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자 주: 비폭력 평화의 방식으로 남아프리카 인종 분리 정책에 반대했던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가 향년 90세로 별세했다. 198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던 그는 대내적으로는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 앞장서고 양심수들을 지원했으며 대외적으로는 남아프리카에 대한 국제 제재를 촉구하면서 여권을 두 번이나 취소당했다. 그는 열정적 투사였지만 1989년 백인 소수정부의 마지막 대통령인 데 클레르크가 아파르트헤이트 해체를 선언하자 그의 용기에 찬사를 보냈다. 남아프리카가 백인 소수 정부에서 민주화로 본격적으로 이행하는 와중에 진실과 화해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던 그는 말 그대로 과거에 대한 진실을 밝히면서도 그 진실이 분열과 분쟁이 되지 않도록 흑백 화해를 위한 '무지개 국가'를 주장했다. 그는 진실 앞에 말을 아끼지 않았다. 아프리카 민족회의 정부가 불평등 정책을 추구하고 그 지도자가 부패에 빠졌을 때 가차 없이 비판했으며, 심지어 아프리카 민족회의 정부가 기대를 배신했기에 아파르트헤이트 정권보다 더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이 글은 뉴욕타임스 Marilyn Berger의 12월 26일 자 기사 Desmond Tutu, Whose Voice Helped Slay Apartheid, Dies at 90의 번역으로 투투의 삶과 세계관 그리고 그의 영향을 소개하고 있다.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 목소리 낸 데스몬드 투투, 향년 90세로 별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 반대 운동에서 비폭력의 강력한 동력이었던 대주교는 198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를 무너뜨리기 위해 그의 설교단과 열정적인 웅변을 사용한 성직자 데스몬드 M. 투투(Desmond M. Tutu)가 일요일 케이프타운에서 사망했다. 그는 90세였다.
그의 죽음은 남아공 대통령 시릴 라마포사(Cyril Ramaphosa)의 집무실에 의해 확인되었는데, 그는 대주교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었다는 성경적 통찰에 의미를 부여한 원칙과 실용주의의 지도자”라고 불렀다.
데스몬드와 레아 투투 유산 재단(Desmond and Leah Tutu Legacy Foundation)은 사망 원인이 암이라며 투투 대주교가 요양시설에서 사망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1997년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으며, 그 후 몇 년간 전립선암이 확산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반복되는 가운데 여러 차례 병원에 입원했다.
남아프리카 교회 협의회의 지도자이자 후에 케이프 타운의 성공회 대주교가 된 투투 대주교는 수십 년에 걸친 자유를 위한 남아프리카 흑인 투쟁의 최전선으로 교회를 이끌었다. 그의 목소리는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운동의 비폭력에 대한 강력한 힘이었으며 198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1990년대 초에 그 운동이 승리했을 때, 그는 백인과 흑인 시민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향해 남아프리카를 인도했고,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의 의장으로서 그는 아파르트헤이트의 악랄함을 문서화하는 증언을 수집했다.
“당신은 악의 규모에 압도되어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그는 상처를 정화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열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과거 범죄에 대한 정직한 설명에 대한 대가로 위원회는 사면을 제안했으며 투투 대주교는 보복적 정의(retributive justice)가 아닌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의 원칙을 확립했다.
그의 신뢰성은 과거 남아프리카 공화국 보안군과 게릴라 전사들이 조사에 협조하도록 하기 위한 위원회의 노력에 결정적이었다.
투투 대주교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억압받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억압받는 자들에게도 비인간적이라고 설교했다. 국내에서 그는 다가오는 폭력에 맞서 흑인과 백인 간의 깊은 틈 사이에 다리를 놓기 위해 노력했고, 해외에서는 정책의 변화를 강제하기 위해 남아프리카 정부에 대한 경제적 제재를 촉구했다.
그러나 그가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지도력에 대해 비난한 만큼, 그는 1994년 최초의 완전한 민주적 선거에서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가 집권한 지배적인 아프리카 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의 지도자들에 대해 동등하게 반대했다.
2004년 대주교는 "너무 많은 우리 국민들이 가혹하고 모욕적이며 인간성을 말살하는 가난 속에서 살고 있는" 반면 만델라 대통령의 후계자인 타보 음베키(Thabo Mbeki) 대통령이 극소수의 엘리트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우리는 화약통에 앉아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비록 그와 음베키 대통령은 화해했지만(2015년 당시에는 전 대통령이었던 음베키는 투투 대주교를 병문안하면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대주교는 스캔들에 휘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음베키 씨의 재임을 거부한 그의 후임자 제이콥 G. 주마(Jacob G. Zuma) 전 대통령 하에서 그의 나라의 상황에 대해 불만족스러워했다.
투투 대주교는 2010년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우리는 남아프리카에서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특히 만델라 시대와 비교해 보면 그렇습니다. 우리가 꿈꿨던 가능했던 많은 것들이 점점 더 우리의 손을 벗어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사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2011년 비평가들이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부패와 잘못된 운영을 비난하자, 투투 대주교는 다시 한번 정부를 공격했는데, 이번에는 한 때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용어였다. 그는 “이 정부, 우리 정부는 아파르트헤이트 정부보다 더 나쁩니다”며 “적어도 당신은 아파르트헤이트 정부에서 그것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주마 씨, 당신과 당신의 정부는 나를 대표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이익을 대표합니다. 나는 사랑 때문에 경고합니다. 언젠가 우리는 아프리카 민족회의 정부의 패배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당신은 수치입니다.”
2016년 남아공의 종교 지도자 연합이 다른 비평가들과 함께 주마의 퇴진을 촉구했을 때 그의 말은 예언적으로 보였다. 2018년 초, 주마는 그해 2월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라마포사(Ramaphosa) 부통령과의 권력 다툼 끝에 축출되었다.
그때까지 투투 대주교는 건강 악화로 인해 인터뷰를 거의 중단했으며 공개적으로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라마포사 씨가 국가의 "새 여명"을 약속하며 새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대주교는 그를 집에서 환영했다.
투투 대주교는 “이 일이 거짓 새벽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가 당신과 동료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기도한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라고 라마포사 씨에게 경고했다.
그 당시 아프리카 민족회의는 국가의 가장 큰 정당으로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지가 감소하였다. 여전히 주마의 지도 하에 있던 2016년 선거에서, 당의 득표율은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라마포사는 이러한 추세를 되돌리기 위해 애썼고 이후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를 강력하게 대처한 것으로 찬사를 받았다.
세계적 명사
일생의 대부분, 투투 대주교는 매혹적인 설교자였으며 그의 목소리는 낭랑하고 고음이었다. 그는 종종 자신의 교인들을 포용하기 위해 설교단에서 내려왔다. 때때로 그는 복도에서 요정 같은(pixielike) 춤을 추며 메시지에 재치와 그의 특징이 된 킥킥거리는 웃음으로 강조하여 청중을 즐거운 유대감으로 초대했다. 그는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확신시키면서 그들의 투쟁에서 비폭력의 길을 따르라고 권고했다.
그의 종교적 가르침에는 정치가 내재되어 있었다. “우리에게는 땅이 있었고 그들에게는 성경이 있었습니다.”라고 그의 우화들 중 하나에서 말했다. “그리곤 그들이 '기도합시다'라고 말하고 우리는 눈을 감았습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다시 열었을 때, 그들은 땅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더 나은 거래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도덕적 리더십과 그의 승리의 열정은 그를 세계적인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그는 화려한 사교 행사에서 사진을 찍고 다큐멘터리에 출연했으며 토크쇼 진행자와 대화를 나눴다. 건강이 안 좋아 보였던 2015년 말에도 영국 해리 왕자를 만났고, 해리 왕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대신해 그에게 영예를 안겼다.
매일 아침 4시 30분에 조깅을 하며 수년간 건강을 유지한 다부지고 가만히 있지 않는 투투 대주교는 무테안경으로 거의 가려지지 않는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해외여행을 할 때 흰색 성직자 칼라가 달린 자홍색 셔츠 위에 잘 어울리는 회색 정장을 입고 멋진 몸매를 드러냈다.
분명히 겸손의 미덕을 확신하면서, 그는 결코 명성과 높은 지위의 장점에 익숙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항상 시간을 잘 지켰고, 자신을 기다리도록 보내진 사환들과 가정부들에게 감사를 표했으며, 리무진과 경찰의 호위를 불편해했다.
그는 워싱턴포스트의 한 기자에게 “고향에서 경찰 사이렌을 들으면 경찰이 잡으러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아직도 그들과 함께 타는 것이 약간 긴장됩니다."
투투 대주교는 당대 다른 남아공 흑인들처럼 아파르트헤이트의 참상과 모멸을 겪었지만, 자신의 적들을 미워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젊었을 때 자신이 아는 백인 사제들 덕분에 운이 좋았고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오랜 투쟁 내내 낙관론자로 남았다고 말했다. 1990년에 뉴욕을 방문했을 때 그는 “정의, 선함, 사랑, 연민이 승리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유의 동이 트고 있습니다. 자유가 오고 있습니다.”
그는 민주주의로 들어서는 새로운 남아프리카를 묘사하기 위해 "무지개 국가"라는 문구를 만들었으며 모든 인종 간의 활발한 토론을 촉구했다.
투투 대주교는 항상 자신이 정치인이 아니라 사제이며,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운동의 진정한 지도자가 감옥이나 망명에서 돌아오면 사제로 봉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교회에 정치적인 역할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사제 서품을 받은 성직자들이 어떤 정당에도 소속되는 것을 금지했다.
1989년 F.W. 드 클레르크(F.W. de Klerk)가 마침내 아파르트헤이트를 해체하기 시작하자 투투 대주교는 물러나고 투쟁의 리더십을 1990년 감옥에서 석방된 만델라 씨에게 돌려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투투 대주교는 국가의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우리는 이 사람들이 지금 있는 곳에 데려가기 위해 투쟁했고 그들이 실패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실패하기 위해 그 모든 최루가스를 삼키고 쫓기고 감옥에 보내지고 살해당하지 않았습니다."
교사에서 설교자로
데스몬드 음필로 투투(Desmond Mpilo Tutu)는 1931년 10월 7일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 북서부 지방의 위트바테르스란드에 있는 클렉스도르프(Klerksdorp)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알레타(Aletha)는 가사노동자였고, 아버지 자카리아(Zachariah)는 감리교 학교에서 가르쳤다. 어린 데스몬드는 감리교 신자로 세례를 받았지만 이후 가족 전체가 성공회에 가입했다. 그가 12살이었을 때 그의 가족은 요하네스버그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그의 어머니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학교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그는 백인 경찰이 자신의 아들 앞에서 자신을 '꼬마'(boy)라고 불렀을 때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결코 잊지 않았지만 사제복을 입은 백인이 어머니에게 경의를 표했을 때 그는 더욱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 백인은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운동가인 트레버 허들스턴(Trevor Huddleston) 신부였다. 데스몬드가 결핵으로 입원했을 때 허들스턴 신부는 거의 매일 그를 방문했다. 신부 허들스턴은 몇 년 후 한 인터뷰어에게 "이 어린 소년은 자칫 죽을 뻔했습니다, "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그의 대단히 즐거운 유머 감각을 결코 잃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회복 후 데스몬드는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그의 가족은 학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교사가 되어 프레토리아 반투 사범대학(Pretoria Bantu Normal College)에서 공부하고 남아프리카 대학(University of South Africa)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3년 동안 고등학교에서 가르쳤지만 흑인 학생들의 교육 수준을 낮추는 반투 교육법(Bantu Education Act)에 항의하며 사임했다.
그때까지 그는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노말리조 레아 선사네(Nomalizo Leah Shenxane)와 결혼했다. 이 부부는 2015년 7월에 공개적으로 결혼 서약을 갱신함으로써 결혼 60주년을 축하했다. 그녀는 아들 트레버 탐산카 투투(Trevor Thamsanqa Tutu)와 세 딸 테레사 탄데카 투두(Theresa Thandeka Tutu), 나오미 논톰비 투투(Naomi Nontombi Tutu) 및 음포 투투 반 푸르트(Mpho Tutu van Furth)의 네 자녀 그리고 7명의 손자 손녀와 함께 생존해 있다.
투투 대주교는 사역이 “봉사의 가능한 수단”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역에 눈을 돌렸다고 말했다. 그는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성 베드로 신학대학교(St. Peter’s Theological College)에서 수학했으며, 1961년 12월 마리아 대성당(St. Mary’s Cathedra)에서 성공회 사제로 서품 되었는데, 이는 시위가 요하네스버그에서 40마일 떨어진 샤프빌(Sharpeville) 타운을 뒤흔든 지 2년도 안 된 때였다.*
* 역자 주: 샤프 빌 학살로 알려진 이 시위는 소위 패스 법(Pass laws)과 같은 인종 차별 정책에 반대한 시위였다. 16세 이상의 남아프리카 거주 흑인들에게 신분증 휴대를 의무화하며 비 휴대시 체포 구금할 수 있는 법으로 흑인들에게 이동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박탈했다. 이 시위로 6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어린이를 포함해 18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지역 교회에서 봉사한 후 영국에서 공부하여 런던의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에서 신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돌아와서는 강사로 일하다가 1972년부터 1975년까지 신학 교육 기금(Theological Education Fund)의 부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두루 여행하며 세계 교회 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의 장학금을 집행했다.
그는 1975년에 요하네스버그의 성공회 주임 사제로 임명되었고 이듬해에 레소토의 주교로 서품 되었다. 1978년 그는 남아프리카 교회 협의회(South African Council of Churches)의 최초의 흑인 총서기가 되었고,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운동의 주요 동력으로 조직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투투 주교의 지도 아래 이 위원회는 흑인 청소년을 위한 장학금을 설립하고 흑인 타운십에서 자조 프로그램을 조직했다. 보안법에 따라 재판에 회부된 흑인 피고인들을 변호하기 위해 변호사들을 고용하고, 재판 없이 구금된 이들의 가족들을 위한 지원을 제공하는 것과 같은 논란이 많은 프로그램도 있었다.
주교로서 그는 종족 "홈랜드"(homelands, 흑인들을 종족별로 분리 거주시킨 반투스탄Bantustan의 영어 명 - 역자 주)의 설립에 대해 반대하고 외국 투자자들이 남아프리카에서 철수하도록 촉구하는 플랫폼으로 이 위원회를 사용했다.
1984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지 한 달 후, 데스몬드 투투는 흑인과 백인 선거인 사이의 교착 상태를 깨기 위해 국가의 교회 위계 조직이 개입했을 때 요하네스버그의 첫 번째 성공회 주교가 되었다. 그는 1986년 케이프타운의 대주교로 임명되어 80%가 흑인인 영국 성공회 150만 명의 영적 수장이 되었다.
용서의 사람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자주 해외를 여행하던 투투 대주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한 제재를 압박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정부는 반격했고 그의 여권을 두 번 취소해서 그로 하여금 시민권이 "미정"으로 기술한 문서를 가지고 여행을 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1999년 '용서 없는 미래는 없다(No Future Without Forgiveness)라는 책 제목의 저자로서 그는 적들을 관대하게 용서했으며, 1989년 데 클레르크 정부가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했을 때 투투 대주교는 변화의 전망을 가장 먼저 환영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1990년에 그는 “남아프리카에서 특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드 클레르크 대통령의 용기 덕분입니다. 여기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시점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자신을 꼬집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진실화해위원회가 2003년 최종 결과를 발표했을 때 투투 대주교의 흔적은 분명했다. 그것은 정부에 아파르트헤이트 범죄의 가해자에게 전면적인 사면을 발행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기업들이 정부와 함께 전 백인 소수자 정부에 의해 희생된 수백만 명의 흑인에게 배상금을 제공할 것을 촉구했다.
이 보고서는 또한 데 클레르크 씨가 고의로 국가가 후원한 범죄에 대한 정보를 위원회에서 제공하지 않았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두 번째로 큰 흑인 정당인 줄루어에 기반을 둔 잉카타 자유당(Inkatha Freedom Party)이 1990년대 초 수백 명의 학살에서 백인 우월주의자와 협력했다는 혐의를 재차 강조했다.
투투 대주교는 2010년 공식적으로 공직에서 은퇴했다. 그의 마지막 주요 등장 중 하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월드컵을 개최한 그해였다.
그러나 그는 대중의 시선에서 완전히 물러나지 않았다. 2011년 6월, 그는 토너먼트를 위해 지어진 새로운 케이프 타운 스타디움에서 미셸 오바마(Michelle Obama)와 함께 했는데, 아프리카 남부 순회 중 그곳에서 그녀는 체력을 자랑했다.
경기장 안에서는 미셸 오바마가 바닥에 엎드려 팔 굽혀 펴기를 몇 차례 했고, 투투 대주교도 동참을 열망하는 듯 바닥에 앉아 똑같이 했다. 약간 숨이 찬 채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주먹을 부딪치며 축하했다.
투투 대주교는 몸이 점점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2021년 90세 생일을 맞으면서 그는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에 대한 허위 정보가 소용돌이치면서 치열한 논쟁에 뛰어들었다.
그는 “두려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 “코로나19가 계속해서 우리나라와 세계를 황폐화시키지 않도록 하십시오. 백신 접종을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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