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영화

레마르크의 원작을 왜곡한 2022년 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 마케팅을 위한 원작 제목만 차용한 전쟁 통속물 블록버스터

Zigzag 2023. 2. 28.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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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Im Westen nichts Neues, 영어 제목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는 작가 자신의 1차 대전 참전에 기초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1차 대전에 참전한 독일군 지원병 파울 보이머가 전장에서의 죽음과 아픔, 불안, 공포, 불합리, 분노, 그리고 허무함을 맛보고 결국 전사할 때까지를 그린 이야기이다. 1차 대전 당시 독일은 전쟁이 몇 개월이면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독일의 예상을 비웃듯이 독일의 서부전선의 정세는 장기적인 참호전으로 접어들면서 연합군과 독일군 사이에서는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파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대한 고뇌와 외부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참상이 잘 대비되었기에 전재의 고통을 경험한 병사들은 물론 비전투 요원들까지 이 작품이 그린 전쟁의 참상과 비인간성에 공감하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전쟁에서의 용기와 우정, 애국심을 소설에 담고 있지만, 병사들의 물리적 육체의 말살은 물론 내면적 인간성의 파괴가 생생하게 묘사되면서 반전문학의 명성을 얻게되고 결국 나치 치하에서 금서가 되었다. 이 작품은 1930년 영화로 각색되어 상연되었고 오스카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았고, 1979년 CBS의 텔레비전 작품은 골든글로브를 받았다. 이 작품들은 모두 영미권에 의해 제작되었다. 하지만 2022년 에드바르트 베르거(Edward Berger)의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최초의 독일에 의한 영화화이기에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기존까지 오스카 레이스에서 크리틱스 초이스와 미국 제작자 협회의 작품상, 미국 배우조합상 앙상블상을 받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에 눌려 별 주목을 받지 못하던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BAFTA) 작품상을 수상하며 단숨에 주목받는 영화가 되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라는 제목과 일부 등장인물들의 이름만 같을 뿐 거의 원작과는 다른 내용임에도 원작의 유명세를 이용하기 위해 원작의 제목을 차용하는 교묘한 상술을 부리고 있다. 영화는 소설과 다른 예술의 영역이기에 원작과 다를 수 있다. 문제는 베르거의 '서부전선 이상없다'가 단지 원작의 일부를 수정 각색하거나, 재해석에 그치지 않고 원작과 완전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원작의 제목을 상술을 위해 차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베르거의 영화는 원작의 반전 메시지를 살리기 보다는 전쟁의 참상을 블록버스터의 스펙타클과 볼거리로 전시하고 있으며, 전범국 독일과 그 전쟁의 자원자들을 인도적으로 묘사하고 대신 피해국인 프랑스를 잔혹하게 그렸다. 특히 마지막에 주인공 파울 보이머가 프랑스 병사가 등뒤에서 찌른 총검에 의해 죽는 장면은 1차 대전이 유대인이나 급진주의자들의 내부 분란과 등뒤에서의 공격 때문이라는 전쟁책임 회피를 노리는 독일 우파들의 논법을 닮았다. 또한 독일의 휴전 요구에 무조건 항복을 주장하고 과중한 요구를 내거는 프랑스에 대한 영화의 묘사는 독일의 2차 대전이 독일에 대한 무리한 전쟁배상금 때문이라는 나치의 논리를 연상시키기에 원작에 대한 각색을 넘어 왜곡의 의혹을 받고 있다. 따라서 영미권과 달리 여전히 전범국 과거의 부채를 지고 있는 독일에서 비평가들은 이 영화에 대해 그리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지 않다. 이 글은 독일 정론지 쥐트도이췌 차이퉁(Süddeutsche Zeitung)의 국제부 부국장 Hubert Wetzel의 2022년 10월 29일 자 기사 "Im Westen nichts Neues" bei Netflix: Schlammschlacht의 번역으로 에드바르트 베르거의 2022년 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가 원작과 어떻게 다르고, 원작을 어떻게 훼손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왜 원작의 타이틀을 전용하는지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넷플릭스의 '서부전선 이상없다':

진흙탕 개싸움

'서부전선 이상없다'의 펠릭스 캄머러(Felix Kammerer). 사진: Reiner Bajo/dpa

넷플릭스 '서부전선 이상없다'의 재촬영이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의 소설 작품과 거의 관련이 없는 이유.

Hubert Wetzel

에리히 파울 레마르크(Erich Paul Remark, 에이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본명)는 1917년 7월 젊은 신병으로서 플랑드르의 최전선에 불과 몇 주 있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부상을 입었고 1차 세계대전의 나머지를 독일의 한 병원에서 보냈다. 그러나 이 짧은 전쟁 기간 동안 독일어로 쓰여진 가장 중요한 책들 중 하나가 나왔다. 1929년에 이 전직 병사는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라는 이름으로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Im Westen nichts Neues)를 출판했다.

레마르크는 서부 전선에서의 전쟁을 종말론적 광기로 묘사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전쟁과 반전 문학의 고전이 되었고, 한 나라의 위대함은 그 나라의 젊은 남성들이이 이웃 나라의 남성들을 죽이는 것에 달려있다는 생각에 반대하는 종이에 인쇄된 기념비가 되었다. 그 첫 번째 영화화는 1930년에 두 개의 오스카상을 받았다.

이것들은 사실 이 소설로 합리적인 일을 하기 위한 최고의 전제조건이다. 하지만,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는 금요일부터 상영되고 있는 '서부전선 이상없다'라는 새로운 영화로, 아마도 나쁜 영화로 만들 수 없을 만큼 좋은 책은 없다라는 모든 문화 비관론자들이 가진 가장 오래된 편견을 확인했다.

감독이 원고를 읽었지 궁금할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사실이 아니다. 독일 감독 에드바르트 베르거(Edward Berger)와 그의 팀 그리고 배우들은 꽤 인상적인 전쟁 영화, 어쩌면 반전 영화를 만들었다. 아직 그것을 알지 못했지만 알고 싶은 사람들은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보면 1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종류의 살해와 죽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군인들은 수류탄으로 찢어지고, 총알에 관통되고, 독가스로 질식사하고, 무너진 벙커 천장에 묻히고, 탱크 체인에 의해 짓밟히고, 적들에게 칼과 총검으로 찔리고, 삽으로 맞아 죽었다. 이 영화는 이 모든 것을 현실적인 잔인함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는 또한 참호에서의 비참한 삶을 묘사한다. 계속되는 비는 프랑스 북부의 전투로 황폐해진 평야를 늪으로 만든다. 군인들은 겁에 질려 참호에 쳐박혀 있고, 진흙탕을 기어다니고, 질퍽한 땅을 건너고, 갈색 혹은 피로 붉게 물든 물로 가득 찬 대포 구덩이에 빠진다. 도랑 앞에 있는 철조망에는 시체들이 매달려 있고, 대피호로 쥐들의 무리가 달려든다. 서부 전선에서 전해지는 모든 것들로 볼 때, 베르거의 영화가 그린 이미지는 현실과 매우 가깝다. 그것은 성과이다.

불행하게도, 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책 '서부전선 이상없다'에 매우 건성으로만 접근한다. 이 영화가 상영되는 거의 2시간 30분 동안, 사람들은 때때로 베르거 감독이 레마르크의 소설을 읽었는지 궁금해한다. 아니면 만약 그가 그것을 읽었더라면, 그것은 단지 그와 그의 시나리오 작가들이 가능한 한 많은 새로운 자료를 꾸며낼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많은 원본 자료를 삭제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어쨌든, 대략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는 이 책과 거의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혀 관련이 없는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만약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파울 보이머(Paul Bäumer), 알레르트 크롭(Albert Kropp), 카트(Kat)와 같이 책에서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 두 작품들 사이에 주목할 만한 유사점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의 영화에서 베르거는 다니엘 브륄(Daniel Brühl)이 연기한 정치인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Matthias Erzberger, 독일의 1차 대전을 지지했지만 후에 이에 반대하며 독일 제국의 대표로 연합군과의 휴전협정에 서명한 가톨릭 정치인 - 역자 주)와 같은 인물들을 자유롭게 추가했다. 감독은 소설의 중심인 다른 등장인물들과 장면들을 생략하거나, 그것들을 줄이고, 그것들을 너무 극적으로 변화시켜, 마치 그들이 촬영이 끝날 때쯤 레마르크 목록의 최고를 삭제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 소설에서, 젊은 독일 군인 보이머가 그가 칼로 찔러 천천히 죽어가는 프랑스인 옆에 있는 포탄 구덩이에서의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은 베르거에게서 여러 공포들 중 공포의 몇 장면이라는 몇 분간의 사소한 일들로 축소되었다.

영화에서 베르거는 몰락한 신병 보이머의 보호자이자 아버지 모습의 군인 카트에게 천연두로 죽은 10살 난 아들이 있다고 꾸민다. 왜? 감독은 그것을 밝히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카트가 계란을 훔치는 동안 약 10살 난 프랑스 농부의 소년에게 총을 맞는 후기 장면과 극적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심지어 1929년에 이 소설에 간결한 제목을 준 짧은 에필로그도 베르거가 다시 썼다. 레마르크에서 파울 보이머는 전쟁이 끝나기 몇 주 전에 우연히 쓰러졌다. "모든 전선에서 너무 고요하고 조용해서 군에 대한 보고는 서부전선에서는 보고할 새로운 것이 없다는 문장으로 제한되었다." 대조적으로, 베르거의 영화에서 보이머의 죽음은 마지막 극적인 폭풍 공격 도륙의 절정이다. 휴전이 시작되기 몇 초 전에 그는 총검에 찔렸다. 베르거는 간단하게 내용과 제목 사이의 중요한 연결을 끊는다. 만약 미국 감독이 레마르크의 책을 영화화시키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여기 저기 칼질했다면, 독일 문화계의 아우성은 엄청났을 것이다.

물론 에드바르트 베르거에게는 레마르크가 충분한 속도와 액션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의 대본에 쑤셔넣을 권리가 있다. 넷플릭스를 설득하고, 자본조달자를을 찾아야 했던 베르거는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며, 상을 타기를 원한다. 그 모든 것이 합법적이다.

그러나 베르거가 너무 동떨어지게 자기자신이 쓴 영화를 진지하게 '서부전선 이상없다'의 각색으로 팔고 있다는 것은 꽤 뻔뻔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영리한 마케팅에 관한 것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즉, 적당한 전쟁통속물의 148분간의 블록버스터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제목을 제공하는 것은 명성과 좋은 판매를 보장한다. 어쩌면 오스카상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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