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3: 불안(Angst)과 죽음

Zigzag 2022. 12. 21. 14:30
반응형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현상학, 실존주의, 포스트 구조주의 등 20세기와 21세기의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 복잡한 개념의 클러스터와 난해함으로 '존재와 시간'은 일반 독자들이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난공불락의 요새이기도 하다. 특히 하이데거의 고전과 그 어휘에 대한 풍부한 이해, 그리고 다의성과 단어의 자유로운 조어가 용이한 것으로 '악명'높은 독일어를 이용한 그의 저작은 독자들에게 통일되고 일관된 이해를 요구하지만 쉬운 이해를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 아울러 하이데거의 나치에 대한 협력은 독자들로하여금 그는 물론 그의 저작에까지 거리를 두게 한다. 하이데거의 찬양자 중의 한 명이자 '호모사케르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은 하이데거가 반유대주의자가 아니었다면서 그를 옹호하려 애쓰지만 하이데거의 반유대주의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과 통찰력은 현대 철학을 이해하는데서 매우 중요하다. 영어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당대 철학자 중의 한 명이자 하이데거와 프랑스 현대철학에 조예가 깊은 뉴욕 사회연구 뉴 스쿨의 철학자 Simon Critchley는 이러한 독자들을 위해 '존재와 시간'에 대해 2009년 8차례에 걸쳐 블로그와 가디언에 글을 연재했다. 그 글들은 '존재와 시간 1부: 하이데거가 중요한 이유, '존재와 시간', 2부: 각자성에 대하여, '존재와 시간', 3부: 세계-내-존재, '존재와 시간', 4부: 이 세상에 던져지다, '존재와 시간' 5부: 불안, '존재와 시간', 6부: 죽음, '존재와 시간', 7부: 양심, '존재와 시간', 제8부: 시간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글들은 '존재와 시간'에 등장하는 주요 개념들을 중심으로 '존재와 시간'에 대해 해설하고 있으며, 각각의 글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전체를 읽은 독자들은 '존재와 시간'에 대해 개략적인 밑그림을 그릴 수 있으며, '존재와 시간'을 정독할 유혹을 느낄 수도 있다. 앞으로 이 글들을 매일 2부씩 총 4회에 걸쳐 번역, 연재할 예정이다. 이 글은 Guardian에 게재된 Simon Critchley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대한 8부의 글 중 5부와 6부 Being and Time, part 5: AnxietyBeing and Time part 6: Death의 번역이다.

'존재와 시간' 5부: 불안

불안은 내가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는 철학적인 기분의 탁월함이다

Simon Critchley

지난 블로그에서 보여주었듯이 하이데거에게 인간의 존재를 공개하는 데 있어  기분은 인간의 존재를 드러내는 필수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특히 처음으로 극명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기분이 있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기본 또는 근본적인 기분(fundamental mood, 독일어로 Grundstimmung)이라고 부르는 불안(anxiety, 독일어로 Angst)의 기능이다. 사프란스키(Safranski)는 불안을 "기분들 중 어두운 여왕"이라고 올바르게 부른다.

불안은 1부 6장에서 등장하는데, 여기서 하이데거는 현존재(Dasein)의 존재를 그가 "돌봄"(care, 독일어로 Sorge, 한국어로 '염려' '마음씀'으로 번역되곤 한다 - 역자 주)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정의하려고 한다. 돌봄의 구조와 의미를 적절하게 상세하게 설명하려면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블로그 항목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불안을 봄으로써 힌트 이상을 얻을 수 있다.

현존재는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이다. 우리의 일상 실존은 세계의 방식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이 특징이다. 세계는 우리를 매료시키고 내 삶은 그 리듬과 활동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 6장에서 하이데거가 던지는 질문은 세계-내-존재 전체가 어떻게 드러날 것인가, 그 자체와 전체로서 세계가 우리에게 드러나는 경험이 있는가, 우리가 세계에서 물러나서 세계를 우리와 다른 것으로 보는 기분이 있는가이다. 하이데거의 주장은 전체로서의 세계-내-존재는 불안에서 드러나고 돌봄으로 정의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안은 존재와 시간의 논증에서 중요한 방법론적 기능을 갖는다.

그러나 불안의 실존적 공명은 방법론적인 것 이상이다. 가장 먼저 파악해야 할 것은 불안이 무언가에 대해 끊임없이 초조해하거나 발작적으로 걱정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하이데거는 불안은 드물고 미묘한 기분이며 한 곳에서는 불안을 고요함이나 평화의 느낌에 비유하기도 한다. 자유롭고 진정한 자아가 먼저 존재하게 되는 것은 불안 속에서이다. 물론 그것은 사르트르의 '구토'(Nausea, 불어로는 La Nausée - 역자 주)와 카뮈의 '이방인(The Outsider, 불어로는 L'Étranger - 역자 주)와 같은 수천 편의 실존주의 소설을 시작한 분위기였다(비록 하이데거는 실존주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지만).

하이데거가 말하는 불안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검토하는 또 다른 기분, 즉 공포(fear, 독일어로 Furcht - 역자 주)와 구별해야 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의 초기에 공포의 현상학을 제시한다. 그의 주장은 공포는 항상 세계의 어떤 특정한 것, 위협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내가 거미를 무서워한다고 해보자. 공포에는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이 제거되면 나는 더 이상 공포스럽지 않다. 나는 욕조에서 거미를 보았고 나는 갑자기 겁이 난다. 거미를 두려워하지 않는 내 친구가 공격적인 거미류를 제거한다. 나는 더 이상 공포스럽지 않다.

불안과는 상황이 매우 다르다. 공포가 특정하고 확정적인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이라면, 불안은 아무런 특정한 것에 대해 염려하지 않으며, 불확정적인 것이다. 만약 공포가 세계의 어떤 뚜렷한 것, 거미 혹은 그 무엇인가를 향한다면, 불안은 세계-내-존재에 대한 불안이다. 불안은 완전히 무한한 어떤 것 앞에서 경험된다. 하이데거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 데도 없다"(nothing and nowhere, 독일어로 Nichts und nirgends - 역자 주)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잠시만 뒤로 물러서자. 앞서 '존재와 시간'의 1부(블로그 3에서 논의됨)에서 하이데거의 주장은 인간이 매우 의미 있고 매료된 세계에서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은 집처럼 편안하고(homely, 독일어로 heimlich), 심지어 아늑하다. 불안 속에서, 이 모든 것이 바뀐다. 갑자기 나는 세상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불안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비본래적(inauthentic) 광경, 일종의 평온하고 무의미한 활동의 부산함으로 보입니다. 불안 속에서 일상의 세계는 사라지고 집은 기이하고(uncanny, 독일어로 unheimlich) 낯설어진다. 나는 내가 사랑했던 인생 게임의 플레이어에서 더 이상 게임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게임의 관찰자가 된다.

불안 속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본래적(authentic) 자신이다. 세계가 멀어지면서 우리가 끼어든다. 나는 이것을 해양 용어로 생각하고 싶다. 세계의 비본래적 삶은 사물 그리고 일종의 "근거 없이 떠다니는"(groundless floating)(이 문구는 하이데거의 것이다)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 완전히 연결되어 있다. 세계의 일상의 삶은 바다에 잠기고 세상의 숨 막히는 진부함에 익사하는 것과 같다. 불안은 밀물이 빠지고, 바닷물이 빠지고, 말하자면 물가에 좌초된 자신을 드러내는 경험이다. 불안은 자아가 처음으로 세상과 자신을 구별하고 자각하게 되는 기본적인 기분이다.

불안에는 어둠, 절망, 식은땀이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가장 무해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다. 지하철에 앉아 산만하게 책을 읽고 대화를 엿듣다가 갑자기 무의미한 느낌, 자신과 자신이 속한 세상 사이의 급진적인 구별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러한 불안의 경험을 통해 현존재는 개인화되고 자각하게 된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불안은 사물과 타인으로부터의 자유로서 우리가 처음으로 경험하는 자유이다. 나 자신이 되기 시작하기 위한 자유다. 불안은 아마도 탁월한 철학적 분위기일 것이다. 그것은 내가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는 사물과 타인으로부터 무심해지는 경험입니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잘 알고 있듯이 불안은 어거스틴에서 키에르케고르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전통에서 강력하게 분석되는 분위기이기도 합니다. 하이데거가 기독교와 다른 점은 자아의 회심(self's conversion)이 신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관련해서만 일어난다는 점이다. 이것이 다음 주 블로그 주제이다.


'존재와 시간' 6부: 죽음

죽음에 대한 지식 속에서 삶에 대한 하이데거의 개념은 병적이기는커녕 해방적이다

Simon Critchley

약 6주 전에 내가 하이데거에 관한 나의 첫 번째 블로그에서 말했듯이 '존재와 시간'의 기본 아이디어는 매우 간단하다. 존재는 시간이고 시간은 유한하다. 인간에게 시간은 죽음과 함께 끝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고 싶다면 우리의 삶을 죽음의 지평에 끊임없이 투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죽음을 향한 존재"(being-towards-death, 독일어로 Sein zum Tode - 역자 주)라고 유명하게 부르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가 유한하다면 진정한 인간의 삶은 유한성에 맞서고 죽음이라는 사실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할 때만 찾을 수 있다. 하이데거는 "철학하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라는 고대 격언에 동의한다. 필멸성은 우리가 우리의 자아를 빚고 형성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다.

죽음을 향한 존재에 대한 하이데거의 개념에는 다소 형식적인 네 가지 기준이 있다. 죽음은 비관계적이고, 확실하고, 불명확하고, 능가될 수 없다. 첫째, 죽음은 죽음 앞에 서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시켰다는 의미에서 비관계적이다. 죽음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만 경험될 수 없고, 오직 나의 죽음과 나의 관계를 통해서만 경험될 수 있다. 나는 아래의 이 기준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가 죽을 것은 확실하다. 비록 누군가가 그 사실을 피하거나 도망갈 수도 있지만, 아무도 인생이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셋째, 죽음은 확실하지만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는 의미에서 죽음은 불확정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길고 충만한 삶을 원하지만, 우리는 언제 저승사자가 우리 문을 두드릴지 결코 알 수 없다.

넷째로, 죽음이 능가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not to be outstripped, 독일어로 unüberholbar)은 단순히 죽음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능가할 방법이 없으며 그것은 나의 자유로운 투사 능력이 가진 모든 가능성을 능가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죽음이 "불가능의 가능성"(possibility of impossibility, 독일어로 Möglichkeit der Unmöglichkeit - 역자 주)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한 것의 이면에 있는 생각이다. 죽음은 나의 존재가능성(potentiality-for- being, 독일어로 Seinkönnen)이 측정되어야 하는 한계이다. 그것은 내 자유의 능력이 스스로 산산조각이 나는 본질적인 무기력이다.

'존재와 시간'의 서문 말미에 하이데거는  "실제성(actuality) 보다 높은 가능성(possibility)"이라고 썼다. '존재와 시간'은 가능성에 대한 찬양의 긴 찬가이며 죽음을 향한 존재에서 최고의 표현을 찾는다. 하이데거는 예견(anticipation, 독일어로 Vorlaufen, 원래 '앞서 달리다'는 의미 - 역자 주)과 기대(awaiting, 독일어로 Erwarten)를 구별한다. 그의 주장은 죽음의 기대는 여전히 실제적인 것의 너무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거기서 죽음은 가능성의 실제화일 것이다. 그것은 병적인 우울한 철학일 것이다. 반대로 하이데거에게 예견은 수동적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자유로운 행동을 위한 조건으로 죽음을 동원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고 역설적인 생각을 낳는다. 즉 자유는 죽음의 형태로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자유는 필멸의 필연성을 확인하는 데 있다. 죽음을 향한 존재 속에서만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이라는 관념 속에는 자신의 필멸의 한계를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의 근거로 받아들이는 것이 숨어 있다.

그래서, 죽음을 향한 존재에 대해 병적인 것은 없다. 죽음을 향한 존재는 현존재를 비본래적 일상에 대한 몰입에서 끌어내고 그것이 그 자신으로 들어오도록 허용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생각이다. 내가 나의 자유를 열정적으로 자각하게 되는 것은 오직 죽음을 향한 존재와 관련해서이다.

바로크식 언어 의상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의 죽음을 향한 존재에 대한 분석은 예외적으로 직접적이고 강력하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유일한 본래적 죽음은 자신의 죽음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죽는 것은 단순히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라고 썼다. 그만큼 하이데거에게 타인의 죽음은 일차적인 나의 죽음에 부차적인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리고 이 비판은 에디스 스타인[Edith Stein]과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 그러한 죽음의 개념은 잘못됐으며 동시에 도덕적으로 유해하다. 반대로, 나는 부모, 배우자, 자식처럼 가까운 사람이든 멀리 떨어진 기근이나 전쟁의 알려지지 않은 희생자이든 다른 사람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 우리 세상에 들어온다고 생각한다. 죽음과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나 자신의 두려움이 아니라 슬픔과 애도의 경험에 의해 풀려난 존재에 대한 나의 감각이다.

또한 하이데거의 죽음에 대한 접근법에는 놀랍도록 전통적인 휴머니즘이 작용하고 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식물과 동물들은 단순히 소멸하는(perish) 반면, 인간만이 죽는다(die). 나는 식물의 죽음에 대해 어떤 전문지식도 가지고 말할 수 없지만, 경험적인 연구는 확실히 고등 포유류인 고래, 돌고래, 코끼리뿐만 아니라 고양이와 개도 그들 자신과 그들 주변 모두의 죽음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우리는 필멸의 감정에 감동을 받는 우주의 유일한 피조물이 아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