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재벌 총수 수난사 혹은 범죄사 3: 삼성 이병철과 '반재벌 정서'란 프레임의 탄생

Zigzag 2021. 4. 4.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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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재벌화와 재벌체제의 성립

건국 이후 삼성의 불법정치자금을 물가상승률을 따지지 않고 액수의 총합으로만 보면 1,000억 원이 넘는다. 이미 2005년 자료에 따르면 삼성의 불법정치자금 규모가 건국 이후 860억 원을 넘었으니, 그 이후 최근 이재용 구속까지 계산에 넣으면 삼성의 불법정치자금 규모는 1,000억 원을 훌쩍 넘는다. 만약 물가상승률까지 고려한다면 그 규모는 일반인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다. 하지만 삼성의 창업자 이병철의 수난 아니 범죄는 그 양적 규모가 아니라 질적 내용에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핵이었던 미르-K스포츠 재단 불법자금은 전경련이란 창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전경련은 재벌과 정권을 잇는 가교이자, 이권단체라는 합법의 간판을 쓴 기업집단의 정치권에 대한 조직적인 불법의 창구였다. 이병철이 1961년에 뜬 전경련의 첫 삽은 반세기 후의 한국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소위 '근간'이 되었다. 이병철을 재벌을 조직화해 '재계'를 형성해 공공연하게 정치에 압력을 행사한 첫 주동자며, 불법행위를 하는 기업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을 '반기업 정서' 혹은 '반재벌 정서'로 프레이밍 해 고립시키려 한 첫 당사자이기도 하다.

식민지 시대 친일을 자본축적의 수단으로 삼았던 화신그룹의 박흥식은 해방과 더불어 반민특위 법정에 섰으며, 혼란의 해방공간과 전후 과정에서 이승만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여 정경유착으로 특혜를 받았던 태창의 백낙승은 이승만 정권과 함께 몰락했다. 4·19 혁명과 5·16쿠데타 이후 정치와 경제의 관계는 기존처럼 정치는 정권 유지를 위해 국가가 가진 자본(귀속 자본, 원조 자본, 금융 자본)을 기생 세력에게 분배하고, 기업은 국가에 기생하며 그 자본을 약탈하는 관계와는 달랐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독재 정권은 합법성을 위해 재벌을 육성했고, 재벌은 소비재 산업에서 본격적인 중공업화를 위한 자본의 저수지로서 해외차관을 분배하는 정권과 공조할 필요가 생겼다. 따라서 이 시기 정권과 기업의 관계는 기존처럼 산발적이고 개별적인 유착에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결탁으로 변화한다. 동시에 이 시기 재벌은 단순히 돈이 많은 부자와 구별되는 가족중심의 모회사를 핵심으로, 그것에 지배되는 여러 자회사가 다양한 산업을 경영하는 기업집단으로 각 산업부문에서 과점적 지위를 차지한다는 실질적 의미에서의 거대 자본으로 진화한다.

삼성이 재벌로 불리기 시작하는 시점은 1950년대 중반부터다. 1956년 4월 8일 동아일보 기사는 흥업은행(우리은행 전신) 귀속주식공매에 참여한 이병철 당시 제일제당 사장을 "신흥재벌"로 묘사하고 있다. 1962년 이병철과 조홍제(후에 효성그룹 총수가 됨)가 결별하기 전까지 삼성은 조선양조(1939년 인수), 삼성물산(1951년), 제일제당(1953년), 풍국주정(1953년), 제일모직(1954년), 천일증권(1956년), 안국화재해상보험(1956년), 한일은행(1957년), 효성물산(1957년), 근영물산(1957년), 한국비료(1957년), 동양제당(1954년) 등을 거느린 굴지의 재벌로 성장하게 된다. 그리하여 1960년 개풍(開豐), 대한산업(大韓產業), 삼호, 태창과 함께 대한민국 5대 재벌에 오른다. 1960년부터 이병철에 대한 호칭은 '사장' 대신 '회장'이 더 빈번하게 쓰이며, 이 호칭의 변경은 다른 그룹들에서도 나타났다. 재벌이 체계화되면서 기업에서 사장은 최고의 권위를 가진 직책이 아니며, 단지 소유권이 없는 경영책임자이며, 회장은 경영에 책임을 지지 않지만 군림하고, 소유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가 된다.

이병철의 불법정치자금과 삼성의 도약

삼성의 1950년대 재벌화는 당시 다른 재벌들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가진 귀속 자본, 원조 자본, 금융 자본이란 3대 자본의 전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제일제당은 18만 달러의 원조 자금, 상공은행의 2천만 환 대부, 원당 도입을 위한 국제협조기구(FOA) 자금 631만 달러 배정으로 국내 제1의 제당업체가 되었다. 제일모직 역시 대충자금 5억 8천3백만 환에 2억 여환 융자와 미국 대외원조자금 600만 달러, 그리고 원료는 미국 국제협조처(ICA) 자금으로 구매했다. 흥업은행 귀속 주식 공매 당시 이병철은 제일모직, 제일제당, 삼성물산 등 여러 회사 명의로 수억 환의 융자를 받은 상태였고, 이 자금을 상환하지 않은 상태에서 흥업은행 전체 주식의 52%에 해당하는 38만 3천5백 주를 13억 6십5백만 환에 낙찰받았다.

귀속 자본, 원조 자본, 금융 자본에 대한 이러한 이병철의 특혜는 정경유착없이는 불가능하다. 5.16 쿠데타 후 설립된 부정축재처리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이병철은 불법정치자금액이 약 4억 2천500만 환, 귀속재산 불하 부정액이 약 5,395만 환, 조세포탈액이 약 33억 5백만 환에 달했다. 이러한 비리와 부정에 기초해 삼성의 자산과 매출, 영업이익은 1955년~1963년 각각 28배, 19배, 31배로 증가했다. 하지만 이병철의 지휘 아래 똘똘 뭉친 재벌들은 부정축재처리법에 따라 1961년 8월 2일 부정축재처리위원회가 약 30개 기업체에 부과한 83억 1천만 원의 환수액을 일주일 후 47억 7천만 원으로 깎는 데 성공했고, 같은 해 말 이 액수는 다시 42억 8천만 원으로 줄었다.

1961년 부정축재처리위원회 경제인 11명의 부정축재액 규모. 출처: 경향신문, 1961.06.03

원래 환수액 통고일로부터 180일 이내 현금납부였던 조건은 3년 6개월 후 주식 납부로 변질되었다. 그럼에도 3년 6개월 후 통고액의 82.3%만이 환수되었고, 부정축재처리법과 헌법 개정 등으로 통고액 미납에 대한 실질적인 처벌 조치를 취할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기업들의 상당수는 통고액의 상당 부분을 한참 뒤에 현금으로 납부했는데 왜냐하면 그사이 소위 재벌들은 삼분파동의 사재기로 물가를 두배나 상승시켜 화폐가치가 절반으로 하락했기 때문이다. 1964년의 42억은 부정축재 환수 통보가 이루어진 1961년 가치로 보면 21억 원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환수금을 내야 한다는 명목 아래 이들 기업은 은행 대출과 차관 등의 특혜를 지속적으로 받아 결국 부정축재로 걸린 기업들일수록 더 큰 혜택을 받은 셈이다. 이 모든 작업들은 이병철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삼분폭리(三粉暴利)와 사카린 원료 밀수: 비양심적 기업에 대한 공분의 대중화

5·16쿠데타 이후 재정적자, 인플레이션, 자금압박에 시달리던 박정희 군부는 1962년 화폐 액면 표시 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바꾸며, 화폐가치를 절하하는 디노미네이션을 불시에 단행한다. 이 개혁으로 재정적자로 인한 실물경제 활동과 비교해 과도한 시중 유동성, 즉 과잉 유동성을 해소하고 부정축재자의 퇴장자금을 끌어내려 했으나 오히려 유동성 부족 사태로 산업활동이 위축되고 경제혼란이 가중되었다. 더구나 1960년대 미국 잉여농산물 원조의 감소, 1962년~1963년 대흉작으로 물가가 급등하기 시작했다. 1962년과 1963년 소비자 물가는 각각 221%와 30% 등귀했고, 도매 물가는 1960년~1964년 사이에 연평균 17.7%나 상승했다. 1964년 원·달러 환율이 100% 가까이 급등한 것도 물가 폭등에 치명적이었다. 이 물가상승에 기름을 부은 것이 소위 삼분폭리 사건이다.

삼분폭리(三粉暴利)는 1963년 이병철의 제일제당, 대한제분(동아그룹 계열), 대한양회(개풍그룹 계열)가 삼분(설탕, 밀가루, 시멘트) 값을 조작하여 폭리를 취한 사건이다. 이들 세 기업은 이 세 분야에서 각각 과점적 지위를 점하고 있어서 가격조작이 용이했다. 소맥 업자들이 배정받은 소맥을 압맥으로 매각해 15억 원의 폭리를, 제일제당 등이 주도해 선수입으로 들여온 원당으로 약 30억 원의 폭리를 거두었다, 대한양행과 동양시멘트는 10억여 원의 이득을 취했다. 재무부에 따르면 이들 삼분업체들은 50% 이상의 폭리를 얻었다. 이들 삼분의 판매액은 약 180억 원이었고, 약 40억 원의 과세가 가능했음에도 최종 과세액은 4억 원에 불과했다. 이러한 시장의 독점적 위치에 기초한 가격조작으로 1년 만에 밀가루는 한 부대에 355원에서 784원으로, 시멘트는 40킬로 한 부대에 150원에서 200원으로, 설탕은 600g에 30원에서 160원으로 올랐다. 이러한 삼분폭리는 당시 '반민족 행위'로 대중의 지탄 대상이 되었다. 당시 군부의 물가 통제로 이들 삼분은 고시 가격이 정해져 있었지만, 이병철의 제일제당 등은 고시 가격의 3배~4배에 달하는 가격조작과 세금포탈을 했다. 박정희 군부의 물가통제 정책은 삼분폭리로 기만성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하지만 그러한 기만성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삼분기업의 폭리가 상당 부분 공화당에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미 부정축재 1위로 대중의 지탄을 받고 있던 이병철은 삼분폭리로 궁지에 몰리게 됐다.

이 삼분폭리 사건은 재벌의 지배력 강화와 억제라는 서로 다른 두 방향에서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재벌의 지배력 강화와 관련해서 보면, 이병철은 삼분폭리를 보도한 경향신문을 상대로 고소를 진행하였고, 1965년 자신들의 신문인 중앙일보를 창간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보도를 계기로 군부는 경향신문에 압박을 가해 결국 강제매각되었다. 재벌에 대한 억제 압력은 공정거래제도 입법 추진으로 나타난다. 1964년 야당은 삼분폭리로 독점재벌에 대한 규제 여론이 비등해지자 총 29개 조로 구성된 공정거래관련법을 제출하지만, 이병철 등 재계의 반대로 무산된다. 그러나 이 시도는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결국 1980년 공정거래법 제정으로 결실을 보게 된다(1975년에 물가안정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기도 했다).

이병철의 수난 혹은 범죄는 1966년 사카린 원료 밀수 폭로로 정점에 이른다. 삼성은 사카린 원료 58t을 한국비료 공장건설 자재로 위장해 밀반입하여 시중에 판매하다 세관에 적발된 사건이다. 1965년 말에 시작된 밀수는 1966년 6월 부산 세관에 적발되어 2,000만 원의 벌금을 받고 끝나는 듯했으나, 9월에 경향신문 보도로 다시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하여 중앙일보 매체들이 동원되어 '2백억 원의 재벌이 2천만 원 밀수를 했기로서니'라며 여론을 호도하려 했던 게 오히려 불붙는 여론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급기야 이병철은 한국비료 주식 51%를 국가에 헌납하고 경영일선에서 잠시 물러난다. 당시 이병철은 사카린과 함께 전기밥솥 등 현금화하기 쉬운 전자제품들도 함께 밀수했다. 이 밀수 현장을 지휘했던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는 이 밀수가 박정희와의 밀약 속에서 진행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일본 미쓰이의 한비공장 기계 공급 계약 조로 100만 달러의 리베이트를 이병철에 제공했고, 그 과정에서 정치자금이 필요했던 박정희는 밀수품의 국내 판매로 자금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이병철은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구체적으로 이름을 밝히지는 않지만, 그 사건이 특정 정치인과 관련이 있다고 언급했다. 이병철은 처음에 차남 이창희와 상의하여 밀수했다는 초기 발언을 나중에 검찰에서 번복해, 한국비료 생산공정에 필요한 자료라고 우겼다. 그는 자서전에도 똑같은 주장을 반복했지만, 이창희와 관련자들은 검찰에서 사카린 재료가 비료생산과 관련이 없었음을 실토했다.

이병철, 재벌의 조직화와 '반기업 정서' 프레임의 탄생

이병철은 최초로 조직화했고, '반기업 정서' 혹은 '반재벌 정서'라는 프레이밍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그는 1961년 한국경제인협회를 발족한다. 표면상 정부의 요청으로 경제계 내부 의견조정을 위해 만들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정부의 압박에 대항해 재계의 목소리를 모아내기 위한 조직이었다. 이미 초대 회장단이 부정축재혐의로 구속된 12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경제인협회는 전경련의 전신으로 이병철이 일본의 게이단렌(経団連)을 모델로 만든 것이다.

역대 경제인협회 간담회에서 화환을 받는 이병철, 1965년. 출처: 호암자전

이병철은 부정축재환수가 서서히 잠잠해지던 시점인 1963년 재벌그룹 회장으로는 드물게 공격적인 여론 공세를 벌인다. 그는 「우리가 잘사는 길」이라는 제하의 연재 글을 1963년 5월 31일부터 6월 5일까지 5회에 걸쳐 한국일보에 연재하였다. 이병철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이 연재는 "그때의 심정을 숨김없이 솔직하게 피력한 것", 아니 이 연재는 그의 심정뿐만 아니라 재계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글이었다.

이 글에서 이병철은 당시 수출지향보다는 수입대체로 농공병진을 추진하던 박정희 정권을 향해 노골적인 농촌 수탈과 대기업 육성을 요구하였다. 그는 농촌에 대한 향수와 중농정책을 버리고 원조물자가 줄어드는 시점에 과감히 외국 차관으로 성장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여 재벌에 투자하는 중공업 정책으로의 전향이 필요하며, 중소기업을 육성하기보다는 대기업을 먼저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제안은 농촌을 수탈해 유휴노동력을 도시로 흘러 들어가게 함으로써 값싼 노동력을 획득하고, 재벌 중심으로 경제를 재편하자는 과감한 제안이었다. 이병철의 제안은 1972년 유신독재와 중화학 공업 추진으로 현실화하였다.

이러한 제안과 함께 그는 "기업인을 죄인 취급하거나 기업의 성장을 죄악시하는 사회 풍조의 시정"을 요구하였다. 이병철의 이러한 주장은 후에 전경련이 기업의 불법적 행태에 대한 비판을 '반기업 정서' 혹은 '반재벌 정서'로 프레이밍 하는 단초를 마련했다. 이병철은 기업의 부패와 비리를 변명하기보다는 그 비판자들을 향해 오히려 경제발전에 저해가 되는 '반기업 정서'와 '반재벌 정서'를 퍼뜨리는 이들로 죄악시하는 역 프레임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가 전경련을 조직하고, 한국일보에 연재하고, 경향신문을 고소하고, 중앙일보를 설립한 것은 재벌의 정치와 사회, 다른 말로 하면 정책 결정과 여론 형성에 대한 조직적 영향력의 행사가 본격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경련은 정치권에 대한 로비와 자금의 창구가 되어 정책 결정에 개입하고, 반대 여론에 대한 겁박과 자기 언론의 창출은 여론의 형성에 영향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후의 역사 과정에서 드러나듯 전경련은 새로운 정권의 창구가 되어 재벌들의 규모에 따른 불법정치자금 제공액 배당의 거간꾼 노릇을 해왔고, 소위 X-파일 사건에서도 드러나듯 재벌의 언론은 여론을 좌우해 권력에 개입해왔다. 이병철은 금권정치를 통한 민주주의 훼손의 실질적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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