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재벌 총수 수난사 혹은 범죄사 5-2: 정치를 넘본 기업인 현대 정주영,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통일국민당까지(1970~2000년)

Zigzag 2021. 4. 20.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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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동 현대 아파트, 산업화와 욕망, 부패의 완벽한 교차점

현대는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전후 복구 수요를 뛰어넘는 개발 수요의 증가와 함께 급속한 성장을 하게 된다. 특히 제조업 부양정책에 따른 도로, 교량, 댐, 항만 등의 인프라 건설과 발전소와 플랜트 건설 수요의 증가는 현대의 성장에 큰 몫을 하게 된다. 그중 1966년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와 1968년 소양강댐 건설은 현대의 기술축적과 규모의 성장을 가능케 하는 가속페달이 되었다. 전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밑천이 되었고, 후자는 박정희 정권의 결정적 신임을 얻는 밑천이 되었다.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삼선개헌과 1차 오일 쇼크는 박정희 정권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위기에 몰아넣는다. 1972년 유신 쿠데타는 그 위기에 대한 발작적 반응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위기의 타개를 위해 재벌의 집중 육성을 통한 중화학공업화의 본격적 추진에 나서게 된다. 그 과정은 산업화의 동맥인 경부고속도로 건설, 해외 달러 유치를 위한 중동 진출, 중공업 육성 등의 일련의 핵심 정책을 통해 드러나며, 현대는 이 모든 과정의 핵심 파트너였다. 정권과 현대의 거리는 거의 실종되며 유착을 넘어 거의 혼연일체의 수준으로 '진화'한다. 정주영은 1977년 전경련 회장에 취임해 소위 전경련의 최전성기, 즉 정권-재벌의 초밀착 시기를 주도한다. 정주영의 현대는 정권을 포함한 소위 사회지도층에 대한 포섭과 밀착 마크를 강화하며, 소위 권력층이 집중되어 있다고 해서 '사설 중앙청'이라 불리는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건설한다. 압구청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은 박정희 정권과 정주영의 현대의 밀착과 근대화의 욕망을 드라마틱하게 압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다.

현대는 1957년 한강인도교 복구에 이어 1962년 길이 1048m, 폭 18m의 제2 한강교(현 양화대교) 건설에 착공, 1965년에 준공하였다. 이에 기초해 현대는 1966년 제3 한강교(현 한남대교)를 착공하였다. 제3 한강교가 한창 건설 중이던 1968년 경부고속도로의 착공이 시작되었다. 제3 한강교는 공간적으로 강남지역과 강북 도심을 단축시켰을 뿐만 아니라 경부고속도로의 서울의 관문으로 기능했다. 이 시기는 경제개발의 가속화로 농촌 공동화와 인구의 이촌향도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강북지역의 인구 과밀화가 나타난 시기다. 이러한 즈음 강북의 인구 과밀화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경기도에 속해있던 강남을 1963년 서울로 편입시키고, 동시에 서울은 공간적으로 268.4km2에서 605km2로 확장되었다. 지금의 강남과 서초지역 인구는 모두 약 2만 7천 명에 불과했으며, 1969년 제3 한강교가 완공되고, 경부고속도로가 막 개통된 1970년까지도 5만 명에 채 못 미쳤다. 정주영의 현대는 1970년대 산업화와 도시개발의 중심이 되는 제3 한강교와 경부고속도로를 모두 장악했다. 1차 오일쇼크로 경제가 침체에 빠지고 외환이 메말라 갈 때쯤인 1970년대 초중반 거대한 오일머니를 소비하려는 중동 산유국들로부터 거대한 중동 건설 붐이 불었다. 1974년 2억 6천만 달러에 불과했던 중동 수주액은, 1975년 8억 5천만 달러, 1982년 82억 달러로 1975년~1979년 GNP 증가율 7.2% 10배, 수출 증가율 25%의 3배에 달했다. 이렇게 중동 건설 붐으로 1970년대 중반 경제 호황이 시작될 때 올라가기 시작한 강남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주거문화, 부동산, 권력지도를 송두리째 바꾸는 사건이 되었다. 아파트는 서울의 인구과밀을 해소하기 위한 적합한 주거형태였으며, 현대가 건설한 아파트는 크기부터 35평~65평형으로 중상층을 위한 주거지로 공동주택에 대한 기존의 불신과 편견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좌측, 압구정 아파트 개발당시 모습(1975년). 우측, 압구정 아파트 2003년 모습. 출처: <상전벽해 국토 60년>

사설중앙청(私設中央廳)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시작부터 특혜와 부패의 온상이었다. 정주영의 현대는 1967년 이후 소양강 댐 시공으로 박정희의 전폭적 신뢰를 얻고, 비슷한 시기에 출발한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주 시공사가 된다. 이는 서울의 과밀해소를 위한 한강 종합개발, 특히 강남 개발과정에서 1969년 압구정동 저수부지의 공유수면 매립면허를 취득의 지렛대로 작용했다. 이미 한강변 공유수면 매립면허의 획득 자체가 막대한 특혜였다. 박정이 정권은 1960년대 말 현대와 삼부 등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한 4개 업체들에게 한강변 40여 만평의 매립을 면허를 몰아주었고, 이 매립지 형성을 통해서만 이들은 수십억 원의 이득을 올렸다. 현대를 포함한 이들 업체들은 이 과정에서 받은 수천 대의 중장비 면세 특혜를 택지조성과 아파트 건설 등의 비관련업무로 확대했다. 또한 현대는 1972년 제정된 주택건설촉진법에서 기업의 사원용 주택 건설에 지출비용 특별 상각 등 세제상 특혜가 부여되는 점을 악용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건설을 사원용 공동주택 건설로 승인받았다. 그러나 현대는 서민용인 25평형 이하의 아파트를 건설하는 대신 그 자리에 35평형 이상 최대 65평형의 의 당시로서는 초호화식 아파트를 건설하였다. 애초부터 이 아파트는 권력자들을 위한 아파트로 지어진 것이다.

현대는 5차분 35평 224가구, 6차분 48평 392가구, 52평형 168가구, 65평형 168가구 등 총 952가구를 무주택 사원용으로 서울시로부터 특수 분양 허가를 받고 사원에게는 350가구만 분양하고 나머지 600여 가구는 특수 분양했다. 검찰 수사에 따르면 특수 분양받은 262명이 청와대 비서실(3명), 중앙정보부(10명), 차관/급/보(5명), 경제기획원(15명), 외무부(13명), 조달청(1명), 재무부(2명), 법무부(검사 15명), 상공부(5명) 등의 중앙권력기관, 국회의원(6명)등 입법기관, 판사(9명) 등 사법기관과 서울시(13명), 그리고 언론계도 조선, 중앙, 동아, KBS 등 34명이나 포함되었다. 현대 측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에 따라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특권층에 아파트를 분양했다. 당시 이 특혜 분양에 포함되지 못했던 언론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를 정주영의 "사설 중앙청"(私設中央廳)이라 부른 것도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이 아파트들은 분양 당시 평당 44만 원이던 것이 1년 만에 90만 원으로 올랐고, 4백~5백만 원의 프리미엄이 붙었다. 현대가 권력층에 속속들이 촉수를 뻗치고 있음이 드러났다.

출처: 1978년 7월 4일 동아일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으로 구속된 것은 정주영이 아니라 그의 차남 당시 한국도시개발주식회사 사장이던 정몽구였다. 당시 이선중 법무부 장관은 법사위 발언에서 "정주영 씨가 한건도 관련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나 개중에는 정 씨도 하고 그 형제를 통해 부탁, 분양받은 사람이 여럿 있다"라고 답변했다가 나중에 정주영 관련 발언을 번복했다. 거의 대부분의 권력 핵심층이 포함된 이 부패사건의 몸통은 누가 봐도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풋내기였던 정몽구가 아닌 정주영 회장이었지만, 그는 자신 대신 아들을 감옥에 보낸다.

전두환 신군부와 정주영의 정치자금

1968년 6월 11일 자 조선일보 '신흥재벌 어떻게 벌고 뭣을 하려나: 제4 집 「현대건설」계'란 기사는 '정치 타고 대공사 독점'을 부제로 달았다. 현대의 성장은 이승만의 자유당 시절에 이어 특히 박정희 정권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현대건설은 물론 1967년 현대자동차, 1973년 현대조선중공업의 성장과 설립은 박정희 정권의 중화학공업 육성책의 산물이다. 박정희와 정주영의 유착은 1970년대 말 현대와 재계 1, 2위를 다투던 이병철의 눈에도 결코 곱게 보이지 않았다. 이병철은 1978년 8월 박정희와 경제 관련 부처 장관들에게 「당면 경제정책상의 과제」란 건의문을 보내 "조선공장 하나에 3천6백억 원, 기계공장 하나에 2천억 원을 투자한다는 실례가 있다" "6천5백억 원 정도로 계획돼 있는 중화학 투자재원이 한두 개 대규모 공장에 집중투자"된다면서 박정희 정권의 정주영에 대한 지원을 노골적으로 견제했다.

박정희 정권의 몰락과 신군부의 등장은 현대에게 결코 반갑지 않았다. 민정당을 만들기 위해 거대한 정치자금을 필요로 했던 전두환의 신군부는 재벌들을 필요로 했지만 동시에 박정희의 재벌 육성정책과 중화학공업에 대한 과잉투자로 인한 박정권의 위기와 여론의 비판을 답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한편으로 재벌 특히 현대에 대한 견제를 강화했고, 일설에서는 정주영에게 전경련 회장직 사퇴를 강권했다고도 한다. 정주영의 현대는 정치권과의 결탁을 통해 성장했지만, 신군부의 견제에 대해 후에 자서전 《나의 살아온 이야기: 이 땅에 태어나서》를 통해 관주도 경제 폐해와 민간주도 경제로의 이행을 주장하고, 국제그룹 해산과 같이 “자신들의 비위에 안 맞으면 대기업을 하루아침에 공중분해"시키는 신군부에 강한 불신과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정치자금 제공에 인색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국책사업 사업자 선정과 금융세제 선처의 명목으로 1982년~1985년 7차례에 걸쳐 전두환에게 220억 원의 뇌물을 제공했다. 그는 1988년 국회 청문회에서 "시류에 따랐다" "왜 권력 앞에서 만용을 부리겠는가"라며 비자발성을 강조했지만, 정권과 정주영의 현대의 관계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일방적 강압이 아니라 서로의 편의를 위한 상호적 과정이었다.

1988년 국회 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한 정주영. 출처: 동아일보 1988년 11월 10일

정주영은 정치 입문을 선언한 1992년 1월 기자회견을 통해 박정희 정권 때 "처음에 추석과 연말에 매년 5억 원을 내다 나중에는 20억 원씩, 5공 때는 추석 때 20억 원 연말에 30억 원씩 각각 냈으며, 6공 들어서는 액수를 늘려 한번에 50억 원을 내고 마지막에는 한 번에 100억 원까지 냈다"라고 밝혔다. 기업들은 박정희 정권 당시 전경련 주도로 1968년 '정경간담회'를 발족해 약 1억 원을 선관위에 제공했다. 이 간담회는 1970년 다시 소집되어 기업을 규모별로 그룹으로 묶어 그룹당 3천~5천만 원을 모금했고, 정주영이 전경련 회장이 된 1977년에는 3억 5천만 원을 모금했다. 현대와 삼성 등 규모가 큰 10대 재벌은 5백만 원 이상을 냈다. 정주영의 1992년 발언은 이런 공식 루트 외에도 비공식 경로로 정치자금을 제공했음을 의미한다. 모든 거래가 그렇듯 '권력의 강압에 의한 일방적 정치자금 제공'은 기업이 받은 더 큰 대가가 누락된 기업 측이 일방적으로 쓴 동화에 불과하다.

경제에서 정치로, 정주영의 시련과 '실패'(?)

정주영은 여러 면에 이병철과 달랐다. 특히 공적 영역에 거의 발을 들이지 않았던 이병철과 달리 정주영은 10년 동안의 전경련 회장 연임, 88 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와 조직위원회 활동 등 공적 영역의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또한 전경련 회장 초기이던 1970년대 말 정치인들을 향해 '정상배'라는 발언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배포도 있었다. 그런 그가 19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나선 것은 그간의 행보를 보면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정경유착과 불법 정치자금 제공에도 불구하고 정주영이 이룬 사업적 성취는 대단한 것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사적 이윤과 시장원리에 따라 움직이던 사업과 달리 정치는 공적 가치와 민주적 원리에 따라 작동한다. 그런 그의 정치행보는 분명 모험이었다.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은 창당한 지 3달도 채 되지 않아 지역구 24석과 비례 7석을 확보하는 기염을 토하며 원내 교섭단체 구성은 물론 제3 당으로 부상했다. 그는 그해 말 통일국민당의 후보로 대선에 출마해 16.3%(388만 표)로 김영삼, 김대중에 이어 3위를 기록한다. 그의 득표율은 통일국민당 1천만 당원수는 물론 정주영 본인의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주영은 김영삼의 영남, 김대중의 호남, 그리고 제주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20% 이상의 높은 득표율을 보임으로써 단순히 '실패'로 낙인찍을 수 없는 성적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반값 아파트, 초중등 무료급식, 경부선 복층화, 국가보안법 폐지, 재벌해체 등 파격적이었다. 무료급식 공약은 지금 현실화된 것이고, 반값 아파트는 아직도 일부 정치인들 사이에서 매력적인 공약으로 채택되고 있다. 현대 계열사를 동원한 지구당 조직과 선거운동, 금품살포는 분명 낡은 정치적 방식이었지만 그의 정당과 정치는 기성 정당에 위협이자 신선한 자극이었다.

정치에 염증을 느껴 직접 정치를 바꿔보고자 정치에 직접 뛰어든 정주영은 성공하지 못했고, 이후 세무사찰 등 시련을 겪었지만 반드시 실패로 볼 수는 없다. 그는 수십 년 몸에 베인 불법 정치자금과 결탁을 통해 사업을 신장시켰고, 그 과정에서 정치에 대한 혐오감도 높았지만, 그 스스로 정치에 뛰어들음으로써 정치문법을 이해하게 되었다. '소떼 방북'과 금강산 관광 사업은 사업과 정치의 일선에서 물러난 정주영의 경제-정치학에서 나온 수들이었다. 사업과 정치에 거리를 두고 나서야 그는 그간의 과오를 성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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