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재벌 총수 수난사 혹은 범죄사 1: 재벌의 등장, 화신(和信) 박흥식과 반민특위

Zigzag 2021. 3. 23.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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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수난사'란 프레이밍

재벌 총수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되면 언론은 곧장 '재벌 수난'이란 연대기를 쓴다. 모든 연대기가 그렇듯 언론이 '재벌 수난사'로 쓴 연대기는 팩트를 가장한 주관적 역사다. 연대기의 작가의 시점에 따라 특정 사건이 선별되고 배치된다. 그 주관적 역사 편집이 아니라도 기사의 제목이 '재벌 수난'으로 프레이밍 되는 순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자동으로 민족 수난, 그리스도 수난, 재해민 수난처럼 약자의 피해가 연상된다. 하지만 수난으로 프레이밍 되는 재벌 총수의 구속과 재판, 수형이 그들에 대한 부당한 압박과 동일어는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재벌 총수의 심판은 그들의 범죄의 결과인 경우가 많다. 재벌 수난사는 재벌 범죄사와 함께 기록되어야 한다.

이 연재 글은 재벌, 구체적으로는 재벌 총수들이 겪었던 수난 혹은 범죄의 연대기다. 한국 재벌들의 수난 혹은 범죄를 논하면 흔히 '정경 유착'을 연상하기 쉽다. 한국 재벌의 형성사가 국가가 독점한 재원의 분배에서 시작되기에 정경 유착은 이들 수난과 범죄에서 뗄 수 없는 현상이지만 그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용어는 아니다. 우선 정경유착이란 말 자체가 그 어순이나(경정 유착이 아닌), 일반적으로 알려진 정치권의 능동성과 기업의 수동성으로 그 반대 현상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기업은 박정희와 전두환의 독재 서슬이 퍼렜을 때도 그들의 이권을 위해서는 단지 수동적인 존재만으로 머물지 않았다. 또한 공정거래법과 기업집단에 대한 회계와 투명성이 강화되고, 민주화가 본격화된 1980년대 중반 이후 재벌 총수들의 수난이나 범죄는 조세포탈, 불법증여, 횡령, 자금세탁 등 화이트칼라 범죄가 정경유착을 압도한다.

재벌 담론의 등장과 식민지 조선에서 재벌의 의미

수난과 범죄의 연대기를 기록하기 위해서는 우선 재벌은 무엇이고, 언제부터 재벌이 형성되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재벌이라는 말 자체는 1900년 전후 일본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근대화와 함께 산업과 금융이 후발주자인 일본에서 중요 부문으로 떠오르자 돈(money)과 금융(finance)을 표현할 어휘로 재물 재(財)자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재계( 財 界, ざいかい, zaikai ), 재무( 財 務, ざいむ, zaimu ) , 재정( 財 政, ざいせい, zaisei ) , 재벌(財閥, ざいばつ, zaibatsu )와 같이 일본에서 18~19세기에 번안어로 널리 사용되던 어휘들이 20세기 전후, 특히 일본의 팽창정책에 따른 식민지 산업화와 함께 1920년대 이후 한반도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재벌이란 용어가 대중화된 것은 일본의 국민신문(国民新聞) 기자 출신 야마지 아이잔(山路愛山)이 1907년 『상공세계태평양(商工世界太平洋)』에 20회에 걸쳐 연재한 기사를 『현대금권사(現代金権史)』 라는 책으로 1908년 출판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일본의 거대 재벌 미쓰이, 미쓰비시는 일본 '봉건제' 해체와 함께 몰락한 사무라이 집안에서부터 출발했다. 야마지는 토지봉건이 해체되고 그자리를 금봉건이 대체했다면서, 재벌의 전제적, 독점적 성격을 비판했고, 그의 이러한 분석으로 사람들은 당시 특정 가문에 의해 지배되는 거대 기업집단을 명명하고 분석할 어휘를 얻게 됐다.

재벌이 식민지 조선에서 사용된 용례는 1920년부터 찾아 볼 수 있다. 1920년 7월 8일 동야일보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법률상 아모 차별이 없다하되 정치계의 주요 지위를 점한 자는 재벌(財閥)이나 군벌(軍閥)이 아니면 권벌(權閥)이라"고 쓰고 있다. 공산주의 사상과 무정부주의를 고취하는 "불온"한 글로 고발당한 1920년 《개벽) 12월호에 공산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 였던 유진희의 글 "일절의 재벌의 발호에서, 일절의 관벌의 위압에서 일절의 소유와 전통에서, 일절의 가정적 정조에서 분리"를 강조했다.

수난과 범죄의 연대기를 기록하기 위해서는 우선 재벌은 무엇이고, 언제부터 재벌이 형성되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재벌이라는 말 자체는 1900년 전후 일본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근대화와 함께 산업과 금융이 후발주자인 일본에서 중요 부문으로 떠오르자 돈(money)과 금융(finance)을 표현할 어휘로 재물 재(財)자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재계(財界, ざいかい, zaikai), 재무(財務, ざいむ, zaimu), 재정(財政, ざいせい, zaisei), 재벌(財閥, さ いは つ, zaibatsu)과 같이 일본에서 18~19세기에 번안어로 널리 사용되던 어휘들이 20세기 전후, 특히 일본의 팽창정책에 따른 식민지 산업화와 함께 1920년대 이후 한반도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재벌이란 용어가 대중화된 것은 일본의 국민신문( 国 民新聞) 기자 출신 야마지 아이잔(山路愛山)이 1907년 『상공세계태평양(商工世界太平洋)』에 20회에 걸쳐 연재한 기사를 『현대금권사( 現代金権史 )』 라는 책으로 1908년 출판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일본의 거대 재벌 미쓰이, 미쓰비시는 일본 '봉건제' 해체와 함께 몰락한 사무라이 집안에서부터 출발했다. 야마지는 토지 봉건이 해체되고 그 자리를 금봉건이 대체했다면서, 재벌의 전제적, 독점적 성격을 비판했고, 그의 이러한 분석으로 사람들은 당시 특정 가문에 의해 지배되는 거대 기업집단을 명명하고 분석할 어휘를 얻게 됐다.

재벌이 식민지 조선에서 사용된 용례는 1920년부터 찾아볼 수 있다. 1920년 7월 8일 동아일보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법률상 아모 차별이 없다 하되 정치계의 주요 지위를 점한 자는 재벌(財閥)이나 군벌(軍閥)이 아니면 권벌(權閥)이라"고 쓰고 있다. 공산주의 사상과 무정부주의를 고취하는 "불온"한 글로 고발당한 1920년 《개벽) 12월호에 공산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유진희의 글 "일절의 재벌의 발호에서, 일절의 관벌의 위압에서 일절의 소유와 전통에서, 일절의 가정적 정조에서 분리"를 강조했다.

식민지 조선의 재벌의 벌(閥)은 군벌, 문벌, 권벌, 원로벌(元老閥), 군벌겸재벌(軍閥兼財閥)처럼 특정 부문의 권력자 혹은 집단을 칭하는 일종의 접미어였다. 문벌 벌(閥)자는 아직 구질서의 그림자가 남아 있지만, 권력의 중심이었던 왕이 사라진 상황에서 신흥 권력자 혹은 권력층을 설명하기 위한 근대인들 나름의 노력이었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재벌은 일본과 중국의 산업과 상업계 권력층을 위한 용어였을 뿐 조선인에게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재벌이 오늘날과 같이 가족 또는 동족에 의해 출자된 모회사(지주회사)를 핵심으로, 그것에 지배되는 여러 자회사가 다양한 산업을 경영하는 기업집단으로 각 산업부문에서 과점적 지위를 차지한다는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은 1970년대 일본의 재벌 연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야수오카 시게아키(安岡重明)의 1970년 『재벌형성사 연구( 財閥形成史の研究 )』와 모리카와 히데마사(森川英正)의 1978년 『일본재벌사(日本財閥史)』 , 특히 위의 재벌에 대한 아수오카의 정의는 이후 한국에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왜냐하면 1953년 한국전쟁 종식 이후 계열화가 급속히 진행된 한국 기업집단의 총수와 그 가족을 중심으로 한 산업부문의 지배는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로 더욱 강화되었고, 일본에서 발달한 재벌의 정의는 재벌이 해체된 전후 일본 기업집단보다 한국의 기업집단에 더 적합한 설명이었기 때문이다.

화신(和信) 박흥식, 한국 최초의 재벌

보통 한국 최초의 재벌은 태창의 백낙승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당대 사람들 속에서 최초의 재벌로 인정받은 사람은 화신(和信)의 박흥식이다. 1939년 1월 4일 조선일보의 '우리 상권을 장성 너머로'라는 기사에서 조선기업의 해외무역을 "재벌진출'로 표현하며 박흥식의 화신무역사가 주목할만한 기업이라고 적고 있다.

박흥식은 이미 20세이던 1920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인쇄업으로 성공했으며, 1925년 면화와 미곡을 유통하는 서선흥산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장사에 소질을 보였다. 본격적인 사업 확장을 위해 그는 이듬해인 1926년 서울로 이주하여 자본금 25만 원(2021년 기준 약 320억 원)으로 설립한 선일지물을 설립한다. 그는 1931년 자본금 100만 원으로 화신상회를 설립했고, 1934년 주식회사 화신으로 상호를 변경하며 전국 350개의 연쇄점 망을 구축한다. 1935년 화신백화점 화재로 약 50만 원의 피해를 보았지만 박흥식은 같은 해 조선석유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북조선제지화학공업 대표로 취임하고, 대동공업 주식회사를 자본금 2백만 원으로 설립한다. 1937년에는 자본금 50만 원으로 제주도흥업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38년에는 화신무역부를 신설한다. 그리고 1939년에는 대동직물 주식회사, 화신무역(자본금 275만 원)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조선인 최초로 만주, 중국, 몽고, 동남아, 남아시아, 미국 등에 무역로를 개척하고, 양은제품, 명태, 운동화 등을 수출한다. 박흥식은 기존 회사들을 합병하여 자본금 5백만 원으로 화신상사 주식회사를 설립한다. 그리고 1944년에는 자본금 5000만 원(2021년 기준 8조 원)으로 조선비행기공업 주식회사를 설립하며, 1945년에 이 회사가 군수공장으로 지정된다.

박흥식은 제지, 무역, 유통, 중공업 등 다양한 방면에 진출하여 문어발식 확장을 하였기에 앞서 정의한 재벌에 근접한 최초의 조선 기업인이었다. 그의 부는 하지만 식민치하에서 형성된 것으로 해방과 더불어 시험대에 오를 운명이었다.

자본축적으로서 박흥식의 친일행위, 반민특위 재판정에 서다

한국 최초의 재벌의 첫 수난 아니 범죄로 인한 구속은 친일에서 비롯되었다. 박흥식의 첫 시련은 해방과 함께 시작됐다. 그는 1946년 2월, 장물죄, 횡령죄, 사기죄, 포고령 위반죄로 구속되었다. 첫째 그는 조선비행기공업 주식회사 손실보상 명목으로 일본의 조선군사령관으로부터 받은 자금 중 1,300만 원을 착복하였고, 둘째 조선비행기공업회사 노사문제 해결 명목으로 조선군사령관으로부터 받은 2천여만 원을 노동자들에게 주지 않고 조선은행, 식산은행 등에 친인척과 화신이름으로 예금해 착복하였고, 셋째 군부로부터 주가 보상으로 1주당 25원으로 약 1,200만 원을 받아놓고 주주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자신의 은전적인 태도로 이를 돌려준 것처럼 기만적 행위를 했으며, 넷째 그는 포고령을 위반하고 서울시민에게 배급할 섬유잡화 수천만 원어치를 공정가격의 수십 배에 팔아 400만 원의 부당이득을 취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일제하의 문제와 친일문제에 대해서는 재량권이 없으며 나머지 문제는 증거불충분과 피고인의 소명으로 충분하다는 명목하에 무죄로 78일 만에 박흥식을 석방했다.

이 재판의 무죄로 박흥식의 수난, 아니 그의 범죄가 완벽하게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1949년 반민특위의 활동으로 더 큰 심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 통과 직후 이미 체포의 기미를 알아채고 외무부로부터 미국행 여권을 발급받아 도피를 준비하던 박흥식은 1949년 1월 8일 반민특위에 의해 전격 체포되었고 여권을 압수당한다. 그는 반민법 제4조 7항(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 경영한 자)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반민특위는 박흥식이 적지 않은 "금전을 가지고 일제의 역대 총독 지하의 수뇌자들과 결탁하여 한국인으로서 최고의 친일 재벌이 되었고, 따라서 조선사람의 모든 중소상공업자를 도탄에 잡아넣고 민족의 고혈을 착취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일지사변을 위시하여 일본의 침략전쟁인 대동아전쟁의 발생하자 경제계에서 정치계로 침입하여 징병 지원병 징용 등을 주장하였고, 마침내 비행기 공장까지 경영하여 일본 정부에 모든 힘을 바쳤다"며 구속기소의 명분을 제시했다.

1949.03.01 동아일보 박흥식 기소요지

박흥식은 총독부의 강요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고 재판정에서 진술했지만, 이미 1946년 재판에서 그는 현재 가치로 약 3조 원에 해당하는 2천만 원의 자금을 노동자들에게 지급하지 않고 횡령했다. 친일은 그의 자본축적을 위한 경제활동의 일환이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주요 신문에 종이를 공급하던 그의 선일지물의 물량확보는 총독부의 협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그의 전국 연쇄점 망은 지방의 상인들을 질식시켰다. 그의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는 총독부의 물적 지원과 기술지도, 인적 훈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반민특위 자체가 반공 이데올로기 속에서 무력화되면서 결국 구속 104일 만에 무죄로 석방된다. 하지만 박흥식은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이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사업에 연이어 실패하고,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로 그가 새롭게 설립한 화신전기 등이 위기를 맞으며 결국 1980년 그의 그룹도 해체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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