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시사

북한 핵-미사일 관련 타임라인 2(1998년-2002년): 햇볕정책부터 악의 축까지

Zigzag 2022. 11. 19.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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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대북제재가 계속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의 뿌리는 물론 1950년 한국전쟁이다. 그러나 비교적 최근의 직접적인 뿌리는 1980년대 중반, 북한의 핵확산방지조약(Nonproliferation Treaty, NPT) 가입 이후 계속된 북한의 핵문제를 둘러싼 미국과 북한의 대립 그리고 북한과 한국의 긴장이다. 앞으로 1985년부터 2022년까지 북한의 핵문제를 둘러싼 타임라인을 몇 차례에 걸쳐 게재할 생각이다. 여기에 제시된 타임라인은 군축협회 (Arms Control Association)와 미국외교협회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그리고 해외 기사들 중 북한 핵 및 미사일과 관련된 것들을 참조했다. 따라서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비교적 객관적으로 보이는 타임라인일지라도 미국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을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타임라인은 모두 다음과 같은 9개의 시기로 나뉜다. 1) 1985년의 북한의 NPT 가입부터 김대중 대통령 당선 직전인 1997년까지의 첫 번째 타임라인, 2) 1998년 햇볕정책부터 2000년 악의 축까지의 타임라인, 3) 2003년 6자 회담 1차부터 2007년 방코 델타 아시아 계정에 동결된 북한 자금 2,500만 달러 동결 해제, 영변 핵시설 폐쇄 개시, 노무현-김정일의 남북 정상회담, 4) 2008년 이명박 대통령 취임에서부터 2009년 북한의 두 번째 핵실험, 2010년 천안함 침몰과 북한의 연평도 포격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긴장 고조 국면 시기, 5) 2011년 김정일 사망과 김정은의 계승, 그리고 2012년 북한의 잠정적 핵시설 가동 중단 선언과 대북 식량지원 재개 및 북한의 미사일 실험에 따른 대북 제재 강화, 6) 2013년 북한의 핵실험과 유엔 제재 강화, 2014년 중단거리 미사일 발사, 2015년 잠수함 탄도미사일 시험, 그리고 2016년 북한의 4 번째 이자 가장 커다란 폭발력의 핵실험 및 사드의 한국 배치 등 첨예화되는 한반도 긴장 고조 과정, 7) 2017년 북한의 6차 핵실험에 따른 대북 제재강화와 한반도 긴장 극대화 국면 그리고 2018년 4.27 문재인-김정은 남북정상회담과 6.12 싱가포르 김정은-트럼프 북-미 정상회담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의 9월 평양방문 등의 극적인 한반도 긴장완화 국면, 8) 2019년 제2차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의 성과 없는 결렬과 남북미 정상의 판문점 회동 그리고 2020년 남북대화의 단절과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 경색과정, 9)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이 우크라이나에 집중하고 일본이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북한의 안보 위협을 자국의 방위력 배가의 근거로 제기하는 와중에 북한이 급속도로 미사일 발사와 대륙간 탄도미사일 시험을 강화하는 2021년부터 대북 유화 대신 대북 강경책을 채택한 윤석열 정부의 등장 그리고 최근 한미일 합동 군사 훈련에 대한 경고로서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시위한 2023년 2월까지의 새로운 군사적 긴장고조 국면.

북한핵과 미사일을 둘러싼 이 타임라인은 긴장완화와 긴장고조 사이를 오가는 매우 복잡하고 변덕스러운 과정이었다. 현재는 러시아, 중국, 일본, 미국, 북한, 한국 등 한반도를 둘러싼 남북한 당사자와 주변 4개국 모두 외교대화보다는 대립, 군사적 무장 강화 노선을 채택한 그 어느 때보다도 무력충돌의 가능성이 높아진 심각한 국면이다. 향후 한반도가 어디로 향하게 될 것인지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을 둘러싼 이 장기적인 타임라인 속에서 패턴과 교훈을 얻는 것이 필수적이다.

1998년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평화, 화해, 협력을 통해 남북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햇볕 정책"을 발표한다.
1998년 4월 17일: 미국은 북한이 미사일 기술과 부품을 파키스탄의 칸 연구소(Khan Research Laboratory)로 이전한 데 대한 대응으로 북한과 파키스탄에 제재를 가한다.
1998년 6월 16일: 조선중앙통신은 북한이 재정적 손실을 적절하게 보상받는 경우에만 미사일 기술 수출을 중단할 것이라고 보도한다.
1998년 7월 15일: 초당파적인 럼스펠드 위원회(Rumsfeld Commission)는 미국이 북한과 이란과 같은 "불량 국가"(rogue states)의 장거리 탄도 미사일 위협에 직면하기 전에 미국이 "경고가 거의 없거나 전혀 없을 수 있다"라고 결론짓는다.
1998년 8월 31일: 북한이 일본 상공을 비행하는 사거리 1,500-2,000km의 3단 대포동 1호 로켓을 발사한다. 평양은 로켓이 소형 인공위성을 궤도에 성공적으로 진입시켰다고 발표했는데, 이는 미 우주사령부에 의해 논박된다. 일본은 1998년 11월까지 기본 합의의 경수로 프로젝트에 대한 비용 분담 계약 서명을 보류한다. 미국 정보기관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 기술 발전과 미사일의 3단계에 고체 로켓 모터 사용에 놀랐음을 인정한다.
1998년 10월 1일: 3차 북미 미사일 회담이 뉴욕에서 시작되지만 진전이 거의 없다. 미국은 북한이 경제 제재를 해제하는 대가로 미사일 프로그램을 중단할 것을 거듭 요청한다. 북한은 제재 해제가 1994년 기본합의에 함축되어 있다는 이유로 미국의 제안을 거부한다.
1998년 11월 12일: 빌 클린턴 대통령은 1999년 국방수권법( Defense Authorization Act)에 의해 설립된 대북정책 조정관으로 윌리엄 페리(William Perry) 전 국방장관을 임명한다. 페리는 즉시 미국의 대북 정책에 대한 부처 간 검토를 시작하고 평양 문제에 대한 통일된 접근 방식을 형성하기 위해 한국 및 일본과 협의를 시작한다.
1998년 12월 4일-11일: 미국과 북한이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심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해결하기 위한 회담을 개최한다. 북한은 미국의 사찰을 원칙적으로 수용하지만 미국의 '적절한 보상' 제안에는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다.

1999년

1999년 2월 2일: CIA 국장 조지 테넷(George Tenet)은 상원 군사 위원회에서 일부 기술 개선과 함께 북한이 대포동 1호를 사용하여 알래스카와 하와이 일부에 소형 탑재체를 도달하게 할 수 있다고 증언한다. 테넷은 또한 평양의 대포동 2호가 대포동 1호와 같은 3단계가 있다면 정확도는 떨어지지만 대형 탑재체를 미국 본토에 도달하게 할 수 있다고 증언한다.
1999년 3월 29-31일: 미국과 북한 관리들이 평양에서 4차 미사일 회담을 개최한다. 미국은 북한의 미사일 개발과 확산 활동에 대해 다시 한번 우려를 표명하고, 북한의 자제를 미국의 제재 완화로 바꾸는 거래를 제안한다. 미국 관리들은 회담이 "심각하고 강도 높은" 회담이라고 설명하지만, 특정 날짜에 다시 만나기로 합의하는 데에만 성공한다.
1999년 4월 25일: 미국, 한국 및 일본은 북한에 대한 긴밀한 협의 및 정책 조정을 제도화하기 위해 3국 조정 및 감독 그룹을 설립한다.
1999년 5월 20-24일: 미국 사찰단이 금창리의 북한 핵 의심 부지를 방문한다. 국무부에 따르면 팀은 핵 활동이나 기본 합의 위반의 증거를 찾지 못한다.
1999년 5월 25일-28일: 대통령 특사로 평양을 방문한 페리는 북한이 미국의 안보 우려를 해결할 의사가 있다면 양국 관계의 큰 확장을 논의하기 위해 북한 정치, 외교, 군 고위 관리들을 만난다. 페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클린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지만 두 사람은 만나지 않는다. 페리는 북한이 미국의 제재 해제, 외교 관계 정상화 및 가능한 일부 안보 보증의 형태의 대가로 기본 합의의 범위를 넘어선 계속되는 핵무기 관련 활동과 탄도 미사일 개발 및 확산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만족시킬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진다.
1999년 9월 7-12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회담에서 북한은 미국과의 회담 기간 동안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에 대한 모라토리엄에 동의한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의 부분적인 해제에 동의한다. 양측은 고위급 협의를 계속하기로 합의한다. (제재 조치는 실제로 2000년 6월까지 해제되지 않는다.)
1999년 9월 9일: 미국 국가정보 평가에 따르면 북한은 2015년까지 200kg의 탄두를 미국 본토에 운반할 수 있는 ICBM을 개발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라고 보고한다.
1999년 9월 15일 : 페리 북한정책조정관은 미국의 대북정책에 대한 검토서를 의회에 제출하고 10월 12일 보고서를 비공개로 공개한다. 이 보고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협상에 대한 새롭고 포괄적이며 통합된 접근"을 권고하고 있으며, 이는 미국과 동맹국들에 의해 "단계적 그리고 상호적인 방식"으로 조정된 고립의 감소를 포함할 것이다. 잠재적인 참여 메커니즘에는 국교 정상화와 무역 제재 완화가 포함될 수 있다.
1999년 11월 19일:
미국과 북한이 베를린에서 만나 양국 관계와 북한 고위급 방미 준비에 관한 회담을 갖는다.
1999년 12월 15일:
기본 합의가 체결된 지 5년 후, KEDO 관계자는 북한, 금호에 두 개의 경수로 건설을 시작하기 위해 한국전력공사와 턴키 계약에 서명한다. KEDO 관계자는 1998년 8월 북한의 대포동 1호 실험으로 인해 야기된 복잡한 법적, 재정적 문제와 긴장된 정치적 분위기로 인해 계약 서명이 지연된 것으로 보고 있다.

2000년

2000년 4월 6일: 미국은 MTCR 카테고리 I 항목을 이란에 확산시킨 북한 기업 창광신용사에 제재를 가한다. 범주 I 항목에는 사거리가 300km를 초과하고 적재량이 500kg 이상인 완전한 미사일 시스템, 주요 하위 시스템, 로켓 기지 또는 유도 시스템, MTCR급 미사일의 생산 시설 또는 그러한 미사일과 관련된 기술이 포함된다.
2000년 5월 25일-27일: 미국이 금창리 시설에 대한 2차 사찰을 실시한다. 사찰팀은 1999년 5월 1차 검사 이후 조건이 바뀌지 않은 것으로 확인한다.
2000년 6월 15일: 역사적인 정상회담 후 남북한이 한반도 통일 문제를 “해결하기로 합의했다”는 공동 선언문에 서명한다. 이번 협정에는 한국전쟁으로 이산가족을 재회하고 기타 경제·문화 교류를 추진하기로 하는 내용이 담긴다. 핵무기나 미사일 프로그램 또는 비무장 지대에 군사 배치와 관련하여 어떠한 약속도 하지 않는다.
2000년 6월 19일: 남북 정상회담에 고무된 듯한 미국은 대북제재를 완화해 상업 및 소비재의 '광범위한' 무역을 허용하고, 투자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며, 개인 및 상업 금융 직거래 금지를 없앤다. 테러와 미사일 확산과 관련된 제재는 여전히 유효하다. 다음 날, 북한은 미사일 시험 발사 중단을 재확인한다.
2000년 7월 12일: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5차 북미 미사일 회담이 결정 없이 종료된다. 회담에서 북한은 미사일 수출을 중단하는 대가로 연간 10억 달러에 달하는 배상금을 거듭 요구한다. 미국은 이 제안을 거부하지만 미국의 우려를 해결하는 대가로 "경제 정상화"를 향해 나아갈 용의가 있다고 말한다.
2000년 7월 19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김정일은 북한의 미사일 프로그램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국가의 위성 발사 지원을 대가로 북한의 미사일 프로그램을 중단하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알려진다.
2000년 7월 28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동남아시아국가연합 지역포럼에서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 국무장관이 백남순 북한 외무상과 '실질적으로 소박한' 회담을 한다. 백은 우주 발사 지원에 대한 대가로 미사일 프로그램을 중단하겠다는 북한의 제안에 대해 추가 세부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2000년 8월 13일: 코리아 타임스에 따르면 김정일은 평양에서 열린 46명의 남한 언론사 간부들과의 회담에서 그의 미사일 제안은 "과학과 최첨단 기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유머러스한 의미"라고 말한다. 이 사건의 보도는 김 위원장의 제의의 심각성을 깎아내리는 것으로 널리 해석되고 있지만, 김 위원장의 연설에서 영어로 된 발췌문은 다음과 같은 제안을 확인시켜주는 것 같다. "나는... 푸틴에게 미국이 나서서 우리의 위성을 발사하면 로켓 개발을 중단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2000년 8월 28일: 웬디 셔먼(Wendy Sherman) 미국 대사는 러시아 측과 함께 김정일의 명백한 미사일 제안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9월 8일 브리핑에서, 국무부 고위 관리는 미국이 북한의 제안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라고 말한다.
2000년 9월 27일: 핵문제, 미사일, 테러에 관한 북미회담이 뉴욕에서 재개된다. 양국은 테러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는데, 이는 북한을 국무부의 테러 명단에서 제외하는 방향으로 진전된 움직임을 보여준다.
2000년 10월 9-12일 : 김정일의 이인자인 조명록 차수가 특사 자격으로 워싱턴을 방문한다. 그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서한을 전달하고 국무부 장관과 국방장관을 만난다. 이는 북미 관계 개선에 대한 김 위원장의 의지를 재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2000년 10월 12일:
미국과 북한은 이날 공동성명을 내고 미사일 문제 해결이 "근본적으로 관계를 개선하는 데 필수적인 기여를 할 것"이라며 기본 합의의 이행에 대한 양국의 의지를 거듭 강조한다. 성명은 또한 올브라이트 장관이 클린턴 대통령의 가능한 방문에 대비하기 위해 가까운 미래에 북한을 방문할 것이라고 말한다.
2000년 10월 24일:
올브라이트 장관은 김정일과의 만남을 위한 2일간의 평양 방문을 마무리한다. 방문 기간 동안, 김 위원장은 북한이 대포동 1호 미사일을 더 이상 시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번 회담에서는 북한의 고유 미사일 프로그램 외에도 북한의 미사일 기술 수출, 핵 투명성, 관계 정상화,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 방문 가능성 등이 논의된다.

북한을 방문한 미 국무장관 올브라이트 장관이 김정일과 잔을 부딪히고 있다. 사진: Chien-Min Chung/AFP via Getty Images

2000년 11월 1-3일 :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북-미 미사일 7차 회담이 합의 없이 끝난다. 올브라이트 장관이 최근 김정일과의 회담으로 얻은 모멘텀 강화의 실패는 클린턴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대통령 방북에 대한 희망을 약화시킨다.
2000년 12월 28일: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가 끝나기 전에 북한을 방문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당면한 일을 끝마칠 시간이 충분하지 않습니다"라고 언급한다. 6일 뉴욕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클린턴의 국가안보보좌관인 샌디 버거(Sandy Berger)는 그가 "잠재적 '헌법적 위기'"라고 보았던 대선 기간 논쟁 중 대통령이 미국을 떠나게 하는 데 주저했다.'"

2001년

2001년 1월 2일: 미국은 2000년 이란 비확산법 위반으로 북한의 창광신용공사에 제재를 가한다.
2001년 3월 6일: 스웨덴 외무장관과의 공동 기자 브리핑에서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행정부가 “클린턴 대통령이 중단한 부분을 이어나가기 위해 북한과 협력할 계획"이며 "몇 가지 유망한 요소가 테이블에 남아 있으며 해당 요소를 검토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2001년 3월 7일: 뉴욕 타임스 기명 논설에서 전 대통령의 대북정책 특별보좌관이자 국무장관이었던 웬디 셔먼(Wendy Sherman)은 클린턴 행정부 말기에 북한의 중장거리 미사일을 제거하고 미사일 수출을 끝내기 위한 북한과의 협정이 "감질나게 가까운" 것이었다고 썼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실무회담을 마친 뒤 기자들에게 “향후 어느 시점에서 북한과 대화를 하기를 기대하지만, 어떤 협상이든 잠재적인 합의 조건에 대한 완전한 검증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한다. 클린턴 행정부 관리들에 따르면, 미사일 거래를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성공적인 합의에 대한 마지막 걸림돌 중 하나로 남아 있다. 부시는 또한 북한이 "모든 합의의 모든 조건을 지키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부시 대통령의 발언 직전 파월 의장은 전날 발언을 수정하면서 “임박한 협상이 시작되려 한다는 암시가 있었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
2001년 3월 13일: 북한은 미국의 새로운 어조에 분명히 반응한 것으로 보이며 서울과의 장관급 회담을 취소한다. 회담은 정치적 화해를 촉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2001년 3월 15일: 평양은 미국에 "천배의 보복"을 가할 것이며 "북남[조선] 사이의 대화를 망치려는 음흉한 의도"에 대해 "천배의 보복"을 하겠다고 위협한다. 조선중앙통신은 성명을 통해 미국의 새로운 정책을 '적대적'이라고 표현하고 북한이 '대화와 전쟁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라고 지적한다.
2001년 5월 3일: 평양에서 열린 기자 회견에서 예란 페르손(Göran Persson) 스웨덴 총리가 이끄는 유럽 연합 대표단은 김정일이 2003년까지 평양의 미사일 시험 중단을 연장하겠다고 약속했으며 김 위원장은 2차 남북정상회담을 "깊은 관심이"있다고 보고한다.
2001년 6월 6일: 보도 자료에서 부시 대통령은 행정부의 대북 정책 검토가 완료되었으며 "광범위한 의제"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평양과 재개되어야 한다는 결정을 발표한다. 부시 대통령은 "기본합의의 개선된 이행", 북한의 미사일 프로그램에 대한 "검증 가능한 제약", 북한의 미사일 수출 금지, "덜 위협적인 재래식 군사태세"를 포함한 "포괄적인" 협상을 수행하고 싶다고 밝힌다.
2001년 6월 13일: 잭 프리처드(Jack Pritchard) 미국 특사가 뉴욕에서 이형철 유엔 주재 북한 대표와 만나 양자 회담을 준비한다.
2001년 6월 26일: 미 국무부는 2000년 제정된 이란 비확산법에 따라 북한의 창광신용 공사에 대해 이란으로의 불특정 미사일 관련 이전에 대한 제재를 발표한다. 이번 발표는 1월 2일에 이어 창광신용에 대한 두 번째 제재를 가한 것이다. 이 제재조치는 어떤 미국 기업도 북한 회사와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데, 이 기업은 이전에 보다 일반적인 미사일 이전 제재 하에서 여러 번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창광 신용은 2001년 1월 2일에 내려진 적극적인 제재와 2000년 4월 6일에 내려진 미사일 제재를 여전히 받고 있기 때문에 그 제재는 대체로 상징적이다.
2001년 7월 6일: 리처드 아미티지(Richard Armitage) 국무부 차관은 북한이 6월 말에 로켓 "모터 엔진"을 시험했지만, "그것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라고 확인했으며, 행정부는 그 시험이 북한의 시험 유예 기간을 위반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2001년 8월 4일: 모스크바에서 푸틴 대통령과 회담하는 동안 김정일은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2003년까지 중단하겠다는 약속을 재확인한다.

2002년

2002년 1월 29일: 연두교서에서 부시 대통령은 "북한은 미사일과 대량살상 무기로 무장한 채 주민들을 굶주리게 하고 있다"라고 비난했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함께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묘사했다.
2002년 2월 5일: 상원 외교 위원회 청문회에서 파월은 북한과 대화를 "어떤 전제 조건 없이" 언제든지, 어떤 장소나 어디에서든지 재개할 용의가 있다는 행정부의 정책을 되풀이하였다. 파월은 또 북한이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조항을 계속 준수하고 있으며 합의된 틀로도 알려진 KEDO 협정 내에 머무르고 있다고 믿는다는 점을 확인한다.
2002년 3월 15일: 미국의 핵태세 검토(U.S. nuclear posture review)가 북한에 대한 핵무기 사용에 대해 논의했다는 보도에 이어, 평양의 관영 통신은 미국이 북한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하려 할 경우" 미국과 합의한 모든 것을 "검토할 것"이라고 발표한다. 보도는 “미국이 [북한]에 핵 대학살을 가하면 전자의 본토도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2년 4월 1일: 부시 대통령은 북한의 제네바 기본합의 준수 여부를 증명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국가 안보를 고려할 때, 부시 대통령은 미국이 KEDO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을 금지하는 미국 법을 폐지하고, 미국이 계속해서 합의된 틀을 재정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2002년 7월 2일: 미국은 계획된 7월 10일 회담 날짜에 북한이 응답하지 않았고 6월 29일 남북한 간의 해상 교전을 이유로 예정된 대표단 방북을 취소한다.
2002년 7월 31일: 파월 의장은 브루나이에서 열린 동남아국가연합 지역포럼 회의에서 백남순 외무장관과 짧게 만나 미국 특사가 북한을 방문할 것이라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양국 간 최고 수준의 교류다.
2002년 8월 7일: KEDO는 미국이 기본합의에 따라 북한에 제공하기로 동의한 최초의 경수로의 구체적인 토대를 타설하는 행사를 개최한다. 이날 행사에는 잭 프리처드(Jack Pritchard) KEDO 미국 대표와 국무부 대북 협상 특사가 참석했다. 프리처드는 2000년 10월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 이후 북한을 방문한 미국 고위 관리 중 가장 높은 인물이다. 미국은 북한에 가능한 한 빨리 모든 핵 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보호 절차를 준수할 것을 촉구하지만, 북한은 적어도 3년 동안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일본 신문 니혼 게이자이 신문이 8월 8일 보도한다. 북한 외교부 대변인은 또한 원자로 프로젝트 완료가 지연되면 북한이 협정에서 탈퇴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2002년 8월 16일: 미국이 예멘에 미사일 기술을 이전한 혐의로 북한의 창광신용공사와 북한 정부에 제재를 가한다. 아리 플라이셔(Ari Fleischer) 백악관 대변인은 8월 23일 제재가 “국무부의 법에 따른 잠정적 요건”이라며 “미국은 언제 어디서나 북한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라고 밝힌다.
2002년 8월 31일: 8월 29일 존 볼턴 미 국무부 군축 및 국제 안보 담당 차관의 연설에 대해 북한은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을 포기할 의지가 있다면 대화를 할 것이다… 공은 미국 쪽에 있다"라고 말했다. 볼턴은 북한의 미사일, 핵, 생물무기 프로그램을 비난했다.
2002년 9월 17일: 북한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북한 지도자 김정일 간의 회담에서 서명한 북일 평양 선언의 일환으로 미사일 실험에 대한 중단을 무기한 연장한다고 발표한다. 북일 선언문 중 일부는 핵무기를 언급하며 “한반도 핵 문제의 포괄적 해결을 위한 모든 국제 협정을 준수하기로 약속했다”라고 언급한다. 이 성명이 단순히 기존 협정에 대한 약속을 확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추가 군비 통제 조치에 대한 지지를 나타내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2002년 10월 3-5일: 제임스 켈리(James Kelly)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북한을 방문한다. 평양을 방문하는 행정부 고위 관리인 켈리는 북한의 핵 및 미사일 프로그램, 미사일 부품 수출, 재래식 전력 태세, 인권 침해 및 인도적 상황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재차 강조한다. 켈리는 북한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포괄적 해결"을 통해 양국 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고 알린다. 향후 회의는 발표되지 않는다.
북한은 켈리의 접근 방식을 '강압적이고 오만하다'라고 비판하며, 북한은 미국의 정책이 "북한으로 하여금 유효성이 입증된 군 기반 정책에 따라 필요한 모든 대응 조치를 취하도록 강요한다"라고 주장한다.

2002년 2월 위성사진이 북한의 핵시설을 보여준다. 사진: U.S. International Security Research Institute via Getty Images

2002년 10월 16일: 미국은 10월 3-5일에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국무차관보가 평양 대표단과 대면한 후 북한이 핵무기용 우라늄 농축을 위한 비밀 프로그램을 갖고 있음을 인정했다고 발표한다. 켈리는 이후 북한 입국이 미국이 이 프로그램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린 다음 날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북한은 이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여러 번 부인해왔다.
리처드 바우처(Richard Boucher) 미 국무부 대변인은 “북한의 비밀 핵무기 프로그램은 기본합의와 핵확산금지조약, 국제원자력기구(IAEA) 안전조치 협정,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남북공동선언에 따른 북한의 약속을 심각하게 위반한 것”이라고 밝힌다. 바우처는 또한 미국은 북한이 비확산 약속을 준수하기를 원하며 "이 상황의 평화적 해결"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2002년 11월 5일: 북한은 북일 정상화 회담이 진전을 이루지 못하면 탄도미사일 실험 중단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한다.
2002년 11월 14일: KEDO는 북한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는 10월 4일의 인정에 따라 대북 중유 공급을 중단한다고 발표한다. 마지막 배송은 11월 18일 북한에 도착한다.
2002년 11월 29일: IAEA는 북한에 "보고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명료화"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북한은 IAEA의 입장이 미국에 편향되어 있다며 결의를 거부한다.
2002년 12월 9일: 스페인과 미군이 예멘으로 향하는 북한의 스커드 미사일과 관련 화물을 실은 선박을 가로채 수색한다. 미국은 화물을 압수하는 데 필요한 법적 권한이 없기 때문에 배송을 허용한다. 아리 플라이셔(Ari Fleischer ) 백악관 대변인은 “워싱턴은 이 선박이 중동으로 미사일을 운반하고 있다는 정보를 갖고 있으며 최종 목적지가 이라크일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북한이 NPT를 탈퇴한 후 수많은 군중들이 평양에서 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 Gong Yidong/Xinhua via AP Photo

2002년 12월 12일: 북한은 IAEA에 한 개의 원자로를 재가동하고 기본합의에 따라 동결된 다른 핵 시설을 재개한다고 발표하는 서한을 보낸다. 이 서한은 IAEA가 핵 시설에서 봉인과 감시 장비를 제거할 것을 요청한다. 북한 대변인은 미국이 기본합의를 위반했다고 비난하며 원자로를 재가동하는 목적은 전력을 생산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11월 27일 의회 연구 서비스 보고서에 따르면 원자로는 연간 1개의 폭탄에 충분한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다. CIA는 2002년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사용 후 핵연료봉에 "[핵무기] 몇 개를 더 만들기에 충분한 플루토늄을 함유하고 있다"라고 밝힌다. 북한의 현재 핵보유국에 대한 미국의 추정은 다르다. 미 국무부 관리는 2003년 1월 3일 미국 정보기관이 북한이 기본합의의 협상 이전에 생산된 플루토늄으로 만든 핵무기를 1-2개 보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고 밝힌다. CIA는 북한이 하나 또는 두 개의 무기를 생산하기에 충분한 플루토늄을 생산했다고 공개적으로 추정한다.
2002년 12월 14일: 북한은 IAEA에 보낸 서한에서 핵 시설의 상태는 미국과 북한 간의 문제이며 IAEA와의 "어떤 합의에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명시한다. 서한은 또한 IAEA가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북한이 봉인과 감시 카메라를 제거하기 위해 일방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2002년 12월 22-24일: 북한이 모든 봉인을 끊고 핵 시설과 물질에 대한 IAEA 감시 장비를 파괴한다. IAEA 대변인은 12월 26일 북한이 새로운 연료봉을 원자로로 옮기기 시작했다고 밝혔으며, 이는 곧 재가동될 수 있다고 시사한다.
2002년 12월 27일: 북한, IAEA 사찰단 국외 추방 명령한다. 그들은 12월 31일에 떠난다.

 

북한 핵 협상 타임라인 1(1985년-1997년): 북한의 핵확산방지조약 가입부터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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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 협상 타임라인 2(2003년-2007년): 6자 회담 시작에서부터 노무현-김정일 남북정상회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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