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현상학, 실존주의, 포스트 구조주의 등 20세기와 21세기의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 복잡한 개념의 클러스터와 난해함으로 '존재와 시간'은 일반 독자들이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난공불락의 요새이기도 하다. 특히 하이데거의 고전과 그 어휘에 대한 풍부한 이해, 그리고 다의성과 단어의 자유로운 조어가 용이한 것으로 '악명'높은 독일어를 이용한 그의 저작은 독자들에게 통일되고 일관된 이해를 요구하지만 쉬운 이해를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 아울러 하이데거의 나치에 대한 협력은 독자들로하여금 그는 물론 그의 저작에까지 거리를 두게 한다. 하이데거의 찬양자 중의 한 명이자 '호모사케르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은 하이데거가 반유대주의자가 아니었다면서 그를 옹호하려 애쓰지만 하이데거의 반유대주의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과 통찰력은 현대 철학을 이해하는데서 매우 중요하다. 영어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당대 철학자 중의 한 명이자 하이데거와 프랑스 현대철학에 조예가 깊은 뉴욕 사회연구 뉴 스쿨의 철학자 Simon Critchley는 이러한 독자들을 위해 '존재와 시간'에 대해 2009년 8차례에 걸쳐 블로그와 가디언에 글을 연재했다. 그 글들은 '존재와 시간 1부: 하이데거가 중요한 이유, '존재와 시간', 2부: 각자성에 대하여, '존재와 시간', 3부: 세계-내-존재, '존재와 시간', 4부: 이 세상에 던져지다, '존재와 시간' 5부: 불안, '존재와 시간', 6부: 죽음, '존재와 시간', 7부: 양심, '존재와 시간', 제8부: 시간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글들은 '존재와 시간'에 등장하는 주요 개념들을 중심으로 '존재와 시간'에 대해 해설하고 있으며, 각각의 글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전체를 읽은 독자들은 '존재와 시간'에 대해 개략적인 밑그림을 그릴 수 있으며, '존재와 시간'을 정독할 유혹을 느낄 수도 있다. 앞으로 이 글들을 매일 2부씩 총 4회에 걸쳐 번역, 연재할 예정이다. 이 글은 Guardian에 게재된 Simon Critchley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대한 8부의 글 중 3부와 4부 Being and Time, part 3: Being-in-the-world와 Being and Time, part 4: Thrown into this world의 번역이다.
'존재와 시간' 3부: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
하이데거가 어떻게 데카르트를 뒤집었는가, 그래서 우리는 존재하고, 단지 그렇기에 오직 생각한다.
Simon Critchley
나는 내 첫 블로그 엔트리에서 하이데거가 우리의 표준적이고 전통적인 철학적 어휘를 파괴하고 그것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려는 시도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이데거가 특히 파괴하고자 하는 것은 현대 철학에 널리 퍼져 있고 그 근원이 데카르트(실제로 데카르트는 '존재와 시간'에서 가장 많은 비난을 받고 있는 철학자이다)인 인간과 세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특정한 그림이다. 대충 그리고 쉽게, 이것은 세상에는 두 종류의 물질이 있다는 생각이다. 즉 우리처럼 사고하는 것(thinking things)과 테이블, 의자, 그리고 실제로 공간과 시간의 전체 구조와 같은 확장된 것(extended things)이다.
사고하는 것과 확장된 것 사이의 관계는 지식의 관계이며, 철학적이고 실제로 과학적인 과제는 더 나중의 전통에 의해 "주체"라고 불리는 것이 사물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인간과 세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인식론적 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데, 여기서 인식론은 "지식의 이론"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지식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우선성을 부정할 뿐이다. 인간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이원론적인 그림 이전에 그는 "현존재는 세계-내-존재이다"(Dasein is being-in-the-world, 세계-내-존재는 독어로 in-der-Welt-sein이다 - 역자 주)라는 공식에서 포착하고자 하는 더 깊은 통일성이 있다. 그게 무슨 뜻일까?
만약 인간 존재가 정말로 세계-내-존재라면, 이것은 세계 자체가 인간이 된다라는 것이 의미하는 근본적인 구성의 일부라는 것이다. 즉, 나는 나와 반대편에 서 있는 사물의 세계에 직면하여 자유롭게 떠다니는 자신이나 자아가 아니다. 오히려 하이데거에게 나는 나의 세계이다. 세계는 내 존재의 일부분이고, 내 존재의 구조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존재를 객체의 세계와 구별되는 주체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세계의 존재가 대부분 구분되지 않는 열린 경험으로 생각함으로써 하이데거 사상의 의미를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의 세계에 완전히 매료되고 몰입되어 있으며, 어떤 종류의 '마음'이나 하이데거가 '의식의 캐비넷'(the cabinet of consciousness)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서 그것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지 않다.
'존재와 시간'에서의 세계에 대한 그의 논의에서 하이데거의 주요 주장은 세계가 자신을 가장 가깝고 대부분 편리하거나 유용한 세계,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일상 경험의 세계로 자신을 알린다는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테이블과의 근접한 만남은 기하학적으로 정렬된 시공간 연속체에 존재하는 특정 정의 가능한 물질(말하자면 나무와 철)로 만들어진 물체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내가 쓸 때 사용하는 테이블일 뿐이고 내 서류, 노트북, 커피잔을 정리하는 데 유용하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경험을 가리는 "해석적 경향을 제쳐두고" 세계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에 훨씬 더 가까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는 전체적으로 함께 의존하며 나에게 의미 있는 편리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훨씬 더 기본적인 용어로, 세상은 함께 관련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내 노트북은 내 책상 위에 있고, 안경은 내 코 위에 있고, 책상은 바닥에 있다. 그리고 나는 정원의 창문을 바라보며 이 도시의 삶을 구성하는 교통의 조용한 웅웅 거림과 경찰 사이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환경"(environment, 독일어로 Umwelt)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여기서 그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고 인간이 대부분 완전히 몰입되어 있는 세계를 설명하려고 한다.
하이데거는 세계의 이 살아있는 경험이 과학적 탐구에 의해 또는 실제로 마음과 현실 사이의 이원론적 구별을 전제로 하는 표준적인 정신 철학을 통해 간과된다고 주장한다. 필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세계 경험의 현상학이며, 우리의 경험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관용구로 번역하자면, 우리는 하이데거가 이론과 실제 사이의 일반적인 구분을 뒤집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에 대한 나의 일차적인 만남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치를 잃은 세계를 응시하는 일부 관전자의 경험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먼저 세상을 유용하고 편리하며 인간의 의미와 가치로 가득 찬 사물의 세계로 실질적으로 파악한다. 데카르트와 같은 사상가에게서 발견되는 사물에 대한 이론적 또는 과학적 비전은 사물에 매혹되고 관심을 갖는 실천적 통찰을 기반으로 한다.
하이데거는 세상에 접근하는 두 가지 방법, 즉 바로 앞에 있음(present-at-hand, 독일어로 Vorhandenheit)와 바로 쓸 수 있음(ready-to-hand, 독일어로 Zuhandenheit)의 구별을 도입한다. 바로 앞에 있음은 객체로 구성된 세계에 대한 이론적 이해를 의미한다. 이것은 과학이 시작되는 세계에 대한 개념이다. 바로 쓸 수 있음은 편리하거나 유용한 것들에 대한 우리의 실제적인 관계를 설명한다. 하이데거의 기본적인 주장은 실천이 이론보다 우선이며, 바로 쓸 수 있음이 바로 앞에 있음보다 선행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 이후 대부분의 철학의 문제는 세계를 이론적으로 생각하고 따라서 데카르트처럼 외부 세계의 존재와 심지어 그것을 채우는 사람들의 현실을 의심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는 것이다. 즉, 누가 알겠는가 그들은 로봇일지!라고 말이다. 대조적으로 하이데거에게 인간으로서의 우리는 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복잡한 사회적 관행의 망과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세계는 나의 일부분이다. 하이데거에게 데카르트처럼 자신을 세계와 단절시키는 것은 요점을 완전히 놓치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개방성의 구조는 하나로 된 것(one piece)이다. 그리고 그것을 잘라서는 안 된다. 게다가, 세상은 단순히 편리하고 친숙한 유의미한 것들로 가득 차 있지 않다. 그것은 또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만약 내가 근본적으로 내 세계와 함께 한다면, 그 세계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경험한 공동의 세계이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함께 존재"(being-with, 독일어로 Mitsein)라고 부르는 것이다.
'존재와 시간' 4부: 이 세상에 던져지다
우리는 어떻게 세계에서 우리 자신을 찾고, 어떻게 여기서 우리의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
Simon Critchley
내가 이미 보여주려 했듯이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기본적인 문제인 존재의 문제에 대한 당혹감을 다시 일깨우려 한다. '존재와 시간'에서 그는 인간에 대한 분석이나 그가 '현존재'(Dasein)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이 질문을 추구한다. 현존재의 존재는 지난 항목에서 논의한 평균적인 일상 존재 또는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으로 이해되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 다소 형식적인 존재 개념에 어떻게 더 많은 내용을 부여할 수 있을까?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의 1부 5장에서 강력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 장은 길고 어렵지만 대단히 보람 있는 장이며 모든 것이 정말로 흥미로워지기 시작한다. 존재와 시간의 나머지 부분에서 심화되는 이 장의 중심 주장은 현존재는 던져진 투사(Dasein is thrown projection, 독일어로 Dasein ist geworfener Entwurf). 이 생각을 풀어보도록 하자.
하이데거는 개념의 클러스터에서 조사를 진행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의 클러스터는 마음의 상태(state of mind), 기분(mood), 그리고 던져짐(thrownness)이라는 세 가지 개념을 포함한다. 마음의 상태는 베핀들리히카이트(Befindlichkeit, 국내에서는 독일어 동사 befinden의 '... 한 상태이다'에 착안해 '처해있음'으로 번역하곤 한다 - 역자 주)의 다소 의심스러운 표현인데, 윌리엄 리처드슨(William Richardson)은 이를 '이미-자신을-거기서-발견-함'(already-having-found-oneself-there-ness)으로 잘 번역한다. 괜찮다, 그것은 특별히 우아하지는 않지만, 인간은 항상 어딘가에서, 즉 세계-내-존재의 '거기'에서 발견되거나 공개된다. 이 '거기'는 현존재(Dasein)의 현(Da, 이 독일어의 da는 '거기' 즉 영어의 there와 같은 뜻 - 역자 주)이다.
게다가, 나는 항상 기분, 즉 슈티뭉(Stimmung, '기분'이라는 의미의 독일어이며 동사 stimmen에는 음악을 조율하다는 의미가 있다 - 역자 주)에 빠져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파토스의 강한 감각, 영혼의 열정 또는 감정, 무언가가 우리에게 닥치고 우리가 스스로를 발견하는 기분이다. 하이데거에게 열정은 본질적으로 합리적인 행위자에 대한 심리적 색채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우리가 세상에 적응하는 근본적인 방법이다. 사실, 음악학적으로, 슈티뭉은 조율과 음높이와 연결되어 있다. 사람은 우선적으로 그리고 대부분 기분을 통해 세상에 조율된다. 하이데거 작업의 매력적인 측면 중 하나는 세상에서 우리의 일상생활을 구성하는 분위기와 정서의 현상학을 제공하려는 그의 시도이다.
이것은 그의 중심적인 통찰력에 접근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즉 우리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그리고 이 관계는 이성적인 사색이 아니라 기분과 욕구의 문제이다.
그런 기분들은 나의 세계-내-존재의 '거기' 속에 던져진 인간을 드러낸다. 짐 모리슨(Jim Morrisson)이 수십 년 전에 말했듯이, '우리는 이 세상에 던져졌다'. 던져짐(Thrownness, 독일어로 Geworfenheit)은 는 우리가 항상 어딘가에 있다는 단순한 인식, 즉 우리가 매혹된 세계,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세계로 전달된다.
우리는 항상 두려움, 지루함, 흥분 또는 다음 항목에서 보게 될 불안과 같은 다양한 기분의 기복 속에서 우리의 일상생활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단순히 세상에 던져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이, 즉 우리는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던져진 상태를 버릴 수도 있다. 하이데거에게 이해는 활동의 개념이다. 그것은 항상 무언가를 수행하는 방법 또는 무언가를 작동하는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해는 능력(ability, 독일어로 etwas können, 문자 그대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의미 - 역자 주)의 소유이며, 진정한 존재할 수 있는(to be, 독일어로 Seinkönnen, 문자 그대로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 - 역자 주) 인간은 능력 또는 잠재력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므로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것으로 정의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또한 가능성을 붙잡고 구체적인 상황에서 행동하는 운동에서 던져진 상태를 던질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 운동은 하이데거가 투사(projection, 독일어로 Entwurf, 이것은 '기획'이라는 의미도 있다 - 역자 주)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하이데거가 나중에 '존재와 시간'에서 자유라고 부를 바로 그 경험이다. 자유는 추상적인 철학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상에서 수행을 통해 자신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경험이다.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본래적(authentic)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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