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시사/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

'시대 전환'(Zeitenwende) 이후: 위르겐 하버마스와 독일의 새로운 정체성 위기

Zigzag 2022. 6. 12.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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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 주: 분단 독일에서 유일 합법 정부는 서독이며 동독과 수교하는 그 어떤 국가와도 대화하지 않겠다는 냉전적 할슈타인 독트린(Hallstein Doctrine)이 1969년 사민당 출신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이 동방정책에 의해 폐기되면서 독일은 일찌감치 동서 대립의 냉전 속에서 데탕트와 화해를 추구해왔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이 화해와 대화의 동방정책은 큰 위기에 직면했고, 독일의 비교적 젊은 전후 세대 평화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표명하며 군사적 개입을 촉구하며 전향을 선언했다. 이들은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적극적 지원과 개입을 압박하며 그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이에 비해 전전 세대이며 냉전 속에서 평화를 지향해왔던 비교적 노회한 평화주의자들은 숄츠 총리에게 중화기 지원은 독일의 재군사화의 위험이 있다며 그의 애초의 소극적 입장으로의 복귀를 촉구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4월 28일 쥐트도이췌 짜이퉁(Süddeutsche Zeitung, '남독 신문'으로 번역되며 중도좌파적 성향의 독일 정론 일간지 - 역자 주)에 '전쟁과 분노'(Krieg und Empörung)라는 제목의 장문의 글을 게재하며(원문의 번역은 이곳) 숄츠 총리의 신중한 접근을 지지했다. 그는 현재 우크라이나에 대한 논쟁의 격렬성이 독일 내에서는 전전/전후 평화주의자들 간의 비동시적 세대차이의 동시성, 유럽연합과 우크라이나 사이에서는 민족국가를 건설 중인 우크라이나와 이를 이미 건설한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의 비동시적 동시성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부당성과 핵보유국과의 전쟁에서 물리적 '승리'란 사실상 존재할 수 없다는 이 딜레마를 풀기 위해서는 긴장의 고조보다는 독일이 어렵게 획득한 대화와 화해의 원칙을 견지하면서 우크라이나의 승리보다는 "우크라이나가 전쟁에서 지지 않는"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독일이 냉전시대 어렵게 획득한 대화와 화해의 시대정신(Zeitgeist)은 시대 전환(Zeitenwende)의 이름 아래 성급히 폐기되지 말아야 하며, 그는 전쟁 당사자가 되지 않으면서도 러시아의 침공을 억제하고 우크라이나의 중무장화를 방치하지 않는 '위험 임계치' 내에서 신중하게 접근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 글은 영국 Newstateman에 게재된 Adam Tooze의 5월 12일 자 글 After the Zeitenwende: Jürgen Habermas and Germany’s new identity crisis의 번역으로 하버마스가 쥐트도이췌 짜이퉁 기고를 하게 된 독일의 시대적 배경과 하버마스의 사상적, 정치적 역정, 독일 좌우파와 평화주의자들에 대한 하버마스의 입장을 해설하고 있다. 하버마스의 글에 함축된 두터운 맥락을 이해하고 싶은 분들에게는 이 글이 도움이 될 것이다.

시대 전환(Zeitenwende) 이후: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와 독일의 새로운 정체성 위기

92세의 철학자는 독일인들에게 러시아에 대한 분노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찬양이 독일이 어렵게 얻은 대화와 평화에 대한 초점을 대체하는 것을 용납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미지: Barbara Gibson

블라디미르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세계 정치를 뒤흔들었고 그 어느 곳보다도 독일에서 더 그랬다. 2월 27일 독일 연방 하원의 긴급회의에서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역사의 전환점인 시대 짜이텐벤데(Zeitenwende, '시대 전환' - 역자 주)을 선언했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은 유럽과 독일이 새로운 시대에 진입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역사는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숄츠는 독일의 국방비를 인상하겠다고 약속했고, 3월에 미국의 터무니없이 비싼 F-35 전투기를 대량으로 주문했다. 이후 러시아에 대한 제재가 강화됐고 독일은 우크라이나에 중무기를 전달하기로 합의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베를린은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에 대한 전면적인 보이콧에 주저하고 있으며, 미국은 물론이고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군사적으로도 베를린이 키예프에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항상 거기에는 지연, 꺼림 및 두려움에 대한 의심이 있다. 독일과 다른 곳에서 이것은 정치적 정체성의 위기에 다름 아닌 것으로 읽혔다. 서구 어느 곳보다 독일 지식인 전체와 모든 TV 토크쇼와 신문이 동원되어 독일의 성과에 대해 토론하고 비판해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Volodymyr Zelensky)가 3월 독일 연방하원의회 연설에서 러시아와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독일의 데탕트(détente)에 대한 공격과 베를린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의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 발언 이후 상황이 악화되었다. 92세의 독일 철학과 정치평론가 위르겐 하버마스가 이번만은 정부 편에 서서 링에 올랐기 때문에 사태가 정말로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러시아의 침략은 독일에게 이처럼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현재의 이 국가는 통일을 가능하게 한 냉전의 평화적 종식 덕분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1989-90년의 성공은 거의 20년 동안 소련과의 무역과 데탕트를 통해 철의 장막을 후퇴시키는 동방정책에 의해 준비되었다. 모스크바와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항상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억압적인 소비에트 정권과, 2000년대 이후로 블라디미르 푸틴과 악마와 계약을 맺는 것을 의미했다. 2008년 러시아의 그루지야 침공 이후, 2014년 크림반도 병합 이후, 2020년 알렉세이 나발니(Alexei Navalny) 음독 이후 베를린은 어깨를 움츠렸다가 계속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 대한 푸틴의 공격과 우크라이나의 현저한 저항으로 인해 그러한 접근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질문은 특히 폭발적인데 왜냐하면 1960년대 후반에 동방정책(Ostpolitik)을 출범시킨 것은 총리 숄츠(Scholz)의 당인 사회민주당(SPD)으로 당시에 이것은 카리스마 넘치는 빌리 브란트(Willy Brandt)에 주도되었다. 데탕트는 전 총리이자 러시아 국영 석유회사 로스네프트(Rosneft)의 완고한 이사회 의장인 게르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öder)가 전형처럼 보여준 것처럼 사민당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애착은 사회민주주의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독일 우파의 목소리는 차르, 소비에트, 현재 푸틴 등 러시아와 관계없이 오랫동안 러시아에 대한 편의적 타협(modus vivendi, 외교와 무력분쟁에서 비공식적인 잠정 협정 - 역자 주)을 선호해 왔다. 그들에게 비스마르크는 동서의 균형을 이루는 모델이다. 2013년, 극우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외교 정책 선언문은 철혈 수상(Iron Chancellor)으로부터 직접 영감을 받은 것으로 자신감 넘치는 외교 정책을 주장하지만, 이는 프리드리히 대제(Frederick the Great)로 거슬러 올라가 독일 역사에서 러시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소련의 후계 국가에 대한 러시아의 이익을 존중했던 외교정책이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좌파당(Die Linke)의 극좌에서 두드러지는 반미주의의 저류에 의해 강화된다. 그리고 최근 몇 달 동안 당혹스러울 정도로 명백해진 바와 같이 베를린의 많은 진영에서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끼어 있는 불행을 안고 있는 "작은" 동유럽 국가들, 특히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국가적 권리에 대한 일반적 무시가 존재한다. 한편, 지멘스와 같은 독일 산업체들은 러시아에서 수익성 있는 사업을 해온 150년을 회고하며 크림반도 합병과 같은 사소한 것에 의해 단절하기를 꺼려했던 관계를 회상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독일의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냉전이 끝난 후 이러한 요인이 전 세계적으로 작용했다. 석유는 독일이 의존하는 러시아 가스보다 훨씬 더 큰 사업이며,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러시아에 대규모 투자를 한 것은 영국, 미국, 프랑스 석유 메이저였다. 외교에서 프랑스의 드골주의 전통은 또한 워싱턴과 모스크바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한다. 이탈리아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동정심이 깊다. 그리고 런던그라드(Londongrad)*가 있다.

* 역자 주: 1990년 소련 붕괴 이후 좌우를 불문하고 영국 정부는 러시아를 환영했다. 1994년 존 메이저(John Major) 하에서 보수당은 100만 파운드(130만 달러)를 투자한 사람에게 거주권을 부여하는 "황금 비자" 제도를 도입했다. 토니 블레어(Tony Blair)의 노동당 정부는 이를 열성적으로 수행했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 런던의 좌파 시장을 지낸 켄 리빙스턴(Ken Livingstone)은 “러시아 기업들이 런던을 유럽의 자연스러운 기반으로 간주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리빙스턴의 후임자인 보리스 존슨은 전 KGB 요원이자 억만장자의 아들인 런던 무료 타블로이드지 이브닝 스탠더드 (Evening Standard)의 소유주 예브게니 레베데프 (Evgeny Lebedev)와 좋은 친구였다. 2003년 러시아 억만장자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첼시 축구 클럽을 인수하면서 러시안 머니는 대중들의 눈에 본격적으로 띄게 되었다. 러시아 올리가르히들은 영국의 보수당에 수백만 파운드를 기부했으며, 런던의 주요 갤러리 건물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들은 템즈강을 오가는 요트에 영국 승무원을 고용하고, 영국 변호사들을 고용하여 소송을 해결했다. 이러한 러시안 머니의 영향은 종종 레닌그라드를 본떠 런던그라드(Londongrad)로 풍자되었다.

또한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함께 동방정책이 독일에서 논쟁거리가 된 것은 지금뿐이라고 시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본이든 베를린이든 그것은 결코 단순한 헤게모니적이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 빌리 브란트의 진보적 사민당-자민당 연정의 외교 정책은 우익으로부터 맹공을 받았다. 그것은 항상 균형의 문제였다. 모스크바와 좋은 협력 관계를 원했지만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 브란트 후임의 사민당 총리), 헬무트 콜(Helmut Kohl, 슈미트를 후임의 기민련-기사연 총리),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총리는 모두 확고한 대서양주의자였다. 푸틴 "이해자"(Putin-versteher)로 공언하는 것은 독일에서 주류가 아니라 주변 의견의 표시다. 좌파당과 독일을 위한 대안 구 동독에서 확고한 지지를 받았을지 모르지만 어느 쪽도 국가 정부에 들어갈 가능성은 없다. 한 때 독일 민족주의를 위한 중립적 트로이 목마로 여겨졌던 녹색당은 인권 우선주의로 정의되는 외교 정책으로 전환한 지 오래다.

조잡한 고정관념은 독일 정치의 복잡성을 포착하지 못한다. 사실은 독일에 있어서 러시아와 균형을 잡는 문제는 현실이고, 독일 외교관계와 독일 민주주의는 논쟁적이며, 건강하게 그러하다. 위르겐 하버마스만큼 그 역사를 일관되게 구현한 사람은 없다.

반세기 전에 하버마스는 1929년에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설립된 사회 연구 연구소(Social Research)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프랑크푸르트 학파(Frankfurt School)로 알려진 비판 이론 브랜드의 상속자로 서독에서 나타났다. 1,2차 대전 사이의 마르크스주의로부터 하버마스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그의 비판이론을 노동이 아니라 의사소통에 재집중했다. 그의 평생 관심은 언어, 담론 및 숙고에 내재된 이성과 해방의 가능성에 있었다. 계몽주의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에 대한 이러한 헌신에 힘입어 그는 1980년대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와 같은 급진적 프랑스 사상가들과 거리를 둔다. 1990년대 후반 그는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폭격을 지지했다.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서구 권력의 옹호자라는 평판을 안겼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순응주의적인 인물이라고 추론하는 것은 그의 철학, 그의 정치, 그러나 무엇보다도 현대 독일에서 그의 공적 역할을 깊이 오해하는 것이다. 70년 동안 그는 연방 공화국의 공적 생활에서 논쟁적이었고 때로는 격론적인 세력이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그는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나치즘과의 연계와 냉전의 경건성에 도전했다. 1968년에 그는 급진적인 학생들을 중재했다. 1970년대에 그는 합법성 위기(legitimation crisis)의 복잡한 이론을 공식화했다. 1980년대에 그는 핵 재무장에 반대했고 홀로코스트의 특이성을 상대화하겠다고 위협한 역사학의 민족주의적이고 수정주의적인 전환을 비난했다. 1990년 민족통일의 순간에 그는 단순한 동독의 통일이 아닌 제헌의회(constitutional convention)를 요구했다. 1990년대 후반에 요슈카 피셔(Joschka Fischer, 전 녹색당 대표이자 외무부 장관 역임 - 역자 주)와 함께 녹색당이 보호 책임이라는 명목으로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개입을 승인해야 한다는 그의 옹호는 논쟁의 여지가 있고 따라가기 어려운 노선이었다. 2003년 하버마스는 이라크 전쟁에 맞서 데리다와 공동 전선을 조직했다. 2010년과 2015년 사이에 그는 강력한 헌법 재판소의 권위 아래 독일 정치의 사법화를 오랫동안 비판한 후 유로존 정책의 기술 관료주의적 경향을 비난했다.

이것은 순응주의자의 기록이 아니다. 2022년에 하버마스는 다시 한번 우크라이나의 저항에 대한 열정의 망토 아래 우익의 부활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4월 28일 자 쥐트도이췌 짜이퉁(Süddeutsche Zeitung, '남독 신문'으로 번역되며 중도좌파적 성향의 독일 정론 일간지 - 역자 주)에 기고한 그의 길고 사려 깊은 기사는 다시 한번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종종 그래 왔듯이 보수적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짜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중도 우파 혹은 우파 성향의 독일 정론지 - 역자 주)은 이 분노에 지면의 플랫폼을 제공했다. 이번에 하버마스는 두드려 맞고 불신당한 서독 정치의 전통을 옹호하고, 푸틴을 묵인하고, 핵전쟁에 대한 오래된 비방을 고수하면서 젊은 세대의 독일인들 사이에서 우크라이나인과 그들의 지지자를 후견 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하버마스의 에세이가 패배주의적 입장으로 묘사될 수 있는 잘못된 공개서한*과 함께 묶인 것은 그의 대의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급진적인 이론가이자 멀티미디어 활동가인 알렉산더 클루게(Alexander Kluge, 독일의 진보적 작가이자 영화감독으로 60~70년대 독일 뉴 시네마 운동의 주도했던 그는 위 서한의 서명자 중 한 명이다 - 역자 주)는 라디오 인터뷰어에게 1945년 항복에서 얻은 교훈은 항복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겨우 말했다. 그는 고향이 항복했던 것이 미국이었다는 사실의 언급을 소홀히 했다. 독일 페미니즘의 거장 알리체 슈바르처 (Alice Schwarzer, 위 서한 서명자 중 한 명이며 그 서한이 실린 'Emma'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 역자 주)는 젤렌스키가 도발자라고 주장해왔다. 그들이 서명한 공개서한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적절한 정책에 대해 독일에 강의할 수 있는 권리에 의문을 제기했을 뿐만 아니라 젤렌스키에게 조차 독일의 이 서명자들이 상상하기를 즉각적인 휴전과 협상을 선호할 수 있는 그 자신의 국민을 대변할 수 있는 권리에 의문을 제기했다.

** 역자 주: 이것은 잡지 '엠마'(Emma)에 5월 3일 자로 게재된 '총리 올라프 숄츠에 대한 공개서한'(Open Letter to Chancellor Olaf Scholz)을 의미한다. 28명의 작가와 예술가가 서명한 이 서한은 3차 대전의 위험을 경고하며 숄츠에게 중무장 화기를 우크라이나에 공급하지 않기로 한 숄츠의 초기 입장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 서한의 서명자로 하버마스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비판자들은 이 서한과 하버마스를 한 묶음으로 비판해왔다.

하버마스는 이 편지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는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기본적 자유가 위태로운 시점에서 폭력에 대한 반대는 한계가 있다. 하버마스는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전달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인정한다. 그가 반대하는 것은 더 많은 것을 해야 한다는 요구가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지는 방식이다. 그를 걱정시키는 것은 "도덕적으로 분개한 고발자들이 사려 깊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연방 정부에 대해 반대하는 자신감"이다.

그 자신감은 본심을 드러낸다. 올바른 사고를 하는 모든 사람은 푸틴의 공격이 성공하도록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데 분명히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러시아와의 전쟁은 생각할 수 없다는 데 동의해야 한다. 러시아는 핵보유국이며 충돌고조는 무서운 위험이다. 하버마스는 선의의 정치적 개입은 이 딜레마에 정면으로 직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버마스는 서구에 대해 "전쟁 당사자로서 이 분쟁에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우크라이나의 재무장에 대한 무제한적인 참여를 막는 위험 임계치(Risikoschwelle)가 있다... 이 임계치에 관계없이 공격적이고 자신감 있는 태도로 총리를 이 방향으로 점점 더 밀어붙이려는 사람은 누구나 이 전쟁으로 인해 서구가 처한 딜레마를 간과하거나 오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서구는 도덕적으로 근거가 있는 결정을 통해 스스로 손을 묶었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이러한 딜레마에 비추어 볼 때, 우크라이나 대변인과 우익 매파뿐만 아니라 녹색당 대열에 있던 많은 전 평화주의자들을 포함하는 숄츠 비평가들의 조바심은 결백하지 않다. 하버마스는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독일 정책의 광범위한 대화 지지, 평화 유지 초점"이며, 이는 결코 당연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우려한다. 그것은 어렵게 얻었고 하버마스가 지적했듯이 "반복적으로 우파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러시아의 핵 위협을 고려하는 것이 협박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오류는 이것을 지적함으로써 그들이 논쟁을 어떻게든 끝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사실 그들이 한 일은 문제를 다시 설명하는 것뿐이다. 하버마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공포의 정치"에 반대하는 사람은 이미 올라프 숄츠(Olaf Scholz) 총리가 정당하게 주장하는 정치적으로 책임 있고 사실에 입각한 종합적인 고려의 논증 범위 내에서 움직이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논증 방식은 하버마스의 전형이다. 날카로운 정치적 비판과 동시에 그는 합리적 합의의 전제조건을 드러내고자 한다. 또 다른 특징적인 움직임으로 그는 또한 현재 혼란에 대한 사회 정치적 기반에 대한 분석을 제공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독일 논쟁이 격렬해진 궁극적인 이유는 숄츠의 용어처럼 결정적인 역사적 전환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성의 충돌을 촉발한 전쟁에 있다. 하버마스가 말했듯이 그것은 "동시적이지만 역사적으로 동시적이지 않은 정서" 사이의 충돌이다.

그 긴장의 일부는 독일 자체 내에서 발생한다. 비평가들이 주장하고 하버마스가 쉽게 인정하듯이, 그와 그의 세대는 원자력 시대의 정치와 그 여파에 의해 지울 수 없이 형성되었다. 이것은 통상적 의미에서 군사 역사의 종말을 지시한다.

그들의 자녀와 손자들은 국제법의 힘을 더욱 확신하는 문화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하버마스의 독해에 따르면 푸틴을 헤이그에 끌어들일 것을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 규범적 책무이다. 부조화하게도, 러시아와 미국 모두 국제 법원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푸틴을 전범으로 재판에 회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선전포고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키도록 강요된 사람은 바로 하버마스이다. 전 평화주의자들이 지금 우크라이나 방어를 정당한 전쟁 십자군으로 만드는 것은 하버마스가 말했듯이 현실주의로의 전환이 아니라 현실주의를 거꾸로 세운 것이다. 공통분모는 가혹한 현실에 직면하여 규범적 표준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이다.

그런 다음 푸틴 자신의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 있다. 그는 어떤 시대에 속하는가? 그는 러시아의 심층 역사의 피조물인가? 아니면 하버마스가 선호하는 것처럼 소련의 힘의 붕괴에서 태어난 분개하는 벼락출세가인가? 그는 끝까지 갈 의향이 있는 진정한 핵 위협인가? 아니면 허세 부리는 것인가? 우리의 혼란의 일부는 정확히 우리가 그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일지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기의 큰 충격이 있는데, 바로 우크라이나와 그 놀라운 저항이다. 하버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감탄은 승리의 확실성과 군사적으로 훨씬 더 우세한 적에 맞서 조국을 방어하기로 굳게 결심한 병사들과 신병들의 변함없는 용기에 대한 어느 정도의 놀라움과 뒤섞여 있다."

하버마스에게 이것은 역시 동시대적이지 않은 것의 동시대성의 표현이다. 우크라이나는 국민국가를 만드는 단계이고 독일은 그것을 이미 넘어섰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열광과 연대의 자발적인 반응을 확인하면서 독일과 서방의 나머지 사람들은 이러한 격차와 그것이 함의를 고려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영웅주의에 전율을 느끼는데 이는 우리 자신의 정치의 수축된 상태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우리의 포스트 영웅적 문화는 단순히 혐오감으로 버려질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계속 살고 있는 나토 우산의 논리적 역사적 효과이다. 반면 우크라이나의 절박한 용기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하버마스는 이렇게 묻는다. "스스로 무기를 들지 않고 러시아의 살인적인 전쟁에 대해 우크라이나의 승리에 베팅하는 것은 경건한 자기기만이 아닌가? 호전적인 수사학은 그것이 전달되는 청중석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기성 민족 국가와 장래 민족 국가 사이의 이러한 거리는 양측 모두에게 함의를 가진다. 우리가 안전한 관중석에서 더 많은 피를 응원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도 외교 전술을 고려해야 한다.

하버마스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와 우크라이나의 정보전사들이 능란한 언론을 통해 우리를 조종하고 도덕적 공갈을 하고 있다고 암시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데 물론 그들은 그렇다. 그것에는 어떤 부끄러울 것도 없다. 키이우는 다른 전선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은 결의와 기술로 정보 전쟁에 맞서고 있다. 그것은 정확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하버마스의 요점은 더 미묘하다.

우크라이나는 독일인들의 죄책감을 그들 자신의 수동성으로 이용한다. 그러나 독일 자신의 입장은 역사에 의해 보증된다. 하버마스가 말했듯이, "동맹국들은 여전히 민족국가가 되는 데 관련되어 있거나 그러한 종류의 형성 과정을 통과했다는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서로 다른 정치적 정서에 대해 서로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우크라이나와 독일은 이러한 발전적 격차를 넘어 상호 작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재치, 통찰력, 그리고 외교력을 필요로 할 것이다. 하버마스가 말했듯이, "… 그러한 차이는 사실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협력 속에서 현명하게 해소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을 정의하는 차이가 배경에 남아 있는 한, 그것들은 감정적인 혼란만을 초래할 뿐이다."

이것은 젤렌스키가 독일 연방의회에서 연설한 충격적인 연설에 대한 반응에서 볼 수 있다. 그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의 관심을 무가치한 립 서비스로 일축했다. 정부와 연방의회가 연설에 대해 논의할 시간을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에 따르면 대중들은 "찬성의 생생한 암시", 젤렌스키 입장과의 자발적인 동일시, 그리고 동시에 자존심의 방어적인 주장의 혼합으로 반응했다.

젤렌스키의 입장은 직설적인 공격이었는데 이는 "전쟁에 대한 인식과 해석의 역사적으로 기초한 차이의 무시와 함께 단순히 서로를 다루는 데 있어 중대한 실수들로 이어질 뿐만 아니다. 더 나쁜 것은, 그들은 상대방이 실제로 생각하고 원하는 것에 대한 상호적인 오해로 이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동료 독일인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은 우크라이나를 거쳐 미래로 돌아가는 길이 있다는 신기루이다. 탈영웅적 태도는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종식 이후의 유럽 역사에 대한 역사적으로 적절한 대응이다. 핵 교착 상태가 계속되는 현실 속에서 우크라이나와 정서적, 문화적 격차를 좁히려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위험하다. 우리가 집단적으로 직면해야 하는 과제는 거리를 인식하면서 진정한 지원을 제공하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하버마스가 우리에게 국제무대에서 그리고 핵 위협의 그늘 아래서 알리십(allyship, 약자 및 소왼 이들과의 동맹 - 역자 주)의 정치를 알아내도록 촉구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전쟁으로 인해 야기된 딜레마에서 건설적인 방법을 찾아야 하며, 그것은 하버마스가 그의 마지막 줄에서 말했듯이, "우크라이나는 이 전쟁에서 '지지 말아야' 한다"는 하나의 기본적인 열망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그것의 국가 건설 프로젝트는 계속되어야 한다.

유럽 그 자신의 경우는 과제가 다르다. 우크라이나와의 대비가 드러내야 할 것은 제대로 된 영웅적 국가 정체성의 부족이라기보다는 EU 차원에서의 탈국가적(post-national) 능력의 결여이다. 하버마스가 말했듯이, 역사적 전환을 선언한 사람들이 유럽이 “외부로부터 불안정화되거나 내부로부터 공동화되지 않는 삶의 사회적 정치적 방식"을 보장하기를 원한다면 군사적으로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고 오랫동안 주장해 온 사람들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크라이나의 영웅주의에 대한 답은 아니지만 최소한 유럽이 미국과 러시아 양쪽에서 독립적으로 정책을 결정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이다. 바로 지금, 미국 정치인들은 러시아와의 싸움에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기 위해 수백억 달러를 제공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그들이 의료나 기후 변화 정책에 동의하지 않고 그것에 동의할 수 있다는 것은 미국 자체의 기능 장애의 신호이다. 그러나 미국 정치가 가까운 미래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불확실하다. 곧 유럽은 동유럽이 아니라 대서양 건너에서 역사적 시간적, 정치적 시간의 혼란스러운 충돌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버마스가 상기시키듯 마크롱의 재선은 또 다른 기회의 창을 연다. 유럽이 그것을 잡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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