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재벌 총수 수난사 혹은 범죄사 2: 해방공간과 정경유착의 공간, 태창 백낙승과 대창 최창학

Zigzag 2021. 3. 30.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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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재편과 기업의 형성: 해방공간의 동학과 정경유착

친인척들이 모여 만든 소규모의 회사(company)가 아닌 일정한 규모를 가진 기업(corporation)은 소위 선진국 후진국, 동서양을 막론하고 발생 초기부터 국가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발생했다. 최초의 주식회사/다국적 기업인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나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국가의 인허(charter)를 받은 기업이고, 식민지 개척과 함께 경찰과 군사력을 갖춘 거의 소규모 주권자 역할까지 했었다. 서양에서 기업의 탄생은 공간의 재구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전쟁 속에서 행정과 세제를 정비해 나간 근대국가는 전쟁 비용의 마련을 위해 기업이 필요했고, 근대국가는 민족국가의 국경이란 공간을 만들어냈다. 또한 기업은 소위 지리상의 발견이라는 서구의 식민사업의 실질적 대리자였다.

해방공간은 서구와는 다른 공간적 재편이었다. 기존 시간으로서 식민지 역사는 붕괴하고, 아직 새로운 역사는 시작되지 않았다. 위기의 시대는 문자 그대로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는 시대며, 당대의 해방공간은 그 위험과 기회를 안고 있던 장이었다. 그 장을 지배하는 규칙이 아직 공고하지 않고 유동적이기에 매 행보가 도박일 수 있으며, 그 도박의 승패에 의해 그 장의 룰이 정해진다. 정치 세력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기업인들은 자본을 획득하기 위해 위기를 활용했고, 그 해방공간이 가진 특유의 위기의 동학이 그들의 결탁을 촉진했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 국가와 기업 역시 긴밀한 관계였지만 그 성격은 국가의 정비보다는 국가자원의 약탈을 위한 정치와 경제의 유착 성격이었다. 식민지에서 막 해방된 미군정 하의 남한과 대한민국의 기업에 국가는 거대한 자본의 저수지였다. 해방 이후 1960년대 이전까지 국가는 기존 자본, 해외 유입자본, 금융자본이라는 이 세 측면에서 실질적 관리 주체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국가는 일본이 남기고 간 귀속재산의 처리, 한국전쟁과 함께 미국에서 제공된 원조물자의 배분, 원조물자 판매와 함께 적립된 대충자금과 은행 대출의 관리의 주체였기 때문에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전후 국가와의 관계는 기업의 흥망과 직결되었다.

귀속자본, 원조자본, 금융자본의 공간으로서 국가: 자본축적 수단으로서 정경유착

일제 말 총 공업자본의 약 94%가 민족자본이 아니었으며, 미군정이 몰수한 일본 기업 수는 6,881개로 전체 법인 불입자본금의 91%를 차지했다. 이 가운데 약 2,700개의 기업이 불하되었다. 1947년과 1948년 가동 중인 귀속공장은 수적으로 전체 공장의 25%에 불과했지만, 노동자 수는 약 50%, 공산액에서는 약 1/3을 차지해 귀속업체들의 규모가 비교적 컸음을 알 수 있다. 귀속 기업들은 원래 가치의 1/10 가격으로 불하되었다. 그 중 70% 이상, 특히 대규모 사업체들의 경우 경쟁입찰이 아닌 우선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불하됐다. 물론 우선권을 받은 이들의 대부분은 이승만의 자유당계 기업인들이다.

귀속 재산이라는 기존 자본 외에도 국가는 미국 원조물자의 배분 주체였다. 1945년부터 1965년까지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받은 경제원조는 약 39억 달러로 매년 거의 2억 달러 상당의 원조를 받은 셈이다. 39억 달러는 지금의 가치로 따지면 약 400억 달러에 해당한다. 마셜플랜으로 서유럽 16개국이 받은 자금이 130억 달러, 가장 많은 지원을 받은 영국이 34억 달러, 그다음 독일이 14억 달러임을 고려하면 냉전의 전초기지였던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막대했음을 알 수 있다. 원조물자는 시중환율의 절반도 안 되는 공정환율에 따라 배정되었기 때문에 원조물자를 배정받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특혜였다. 또한 원조물자 판매로 마련된 대충자금도 특혜금리로 받아 별도의 생산 없이도 원조물자 불하만으로 자본축적이 가능했다. 이 대충자금의 규모는 1957년 전체 국가 세입 규모의 약 53%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나아가 이 원조물자는 삼백 산업이라 불리는 면직, 제분, 제당을 중심으로 한 초기 재벌 형성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삼성의 오늘을 가능케 한 제일제당은 1954년~1958년 사이 원당 도입 국제협조기구(FOA)자금 1,587만 불 가운데 631만 불을 배정받았다

귀속재산과 원조물자의 특혜적 배분 외에도 기업은 은행의 특혜적인 저금리 대출로 자본을 축적했다. 이 특혜적인 대출금리는 물가 상승률보다 낮아서 대출 자체만으로 이득이 있었다. 이 특혜저금리는 일부 기업에 집중되었다. 1957년 하반기 은행 대출액의 1/3이 전체 대출의 0.3%에 해당하는 1억 환 이상의 융자에 집중됐다.

해방공간과 이화장(梨花莊)과 경교장(京橋莊): 공사경계를 흐린 장(莊)의 공간정치

장(莊)은 봉토와 장원, 영지나 별장과 같이 위계 상으로는 왕 아래 봉건 영주의 영역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일본의 근대 건축물 중의 하나인 반스이소(萬翠)는 일본식 봉건제의 영주 건물이었다. 식민지 조선에 거주한 일본 기업인들은 자신의 거주지에 장(荘)이라는 이름을 붙이곤 했다. 왕이 사라진 식민지 조선, 중앙정부는 아직 건설 전인 신새벽의 해방정국에서 정치는 왕과 대통령, 혹은 총리 대신 군웅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의 영지는 장(莊)이란 이름의 공간이 되었으며, 이 공간은 해방공간의 정치를 결정하는 주요 공간이었다. 이승만의 돈암장(敦岩莊)과 이화장(梨花莊), 김구의 경교장(京橋莊), 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 이시영의 무교장(無僑莊), 박헌영의 혜화장(惠化莊), 신익희의 낙산장(駱山莊)은 정부 수립 전 미군정 하에서 주요한 정치 공간이었다.

저택에 장(莊)이란 접미사가 붙는 건 그 장소의 크기보다 그 거주자의 위치에 의해 결정됐다. 이승만이 머물렀던 돈암장, 마포장, 이화장은 원래 그 주택의 이름이라기보다는 이승만이 머물렀기에 장(莊)이란 접미사가 붙은 것이다. 한편으로 청와대(당시 경무대)나 당사가 아닌 자택 혹은 사택이란 공간이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은 공적 정치와 사적 이해관계 사이의 경계가 불투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대의 정치지도자들이 머무는 곳이 곧 정치 중심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해방공간에서 장(莊)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공간정치는 정치-경제 유착의 상징이다. 특히 국내에서 합법적으로 체류하던 인사가 아닌, 해외에 머물던 임시정부 인사들이나, 지하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은 해방공간에서 각각 자신의 공간을 형성하였으며, 이 공간은 재력가와 기업인들의 기부와 후원에 의해 마련되었다. 실제로 이승만의 이화장은 33명의 기업인이, 김구의 경교장은 금광왕 최창학이, 김규식의 삼청장은 친일파 민영휘의 차남이자 금융인인 민규식이, 박헌영의 혜화장은 익산 함라의 만석꾼 지주 김병순의 아들 김해균이 마련한 공간이었다.

돈암장에서 이화장까지 이승만의 공간정치

다른 임시정부 인사들 보다도 이른 1,945원 10월 16일 귀국한 이승만은 조선호텔에 여장을 풀었지만, 수백 명씩 밀려드는 내방객들을 주체할 수 없어, 귀국한 지 열흘도 안 되어 측근 장덕수의 인척이자 조선타이어주식회사 사장이었던 장진영(張震英)의 돈암동으로 거처를 옮긴다. 신탁과 반탁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워지자 부담을 느낀 장진영의 퇴거 요청으로 이승만은 1947년 8월 미군정청이 마련한 적산 가옥 중 하나인 마포장으로 이사한다. 마포장은 총독부의 이인자인 정무 총감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의 여름별장이었지만 바람이 너무 강해 노회한 이승만 부부가 거주하기에는 불편했으며, 더구나 암살사건도 발생해 이사한 지 두 달 만에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화장은 경성고무 권영일, 상공회의소 전용순, 조선항공회사 신용욱, 서울시극장협회 홍찬 등 기업인 33인이 마련한 1백만 원의 자금으로 산 이승만 전용 사택이다. 이들 기업인 중 적지 않은 이들은 반민특위 반민법에 의해 기소되거나, 박정희가 쿠데타 후 기업인을 길들이기 위한 세무조사 때 탈세자 명단에 오른 이들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거주하던 이화장 전경. 출처: 대한민국 역사박물환

돈암장에서 이화장까지 이 공간은 이승만의 실질적 정치본부로 기능했으며, 동시에 그의 정경유착과 정치자금 수수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경제인들 가운데 가장 먼저 그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겠다고 태창의 백낙승이 이승만을 찾아온 곳도 돈암장이었고, 그 만남 이후 백낙승은 매달 50만 원의 '생활비'를 이승만에게 제공했다. 그는 이승만이 미 군정에 의해 고립되고 방문객도 뜸했던 마포장시절에도 70만 원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이승만은 대통령 당선으로 경무대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3년간 최대 약 5,200만 원에서 최소 2,700만 원의 정치자금을 모았다. 이 가운데는 삼양의 김성수, 김연수 형제 700만 원, 민대식-민규식-민병도 등 민씨 일가 300만 원, 화신 박흥식 200만 원, 이승만이 정치자금 모집을 위해 결성한 기업인 모임인 경제보국회 1,000만 원 등이 포함되어 있다. 당시 이승만이 모금한 정치자금은 GNP 대비 최소 0.38~0.74%에 이르는 막대한 자금이다. 이 정치자금에 이승만이 답례를 표하지 않았을 리 없다.

이승만이 1945년~1947년까지 조성한 정치자금 규모와 당시 GNP 및 재정규모와 대비. 출처: 역비 《한국학연구총서 - 현대 및 북한》

조선 최후의 상인집안이 낳은 해방후 최초의 재벌 태창의 백낙승

지금은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아버지로 알려졌지만, 백낙승은 해방 후 한국 최초의 재벌로 알려졌다. 그의 태창그룹은 원래 조선 시대 왕실과 국가기관에 비단을 납품하던 육의전 백윤수가 1916년 자본금 50만 원으로 대창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백윤수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금융을 장악하기 위해 시행한 1905년~1908년 화폐 정리사업으로 육의전을 포함한 조선 상인들의 대부분이 몰락한 가운데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육의전 상인이다. 대창무역의 설립으로 백윤수는 시전 상인에서 근대적 기업가로 거듭났다. 그는 경성방직의 김성수, 후에 두산이 된 박승직 상점의 박승직과 함께 장안의 3대 자본가였다.

백윤수의 4남 중 막내 백낙승이 1939년 태창 직물을 설립했으며, 만주 포목 밀수로 막대한 돈을 벌었다. 그는 자신의 형제들을 밀어내고 태창 그룹 독차지했다. 해방 직전인 1943년 백낙승의 자산은 약 1,141만 원에 달했다. 해방 직전 밀수로 몰수당했던 그의 포목은 해방과 함께 압류가 풀리면서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그에게 거금을 안겨주었다. 백낙승은 돈암장 시절 부터 이승만에게 정치자금과 생활비를 계속 제공한 대가로 이승만의 신뢰를 얻게 되었다(그는 이승만의 대통령 취임 후에도 생활비를 제공했다). 백낙승은 이승만의 거처로 인수재(仁修齋)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경무대에 들어간 후 백낙승을 불러 그동안 고마웠다며, "백사장도 국리민복을 위해 일하면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승만의 약속은 백낙승을 위험에서 구해주었고, 기회를 제공했다. 백낙승은 화신 박흥식처럼 친일로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됐지만, 박흥식이 100일 넘게 구속되어 재판에 넘겨진 것과 달리, 체포된 지 한 달도 채 안 되어 불구속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대한문화선전사를 통해 홍삼전매권을 따냈으며, 고려 방직 영등포공장을 경쟁입찰 없이 수의계약으로 불하받았으며, 이를 위해 15억 원의 긴급융자를 받았으며, 정부 보유 달러를 550만 불이나 대출받았다. 그는 이승만의 적극적 지원으로 태창 방직(1956년), 자유신문사(1953년), 동서해상(1955년), 태창상사(1957년), 금강흥업(1958년), 태창공업(1958년), 협동섬유(1959년) 등을 거느린 해방 이후 최초의 굴지의 재벌이 된다.

태창에 대한 귀속재산 불하 및 금융대출 틀혜를 비한하는 1955년 2월 7일자 경향신문

하지만 이승만이 제공한 기회는 이승만의 위기와 함께 그에게 위험으로 다가왔다. 백낙승의 고려방직 수의계약과 중복대출, 500만 불 정부 보유 달러 대출은 의회와 심계원(지금의 감사원)으로부터 지속해서 문제가 있음을 지적받았다. 1954년 심계원 감사에서 백낙승은 대전시흥아직포공장 앞으로 무담보로 3,000만 원의 시설자금을 대출받고, 다시 산업은행으로부터 중복적으로 4,000만 원을 대출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이 시설자금을 시설에 투자하는 대신 내무부(지금의 행안부) 본부를 포함 전국 각도 경찰국에 50만원과 자유당에 50만 원을 포함해 모두 450만 원을 정치자금으로 제공한 사실이 발각되어 국회와 여론의 포화를 맞았다. 결국 1955년 국회 차원에서 태창에 대한 특별융자조사위원회가 공론화되고, 태창은 세무조사를 받게 된다. 재무부 사세국(국세청 전신)은 태창산업을 급습하여 무려 4가마 분량의 장부를 압수하였고, 태창산업이 수년간 법인소득, 영업소득, 원천과세 등을 수년간 탈세하였음을 밝혀냈다.

태창은 1960년 삼성, 개풍, 대한산업, 삼호와 함께 5대 재벌에 올랐지만 1965년의 5대 재벌 명단에서는 사라졌다. 태창은 1950년대 말 방만한 경영과 투자실패로 산업은행의 관리로 넘어간다. 1960년 4.19가 발생하기 전 백낙승은 사망하고 그의 태창도 백씨 가문의 손을 떠나고 만다.

김구의 경교장과 금광왕 최창학

김구는 귀국과 함께 경교장에 짐을 풀었다. 경교장은 금광왕 혹은 천만장자라 불리던 최창학의 사저였다. 경교장은 이승만의 이화장처럼 암살 직전까지 김구라는 정치 거인의 정치중심지였다. 경교장은 김구의 사저였을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의 청사이자, 한국독립당 본부로도 사용되었기에 김구가 남북협상과 대화에 나서기 전까지 매일 수백 명이 경교장을 들락거렸다.

경교장의 원주인 최창학은 식민지 조선의 3대 광업인 중의 1인이었다. 1941년 당시 주식회사 형태의 광업회사 중 이종만(배우 강동원의 외조부)의 대동광업이 불입자금 300만 원으로 1위였으며, 최창혁의 대창광업이 150만 원, 방응모는 135만 원 규모였다. 최창혁은 몰락한 선비 집안의 자식으로 10년간 금광을 찾아 나섰다가 노다지를 발굴했다. 그는 자신의 금광을 일본광업주식회사에 800만 원(현재 가치로 약 1조 원)에 매각했다. 1939년 백낙승의 국방헌금이 1만 원인데 비해 1940년 최창학은 5만 원을 냈으니 그의 부를 짐작할만하다. 그는 일제에 국방헌납과 국민정신총동원 등의 친일 활동으로 해 반민특위의 심판이 두려웠던 김구에게 경교장을 제공했다.

경교장.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이종만은 조선광업 기업을 근대화한 최초의 인물이며, 각종 사회사업과 사회개혁사업으로 개혁에 앞장서고, 방응모는 조선일보의 사장으로 취임하는 등 기업가로 변모했다면, 최창학은 근대 기업으로 나아가는 대신 고리대금업에 만족했다. 분단으로 북한에 있던 자산을 상당 부분 잃었음에도 최창학에게는 많은 자산이 남아 있었다. 그는 해방과 동시에 거의 모든 기업이 뛰어들었던 정크무역 등 무역업자들을 상대로 돈놀이를 해서 그의 돈을 쓰지 않은 장안의 무역업자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백낙승만큼 줄을 잘 서지 못했다. 더구나 고리채에만 의존했던 그의 사업은 인플레로 돈의 가치가 떨어지자 점차 기울어갔다. 1955년 세무조사에서 탈세로 걸린 최창학은 기업에 1할에서 1할 5부의 이자를 받고 약 2,000만 원의 자금을 빌려주었고, 이를 통해 수백만 원의 세금을 탈루한 혐의로 기소됐다. 2년 뒤 그는 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그는 그로부터 2년 뒤인 1959년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해방공간은 그 특유의 다이내믹으로 기업에 위험과 기회를 동시에 제공했다. 아직 정부가 공고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치는 봉건영주와 같은 정치 군웅들에 의해 지배되었고, 기업은 그들의 공간정치의 중심을 제공했고, 그 공간은 그들의 의도대로 영주가 머무는 장(莊)의 이름을 획득했다. 국가가 귀속자본, 외부유입자본, 금융자본을 장악한 상황에서 이 장(莊)은 기업이라는 사적 주체가 공적 정치에 접근하기 위한 일종의 지렛대였다. 태창의 재벌화는 해방공간의 장(莊)을 둘러싼 공간정치가 어떻게 정경유착의 고리가 되었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권력에 줄을 대지 못했거나 혹은 잘못된 줄을 잡은 경우 그 공간의 정치는 자본축적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김구의 암살로 경교장이 정치의 공간에서 사라지듯, 최창학 역시 쓸쓸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승만이 청와대에서 쫓겨나 망명 전까지 머물렀던 이화장은 더는 예전의 공간정치의 중심적 역할을 하지 못했고, 이승만과 유착했던 태창의 백낙승은 결국 정권과 운명을 함께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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