 씨는 그가 무급 청소부로 일하겠다고 자원한 후에야 비로소 극단의 연기 학교의 자리를 얻었다.
그의 행운은 브로드웨이 제작자가 참석하는 리허설에 극장에 또 다른 배우인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 찾아왔다. 포이티어 씨는 대신 무대에 올랐고 1946년 모두 흑인으로 제작된 '리시스트라테'(lysistrata,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남성들의 전쟁을 중단시키기 위해 여성들의 섹스 파업을 다룬 이야기 - 역자 주)의 배역을 맡았다. 비록 비평가들에 의해 혹평을 받았지만, 그것은 '안나 루카스타'(Anna Lucasta)의 로드 프로덕션으로 이어졌다.
'노 웨이 아웃'(No Way Out) 이후에는 영화와 TV 역할이 드문드문 들어왔지만 포이티어 씨는 여전히 연기와 천한 일 사이를 오갔다.
1951년 그는 댄서이자 모델인 후아니타 마리 하디(Juanita Marie Hardy)와 결혼했고 1965년에 이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4명의 딸이 있었다. 1976년에 그는 공장을 털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흑인 무장 단체에 관한 영화 '로스트 맨(The Lost Man, 1969년)에서 함께 출연한 조안나 심커스(Joanna Shimkus)와 결혼했다. 그들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심커스 씨는 아직 생존해 있다. 그의 딸 지나 파트리스 푸아티에 구라이제(Gina Patrice Poitier Gouraige)는 2018년에 사망했다. 그의 유족들에 대한 완전한 정보는 즉시 제공되지 않았다.
탈주 영화인 '폭력 교실'(Blackboard Jungle), '흑과 백'(The Defiant Ones, 1958년) 같은 영화를 만든 후 포이티어의 운명은 인종적 관용의 경계를 넓히려는 그의 목적인 할리우드와 엮여 있었다. "제 경력에 대한 설명은 제가 사회적 양심을 가진 소수의 영화 제작자들에게 도움이(instrumental, '도구적'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 역자 주) 되었다는 것입니다"라고 그는 나중에 썼다.
'흑과 백', '밤의 열기 속으로'에서 인종 정치는 핵심적인 역할과 일치했다. 그러나 포이티어 씨는 '푸른 하늘 아래서'(A Patch of Blue, 1965년)와 같은 감상적인 영화에서 인종 화합의 고결한 메신저나 혹은 냉전시대 해군 드라마 '베드포드 사건'(The Bedford Incident, 1965)의 신문기자, '위대한 생애 (The Greatest Story Ever Told, 1965년)에서 사이렌의 사이먼(Simon of Cyrene), 혹은 '디아블로 요새'(Duel at Diablo, 1966년)에서의 전 기병대 하사처럼 기억에 남지 않는 영화에서 인종 중립적 역할을 했다.
'흑과 백'은 포이티어 씨의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로 남았지만, 이 배역을 따내기 위해 그는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의 출연진을 모으는 새뮤얼 골드윈(Samuel Goldwyn)과 싸움을 벌여야 했다. 벨라폰테가 포기의 역할을 모욕적이라고 거절한 후 골드윈은 마찬가지로 그 뮤지컬을 흑인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는 포이티어 씨를 주목했다. 포이티어 씨는 생동감 있고 유난히 솔직한 첫 회고록 '현세'(This Life, 1980년)에서 골드윈 씨가 그가 포기를 연기하지 않는 한 스탠리 크레이머(Stanley Kramer) 감독이 그를 '디파이언트 원스'에 기용하지 않도록 뒤에서 조종했다고 말했다.
화가 난 포이티어 씨는 피할 수 없는 상황에 고개를 숙였다. 그는 1967년 뉴욕타임스에 "나는 그것을 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고, 나는 아직 나를 완전히 용서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후에 백인 기득권층 앞에서 그가 굽신거렸다고 비난한 비평가들은, 1963년 워싱턴 행진에 참여했던 할리우드 대표단의 일원으로서, 인종 정의와 민권 운동에 대한 그의 오랜, 거침없는 주장을 묵살하는 듯했다. 그의 경력 초기에 좌익 운동과 급진적인 가수이자 배우인 폴 로브슨(Paul Robeson)과의 우정은 그를 영화와 텔레비전 제작자들에게 정치적으로 위험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스타일은 여전히 절제되었고 대립적이지 않았다. 그는 "이 모든 것에 대한 나의 역할에 대해"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노하고 반항하는 사람들을 위한 장소가 있다는 것이고, 때때로 그들이 도움이 되지만, 그것은 결코 나의 역할이 아니었습니다"라고 썼다.
1959년 포이티어 씨는 로레인 핸즈베리(Lorraine Hansberry)의 '태양 속의 건포도'(A Raisin in the Sun)로 브로드웨이로 의기양양하게 복귀하여 황홀한 평을 받았다. 브룩스 앳킨슨(Brooks Atkinson)은 뉴욕타임스에 "포이티어 씨는 항상 통제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진 놀라운 배우다, "라고 썼다. "안절부절못하는 아들로 출연해, 그는 예민한 청년의 격동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그는 할 말이 없을 때 독설적인 대사를 할 때처럼 유창하다. 그는 광대짓을 하며 춤을 출 수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사고의 에둘러진 과정을 전달할 수 있다." 포이티어 씨는 1961년 영화 버전의 연극에서도 그 역할을 반복했다.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에 고든 파크스(Gordon Parks)와 멜빈 반 피블스(Melvin Van Peebles)와 같은 흑인 영화 제작자들이 부상하면서, 당시 40대인 포이티어 씨는 감독과 제작자로 전향했다. 그는 애비 링컨(Abbey Lincoln)과 함께 출연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아이비의 사랑을 위하여'(For Love of Ivy, 1968년)의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1969년 폴 뉴먼,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함께 퍼스트 아티스트(First Artists)라는 제작사를 설립한 후 그는 서부 영화 '벅 앤 프리쳐'(Buck and the Preacher, 1972년)에서 벨라폰테 씨의 반대편에서 연기했으며 코미디 시리즈 특히 '업타운 토요일 밤'(Uptown Saturday Night, 1974년)과 빌 코스비(Bill Cosby)와 팀을 이루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한 쌍을 연기한 '다시 해보자'(Let’s Do It Again, 1975년)그리고 리처드 프라이어(Richard Pryor), 진 와일더(Gene Wilder)와 함께 '폭소 감방'(Stir Crazy, 1980)을 감독했다.
비평가들은 포이티어 씨의 감독 재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열광적인 흑인과 백인 관객들은 세 편의 영화를 모두 흥행에 성공시켰다. 와일더와 질다 래드너(Wilder and Gilda Radner) 씨가 출연한 코미디 영화 '행키 팽키'(Wilder and Gilda Radner, 1982년)나 코스비 씨가 세 아이를 혼자 두기를 거부하는 죽은 아버지를 연기한 '유령 아빠'(Ghost Dad, 1990년)처럼 관객도 비평가도 이후 감독 활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말년에 포이티어 씨는 '25시의 추적'(Shoot to Kill, 1988년), 'KGB의 아들'(Little Nikita, 1988년), '스니커즈'(Sneakers, 1992)와 같은 쉽게 잊혀질 액션 영화와 스릴러에서 탄탄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에게 가장 위대한 두 역할을 제공한 것은 텔레비전이었다.
1991년 그는 서굿 마셜(Thurgood Marshall) 대법관의 삶을 각색한 ABC 드라마 '세퍼레이트 벗 이퀄'(Separate but Equal)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1997년 그는 F.W. 데 클레르크(F.W. de Klerk) 대통령 역의 마이클 케인(Michael Caine)과 함께 만델라가 남아공에 수감된 마지막 몇 년을 집중 조명하는 텔레비전 영화인 '만델라와 데 클레르크'(Mandela and de Klerk)에서 넬슨 만델라 역으로 널리 찬사를 받았다.
캐린 제임스(Caryn James)는 뉴욕타임스 리뷰에서 "시드니 포이티어와 넬슨 만델라는 완벽한 대칭으로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 위에 겹쳐진 이중 노출 사진처럼 놀랍도록 쉽게 합쳐졌다"라고 썼다.
2002년 영화계에서의 활약으로 포이티어 씨는 명예 오스카상을 받았다.(동시에 덴젤 워싱턴은 '트레이닝 데이'[Training Day]로 포이티에 이후 흑인 배우로는 처음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장벽을 무너뜨린 끈질긴 헌신"을 언급하며 그에게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했다.
포이티어 씨는 1974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푸아티에의 회고록 '현세'에 이어 2000년에 두 번째 작품인 '더 메저 오브 맨'(The Measure of Man)이 발간됐다. "영적 자서전"(A Spiritual Autobiography)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는 인생, 사랑, 연기, 인종 정치에 대한 포이티어 씨의 생각이 담겼다. 이 책은 후속작 "라이프 비욘드 메저: 증손녀에게 보내는 편지'(Life Beyond Measure: Letters to My Great-Granddaughter, 2008년)를 만들어냈다.
인종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을 바꾸고 새로운 세대의 흑인 배우들에게 문을 열어준 그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포이티어 씨는 그의 경력에 대해 겸손함을 유지했다. 그는 "역사는 나를 현재 진행 중인 주요 사건의 사소한 요소, 필요하다면 작은 에너지로 기술할 것"이라고 썼다. "그러나 저는 선택받은 것에 만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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