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기의 보급과 문해율 혁명 그리고 격변의 유럽
책의 보급사는 역사의 굴곡과 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세부사 이다. 책의 보급은 구전에서 필사로의 정보와 기록의 전환, 기본적인 문해율, 필경과 필사에서 인쇄의 기술변화, 소비 수요와 구매력의 존재를 전제한다. 이 전제는 정치적으로 제한된 특권의 타파, 왕실 이외 공공영역의 성장, 중산층의 성장, 인쇄기술의 발달, 정보의 가치와 역할에 대한 재평가 등이 함께 수반될 때 충족될 수 있다.
책의 보급에서 중요한 물리적 사건은 1440년경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이다. 인쇄기의 도움은 필사본에서 인쇄된 책으로의 시대적 전환을 가져왔으며, 그와 함께 책의 생산은 더욱 효율적으로 되었고, 가격은 낮아졌다. 당시 필사본 한 권의 값은 매우 비쌌다. 가령 1383년 영국 웨스트민스터 주교는 기도서 한 권의 필사 값으로 필경사에게 4파운드를 지불했는데, 이는 당시 숙련공의 208일에 해당하는 임금이었다. 물론 이 돈은 당시 비싼 종잇값, 그림과 장식, 제본 비용을 제외한 순수 필사를 위한 대가였다. 인쇄기가 도입된 후 10년 후 책값은 80%가량 하락했다. 책의 가격이 저렴해지면서 책의 소비는 자연스럽게 증가했고 이는 거대한 변화를 야기했다.
인쇄기는 중세의 정보혁명 그 자체였다. 오늘날 언론이 인쇄기를 의미하는 press로 번역되고, 베네딕트 앤더슨이 프린트 캐피탈리즘(print capitalism)을 통한 정보의 공유가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로서 민족주의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인쇄기와 그 인쇄물에 실물 이상의 엄청난 역사적 함의가 있음을 깨닫는다.
인쇄기와 인쇄물에 내재한 함의와 그를 둘러싼 맥락을 더 잘 살펴보기 위해서는 책 생산 증대의 주요 동인은 문해율 혁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책과 인쇄기의 보급 그리고 문해율의 증가는 그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당시의 역사적 맥락과 함께 읽어야 그 상관관계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위의 문해율에서 변화 차트에서 15세기 중후반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의 문해율이 가장 높음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발달과 상인과 도시민의 성장, 15세기에 본격화된 르네상스와 고전으로의 복귀, 그리고 당대 최고의 국제적 상업 국가였던 네덜란드의 상황과 비교적 높은 문해율은 무관하지 않다. 더욱이 15세기 중반 비잔틴 제국의 멸망은 희랍어를 아는 많은 학자와 희랍어 문헌들이 서유럽으로 이동하면서 그리스 고전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는 또한 소위 '지리상의 발견'과 '대항해' 시대로 식민지 개척이 본격화되고, 식민지 물품이 유입되고, 식민지로의 수출이 증가하면서 귀족 외의 신흥계급들이 성장하는 시기이다. 즉 외연의 확장과 기존 체제의 내파가 동시에 병진하는 시기였다.
16세기 초 종교개혁을 촉발한 마르틴 루터의 95개 논제는 1518년~1520년 동안 무려 30만 부가 인쇄되었는데, 이는 인쇄기의 도입과 문해율의 빠른 증가세를 보여준다. 희랍어나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 버전의 성경이 루터에 의해 1522년 처음 발간되고, 약 한 세기 뒤인 1611년 영어로 된 킹 제임스 성경이 발간되었다. 이는 성경에 대한 각국의 수요와 문자 층의 증가를 동시에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당대에 글을 읽을 줄 아는 층들은 종교인과 학자들이 대표적이었으며, 상인들 역시 중요한 문자 층이었다. 특히 필경사와 부기를 기록하는 상인들은 종종 중첩되었으며, 후에 회계와 필경을 겸임했던 이들이 신흥부르주아와 젠트리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18세기 중반 최고의 전성기에 오른 네덜란드와 영국의 문해율이 높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신흥 계층의 성장은 17세기 초반에 시작하여 18세기 중후반에 정점에 오른 계몽주의는 문해력의 향상과 책의 보급에 중요한 사건이었다.
상업과 종교의 변화와 더불어 주목해야 할 것은 신문의 보급이다. 이미 16세기 이탈리아에서는 신문 1부 값에 해당하는 동전의 이름에서 따온 가제트라는 신문이 발간되었으며, 17세기 영국 등 서유럽에서 신문은 기존의 서신을 넘어 본격적인 부르주아의 정보와 발언의 장으로 성장한다. 신문의 보급은 문해력의 대중적 확대를 보여주는 것이며, 이는 동시에 책이 특정 계층의 기록물에서 점차 대중의 관심물로 이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500~1800년 필사본 및 인쇄 서적 생산의 확대
부링과 잔든(Buringh and Zanden)은 6세기 부터 16세기, 즉 중세와 초기 근대 서유럽의 필사본(manuscript)과 책의 생산 증가를 도시화, 수도원과 대학의 증가 등을 통해 추정했다. 부링과 잔든의 분석 단위는 필사본은 개별 필사본의 수, 인쇄된 책은 (신규) '서적'(title) 또는 '판'파이다. 저자들의 추정치가 보수적이고 "수치가 낮은 추정치로 해석되어야 한다"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적은 책(정의상 49페이지 이상) 또는 팸플릿(50페이지 미만)이다. 부링과 잔든에 따르면 서적은 '인쇄된 출판물로 한 권으로 발행되든 아니며 여러 권으로 발행되든 별개의 전체를 형성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특정 국가에서 출판된 동일한 서적의 다른 언어 버전은 개별 서적으로 간주하여야 한다. 여기에는 초판과 개정판이 포함된다. 그들의 예에 따르면 구텐베르크의 성경의 첫 인쇄는 하나의 서적이고, 새로운 성경 판은 다시 셈해지지만, 정확히 동일한 원고의 재인쇄는 새로운 서적으로 포함되지 않는다.
부링과 잔든은 데이터의 국가별 집계가 일국 내의 불평등을 흐릴 수 있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북부나 프랑스 북부(파리 포함) 지역은 1인당 책 생산량이 그 국가의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높다.
6세기경 유럽 전역의 필사본 생산은 13,352권에 불과했다. 12세기 서유럽 필사본 생산은 56배가량 증가한 768,721권으로 증가했다. 15세기 필사본은 그보다 6.5배 증가한 약 500만 권으로 늘어났다. 특히 15세기 들어 도시국가의 발전과 르네상스가 꽃피던 이탈리아의 필사본 생산은 12세기보다 약 15배 증가한 142만으로 당시 유럽 최 강대국 프랑스의 119만 권보다 많다.

1300년에 걸친 서유럽의 도서 부문의 성장은 어마어마하다. 책 생산 증가를 위한 가장 결정적인 발전은 15세기 중엽 인쇄기의 도입이었다. 예를 들어, 1550년 한 해에만 서유럽에서 약 300만 권의 책이 생산되었는데, 이는 14세기 전체 원고 수보다 많은 양이다. 잉글랜드의 경우 1473년 처음으로 인쇄소가 등장해 18권의 서적(title)을 출판했다. 1695년 잉글랜드의 인쇄소는 70개로 늘어났고, 출판 서적도 2,092권으로 증가했다.
아래의 국가별 인쇄 서적 출판량을 보면 시기별 각각의 국가의 지역 내에서의 힘의 크기와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16세기 이후 프랑스의 지속적인 영향력 유지,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부상, 17세기 상업의 발전에 따른 영국과 네덜란드의 부상, 15세기 종교개혁 및 18세기 프로이센의 등장에 따른 독일의 성장이 책의 출판량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난다.

아래의 1인당 연간 책 소비량은 그 시대의 특징을 보다 정교하게 읽어낼 수 있다. 16세기 스위스의 1인당 책 소비는 전반기 48.1권, 후반기에는 78.5권으로 유럽 최고를 기록했다. 이는 스위스의 대도시 바젤과 제네바가 종교개혁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17세기 이후 네덜란드의 최고 책 소비량은 그 상업적 발전과 관련이 있다. 18세기 중반 이후 프랑스의 책 소비량 증가는 정점에 이른 계몽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판(edition)당 인쇄된 책
디트마르(Dittmar, Jeremiah)의 연구는 실제로 출판된 책의 양이 훨씬 더 매우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아래 차트는 책의 실가 보여주듯 실제 책 수의 증가는 훨씬 더 크다. 판당 인쇄된 책 수는 1450년~1600년 사이 크게 증가했다. 인쇄기가 처음 보급되기 시작한 15세기 중엽 판당 인쇄 부수는 200~600부였다. 16세기 말 판당 인쇄 부수는 600~900부가 일반적이었고, 17세기 동안에는 1,000부로 늘어났다.

인구 1백만 명당 신간 도서, 1500년~ 2009년
인구 1백만 명당 출판된 신간 도서(title) 수의 추이 변화는 책의 보급이 얼마나 빠르게 진행되었는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1500년 스위스와 이탈리아는 1백만 명당 각각 81권과 65권이 출판되었다. 당시만 해도 1백만 명당 100권이 넘는 도서를 출판하는 국가는 없었다. 프랑스 혁명이 휩쓸고 간 1800년 네덜란드는 1백만 명당 502권, 스웨덴은 326권, 미국은 314권, 영국과 독일, 프랑스는 각각 298권, 153권, 106권이 출판되었다.

책 가격 : 책 제작 생산성
책의 수요 증가는 책 가격의 대폭적인 하락에 의해 주도되었다. 1440년경 인쇄기가 보급된 이후 책 생산의 효율성이 높아져서 가격이 낮아졌다.
클라크(Clark, Gregory)는 건축 장인의 임금과 책 가격 간의 비율로 후속 생산성 향상을 측정하고 인쇄기 보급 후 첫 200년 동안 생산성이 20배 증가한 것을 발견했다. 생산성은 건축 장인의 임금과 표준 특성 장부의 가격 사이의 비율로 측정된다. 클라크는 "수작업과 인쇄기 양쪽 모두 책 제작에 드는 주된 비용은 인건비(종이 및 양피지 제작비는 주로 인건비였다)"라고 지적했다.

클라크에 따르면 인쇄기 이전의 필사자들 하루에 3,000단어의 일반 텍스트를 복사할 수 있었다. 이는 성경 한 권의 제작이 136일간의 작업이 소요됐음을 암시한다. 아이젠슈타인은 1483년 플라톤의 저작 번역본 복사를 위해 필경사에게 지불한 가격과 피렌체에 있는 리폴리 인쇄소에서 같은 작품을 복제한 가격을 비교할 수 있다. 리폴리 인쇄소는 3 플로린(florin, 1 플로린은 2실링)에 1,025부를 생산했지만, 필경사는 1 플로린으로 1부를 생산했다. 이는 인쇄기가 도입되면서 책 한 권당 비용이 341배 감소했음을 의미한다.
아래 네덜란드 도서 가격 그래프에서도 드러나듯이 인쇄기의 도입으로 1460년대 도서 가격은 필사본보다 50~80% 쌌으며, 한 세대 만에 90%까지 도서 가격이 하락했다.

아래 그래프를 보면 인쇄기의 보급과 책의 보급 관계는 마치 컴퓨터 기술의 발달과 가격 하락의 그래프와 유사하다. 인쇄기 보급의 확대는 책 가격은 떨어뜨리고 보급은 상승시켰다.

책 소비자 구조의 변화
아래 도표를 보면 11세기~19세기 사이 유럽에서 책 소비자층의 급격한 변화를 볼 수 있다. 서기 1000년 이전까지 책의 주요 수요자는 오롯이 성직자뿐이었다. 11세기 들어 교구들이 두꺼운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책의 또 다른 수요층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13세기 이후 도시국가들이 성장하면서 책은 성직자와 교구보다는 도시 엘리트들에 의해 더 적극적으로 소비되었다. 14세기~15세기에 접어들면서 책의 60%~80%는 도시민의 수요에 의해 생산되었으며, '책 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소비자 구조의 변화, 특히 도시 엘리트와 도시민이 책의 주요 소비자로 등장하면서 소비량 자체도 증가했다. 상업과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성장한 신흥계층들의 상업활동 기록과 장부 정리 그리고 시간적, 물질적 여유의 증가는 책 소비 증가와 직결되었다. 아래 도표는 유럽 주요 국가들의 15세기 중엽~18세기 말까지의 1인당 연간 도서 소비량 변화를 보여준다. 상업이 가장 왕성하게 발전했던 네덜란드의 도서 소비는 15세기 중엽~말까지 7.9권에 불과했지만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488권으로 증가했다. 특히 신문보급과 문해율의 증가가 두드러지기 시작한 17세기 이후 1인당 연간 도서 소비는 유럽 주요 국가들에서 눈에 띄게 증가했다.

장르의 다양성 증가
책 수요자 구조가 변하고, 도서 판매가 증가한 것은 책이 더이상 종교적인 문제만을 다루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신학은 더이상 학문의 왕으로서 책의 모든 장르를 지배하는 권좌를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책 인쇄기의 보급 이후 도서 시장의 또 다른 근본적인 변화는 독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인쇄된 책 다양성의 매우 강한 증가였다. 디트마는 1400년대 후반에서 1700년대 사이에 영어책 샘플에서 책의 주제를 식별하기 위해 기계 학습의 기법을 사용하여 주제 내용을 측정했다. 가령 하나의 책에 어떤 주제(topic), 예컨대 신,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주제가 어느 정도 등장하느냐를 측정한다. 따라서 샘플에서 지정된 수의 주제를 식별하고 시간에 따른 다양성의 변화를 추적할 수 있다. 그는 어느 산업의 시장에서 특정 사업자가 가진 집중도를 파악하여 시장의 경쟁상태를 나타내는 허핀달(Herfindahl)의 주제 집중 지수를 계산하여 증가한 소비자의 선택을 묘사한다. 허핀달지수는 숫자가 1에 가까울수록 시장의 독점 혹은 과점 상태를 의미하며, 0에 가까울수록 경쟁상태의 활성화를 의미한다. 시장이 2개 사업체에 의해 과점 되면 허핀달 지수는 0.5가 되며, 100개 사업체가 시장에서 경쟁하면 허핀달지수는 0.01이 된다. 이는 그림의 패널 A에 나타나 있다. 인쇄기가 보급되기 시작하던 15세기 중반 시장의 과점이 최고 0.6에서 18세기로 가면서 점차 0으로 수렴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패널 B는 1500년 이후에 효과적인 소비자 선택의 수가 어떻게 급격히 증가했는지를 보여준다. 거의 모든 책이 1400년대 후반에 종교적인 주제에 관한 것이었으며, 그 이후 책 증가하는 다양성은 신학 교과서의 지배적인 역할의 종말을 의미한다. 패널 A와 B는 16세기 들어 책 시장의 집중도는 낮아지고, 책의 다양성이 증가하며 본격적인 책 시장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아래의 파이 차트 1700년 런던 도서 시장의 다양한 도서 주제에 대한 개요를 제공한다. 신학은 여전히 책 시장의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지만 다른 장르 책들의 약진을 볼 수 있다.

아래 차트는 17세기~18세기 동안 영국에서 "소설"로 분류된 도서명의 출판 통계다. 비평가 이안 와트(Ian Watt)가 '소설의 부상(The Rise of the Novel)에서 언급했듯이 18세기는 소설의 시대다. 다니엘 데포의 <로빈슨 크루소>나 새뮤얼 리처드슨의 <파멜라>와 같은 베스트셀러들이 이 시대에 쏟아져 나왔다. 성직자들의 도서보다 도시민의 도서인 소설이 출판시장을 본격적으로 장악하는 이 세기가 혁명의 세기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부록: 한국 도서출판의 변화
한국의 1백만 명당 출간된 신간 도서 수는 1955년 61권에서 1979년 130권으로 본격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1987년 민주화와 함께 신간 도서 출판은 1백만 명당 1,064권으로 최정점에 달했고, 1990년대 들어 조금씩 줄어들어 670권으로 감소했다.

* 이 글은 Max Roser가 Our World in Data에 게재한 'Books' 기사의 번역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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